선간후살, 목 베기 시합...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 새 소식

본문 바로가기

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새 소식

선간후살, 목 베기 시합...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작성일07-12-16 00:00 댓글0건

본문

[르포 ②] 70주년 맞아 돌아보는 난징대학살
  
학살한 시체를 불에 태워 소각하는 일본군 병사들. 이 사진은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한 일본군 병사가 찍은 것이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그 연대기는 길고도 참혹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질러진 난징대학살에 비견될 만한 정도와 규모를 지닌 사건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리스 장, <난징의 강간> 중에서)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과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방화, 약탈, 살인, 강간, 고문….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만행은 전쟁 와중에 드러난다.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는 인간의 야수성을 극도로 표출한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왔다.

 

유럽에서는 나치스 독일에 의해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어 600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한 달여 동안 난징(南京)대학살이 저질러져 30만 명이 죽어갔다.

 

각종 무기와 첨단기기로 사람을 대량 학살하고 태워버린 나치스와 일제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전쟁의 광란 속에서 저질러진 뜻하지 않은 만행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유대인 대학살과 난징대학살은 인간의 폭력성·잔인성·광기·인종배타성 등이 극단적으로 보여준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이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남서쪽 교외 루거우차오(蘆溝橋) 주변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 정체 모를 10여 발의 사격이 가해졌다. 일본군 주둔사령부는 펑타이(豊台)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다음 날 루거우차오 일대를 완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융딩허(永定河) 우안까지 몰아냈다.

 

훗날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불리는 이 군사 충돌은 일본 군부에서 획책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일본정부는 중국 대륙 전체를 손에 넣으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7월 28일 일본군은 베이징·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고 8월에는 상하이를 침공했다. 중국 대륙을 전쟁의 참화 속에 몰아넣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난징성은 시안(西安)성과 더불어 중국 대도시에 유일하게 남은 고성이다. 난징수비대는 도시 밖 전술 요충지를 포기한 채 난징성 안에 머무는 옹성전략을 고집하는 실책을 범했다.
ⓒ 모종혁
난징

 

  
난징을 점령한 뒤 국민당 정부 청사 위에 올라 일장기를 꽂으며 환호하는 일본군 병사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옹성전략 속에 일본군이 침공하자 먼저 도망간 사령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중국군을 단숨에 괴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중국군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순조로울 것이라 여겨졌던 상하이 점령은 무려 3개월이나 걸렸다. 어렵사리 중국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상하이를 손에 넣은 일본군은 다음 공격 목표를 국민당의 수도 난징으로 잡았다.

 

상하이를 떠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11월 20일 난징 외곽에 도착했다. 같은 날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내륙의 충칭(重慶)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좁혀오는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중국 고위관료와 부유층은 식솔을 이끈 채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갔고, 난징 주변의 주민들은 일본군을 피해 시내로 몰려들었다. 전쟁 전 백만 명에 육박하던 난징은 빠져나가는 시민들과 들어오는 피난민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11월 25일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난징성 공략을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2월 들어 일본군은 비행기를 띄워 난징 곳곳에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를 뿌렸다. 그러나 탕셩즈(唐生智) 난징수비대 사령관 휘하 15만 대군은 결사항전을 맹세하면서 항복을 거부했다. 도시 밖 전술 요충지를 포기하고 난징성 안에 머물며 옹성전략만 고집한 채였다.

 

12월 10일 일본 화중군사령부는 난징 중산문(中山門)에 4명의 군관을 보내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했다. 난징을 지키던 중국군 수비대가 투항을 거절하자, 부하를 데리고 나왔던 무토 부참모장은 코웃음을 쳤다. "가소로운 놈들, 자비를 거절하다니. 역사에 남을 피의 양쯔강을 보게 해주마." 대학살을 예고케 하는 말이었다.

 

12일 밤 일본군은 난징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개시했다. 13일 0시가 지나자, 일본군 선봉부대는 난징성 성문 중 제일 견고한 중화문(中華門)을 점거하고 성 안으로 진격했다. 전날 탕셩즈 장군은 고위 장교들을 긴급 소집하여 일본군의 포위를 격파하라고 명령하면서, "난징과 함께 죽든지 살든지 하자"고 외쳤다. 일본군이 난징성 안으로 진공하자, 양쯔강을 건너 도시를 제일 먼저 빠져나간 사람은 탕 장군이었다.

