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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주장이 두 번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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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07-08-10 00: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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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펜실베니아대 교수의 “여운형, 박헌영세력에 피살” 주장에 대한 반론

중국시민

 

 

이 글을 쓴 필자의 가치판단이 자주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히며, 필자의 표현을 존중해 원문 그대로 싣게 된 점을 알려드립니다.(편집자)

지난 7월 4일은 7. 4 공동성명 발표 35돌이 되는 날인데 남이나 해외에서 별로 거들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한 가지 역사사건은 엉뚱한 형식으로 <기념>되었다. 몽양 여운형의 죽음이다.

여운형은 박헌영 세력에 피살?

<원로 정치학자로 한국 현대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이라는 굉장한 수식어가 붙은 이정식(李庭植)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는 7월 19일이 여운형 사망 60돌이라면서 <여운형 박헌영 세력에 피살 가능성>이라는 주장을 폈다. 근거로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1981년 다른 재미(在美) 학자들과 함께 평양에 가서 여운형의 둘째 딸 여연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우리 아버지를 암살한 건 종파분자들입니다’라고 했다는 것. 이른바 종파분자는 박헌영이라는 것이다.

둘째, 광복 후 북조선에 주둔했던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일기에 여운형이 박헌영네와 손잡지 못하겠다고 하니 김일성 주석이 꾸짖었다는 것.
“ ‘스티코프 일기’를 보면 1946년 9월 25일 여운형이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박헌영이 나와 전혀 협의하지 않고 내가 당수로 있는 인민당을 남로당에 흡수하려 했다’ ‘내가 공산주의자들 손 안에서 농락거리가 될 수 있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오히려 박헌영의 편을 들며 여운형을 질책했다.”

셋째, “처음 공개되는” 사실로서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에 승용차를 타고 가려 했던 목적지는 미 군정의 민정 책임자였던 E A 존슨(Johnson)의 집이었다는 것.
“그 근거는 내가 입수한 존슨의 회고록 ‘페르 귄트의 모습인 미 제국주의(American Imperialism in the Image of Peer Gynt· 1971)’다. 당시 미 군정이 우익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운형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미국이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 한 독립을 위해선 싸우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암살 직전 여운형의 결심이었다.”

이런 내용만 보는 사람들은 여운형이 박헌영의 공산당-남로당에도 김일성 주석의 노동당에도 실망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사실 이 교수의 결론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까운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근거에 대한 반론을 펴본다

그의 주장의 근거로 되는 것들에 관한 자료들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필자는 그가 여연구 씨에게서 종파분자암살론을 들을 때 그 자리에 없었으니 그런 말이 나왔을 리 없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당시 그는 여러 사람과 함께 조선(북한)에 갔다니까 혹시 다른 사람도 그런 말을 들었노라고 증언할지도 모르겠다. 단 필자는 여연구 씨가 쓴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본 적이 없다.
여연구 씨는 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글을 많이 썼는데 지금 찾아보기 쉬운 책으로 2000년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김일성 주석과 려운형>(아래사진)이 있다.
책 앞의 <편집자의 말>에서는 전에 나온 수기를 전문 그대로 출판한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장편수기는 《나의 아버지 려운형》이란 제목으로 남조선에서 발행되는 시사월간잡지 《윈》(WIN) 1997년 8호에 소개편집되였으며 이에 앞서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 《통일평론》(일문)에 1996년 8호부터 1997년 11호까지 13회에 걸쳐 련재된바 있다.>

여연구 본인이 1995년 7월에 쓴 것으로 된 서문에선 또 이렇게 설명한다.

