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0장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18.19-61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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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0장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18.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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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3 19:3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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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제1회) 18-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제2회) 19-61

 

 

 

4권 제10장 5. 혁명의 씨앗을 넓은 대지에

 

 

 

<숙반>의 회오리가 남긴 파멸적인 결과를 놓고 온 동만이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갈길을 모색하고있을 때 우리는 해방지구형태의 고정된 유격근거지들을 해산하고 광활한 지대에 진출하여 적극적인 대부대활동을 벌릴데 대한 새로운 로선을 내세우고 그것을 1935년 3월의 요영구회의에 상정시키였다. 이 로선은 회의에 참석한 절대다수의 군정간부들한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그에 리해와 공명을 표시한것은 아니였다. 회의에 참가한 당과 공청의 일부 간부들가운데는 유격구해산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유격근거지를 해산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망발인가, 해산해버릴 유격구라면 애당초 건설은 왜하였는가, 먹을것도 먹지 못하고 입을것도 제대로 입지 못하면서 이 유격구들을 위해 3~4년동안이나 피는 왜 흘려왔는가, 이것은 우경이다, 투항주의다, 패배주의다라고 하면서 우리를 막 공격하였다. 그때 그들이 유격구해산을 반대하여 들고나왔던 주장을 학계에서는 지금 유격구사수론이라고 부르고있다.

요영구회의에서 유격구사수를 제일 강경하게 제창한 대표적인물은 녕안유격대 창건자의 한사람인 리광팀이였다. 공청녕안현위와 길동국에서 청년사업을 많이 해온 리광림은 그후 왕청지방에 파견되여 채세영, 부현명을 비롯한 반일부대사령들과 함께 항일련합군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에 관계하였다. 그가 요영구회의에 참가한것은 공청 동만특위 림시서기의 직책을 가지고 활동할 때였다고 생각된다.

리광림은 아래와 같은 론거를 가지고 유격구해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유격구를 해산하고 혁명군이 광활한 지대에로 떠나가면 인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유격구를 해산한 다음에는 인민들을 적구로 내려보낸다고 하는데 이것은 군대와 일심동체가 되여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그들을 사지에 밀어넣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유격구라는 군사정치적지탱점이 없이 혁명군이 유격전을 전개할수 있겠는가. 유격구에서 혁명적으로 세련된 인민들이 적구로 내려간다는것은 곧 우리가 손때를 묻혀 키워온 수만명의 혁명군중을 잃는것으로 되지 않는가. 총체적으로는 유격구해산조치가 혁명을 1932년의 원점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수 있지 않겠는가.

순조롭게 락착을 지을것 같던 론의는 리광림의 장광설로 하여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였다. 유격구해산방침에 지지를 표시하던 사람들가운데서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인물들이 나타났다. 회의참가자들은 유격구사수론자와 유격구해산론자의 두 패로 갈라져 입씨름을 펼치였다. 론쟁이 극점에 이르자 수양이 부족한 일부 사람들은 인신공격까지 해가며 상대를 강짜로 눌러버리려고 하였다. 누구인가는 리광림의 사생활까지 거들면서 그의 주장을 론박하였다.

리광림은 녕안현에서 구공청책임자로 활동할 때 어떤 녀성을 짝사랑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랑은 매우 열정적인것이였으나 상대는 좀처럼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순정을 기울인 대가로 얻은것이란 보낼 때마다 답장도 없이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련정의 편지와 보고서도 못본척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군 하는 처녀의 무정하고 랭담한 반응뿐이였다. 사랑이란 역시 어느 일방의 주관적욕망이나 열성만으로는 이루어질수 없는것이였다. 리광림은 자기에게 실련의 쓴맛을 안긴 그 녀성을 목릉현으로 쫓아버리고 다른 녀성과 치정관계를 맺다가 왕청으로 나왔다고 한다.

