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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 43,44,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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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3-17 18:2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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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제1회) 43-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제2회) 44-8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6 권 제17장 5. 간삼봉전투(제3회) 45-84

 

 

 

제6제17장 5. 간삼봉전투

 

 

군민련환대회가 끝난후 우리는 최현부대와 함께 팔반도에 있는 집단부락을 치고 서로 헤여지기로 하였다. 팔반도란 간삼봉부근에 있는 집단부락이다. 거기에는 300여명의 위만군 <토벌대>가 주둔하고있었다.

 

국내진공작전도 계획대로 수행하고 세개의 대부대가 한데 모여 군민련환대회도 성대하게 거행한 때여서 대원들과 지휘관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하였다. 그들중에는 대부대들이 한데 모인 기회에 국내진공을 더하든가, 장백시가 같은 곳을 답새겨서 인민혁명군의 본때를 다시 한번 보여주자고 정식으로 제기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군사행동의 견지에서 볼 때 보천보를 방금 치고난 후여서 국내진공작전을 되풀이한다는것은 불합리한 일이였다. 혜산방면의 공기가 심상치 않은 조건에서 장백시가를 친다는것도 역시 심사숙고해 보아야 할 문제였다. 혈기나 욕망만을 가지고서는 승산이 있는 싸움을 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격대상지로 팔반도를 선택하였다.

 

우리에게 팔반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것은 2사동무들이였다. 그들이 우리 밀영에 와있을 때 그 고장의 실정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그후 우리는 팔반도에 우리의 지하조직을 박아놓았다. 그 지하조직성원들가운데는 류씨성을 가진 위만군병사도 있었다. 그는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해서 지휘관들의 눈밖에 난 사람이였는데 상관들한테서 부당한 압력을 받은것을 계기로 우리 부대에 의거해와서 분대장을 하였다. 이 사람이 또한 위만군대대의 내부실정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일반적으로 유격부대가 적이 집중되여있는 군사적요충지를 친 후에는 쭉 빠지는 전술을 써서 멀리 빠져나가는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보천보를 친 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들도 유격대전법에 도통하고있는것만큼 그 점을 미리 타산하고 대책을 세울수 있기때문이였다. 실제로 관동군은 우리가 무송방면으로 빠져나오리라는것을 예견하고 그 일대의 길목들에 대부대들을 촘촘히 배치하고있었다. 이 점을 예측하고 있었기때문에 우리는 쭉 빠지는 전술이 아니라 적의 턱밑에 그대로 돌아앉는 수법을 썼다.

 

우리가 국경근방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던 다른 하나의 리유는 그 일대의 조국광복회 조직들을 도와주면서 국내의 실정을 더 구체적으로 료해하고 장악하며 상승단계에 있는 국내혁명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키자는데 있었다. 우리는 팔반도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이르는곳마다에서 공작원들을 불러 지하사업정형도 료해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과업도 주었으며 지방조직의 책임자들을 만나 사업방법도 배워주었다.

 

이런 때 정보공작임무를 받고 혜산에 건너가있던 리훈이 우리에게 통신을 보내왔다.

 

도천리의 한병을로인이 가지고온 리훈의 그 통신에는 함흥 제74련대가 수십대의 자동차를 타고 급작스레 혜산에 밀려들었다는 정보내용이 적혀있었다. 적들은 벌써 신파쪽에 나가 압록강을 건느기 시작했으며 <토벌>을 책임진 자는 김석원이라는 악질적인 조선인장교라고 하였다.

 

어떤 자료를 보면 그때 함흥 제74련대를 인솔해 가지고 <토벌>에 동원된 일본군측 지휘관이 김인욱이라는 조선인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와 장백의 지하조직들에서 우리에게 보내온 통보자료들은 한결같이 <토벌대>를 이끌고 함흥을 떠난 적장의 이름을 김석원이라고 밝히고있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김석원은 일제가 소문을 크게 내려고 함흥역에서 조직한 요란한 장행식에서 혈서로 <무운장구>라고 쓴 기발을 들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김일성부대를 몰살시키겠다고 매우 격해서 떠들어댔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상급의 신임으로 <토벌>을 떠나는것은 공산군의 전술을 잘 알기때문이라고 하면서 멀지 않아 74련대의 솜씨가 어떤가를 보게 될것이며 황군의 위력앞에서 공산군은 추풍락엽의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라고 허장성세하였다는것이다.