<이 기회에 나는 지난 시기에 나간 저의 아버지에 대한 글들에서 사실과 맞지 않거나 외곡되고 변조된것들도 바로 잡고 보충하고 싶다.>

그 책에서는 여운형 죽음의 뒤에 숨겨진 검은 손을 장택상으로 지명한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내가 쏘련에 있을 때 출판물지상에는 려운형을 누가 암살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서로 각이한 견해들이 피력되였었다. 그래서 조국에 나오자마자 나는 어머니와 언니를 붙들고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가고 물었다.
《장택상(수도경찰청장)놈이였다. 장택상은 리승만의 지시를 받고 리승만은 미국의 지시를 받았다.》
이렇게 대답한 언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둘째, 적어도 7년 전에 출판된 책에 벌써 여운형이 김일성 주석의 지적을 받았다는 대목이 있다. 이정식 교수는 스티코프의 일기에서 여운형이 김일성 주석의 질책을 받았음을 발굴해냈다는데, 여연구 씨는 무슨 자료에 근거했는지 잘 모르겠다만 관련부분이 상당히 상세히 나온다. 1946년 7월과 8월에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3당합당문제를 놓고 모순이 많아지니 여운형은 인민당 당수 사퇴성명을 발표하고 시골로 내려갔었다는 것이다. 하여 골머리를 앓던 여운형이 평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미제가 《좌우합작》에서 노리는것은 3당합동을 파탄시키자는데 있으며 민주력량을 와해시키고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유리한 정치적지반을 닦자는데 있다고 하시면서 남조선에서 3당합동이 실현되지 못하고있는것은 공산당과 신민당에도 책임이 있지만 인민당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인민당이 합당운동을 발기한 당으로서의 역할을 옳게 수행하지 못한것이라고 지적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계속해서 선생이 3당합동문제를 처리해나가는데서 여러가지 고충이 있다는것을 모르는바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합당문제를 선참으로 발기해나선 선생이 이러한 난관에 굴복하여 지난 8월 16일 인민당 당수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표명을 하고 시골에 가있은것은 잘못이라고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이정식 교수는 “이미 소련으로부터 여운형 세력을 흡수하라는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김일성 주석의 여운형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데 글쎄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런 식 해석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거인들의 만남이란 결코 술이나 마시면서 서로 대단하다고 올리추는 게 아니라는 것. 잘못된 점은 따끔하게 찔러야 흠을 고치기 마련이다. 참다운 비판이 고맙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인간이다. 여운형이 결코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던 이상 그가 잘못한 점을 말해주는 것이 잘못일까?
여연구 씨의 글에 의하면 미 군정장관 하지가 여운형이 북에 다녀온 것을 트집잡으니 여운형이 <집주인이 제집에서 아래방으로 내려가건 웃방으로 올라가건 당신들 손님들이 웬 참견>인가 내쏘았다는 일화가 바로 그번 평양행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의 일이라 한다.

셋째, 이 교수는 죽음을 당하던 날에 미군정의 사람과 만나려 했다는 것을 처음 공개한다고 주장하는데 여연구 씨의 주장은 아주 다르다. 물론 그 시기 그녀가 아버지 곁에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곁에 있던 언니에게서 들은 말에 근거해 묘사한 것이다.

바로 운명적인 그 7월 19일에도 오전에 미국에서 온 김룡중(金龍中, 인용자 주: 책의 앞에서 미국무성에 근무하는 유일한 조선사람이라고 설명했음) 등과 만나 쏘미공위의 성공적타결책을 토의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피격당하였다.

그 좌석에 참가했던 고경흠(인용자 주: 책의 앞에 《독립신문》주필이라고 설명했음)은 《몽양의 화제는 주로 미쏘공동위원회에 관한것이 대부분이였다. 몽양은 침울한 어조로 미국측 대표의 태도가 강경해졌다는 사실과 전세계에 걸치는 미쏘대립의 랭전을 관련시키면서 공동위원회에 대한 막연한 락관을 경계하였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주적립장에서 미쏘량측 대표단에 부단한 절충과 교섭을 가져야 할 필요를 강조하였다. 몽양은 만만한 자신으로 미쏘량측 대표에 대한 빈번한 접촉과 격려가 공동위원회진행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였으리라는것을 말하고 또 더욱 그 방면에 힘쓸것을 다짐하였다.…》(책의 원주해: 《우리신문》 1947년 7월 22일)고 말했다.

나의 언니 란구가 전해준데 의하면 아버지는 그때 한주일간이나 집에 못들어오셨다. 일도 바쁘셨지만 아버지에 대한 테로가 너무 빈번하여 혹시 가족들에게 피해가 있을가봐 집에서 류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바로 7월 19일 정오가 지나서 갑자기 전화벨소리가 울리였다. 언니가 무심히 수화기를 드니 《란구냐? 나다.》하는 아버지의 정다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란구야, 다 잘 있겠지. 내 곧 돌아가마. 오후에 서울운동장에서 영국축구팀과의 친선경기가 있다. 점심먹고 함께 보러가자. 내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놓아라. 지금 곧 간다. 기다려라.》

여운형의 큰 딸이 다 차비를 해놓았는데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다. 그녀가 아니면 미국인 가운데 한 사람은 기억이나 서술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반일운동을 한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 여운형 만큼 일본 고관들을 많이 만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찌 보면 골수 친일파들보다도 더 많이 만났을지 모른다. 조선총독부에 드나들며 일본 총독을 만났고 도쿄에 가서 일본 수상도 만났다. 또 여연구 씨의 책에는 그의 오빠 여경구 씨의 추억으로 여운형이 일본 천황과도 만났다고 적혀있다. 일본 고위인물들과의 만남이 잦았다 하여 그가 친일을 했노라고 단언하거나 일본과 손잡고 무얼 얻어먹으려 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머리를 저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어떻게 말하는가?