 

  
중화문 밖에서 집단 학살된 중국인들의 시체. 일본군은 난징 점령 전 치밀한 학살계획을 수립, 실행에 옮겼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집단 학살이 발생한 현장 지도.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을 몰살시킨 일본군은 시체를 소각하거나 양쯔강에 내던져 버렸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던 일본군

 

사령관은 도망가고 난징성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남아있던 시민들과 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 밖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이나 되는 포로와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이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히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일본 종군특파원 오마타 유키오는 다음과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천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 방식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타! 타! 타! 포로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다. 군중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도 끼어있었다. 일본군은 군중에게 석유를 쏟은 뒤 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다. 아비규환의 지옥 같은 광경, 그러나 일본군들은 자신들이 연출한 장면을 보며 웃고 즐겼다.

 

2차 세계대전 후 발견한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일본 군인의 일기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 20세기 후반 민족분규 현장에서는 인종말살 구실로 대규모 강간이 이뤄졌지만, 난징대학살에서 이뤄진 강간은 더욱 잔혹했다. ´집단윤간´,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열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60·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

 

  
일본군은 학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적지 않은 시체를 양쯔강에 버렸다. 오늘날 불에 태워진 시체와 달리 양쯔강에 버려진 대부분의 시체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만인 앞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중국군 포로.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나 젊은 남자를 인간이 아닌 가축 정도로 생각하여 살해했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난징대학살

선간후살에 임산부·태아까지 살해... 인간성을 상실한 만행

 

일본 군법은 강간을 금지하긴 했지만, 고급장교들을 비롯하여 아무도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본군은 임신 중인 여성도 강간했는데, 강간 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함께 죽여 버리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군 병사인 아즈마 시로는 "중국 여자들을 옷 벗겨 구경한 뒤 ´오늘은 내가 목욕하는 날이다´라 외치며 윤간했다, 윤간 뒤 우리는 그 여자들을 죽여 버렸다, 시체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난징 곳곳엔 사지가 절단된 시체와 더불어 다리를 벌린 채 죽은 여자 시체가 쌓였다. 일본군은 살해한 여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위에 막대기를 쑤셔놓기도 했다. 일본군에 의해 가슴이 도려 나가고 성기가 잘려나간 여성이 숨을 멈출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자, 일본군은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중국 <다공(大公)일보>는 한 생존자의 목격담을 실으면서, "죽은 여자 시체의 열 중 여덟은 배에 칼을 맞고 죽어 있었다, 여자들은 가슴이 잘려져 떨어져 나왔고 그렇지 않은 시체는 총검에 숱하게 찔려 가슴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한 여자는 고깃덩어리처럼 변해버린 태아 옆에 쓰러져 죽어있었다"고 보도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 발발 후 가는 곳마다 학살과 강간을 자행했지만, 난징에서의 만행은 야수의 잔학성보다 더욱 참혹했다. 1주일 만에 점령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상하이 진공전에서 3개월을 허비하고 중국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일본군은 초조해졌다. 일본군 수뇌부는 조금씩 전쟁에 지쳐가는 병사들에게 위안거리를 준 대상을 찾기 골몰했다. 거센 중국군의 저항 기세를 꺾을 희생양을 찾아 중국인에게 본보기를 보일 계획도 세웠다.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기 전 치밀한 학살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조직적인 군사작전을 치르듯 6주 동안 난징 13곳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 남녀노소 가릴지 않는 살육의 광란이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에서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2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200t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 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 적었다.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은 그렇게 지옥의 도시로 변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에 새겨져 있는 학살자의 명단. 수많은 학살자들은 가족 단위로 적혀져 있다.
ⓒ 모종혁
난징대학살
[출처: 오마이뉴스]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1월 30일(토)
[성명]바이든정부는 대조선친선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1월 30일(토)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1월 29일(금)
력사의 분수령에서 더 높이 울린 이민위천의 선언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1월 29일(금)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1월 27일
최근게시물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2월 27일(토)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2월 26일
우리는 새 승리의 종착점을 본다
[론설] 산림복구전투는 조국의 부강발전과 후손만대의 번영을 위한 최대의 애국사업
지방경제발전의 본보기로 흥하는 일터
[사설] 혁명적인 사상공세로 기적과 위훈창조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일으키자
사회주의큰집을 떠받드는 사람들 (1)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2월 26일(금)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2월 26일(금)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2월 25일
혁명적인 사상공세로 최후승리를 앞당겨나가자
50년전에 비해서 지금의 음악은 어떻습니까?
Copyright ⓒ 2000-2021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