 

김석원의 함흥 74련대는 혜산과 신파를 떠나면서도 환송의식을 치르었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집집을 찾아다니며 군중을 강제로 동원시키였다. 경찰과 일본인 유지들, 관리들, 재향군인들이 거리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일장기를 흔들면서 부산을 피웠다. <토벌대>의 무력이 어찌나 많았던지 30~40명이 탈수 있는 목선으로 하루종일 신파나루를 건네였다고 한다.

 

이런 상세한 자료를 정탐일군도 아닌 리훈이 알아냈다는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였다. 우리한테서 혜산시내의 적정을 탐지할데 대한 과업을 받은 리훈은 목재상의 간판을 가지고 공작지에 침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19도구 관내에 있는 조국광복회 분회장들에게 과업을 주어 며칠사이에 수백대의 나무를 베게 하고 그것으로 떼목을 무었다. 목재상의 신분을 보여주는 증명서도 만들었다.

 

리훈은 원래 8년동안이나 산판에서 류벌로동을 한 경험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다른 한사람의 조직원과 함께 떼를 몰고 혜산으로 나갔는데 일이 잘되느라고 그랬던지 강기슭에서 최경부의 친척되는 령감을 만났다. 최경부는 <혜산사건>때 많은 애국자들을 잡아가둔 악질적인 경관이였다. 박달을 체포한것도 이 최가였다.

 

최경부의 삼촌은 리훈이 수백대의 통나무를 끌고 온것을 보자 나무를 몇대만 팔아달라고 하였다. 리훈은 최경부나리의 숙부되는 어른이라는데 어찌 돈을 받고 나무를 팔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통나무 두대를 거저 주었다. 령감은 흐뭇한 김에 리훈에게 시내에 있는 목재상을 소개해주었다. 령감의 말이 그 목재상의 사위도 자기 조카처럼 혜산경찰서에 있다는것이였다.

 

리훈은 목재상과 통성을 하고 나서 장백이란데는 <비적>이 많아서 살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나무나 내다 팔아서 돈냥이나 모아가지고 혜산에 나가 살 생각인데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는 목재상에게 절반값으로 나무를 팔아버린 다음 그 집에 며칠동안 머무르면서 그의 사위라고 하는 김순사와도 통성을 하였고 한턱 낸다는 명목으로 술좌석도 마련하였다.

 

리훈이 김순사와 목재상을 처음으로 음식점에 초대한 날이였다고 한다. 취기가 돌자 기분이 좋아진 김순사는 아무날 몇시에 김석원부대가 혜산에 온다는 비밀을 흘려놓았다.

 

그는 보천보사건으로 제국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군부의 위신을 추켜세우느라고 김석원을 파견한 모양인데 아무튼 싸움개나 하는 사람이라더라, 이 사람이 김일성부대를 치고 서간도를 평정하겠다고 장담했다는데 결과는 두고봐야 알테지만 어쨌든 공산군측에서도 김석원부대와 접전하게 되면 고전을 겪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함흥 74련대가 혜산시내에 들어오는 날 리훈은 고급양복에 봄가을외투를 입은 말쑥한 신사차림으로 거리에 나가 환송대렬에 슬그머니 끼여 <토벌>에 동원된 무력이 얼마이고 포는 몇문이며 기관총은 몇정인가 하는것을 죄다 살펴두었다. 그리고 환송의식이 끝나기 바쁘게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에게 련락을 보냈다. 련락이 사령부에 당도한것과 때를 같이하여 장해우와 김정숙이 보낸 련락원이 또한 우리를 찾아와 보다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련락원은 압록강을 건너온 적의 부대가 13도구에 와서 행적을 감추었는데 지금 조직원들이 동원되여 그 행방을 찾는다고 하였다. 리훈의 정보와 도천리, 신파 조직이 보내온 정보는 신통히도 일치하였다. 지방조직들에서 보내온 자료를 종합해보면 <토벌>에 동원된 적의 무력은 약 2,000명 정도로 추정되였다.