리광림의 주장을 론박하느라고 끄집어낸 리면사이니 그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속단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리면사를 끌어내는 비렬한 방법까지 써가면서 리광림을 강타한것은 그가 사랑하던 녀자를 타지방으로 추방해버릴 정도로 무서운 복수심을 가지고있는 인간인것만큼 론쟁상대를 꺼꾸러뜨리기 위해서는 무슨짓이든지 다할수 있다는것을 증명하려는데서였다.

어떤 사람은 리광림이 지난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산하의 모모한 인물들에게 열심히 추종하던 <화요파계렬의 잔당>이라는것까지 상기시키면서 유격구해산을 반대하는것은 종파병의 재발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느냐고 까박을 붙이였다.

실패작으로 끝난 론쟁상대의 애정사를 들추어낸다든가 그에게 종파잔당이라는 감투를 씌운다는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약비한짓이였다. 그러나 책임은 리광림에게도 있었다. 그가 자기를 인민의 가장 충실한 보호자, 인민의 의사와 리익의 가장 철저한 대변자로 묘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경기회주의이니, 인민에 대한 배신이니, 용서할수 없는 자살행위니 하는 어마어마한 딱지를 마구 가져다 붙이였기때문이였다.

리광림과 같은 사람들이 유격구해산을 한사코 반대하는 그 심정의 일단은 우리도 얼마든지 리해할수 있었다. 유격구를 해산하는것은 우리자신들에게 있어서도 고통으로 되여있었다. 자기들의 손으로 건설했고 자기들의 심혈로 가꾸었으며 <천당>이상으로 여기면서 철통같이 지켜온 보금자리를 아무 미련도 애정도 없이 랭담하게 집어던지고 달아날 그런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있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끝없는 미련과 애정에 부대끼면서 유격구해산을 결심하였다.

리광림도 물론 우리만 못지 않게 유격구를 사랑하였을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실정에서 해방지구형태의 고정된 유격구를 타고앉아 막대한 군사적잠재력을 가진 강적을 상대로 하여 장기간 1대1의 정면대결을 한다는것은 아무리 공정하게 평가한다고 하여도 모험주의라고밖에 달리는 말할수 없었다. 그것은 자멸을 가져오는 길이였다.

유격구의 생활력이 결정에 올랐던 1933년이나 1934년에는 우리가 감히 이런 말을 할수 없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때 유격구를 오아시스나 지상천국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1935년에 와서는 유격구를 해산하자고 주장하게 되였는가? 이것은 변덕이 아닌가? 아니다. 변덕도 아니고 동요도 아니며 후퇴도 아니였다. 그것은 오히려 일보전진이라고 할수 있는 통이 큰 전략조치였다.

우리가 1935년에 와서 유격구를 해산하자고 감히 결심할수 있게 된것은 당시의 주객관적정세가 바로 그것을 요구하였기때문이였다.

두만강연안에 건설된 유격구들은 자기앞에 부과된 사명과 임무를 다했다고 말할수 있었다. 우리가 유격구의 사명과 임무로 내세웠던 최대의 과제는 혁명력량을 보존육성하는데 있었고 아울러 항일무장투쟁의 확대발전을 위한 정치군사적, 물질기술적 토대를 튼튼히 축성하자는데 있었다. 물론 그때 우리가 그 임무수행기간을 3년이라거나 4년이라고 규정해놓은것은 없었다. 다만 그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보았을뿐이다.

무장투쟁의 열파속에서 군대와 인민은 모두 불사조로 성장하였다. 출발역을 떠날 때 수십명에 불과했던 유격대오는 대규모의 유격근거지방어전투들과 도시공격전까지 벌릴수 있는 방대한 력량을 포섭한 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다. 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보물고에는 생신하고 독창적인 유격전의 경험들이 풍부하게 축적되였다.

유격전쟁은 투사들을 키워내는 용광로였고 군정대학이였다. 이 용광로에서는 순수한 강쇠만 뽑아냈다. 돌밭이나 지주집 외양간에서 굴러다니던 떡쇠도 이 로에만 들어가면 번쩍번쩍하는 강쇠가 되여나왔다. 항일군정대학은 부와 가난이 다같이 손금에 있고 점쟁이의 점괘에 있고 무당의 넉두리에 있다고 생각하던 촌무지렁이들과 품팔이군들까지도 투사로 만들어놓았다.