여운형(오른쪽)과

▲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

사실 여연구 씨의 글을 보면 박헌영 일파 암살설은 결코 21세기에 나온 게 아니다.

아버지가 서울거리 한복판에서 대낮에 테로를 맞고 쓰러졌을 때 누가 쏘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오래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
미군정에서는 박헌영이가 이북의 지령을 받고 쏘았다고 떠들었다.
한독당패가 쏘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미군정의 지시로 리승만이가 쏘았다는 주장이 제일 강했다.
한편 박헌영은 《려운형이가 미국의 간첩이였다.》는 여론을 널리 퍼뜨려 사회계를 들썩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만은 아버지를 끝까지 믿어주시였다.

<조선사회민주당> 608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려운형암살사건의 주범은 누구인가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인민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힘써온《근로인민당》당수였던 려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거리에서 백주에 저격피살되였다.
  그러면 백주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려운형에 대한 암살사건은 과연 어떻게 조작되고 실행되였는가. 1947년 7월초 서울경찰청장 장택상은  당시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로부터 려운형을 암살할데 대한 지령을 받았다.

하지가 이런 지령을 하달하게 된것은 려운형이 저들의 군정통치에《협력》하지 않을뿐아니라 여러차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련공인물로, 앞으로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위험한 존재》로 보았기때문이다.

하지의 지령을 받은 장택상은 《백의사》(해방후 월남도주한 악질분자들의 친일친미반공조직)의 신동운에게 암살단을 조직할데 대한 지령을 하달하였다.

신동운은 즉시에 김흥성, 리섭동, 김훈, 유순필, 김영성 등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후 려운형에 대한 암살미수는 10여차례나 진행되였다.
려운형암살후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월남도주한지 불과 20일밖에 안되는 리섭동을 희생물로 선정하고 그를 꾀여 17살의 한지근으로 가장시켜놓고 각본에 따르는 재판을 진행하였으나 리섭동을 미성년범죄자로 만들어 무기징역을《선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흑막속에 종결되고 말았다.

려운형암살사건의 전말은 미국이야말로 이 사건의 주범이라는것을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본사기자

그리고 다른 면으로 조선에서 종파분자들을 처리한 기록에는 그들을 여운형 암살사건과 연계하지 않았다. 좀 널리 알려진 자료로 박헌영 공판기록을 보아도 그런 죄목은 없었다. 다른 책들에서도 적어도 필자는 보지 못했다. 조선의 역사책들을 보면 김삼룡의 체포 같은 경우는 종파분자들의 죄악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지만 말이다. 암살이란 항상 개입한 사람이 많기 마련인데 누가 어떻게 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이 아무개네 세력이 했을 것이라는 식의 추리는 얼마나 위험한가!

큰 역사관으로 역사를 보아야

광복 후 테러에 의해 죽은 인물은 여운형 하나만이 아니다. 추측 식으로 문제를 풀겠으면 아예 모두 공산당의 행위라고 해버릴까?
정말 정신병자가 발작하여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내놓고는 문제는 항상 누구의 죽음으로 누가 이득을 보느냐에 따라 풀이해야 한다.
김구에 대한 암살을 이승만이 직접 지시했냐 하지 않았냐를 따지는 바람이 한때 세게 불더니 근간에는 좀 즘즘해진 모양이다. 여기에서 이승만이 명백하게 아무개를 죽이라고 했느냐 하는 증거는 아무래도 현장에 있었다는 인물의 증언에나 그칠 수밖에 없으니 그런 걸 따진다는 자체가 힘만 드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김구의 죽음으로 최대의 이익을 본 자가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이 제 입으로 지시했던 하지 않았던 그가 권력을 틀어잡기를 바라는 자들이 김구의 죽음을 빚어냈다고 판단하면 그만이 아닐까.