 

적들이 조선주둔군에서 정예라고 하는 함흥 74련대까지 <토벌>에 내몬것을 보면 조선총독의 분격과 신경질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던것 같다. 보천보전투와 그 전투를 전후하여 국경일대에서 거듭 얻어맞은 적들은 엄청난 심리적혼란을 겪게 된것이다. 중국관내에 대한 침략전쟁이 목전에 박두한 때여서 일제는 후방의 안전에 여간 신경을 쓰지 않고있었다. 이런 때에 <동장철벽>이라고 자랑하던 조만국경일대가 란리판이 되고보니 총독이 노발대발하는것도 별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였다.

 

조성된 정세는 우리가 서강에서 작전방침을 세울 때 국내진공을 마친 후 3개방면에 진출했던 부대들이 한데 모이기로 약속한것이 아주 예견성있는 조치였다는것을 증명해주었다.

 

2,000명이면 적의 력량이 우리보다 훨씬 우세하였다. 이런 형편에서는 접전을 피하는것이 상책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군대부대와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였다. 적이 대부대로 공격해오면 재빨리 분산해서 기동전을 벌리는것이 유격전의 일반적인 전술이지만 이번에는 관례를 깨뜨려 대부대를 대부대로 치자는것이 나의 결심이였다.

 

우리는 팔반도쪽으로 움직이다가 일단 행군을 멈추고 싸움터를 고르기로 하였다. 로마가의 서쪽산에 올라가서 직접 지형을 정찰하였는데 거기가 바로 사방이 탁 트인 간삼봉이였다. 간삼봉은 13도구로부터 8도구에 이르는 100여리의 광활한 대지에 가로놓여있는 서강고원의 북쪽 세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간삼봉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원시림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우에 사등방산줄기의 련봉들이 떠있었다. 모두더기라고 불리우는 고장이였다.

 

남쪽도 역시 동서로 100리가 넘어보이는 수풀이 바다인데 서강고원이라고 불리우는 그 덕지대에 팔반도며 로국소와 같은 부락들이 띠염띠염 보였다. 간삼봉은 태고연한 원시림의 바다우에 섬처럼 솟아있는 봉우리였다. 적들이 여기로 오려면 13도구에서 서강성에로 올라오는 산굽이와 령마루들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싸움터로는 간삼봉이 제일 적당하였다.

 

저녁에 지휘관들이 모여 전투방안을 토의하였는데 거기서 내가 강조한것은 적의 정규전법에 말려들지 말고 유격전법을 주동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러자면 우리가 먼저 산릉선을 차지하고 적들이 골짜기에 몰리게 유도하여야 하였다. 부대의 배치에서도 도식을 범하지 말아야 하였다. 적들이 우리가 주의를 덜 돌릴것이라고 볼수 있는곳에는 력량을 많이 배치하고 전투과정에 부대들이 수림을 리용하여 좌우로 빨리 기동하면서 림기응변하도록 하였다.

 

나는 4사, 2사의 지휘관들과 함께 전투방안을 짜놓은 다음 새벽녘에 권영벽, 김재수, 정동철을 비롯하여 우리의 부름을 받고 간삼봉으로 찾아온 국내와 장백지방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혁명조직들의 사업방향과 임무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적들이 간삼봉으로 공격해온것이 바로 이날 아침이였다. 새벽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안개가 뿌옇게 끼였는데 최현부대가 차지한 산봉우리에 있는 보초소에서 먼저 신호총소리가 울렸다. 나는 곧 산릉선의 지휘처로 올라갔다. 최현은 보초대가 적의 포위에 들것 같아 한 개 중대를 거느리고 전방으로 맞받아나갔다. 적들은 순식간에 최현이 인솔한 중대를 포위해버렸다.