나는 전에 김자린의 머슴군시절의 경력을 듣고 앙천대소한 적이 있었다. 웃지 않고는 들을수 없는 한토막의 희극이 그 정력을 채색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날도 김자린은 지주집의 소를 끌고 아침일찍 들판으로 나갔다. 그가 먹음직한 풀을 골라가며 한창 낫질을 하고있을 때 산굽이에서 기차가 불쑥 나타나 전속력으로 달려오고있었다. 그는 일손을 놓고 두렁에 앉아 잠간동안 기차구경을 하였다. 김자린의 눈길은 승강구에서 담배를 피우고있는 어떤 신사의 해말쑥한 모습을 우연히 포착하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그 해말쑥한 꼴이 몹시 밉광스럽게 보이였다. 그래서 신사에게 주먹질을 하였다. 그것은 잘 먹고 잘 입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도발이였다. 신사도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하였다. 그 서슬에 그의 머리에서 맥고모가 날아났다. 신사는 어이가 없는듯이 몇번 두손을 허공에 저어보였지만 잠시후에는 달리는 기차와 함께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리였다. 그대신 그의 맥고모는 철길가의 늪속에 날아가 떨어졌다.

김자린은 늪속에 뛰여들어가 그 맥고모를 건져 쓰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철길뚝에 올라섰다. 그는 그 뚝우에서 운수가 좋게도 은전 5전이 들어있는 손수건을 발견하였다. 신사의 머리에서 맥고모자가 벗어질 때 그 모자와 함께 공중에 떠돌던 손수건이였다.

은전 5전으로 무엇을 사면 좋겠는가고 하루종일 궁리를 하던 10대의 머슴군 김자린은 그날밤 신사가 떨구고 간 맥고모를 쓰고 부자집자식들이 밤마다 모여서 풍청대는 도박장에 나타났다. 그는 5전을 밑천으로 우연히 하루밤사이에 부자집자식들한테서 거액의 돈을 따냈다.

김자린은 그 돈중에서 지주집에 진 빚을 물어주고 더러는 가난과 눈물로 한평생을 엮어가고있는 이웃집의 불쌍한 로인에게 주었다. 수중에 남은 돈은 얼마 안되였으나 그 돈이면 몇해를 두고 홍야라붕야라 하며 살아갈수 있다고 어린 머슴군은 타산하였다.

그러나 한해도 지나기전에 김자린은 다시금 빚에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한푼의 돈이라도 더 벌려고 황소처럼 일하였다. 일만 부지런히 하면 살림도 펴이고 팔자도 고칠수 있으며 지어는 출세까지 할수 있다는것이 머슴군시절에 김자린이 간직하고있던 세계관이였다. 하지만 로동은 그에게 부도 주지 않았고 생활개선의 길도 열어주지 않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그에게 차례지는것은 가난과 천대뿐이였다. 그는 머리도 총명하고 힘도 장사였으나 돈이 없는탓으로 사람값에 들지 못하고 짐승 같은 대접만 받았다.

김자린은 자기를 모욕하고 학대하는자들에게 정면으로 대항하였다. 수틀리면 못살게 구는자들의 멱살을 틀어쥐고 주먹을 휘두르군하였다. 그러나 그런 울분만으로는 생활고를 타개할수 없었다. 그는 후에 왕우구유격구에 들어와 유격대원이 되였으며 간도에서 다섯손가락에 드는 기관총수로 성장하였다.

우리 인민들속에 불사조로 널리 알려진 홍두산전투의 주인공 리두수도 한때는 길가에서 동냥자루를 들고 밥비럭질을 하는 거지생활을 하였다.