죽음과는 반대로 살아서 진행하는 활동을 보자. 여운형이 미군정과 손잡으려 했다면 어떤 형식인가? 그가 무슨 턱찌끼를 받아먹겠다고 미군정과 손을 잡는가? 주장의 근거가 고작 미국인의 회고록인데 미군이 민정장관자리를 주겠다고 하면 여운형이 고맙수다 하고 받아들일까? 그가 어떤 구상을 했다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 식 아니면 어떤 식? 남에게 붙어먹고 살려고 했더라면 벌써 일제 시절에 최고지위를 누렸을 여운형이 아닌가? 또 미군이 처음 들어왔을 때 붙었더면 더 높은 자리를 가졌을게 아닌가? 웃겨도 너무 웃긴다.

두 벌, 세 벌 죽임을 하지 말기를

이 교수는 여운형이 소련제국주의를 반대하여 미국과 손잡으려 했다고 풀이한다. 기발한 주장이다. 당시는 여운형의 두 딸이 소련에 가서 유학하고 있을 때이다. 미국 유학을 주선하겠노라는 미국 측의 권유를 물리치고 김일성 주석에게 보냈다는데 평양에서 소련으로 간 것은 여운형의 원뜻에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암만 그의 행적과 그 신변 인물들의 움직임 그리고 운명을 보더라도 여운형이 미국을 소련보다 더 선호할 이유가 없다.

또 소련제국주의를 반대한다면 결국에는 김일성 주석이 소련의 장단에 맞춰 놀기 때문이라는 논리인데 우선 그 점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역사인물의 말년전환은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다루기 좋아하는 주장이다. 마르크스가 말년에 주장을 철회했다느니 김일성 주석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김정일 위원장에게 실망했다느니 따위의 설은 항상 심심찮게 나돈다. 무료하기 그지 없는 말들인데 역사학자의 명의로 내놓을 때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여운형에 대한 이상한 재조명은 역시 반도의 정치사를 통해 살펴보아야 더 잘 이해가 되리라 생각된다. 남쪽이나 해외에서는 좌도 나쁘고 우도 좋지 않고 북도 나쁘고 남도 나쁘다는 식의 논리가 오랫동안 상당한 세력(?)을 가져왔다. 남에서 나온 문학예술작품들에도 그런 인물들과 주장들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오래전의 소설 <광장>이 그러했고 근년에 나온 영화들도 그렇지 않은가? 꽤나 재미는 있게 엮은 영화 <쉬리>의 북조선 특수부대 성원들이 그러하고 재미가 별로 없는 <천군>에서도 남북의 지도층을 싸잡아 욕하며 흥행에 실패했다는 <이중간첩>에서도 한석규가 분장한 위장 귀순 간첩은 남도 북도 아닌 남미로 달아났다가 죽는다...... 이러한 실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좋은 놈 하나도 없더라는 식의 독선적인 교만성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사실 결국에는 모종의 도피심리이다.

일단 도피에 습관되면 남도 그러리라고 짐작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찾는 법이다. 한때 꽤나 인기를 끌었다는 <남부군>의 저자 이태의 경우를 보자. 이현상이 나중에는 북에서까지 버림을 받고 어떠어떻게 죽었으리라고 엮어댔는데 소설이라면 3류 정도로 쳐주더라도 역사인물에 대한 주장으로서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하다. 본인이 전향했으니까 남도 신념을 지킬 리 없었다는 식이 아닌가? 그는 산에서 죽어간 어느 여자의 말이었다고 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들>이라던가 하는 방식으로 유격전을 한 사람들을 묘사했는데 이런 주장은 실제로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도피에 불과하다. 이인모 선생을 비롯한 비전향장기수들이 분노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주장이 <독자를 허무주의로 이끌어>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런 주장은 피 흘리며 싸웠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한 심한 모독이다.

뛰어난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너절한 의사는 사람을 죽인다 한다. 또 장수 하나가 공로를 세우면 만 사람의 뼈다귀가 말라버린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의사든 장수든 사람을 한번 밖에 죽이지 못한다. 허나 역사인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사람들은 남을 두 번, 세 번 혹은 그 이상 죽이고 또 죽인다. 너무나도 잔인한 짓이고 고인에게 무례한 노릇이 아닐까?

이 교수의 주장을 지금 필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이제 9월에 <여운형 평전>을 출판한다는데 거기에서 혹시 이제 확증하는 증거를 내놓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의 역사지식이나 인간에 대한 이해로서는 그런 증거가 영원히 나오지 않으리라고 인정한다. 시간의 검증을 기다려보기로 한다.(2007년 8월 10일)

출처: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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