 

전투에서는 시작을 어떻게 떼는가 하는데 따라 전투사기가 좌우되므로 어떻게 하든지 사태를 수습하여야 하였다. 리동학에게 경위중대를 데리고가서 최현네 중대를 빨리 구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위만군을 총알받이로 앞세우고 맹렬하게 달려들었지만 최현네 중대와 리동학중대가 안팎에서 협공으로 벼락같이 조겨대는 바람에 적의 포위진이 무너져버렸다. 치렬한 육박전끝에 중대는 구출되였다.

 

사태를 역전시킨 우리는 적들을 여러 번 협곡에 몰아넣고 하루종일 답새겨대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맹수처럼 기세가 등등하였다. 일본군대의 돌격이란 참으로 집요한것이였다. 그들은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타고 넘으면서도 목이 터지게 함성을 지르면서 파도식으로 계속 련달아 달려들었다. 소왕청방어전투때에 조선에서 건너온 일본군 간도파견대의 돌격을 겪어보고 대단히 악착하다고 하였는데 이 함흥 74련대의 돌격은 그보다 더 맹렬하였다. 우리가 기관총을 10여정이나 배치하고 전방을 탄막으로 뒤덮는데도 적들은 그냥 새까맣게 달려들었다.

 

이런 공격을 종일토록 계속하였다. 그통에 우리도 어지간히 힘든 싸움을 하였다. 어떤곳에서는 적이 아군진지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육박전까지 벌려야 하였다. 거기에 비까지 계속 내려서 전장은 더 처참하였다. 그때 우리가 생각한것은 어떻게 되여 군국주의가 사람들을 저렇게도 검질기고 분별없는 야수적 존재로 만들었는가 하는것이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떠드는 <야마도정신>은 부정의를 정의로 알고 악을 선으로 착각하는 천치들, 총구앞에 부나비처럼 뛰여들어 보람없는 개죽음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무사도라고 자부하는 청맹과니들, 타민족의 시체더미우에서 축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야수들, 자기가 죽으면 천조대신의 혼이 자기를 굽어살피고 천황이 자기 명복을 빌며 일본국민이 자기를 영원히 기억할것이라고 망상하는 정신불구자들을 수많이 생산해냈다. 일본의 군벌들과 대신들은 그렇게 죽은 장병들을 잠간 피였다가 사라져버리는 <사꾸라꽃>에 비기면서 황군의 정신이니 뭐니 하고 추어주었다.

일본군병사들은 자기들의 죽음이 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고 믿고있었지만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였다. <황도정신>은 일본을 부흥에로 이끌어간것이 아니라 멸망에로 몰아갔다.

 

유격대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이런 관점에서 일본군대를 평가하고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사납게 달려들어도 혁명가의 자부심, 승리자의 자부심으로 적을 굽어보았다.

 

우리는 정황을 효과적으로 리용하면서 날이 저물도록 적들을 답새기였다. 녀대원들이 싸움을 하면서 부른 <아리랑>이 전대오에 퍼지였다. 격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것은 강자들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간삼봉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종심을 비쳐보이고 락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것은 그닥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였으며 나중에는 인생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는것이였다.

 

적들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저녁때가 되도록 폭우속에서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런 때 우리는 팔반도쪽에 정찰임무를 받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박성철소부대와 식량공작조에 련락하여 적의 뒤통수를 때리게 하였다. 김석원은 앞뒤에서 얻어맞을 위험이 생기고 날까지 어두워지자 200명가량밖에 안되는 패잔병들을 모아가지고 싸움터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간삼봉전투는 흥미있는 일화들을 많이 남기였다. 최현의 나팔수인 김자린은 덤벼치던 나머지 허벅다리에 척탄통을 세우고 쏘다가 반충력에 대퇴골이 골반에서 삐여져나가는 사달을 일으키였다.