유격구는 수천수만을 헤아리는 항일의 영웅들과 렬사들을 육성해낸 온상으로 되였다. 이발이 다 빠진 로파도 유격구에만 오면 항일을 부르짖는 선동가로 성장하였다. 여기서는 모두가 로력가였고 초병이였고 전투원이였으며 유능한 조직자, 선전자, 실천가들이였다. 조동욱, 전문진, 오진우, 박길송, 김택근 등은 모두가 왕청유격구에서 단련된 쟁쟁한 혁명가들이였다. 항일의 영웅들은 피와 땀으로 온 세상이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만고의 항쟁사를 창조하였다.

종파주의와 함께 좌우경기회주의를 반대하는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혁명대오는 그 어떤 철퇴로써도 깨뜨릴수 없는 하나의 대가정으로 통일단결되였다. 무장투쟁과 당건설을 위한 군중적지반도 튼튼히 마련되고 중국인민들과의 반일공동전선도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불패의것으로 다져졌으니 이 모든 성과는 유격구가 생겨 3~4년동안에 이룩된 결실이였다.

과연 유격구라는 책원지가 없이 조중공산주의자들이 이처럼 풍성한 수확을 거둘수 있었겠는가. 유격구라는 출전기지, 병참지, 후방기지가 없이 항일혁명앞에 나선 첫 단계의 전략적과업들을 그처럼 철저하고 훌륭하게 실현할수 있었겠는가.

김명화는 처녀시절에 말총으로 감투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가던 최하층의 녀성이였다. 그도 유격구에 들어와 사람다운 생활을 하였고 항일대전의 열풍속에서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 성장하였다. 유격구가 아니였더라면 그는 이처럼 놀라운 진보의 길을 걷지 못하였을것이다. 진보는커녕 육체적생명도 건지지 못하였을것이다.

항일전쟁이 낳은 투사들중에는 지난날의 포수도 있고 백정도 있고 훈장도 있고 떼목군도 있고 대장장이도 있었다. 림춘추와 같은 약국주인이 있는가 하면 서철과 같은 의사출신의 혁명가도 있었다. 동만청총의 영향을 받다가 들어온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남만청총이나 주중청총의 지붕밑에서 살다가 참군한 청년들도 있었고 도회지에서 온 책상물림들이 있는가 하면 시골에서 온 더꺼머리들도 있었다. 유격구는 출신과 생활경로가 얼럭덜럭한 인간들을 하나의 구령에 따라 움직이는 성실한 군인들로 키워냈으며 항일구국의 전렬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결사분투하는 시대의 총아들로 육성해내였다.

간도의 산악지대들에 해방지구형태의 유격구를 창설하기로 한 우리의 결심이 정당했고 시기적절한것이였다는것은 실천을 통하여 충분히 검증되였다. 그런데 유격구의 생활력이 아직은 남아있던 그때 우리는 요영구에서 그 해산의 절박성을 새롭게 력설하게 된것이다. 무슨 근거를 가지고? 사명과 임무를 다한 유격구를 더는 사수할 필요가 없다는 근거를 가지고.

1930년대중엽의 간도지방 혁명정세는 조중공산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대답할수 있는 로선상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유격구에 그대로 틀고앉아 결사전가를 부르며 종전과 같은 방법으로 땅덩어리를 지키는 놀음을 하겠다는것은 엄정하게 말해서 혁명을 더 심화시킬 의향은 없이 현상유지나 하자는 속심이라고 할수 있었다. 혁명을 흐르는 물에 비길수 있다면 그들의 주장은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 않고 호수나 저수지 안에서만 맴돌기를 바라는것이나 다름없는것이였다.

혁명이란 대하나 장강과 같은것이다. 절벽에 부딪쳐 아우성치고 계곡에 막혀 태질을 하면서도 허공에 부서져 나딩구는 억만의 비말들을 고스란히 걷어안고 바다를 향해 용용히 흘러가는 대하나 장강과도 같은것이 바로 혁명이다. 대해를 등지고 산악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장강을 본적이 있는가? 역류와 정지는 장강의 본성이 아니다. 장강은 오직 앞으로만 달린다. 장애물이 있으면 격파하고 동료나 동행자가 있으면 포섭하면서 머나먼 종착점인 바다로, 바다로 쉬임없이 달린다.

