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해방 22] 내가 본 신약성경(2),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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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신학의 해방 22] 내가 본 신약성경(2),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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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22 18: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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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22]

내가 본 신약성경(2)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가의 고난의 종 그리스도론-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편의상 마가를 저자로 부를 뿐이다. [마가복음서]가 기록된 연대는 AD 66년 경으로 믿어지고 있다. [마가복음]서 이전에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어떤 연결된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예수의 말들(Sayings), 가르침들(Teachings), 행적들(Actions), 비유들(Parables),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Miracle Stories), 고난의 이야기들(Passion Narratives), 등이 구두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마가는 그들을 수집하여 그의 독특한 관점에 따라 그의 역사적 상황에 맞게 편집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었던 것이다.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세워진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어 초대교인들 상호간에 돌려보았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러가지 전통적인 재료들을 수집하여 마가는 최초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일관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후 15년 쯤 지난 후 마태(Matthew)와 누가(Luke)는 [마가복음]을 앞에 놓고 그것을 그들의 재료로 사용하면서 <Q>라는 재료와 마태와 누가가 각자 수집한 그들만의 독특한 재료들을 모두 사용하여 예수의 전기를 길게 기록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의 내용이 서로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복음을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고 부른다.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서]를 재료로 놓고 예수의 생애를 기록했기 때문에 보는 관점이 서로 같지 않을 수 없었다.

 

[마가복음]의 구성

 

[마가복음]을 기록한 기자는 [마가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 부분에서는 예수의 생애 중 <봄철>에 해당하는 병자를 고치고, 제자들을 만나고, 기적을 행하며, 가진 것을 나누어 먹는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함으로서 예수는 제자들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고 그 절정에서 <그리스도(Christ)>로 인정을 받게 된다(8:29). 복음서 후반부에서는 예수의 생애 중 <겨울철>에 해당되는 내리막길, 즉 <수난의 이야기(Passion Narratives)>가 기록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인 1장에서 8장까지는 예수의 생애 중 <성공담들>을 기록하고 있고, 후반부인 9장에서 16장까지는 주로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전반부 8장과 후반부 8장 중간에서 예수의 생애 중 <정점>을 차지하는 <가이사리아 빌립보 사건(Event at Caesarea Philippi)>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상은 마가의 신학적 견해에 따른 세밀한 <편집>에 의한 것이었다. 마가는 [마가복음]의 <절정사건>을 다루기 전에 고의로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하여 한 <장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베싸이다의 소경 이야기(마가 8:22~26)

 

예수와 그의 12제자들은 갈릴리의 시돈과 두로지방을 두루 여행하며 80일 가량 같이 먹고 자면서 긴 이야기를 나눈다. 제자들은 차차 눈이 떠 예수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가 의도하는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가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시도하려는 지를 조금씩 깨달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끊임없이 그의 스승 예수의 참 뜻을 오해했으며 <눈 먼 장님>처럼 예수의 역사적 사명을 명확히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끝없는 오해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의식>이 변해가는 과정을 비유적 사건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마가는 <베싸이다의 소경 이야기>를 <절정사건> 바로 전에 다루고 있다.

 

예수와 12제자들은 긴 여행 중에 <베싸이다>라는 지방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 중 몇이 눈 먼 소경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주기를 원했다. 그 때 예수는 그 소경의 손을 잡고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그의 눈에 손을 얹고 묻기를,

“무엇이 좀 보이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소경은 눈을 치켜뜨면서,

“사람들이 보이긴 합니다만 그들이 움직이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기적이 실패했다. 그 때 예수는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어 장님의 눈을 완전히 고쳐서 그가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의 제자들은 물론 마가 자신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 <인간>을 <나무>로 보던 소경처럼 예수의 <메시아성>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말해준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아성(Messiahship)>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듯이 마가를 비롯한 초대교인들도 십자가에 못 박힌 패배자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말해준다. 이 소경 이야기는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중에는 <똑똑하게> 보게 되는 <의식의 변화 과정>, 혹은 <신앙의 변화 과정>을 비유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은 눈 먼 장님과 같아서 이미 자신이 익숙했던 습관, 풍습, 제도, 등에 매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다. 더구나 <거짓의식>을 고의로 주입시키는 지배층의 세뇌교육으로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약한 것은 <거짓의식 속>에 빠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예수 당시의 현실, 즉 로고스인 예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듯이 마가가 처한 초대교회가 직면한 현실을 고치기 위해서는 <인간들>을 <나무들>로 보는 베싸이다의 <장님의 의식>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마가는 강조했던 것이다..