 

최현은 김자린에게 걸쭉한 욕설을 퍼붓고나서 척탄통을 두어방 쏘아 포진지에서 한데 몰켜돌아가는 적들을 소멸한 다음 탈골된 김자린의 다리를 두손으로 잡아당겨 단번에 제자리에 맞추어주었다. 그날 아군이 쏜 척탄통에 김석원이 부상당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실여부는 잘 알수 없다.

 

함흥 74련대의 <토벌>행각은 완전한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간삼봉전투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중에는 함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도시로 꽁무니를 뺀 병사들도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사까이라는 병졸도 김석원을 따라가지 않고 청진에 도주하여 일제의 패망당시까지 술집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그는 간삼봉격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것이 너무나 다행스러워 짬만 있으면 손님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사까이의 말이 자기는 일본사람이지만 조선말을 알고있은 덕분에 목숨을 건지였다고 하였다.

 

그때 장교들은 귀신이 되여서라도 산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다면서 병사들을 공격에로 몰아대였다. 사까이는 와들와들 떨면서 산중턱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산마루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 혁명군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황군의 서렬에서는 단꺼번에 수십명의 사상자가 났다.

 

사까이는 산아래쪽으로 정신없이 내리달리였다. 그런데 이때 산꼭대기쪽에서 <조선사람은 엎디라!>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조선말을 아는 사까이는 그 고함소리를 듣자 얼결에 무기를 던지고 동료들의 시체옆에 엎드리였다.

저녁녘에 유격대원들이 총과 탄띠들을 걷어가느라고 전장을 수색하였다. 그들은 사까이가 죽은줄로만 알고 그냥 지나가 버리였다. 심장이 멎는듯한 공포와 함께 심한 염전의식에 사로 잡힌 사까이는 어둠을 타서 산을 기여내렸고 네발걸음으로 집단부락에 가 닿았다.

 

 <이 사까이가 조선말밑천이 좀 있는것이 행운이였소. 조선말이 결국은 내 생명을 살려주었소. 그래서 지금도 조선말을 열심히 배우고있소.>

 

이것은 사까이가 술을 마시며 사람들에게 자주 했다는 말이다.

 

사까이의 선전으로 청진시내와 그 주변일대에서는 간삼봉전투에 대한 일화들과 함께 우리에 대한 소문이 널리 전파되였다. 군직을 버리고 소시민으로 전락된 한 침략군병사의 고백이 결국은 우리 인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결과를 빚어냈다.

 

간삼봉전투가 있은 얼마 후 우리 동무들은 전장근처의 마을들에 갔다가 적들의 패전상을 상세히 알아가지고 왔다.

전투가 있은 다음날부터 적들은 혜산, 신파와 간삼봉부근에 있는 마을들에서 담가와 우마차, 자동차들을 징발하여 시체운반을 하였다. 그 고장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전투직후 간삼봉과 그 일대의 부락들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한벌 깔려있었다고 한다. 적들은 시체마다에 흰광목천을 덮어놓고 사민들이 얼씬 못하게 단속하였다. 적들이 제일 두려워한것은 저들의 패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는것이였다. 그들은 신문에 간삼봉전투실황을 소개할 때에도 사상자수가 얼마 안되는것처럼 허위보도를 하였다.

 

김석원이 우리를 치겠다고 신파에서 압록강을 건너올때는 하루종일 걸렸는데 다시 건너갈 때는 반시간 남짓하게 질렸다고 한다.

 

사상자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시체에서 머리만 잘라서 마대나 나무상자에 넣어 우마차에 실어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날랐다. 그러면 시꺼먼 풍을 친 자동차들이 그 마대와 나무상자들을 싣고 압록강을 건너갔다. 시체들을 화장하는 연기와 냄새 때문에 간삼봉지구 농민들은 며칠동안 숨도 제대로 쉴수 없었다고 한다.

 

시체운반에 동원된 일본병사에게 어떤 농민이 시치미를 떼고 <나리, 달구지에 싣고가는게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일본병사는 능청스럽게 <가보쨔>라고 대답하였다. 호박이라는 뜻이다.