장강이 썩지 않는것은 바로 정지나 휴식을 모르는 그 꾸준한 운동에 있다. 만약 장강이 한순간만이라도 흐름을 멈춘다면 그 강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부패현상이 생기게 될것이다. 온갖 부유생물들이 번식하여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게 될것이다.

만일 혁명이 혁신을 배제하고 기존방침의 고수만을 절대화하는데로만 나간다면 그 혁명은 흐름을 멈춘 강물과 같이 된다. 혁명은 자기가 세운 전략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과 조건에 맞게 전술을 부단히 갱신해야 한다. 이런 갱신이 없다면 혁명은 침체와 답보를 면치 못하게 된다. 한 방법이 50년후에도 유효하고 100년후에도 절대적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망상가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과 의식성을 무시하는 립장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수 없다.

전술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의의를 가진다. 한순간을 대표할수도 있고 하루를 대표할수도 있고 한달이나 한분기, 한시기를 대표할수도 있는것이 바로 전술이다. 하나의 전략을 성공에로 이끄는 과정에는 열가지 전술이 있을수도 있고 백가지 전술이 있을수도 있다. 하나의 전략을 위해 한가지 처방만을 내세우는것은 혁명에 대한 창조적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교조이다. 교조는 자기의 손발을 자기 스스로 얽어매는 미욱한 자살행위이다. 교조가 존재하는곳에서는 생동하고 박력있는 정치를 볼수 없으며 도도하고 활력에 넘친 혁명의 장강을 만날수가 없다.

혁명을 장강의 흐름처럼 줄기찬것으로 만들수 있는 힘은 창조와 혁신에 있다. 창조와 혁신이야말로 자주적인 삶을 위하여 끝없는 진보와 번영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인민대중의 본성적요구를 충실하게 반영하고있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와 혁신은 혁명을 추동하는 발동기라고 할수도 있다. 한 개민족의 발전력사가 얼마나 빠른가 하는것은 이 발동기의 마력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조선혁명은 이 발동기의 힘으로 21세기의 대문앞에까지 와 닿았다.

21세기를 지척에 바라보고있는 오늘 우리 당에서 가장 중요하게 론의되고있는 정치적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국주의 련합의 강력한 봉쇄속에서 인ㅁ빈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어떤 방법으로 계속 고수하고 빛내여나가겠는가 하는것이다.

한세기전에도 조선반도는 대국들의 포위환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인천앞바다에는 렬강들의 군함이 노상 떠있었다. 봉건조정이 쇄국을 고집하면서 척양척왜의 립장을 취할 때마다 그네들은 대포를 몇방씩 쏘아대면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친일내각을 조작하고 그것을 발동시켜 내정개혁까지 강행하게 하였다. 왕과 왕후의 측근에서는 일제가 박아넣은 고문들과 공사들, 밀사들이 맴돌았다. 이것도 일종의 포위였다.

외래침략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포위와 봉쇄는 력사적으로 조선민족에게 강요되고있는 시련이다. 나도 우리 민족과 더불어 한평생을 이 포위와 봉쇄 속에서 살아왔다. 지정학적특성으로부터 오는 숙명인가? 물론 그것도 한가지 원인으로는 될수 있을것이다.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만일 알라스카나 북극의 어느 빙하 한끝에 붙어있다면 혹시 우리 나라에 대한 강대국들의 구미가 달라졌을수도 있지 않을가. 그러나 이러한 <만일>이란 있을수 없다. 어떤 나라가 어디에 위치하고있는가 하는것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 대국들에게 알랑거리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아나가는 나라들은 지구의 그 어느 곳에 있건 항상 <푸른 베레모>의 공격목표가 되든가 무수한 <토리쎌리법안>의 희생물이 될수 있다는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생을 자주적으로 살려고 결심한 사람들은 제국주의자들의 봉쇄를 항상 각오해야 하며 그것을 뚫고나갈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간도의 항일근거지들은 1935년에도 물샐틈없는 봉쇄상태에 놓여있었다. 이해에는 적들의 봉쇄가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가 로선을 바꾸어 혁명에서 대단원을 이루어보려고 결심하였다면 그들은 봉쇄망을 최대한으로 조이여 <공비>숙청에서 결정적승리를 달성해보려고 시도하였다. 일제는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정예무력을 동원하여 유격구를 겹겹이 포위하고 매일같이 항일근거지의 모든 생물체들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기 위한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다.