 

[마가복음]의 절정사건                                            

<[마가복음] 8:27~9:1, 비교(마태 16:13~28, 누가 9:18~27)>

 

예수의 제자들은 소경이 눈을 뜬 <베싸이다>에서 갈릴리 지방의 북쪽 산간에 위치한 <가이사리아 빌립보>로 가는 도중이었다. 이 때 예수는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고 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혹은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예수와 오랫동안 같이 지낸 제자들 각자가 예수를 어떻게 보는나는 어려운 질문이다. 마가는 여기서 <초대교회>가 직면한 신앙의 핵심사상인 <그리스도론>을 예수 제자들의 입을 빌어 명확하게 밝혀 신도들의 신앙적 결단을 새롭게 하고자 의도했던 것 같다. 예수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수제자인 베드로는 즉시 서슴치 않고 대답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나타내고 있다. 소경처럼 현실, 즉 로고스인 예수를 올바로 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절정사건>이다.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인정을 받는 <결정적 순간>이다. 그러나 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사태는 갑자기 <가파른 절벽>, 즉 <십자가>를 향하여 달리게 된다. 예수는 그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있는 베드로의 <가볍고 낙관적인 메시아론>이 잘못되었음을 꿰뚫어보고 청천벽력 같은 질책을 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말한다.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으리라(8:31).”

 

고 예수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구할 <그리스도>로서 인간의 모든 권세 잡은 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헤롯 왕과 더 나아가 식민주의자들인 로마병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다윗 왕과 같은 통치자가 되어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는 고의로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대신에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인간의 아들>인 자신은 <역사적 현실>을 떠나서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을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는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아들>이어야 하며, 역사 속에서의 역사적 현실을 개혁해가는 가운데 메시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명백히 밝혔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거대한 억압의 세력들인 로마, 헤롯당, 그리고 거짓의식을 주입하는 종교집단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베드로(초대교회)의 순진한 초자연적 <그리스도론>을 예수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들 거대한 압제자들의 악에 대항하여 싸워 인간의 정체성, 인권, 존엄성, 평등권을 쟁취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인 <초자연적 그리스도>의 힘을 빌려 쉽게 공짜로 얻어보려는 베드로(초대교회)의 안일한 <메시아관>을 예수는 꾸짖었다. 베드로(초대교인들)같은 초자연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평안한 안식을 원하지  고난이 따르는 <역사적 메시아>, 즉 <십자가의 메시아>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마가는 여기서 앞 장에서 다룬 바울의 낭만적인 <영적 그리스도론>을 믿고 있는 초대교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마가는 일부러 9장부터 16장까지 후반부 8장에 걸쳐 길게 예수의 <고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바울의 초자연적이고 낭만적인 <영적 그리스도>를 비판하고 거대한 억압의 기구 속에서 철저하게 <역사적 참여>를 강조하는 <고난의 종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으리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방금 예수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며 예수를 말렸다.

 

예수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고 사람의 편에 섰도다.” (8:33)

 

초대교회 당시 <사탄(Satan)>이란 말은 욕 중에서 가장 가혹한 욕이었다. 거대한 적들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낭만적인 초자연적 <영적 그리스도론>이나 신봉하며 <역사적 고난>을 회피하고 나른한 평안이나 꿈꾸거나, 남의 덕으로 쉽게 구원을 받아 보려는 식의 베드로(초대교회) 같은 낭만적인 안일주의 종교인들이 바로 사탄인 것이다. 이들 안일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안위와 축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의 편>에 선 자들로서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 하고 있다. 거대한 억압의 세력들인 로마와 헤롯당과 거짓의식을 조장하는 <신학적 기업체들(몰트만의 용어)>과 투쟁하며 인간의 정체성, 존엄성, 인권을 쟁취하는 일이 바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야웨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이들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역사적 메시아들>은 왜 예수가 <고난의 종 메시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다. 바울이 받아들인 낭만적인 초자연적 <영적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은 정작 고난이 닥쳐올 때는 쉽게 도망쳐버리게 된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자식>인 예수는 그가 십자가를 진 후 제자들(초대교회)에게 닥쳐올 박해를 미리 내다보며 <역사적 메시아>, <고난의 종 메시아>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Son of Man)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가 8:34~38)

 