 

그러자 농민도 싱글벙글하면서 <가보쨔농사가 대풍이군요. 좋은 국거리니 많이들 자시우.>하고 야유하였다. 그때부터 항간에는 <호박대가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인민들은 일본군시체만 보면 <호박대가리>라고 풍자하였다.

 

김석원과 그의 패잔병들은 번화한 혜산을 거치지 않고 조심스레 신파와 풍산으로 빠져 함흥으로 돌아갔다. 출동할 때는 장행식까지 하면서 떠들썩했던 함흥역이 돌아올 때는 초상난 집같은 광경이였다. 역두에 나온것은 병영에 남아있던 병졸들뿐이였다. 그 병사들이 부상자투성인 출정군인들을 복판에 세우고 거리를 가까스로 지나갔다. 시민들의 눈을 속이고 패망상을 감추자니 그런 궁상스러운짓도 하였을것이다.

 

함흥의 무덕정이라면 일본군인들이 격검을 하던 련무장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간삼봉전투가 있은후 얼마동안 적들은 여기서 격검을 하지 못하였다. 신파거리에서는 간삼봉전투가 있은후 야경소리까지 없어졌다고 한다.

 

간삼봉에서의 패전은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씻을수 없는 치욕으로 되였고 김석원이라는 이름은 그 치욕의 대명사로 되였다.

 

결국 보천보전투와 그에 잇달아 진행된 간삼봉전투로 조선총독 미나미와 관동군사령관 우에다가 <도문회담>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완전히 소멸하겠다고 작성한 이른바 <획기적인 전략>은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이로써 1937년초 우리가 계획한 대부대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은 성과적으로 결속되였다.

 

간삼봉전투는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하나의 큰 봉우리를 이루는 의의있는 전투였다. 이 전투는 구시산전투와 더불어 보천보전투의 성과를 공고히 해주었다. 구시산전투와 간삼봉에서의 격전으로 하여 보천보전투승리는 더욱더 큰 빛을 낼수 있었다. 비유해 말하면 간삼봉전투와 구시산전투는 보천보전투의 메아리라고 볼수 있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통하여 <무적확군>의 신화를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위력을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간삼봉전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에 진출한 후 항일혁명의 전성기를 마련하는데서 하나의 뚜렷한 몫을 차지하고있는 중요한 싸움이였다.

 

운명의 조화라고 할가. 우리의 숙적이였던 김석원은 해방 후 또다시 38선을 사이에 두고 최현과 대결하였다. 최현은 거기서 경비려단을 지휘하였다. 리승만이 김석원을 38선가까이에 밀어보낸것을 보면 간삼봉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할 기회를 마련해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의거해온 <국군>사병들의 말에 의하면 김석원은 38선을 지킬 때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최현도 그와 맞다들면 혼을 내주려고 별렀다.

 

전쟁전야에 김석원이 불의에 38선을 넘어 대규모의 기습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그바람에 송악산에서 싸움이 붙었다. 아마 그는 최현을 혼내우거나 없애치울 작정이였던것 같다. 격노한 최현은 38선을 넘어온 <국군>을 모조리 소멸하고 얼마 안되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개성까지 따라갔다. 그는 내친 걸음에 서울까지 쫓아가서 김석원을 잡겠다고 하였다.

 

나는 최현에게 당장 철수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그 사람이 옛날에는 일제놈들의 충견이 되여 싸우러 왔었지만 지금은 미국상전에게 매워있다, 자칫하면 동족끼리 죽일내기를 하게 되고 전면전쟁으로 번져질수도 있다, 김석원도 조선사람이니 언제인가는 자기를 뉘우치게 될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지금은 최현도 김석원도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을 대신하여 오늘은 망국의 설음을 겪어보지 못한 새 세대들이 북과 남에서 총부리를 마주대고 군사분계선을 지키고있다. 나는 북과 남의 모든 새 세대들이 민족의 피줄을 두토막으로 동강낸 인위적인 그 장벽을 하루속히 제거해버리고 자주적인 통일조국에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 김석원도 말년에는 이런 념원을 품고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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