혁명군과 인민들사이의 련계를 끊어버리기 위한 적들의 책동중에서 기본으로 된것은 바로 집단부락정책이였다. 이 정책에 따라 인민혁명정부의 관할밖에 있는 모든 행정구역의 주민들은 싫건좋건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있는 밀집부락에 들어가서 오가작통법이나 십가련좌법과 같은 악법들과 중세기적인 질서의 지배밑에서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해야 하였다.

적들이 만주각지에 널려있는 수천수만개의 산재부락들과 가가호호들에 불을 지르고 최후통첩적인 철거령을 내리고 그 주민들을 벌방의 토성촌들로 무자비하게 이주시킨 목적은 군대와 경찰, 무장자위단이 상주하고있는 <안민촌>들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 편안한 통치를 하자는데도 있었지만 주요하게는 토성, 포대, 물홈, 울타리, 탐조등, 철조망과 같은 인공적인 장벽들로 <공비박멸>에서 가장 큰 장애로 되고있던 군민일치의 피줄기를 영원히 끊어버리자는데 있었다. 유격대가 인민의 보호자이고 인민이 유격대의 후방이며 중요한 정보원천이라는것도 적들도 잘 알고있는 상식이였다.

인민을 토성속에 모조리 걷어넣으면 도로건설과 군사시설의 설치를 비롯한 여러가지 부역에도 집단적으로 동원시킬수 있었고 그 비밀도 철저히 보장할수 있었으며 로력과 자금, 물자의 징발도 어느때나 용이하게 할수 있었다.

적들은 집단부락건설을 계기로 반공선전을 강화하였다. 너희들이 정든 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집단부락으로 가게 된것은 다 공산당때문이고 혁명군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들과 내통하면서 치안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당국은 부득불 산재부탁들을 없애고 백성들이 <공비>나 마적들의 성화를 받지 않고서도 살수 있는 <안민촌>들을 건설하게 된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

적들은 토성을 네모나게 쌓고 한 토성안에 100호 또는 200호의 집들을 밀어넣었다. 집은 군경들의 감시에 편리하게 현대공장지구 사택들처럼 줄을 맞춰 지었다. 한동네에서 온 사람들도 집단부락에만 들어가면 서로 추녀를 맞대고 살지 못하게 갈라놓았으며 친척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앞뒤집이나 아래웃집에 있게 하지 않고 동서남북에 각각 분산시켜 배치하였다. 그것은 뜻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치안유지에 방해되는 모의를 하거나 비밀결사를 시도하지 못하게 하자는 조치였다.

적들이 집단부락안의 주민들의 분렬과 리간을 얼마나 꾀하였는가 하는것은 오가작통법 한가지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적들은 다섯집으로 한 개 조를 뭇고 그 중 한집이라도 유격대와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면 조안의 모든 세대들에 꼭 같은 처벌을 주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그 다섯집의 주민들을 전부 학살하군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악명높은 오가작통법이다.

집단부락을 통치하는 행정관리들과 무장군경들은 인민혁명군의 수중으로 한되박의 쌀이라도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식량에 대한 통제를 무섭게 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이 토성밖으로 일하러 나갈 때마다 <공비>들에게 줄 여분의 밥이 담겨있지 않는가 하는것을 조사하려고 점심보따리까지 헤쳐보았다. 점심그릇도 한사람몫이 넘으면 무턱대고 빼앗아냈다. 집단부락의 농민들은 밭일이 묵어서 새벽작업을 하고싶어도 날이 밝기전에는 성밖으로 나갈수 없었고 날이 저물기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혁명군은 집단부락인민들의 식량상 방조를 거의나 기대할수 없었다.