<절개 없고 죄 많은> 역사 속에서 <고난의 종 메시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신도들이   절개를 지키며, 그들이 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죄 많은 세상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억압받고 착취받는 백성들의 엑소도스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일이 바로 억눌린 백성들을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길이란 뜻이다. 마가가 여기서 <박해>와 <고난>을 특히 강조한 것은 이 글을 쓰던 당시에 초대교회가 직면한 역사적 상황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바대로 초대교회의 반석이던 베드로가 AD  64년 로마황제 네로의 박해에 의해 처형되었다면, 마가는 AD 65년 경 예수의 생애에 관한 자료를 모아 초대교인들에게 이미 닥쳐왔고 앞으로도 계속 닥쳐올 박해를 염두에 두고 [마가복음]을 편집했기 때문에 <고난의 종 그리스도론>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 당시 밑바닥층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유대인 전쟁(The Jewish War AD 67~70)>을 일으켜 치열하게 로마제국에 저항하였다. 로마 장군 타이터스(Titus)의 지휘 아래 잘 훈련된 로마병들은 맨주먹의 유대인 항거자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했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초대 기독교인들이라고 박해를 피할 길이 없었다. 이 전쟁에서 약 10만의 유대인 해방군들이 대량학살되었다고 역사가 요세퍼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혁명적인 역사적 상황을 미리 내다본 마가는 초대교회가 <메시아>로 믿고 있던 예수마저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역사적 고난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아들>로 로마제국과 지배층의 박해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처절하게 죽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고난의 종 메시아>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과 초대교인들도 십자가를 진 예수처럼 박해와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고 마가는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서]의 목적은 예수의 <고난의 이야기>를 강조함으로써 초대교인들이 당면할 박해를 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초대교회가 오랫동안 믿어온 바울이 주장한 낭만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적 그리스도론>을 버리고 <고난의 종 그리스도론>을 바로 이해하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고 마가는 생각했다.

 

골고다의 십자가와 빈 무덤

 

예수의 제자들은 <가이사리아 빌립보 사건>이 있은 후 그곳을 떠나 갈릴리지방을 통과하여(9:30) 유대지역과 요단강 건너편 지역으로 들어가(10:1) 점차 고난의 현장인 골고다가 있는 예루살렘성을 향하여 접근해간다. 마가는 장소가 옮겨져감에 따라 그 곳에 <고난의 예고>를 기록하고 있다(8:31, 9:31, 10:33). 이것은 마가의 의도적인 편집에 의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호흡은 가빠온다. 세 번째 고난의 예고에서 예수는 그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힌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로마인, 빌라도를 가리킴)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직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10:33~34)

 

이러한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수제자들 중 베드로를 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오해하고 예수가 <영광의 자리(10:37)>에 앉으실 때에, 즉 다윗 왕과 같은 임금이 되시거든 하나는 우의정, 하나는 좌의정을 삼아달라고 부탁했다. 인간들(men)을 나무들(trees)로 보던 <베싸이다의 소경>처럼 제자들은 끝까지 <고난의 종 메시아>인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첨하는 간청을 엿들은 제자들은 화가 나서 서로 자리 다툼을 하며 싸웠다. 예수는 몽매무지한 제자들을 앞에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너희도 알다싶이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10:42~45)

 

 

마가는 오해하기 쉬운 <하나님의 아들>이나 <그리스도>라는 칭호 대신에 <인자(Son of Man)>라는 칭호를 쓰면서 <고난의 종>을 강조했다. 예수는 마침내 의인들을 무수하게 잡아 죽인 죄악의 도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시민들도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해 오해를 했다. 그들은 <인간의 아들>인 <고난의 종> 예수를 향하여 환성을 지르며 환영하여 맞기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 (11:10)

 

라고 외쳐댔다. 이 낙관적이던 제자들과 시민들의 기대에 어긋나게도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헤롯당, 그리고 로마제국의 야합에 의해 처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고 말았다. 예수가 예견한 대로 위기에 처하자 베드로(초대교회)는 세 번이나 그의 스승을 부인했고, 가롯 유다는 스승을 팔았다. 십자가 사건 후 제자들과 시민들은 벌벌떨며 모두 자기집으로 도망쳐버렸다.

 

마가는 16장 1절에서 8절까지 예수의 <빈 무덤>을 다루고 복음서를 끝내고 있다 16장 9절에서 20절까지는 여러 고대사본에서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활이야기>는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면 <빈 무덤>은 음부, 즉 지옥의 가장 밑바닥이 아닐까? 그의 시체마저 <우상의 대상>이 되지 못하도록 그의 무덤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옮기도록 예수 자신이 유언한 것은 아닐까?