유격구에서 재배하는 곡식으로는 군민에게 필요한 식량을 충당할수 없었다. 게다가 적들이 줄곧 농사를 방해하였다. 그들은 사람과 함께 농작물도 초토화대상으로 삼았다. 싹이 돋아나는 곡식은 군화로 짓밟았고 성장기의 작물은 불을 질러 태워버리였으며 다 익은 낟알은 무장대가 우마차를 끌고와서 모조리 실어갔다. 이것은 총과 대포로써도 멸살시킬수 없는 유격구역의 군대와 인민을 완전히 굶겨서 죽이기 위한 비렬하기 짝이 없는 기아작전이였으며 목을 조이는 봉쇄작전이였다.

 <민생단>은 해체되였지만 혁명대오를 안팎으로부터 분렬와해하기 위한 적의 파괴작전은 종전보다 더 악랄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였다.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들에는 미인들의 라체사진이나 추잡한 남녀관계를 그린 눅거리 춘화들까지 나타났다. 돈에 매수된 미녀들이 로자 룩셈부르그나 쟝느 다르크의 탈을 쓰고 우리 대오에 침투하여 군정간부들의 넋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경찰서나 헌병대로 데려가기 위한 부식공작을 열심히 벌리였다.

이 모든것은 간도의 유격구들을 인간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절해고도의 세계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철저히 초토화하고 질식시키기 위한 대살인광대극이였다.

이런 대세를 보지 않고 이미 로출된 유격구를 보위하는데만 몰두하게 된다면 혁명군은 결국 군사적으로 피동에 빠지게 될것이며 적과의 끊임없는 소모전에 말려들어가 다년간에 걸쳐 육성된 혁명력량은 보존되지 못하고 지리멸렬될것이였다. 협소한 유격구를 사수하기 위해서만 골몰한다는것은 결국 적색구역의 모든 군민을 립체전으로 압살하려고 발악하는 적의 기대에 발을 맞추어주는 결과밖에 가져올것이 없었다.

회의참가자의 과반수가 유격구사수론을 모험주의라고 비판한것은 정당한 일이였다. 내가 지금까지도 신기하게 생각하는것은 그때 요영구회의에서 유격구사수론을 고집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일상 생활에서 교조가 심하고 좌경기가 많은 독신적인 인간들이였다는것이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립장을 가진 사람들을 경원시하였으며 창안을 잘하는 사람, 발기를 잘하는 사람, 꿈이 많고 환상이 풍부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시답지 않게 대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요영구회의에서 이 과격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나이들을 끝끝내 설복해내고야 말았다.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합의한 반 <민생단>투쟁문제와 달리 유격구를 해산하는 문제는 회의에서 결정으로 채택되였다. 이것은 우리가 좌경모험주의와의 투쟁에서 거둔 또 하나의 성과였다.

요영구회의는 인민혁명군이 유격구역을 사수하기 위한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공격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적계기로 되였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하여 우리는 유격구역의 협소한 범위를 벗어나 동북과 조선의 광활한 판도에서 적극적인 대부대유격전을 령활하게 벌릴수 있는 창창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였다. 간도 5개 현에 국한되였던 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는 수십배로 확대되였다. 우리의 활동무대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제한된 지역의 봉쇄에만 매달리던 적들이 곤경에 빠져 허우적거리리라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5개 현을 포위하는것은 비교적 용이한 일이라고 할수 있겠지만 그밖의 동북의 여러 성들은 문제가 달랐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유격구를 봉쇄해놓고 고정된 지역에 틀고 앉아 휘파람을 불며 호강을 해왔지만 이제부터는 인민혁명군을 쫓아다니며 전례도 없고 규범에도 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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