 

AD 285~295년 사이에 태어나 이집트의 나일강변에 많은 수도원을 짓고 이집트 수도원의 창시자가 된 <성 아바 파촘>은 그가 죽기 전에 그의 수제자에게 부탁하여 그의 시체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릴 것을 부탁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시체를 숭배할 지도 모를 신도들을 염려해서였다. 예수의 <빈 무덤>도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부활의 아침

 

십자가, 즉 고난의 생애와 <빈 무덤>, 즉 마이너스의 인생을 산 예수를 이해하는 데는 예수의 제자들 자신들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수의 <십자가>와 <빈 무덤>을 체험한 제자들은 다시 옛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슴 속에 새겨진 <고난의 종 그리스도>인 예수는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제자들 개인 각자가 <새로운 인간>으로 변해갔으며 가족이 변하고 마을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난의 종 그리스도>인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곳에 불이 붙었다. 이들은 이때 비로서 예수가 <가이사리아 빌립보>에서 한 다음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마가 9:1)

 

예수 자신은 역사, 혹은 신이 그에게 맡긴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있을 때 그 자신 속에 이미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체험했으며 그들과 만나는 사람마다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되고 그와 만나는 가족, 지역사회가 변하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해방운동>, 더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분들은 이미 자신 속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가 속해 있는 가정과 사회가 변화되는 것을 체험한다. 근로대중이 주인인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지상에 이루어져가는 것을 체험한다.

 

바울이 받아들인 낭만적인 초자연적 <영적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은 역사 속에서의 고난을 무시하고 개인의 안락과 내세의 복 만을 구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낭만적인 <영적 메시아>를 믿으면 믿을수록 그러한 신도들은 비인간화되어가고 비역사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역사 속에서 현실을 바꾸는 일 대신에 기껏해야 신비주의적인 도피주의에 빠져버리게 되거나 심리적인 안위나 누리는 안일주의에 머물게 되거나, 혹은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며 다짐이나 하는 수동적 인간이 되어버린다. <역사적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 구원을 기다리는 이러한 수동적 신도들과 십자가를 지고 처참하게 죽은 <고난의 종>, 예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십자가>란 단지 지극히 추상적인 <내면적 죄>의 대가를 지불한 표징으로 여겨질 뿐, 그들 자신들이 질 십자가는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수동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기복신앙자들은 험한 십자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다 지고 나약한 인간인 자신은 예수의 십자가의 대가로 공짜로 구원과 축복이나 받자는 심산이다. 이러한 신도들에게는 내세의 극락은 고사하고 현존하는 지상천국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의 종 그리스도론

 

근로민중들이 주인으로 등장한 <자주의 시대>에 있어서 절실히 요구되는 그리스도는 바울이 만들어 낸 낭만적인 초자연적 <영적 그리스도>도 아니며, 마가가 강조한 <고난의 종 그리스도>도 아니라,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혁명의 종 그리스도>를 나는 제창한다. 이제는 더이상 하나님의 아들인 초자연적 <영적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류를 구원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 없으며, 또한 더 이상 십자가나 지고 현 로마와 그 추종자들에게  계속 당하고 죽을 수 만은 없다. 인류의 적들의 거대한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적의 힘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고, 그들에게 변혁의식을 고취하며, 변혁세력을 조직화 할 <혁명의 종 메시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인류를 구원할 <혁명의 종 그리스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자주의 시대이다.

 

 예수가 만약 자신과 같은 사상의식을 가진 동지가 1,000명만 있었다면 단지 <고난의 종>으로 허무하게 십자가에 몸을 던지고 말았겠는가? 예수는 너무나 외로웠다. 아무도, 심지어 그의 내적 그룹인 12제자마저도 그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변혁의식을 지닌 개인이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고난의 종 메시아>가 되어 자신을 십자가에 던져 표본이 되는 것 뿐이다. 그러나 <혁명의 종 메시아>는 부단하게 동지를 만나야 하고 외롭지 않아야 한다. <마카비아 형제들>처럼 민중의 뜻을 잡아 그들의 에너지를 변혁에 동원하여 적들을 섬멸해야 한다. <혁명의 종 메시아>는 무모한 자살행위를 피하여야 하며 무모하게 십자가에 몸을 던져서도 안 된다. <혁명의 종 메시아>는 2천 년 동안 낭만적인 초자연적 <영적 그도리스도>와 <고난의 종 그리스도>가 이루지 못한 지상의 낙원을 기필코 이룩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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