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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토론연재17]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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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17 14:5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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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연재17]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편집국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들의 모임에서 자유토론이 있었다. 토론은 지금까지 토론한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이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주체사상의 이해, 즉 <주체사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는 내용이었다. 이 모임에는 회원을 비롯해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이 참석하였다. 토론에서 논의된 것을 간추려 소개한다. 회원의 질문에 김현환 소장이 대답한 것을 편의상 질문과 대답으로 표기한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토론

 

 

질문: 앞의 토론에서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그에 기초하여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해설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이제 <사회>와 <역사>에 대한 주체사상의 이해, 즉 <주체사관>을 설명해 주시지요.

 

대답: <사회>와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철학의 <근본문제>에 기초한 올바른 <철학적 원리>를 가져야 합니다. <철학의 근본문제>는 <세계관>을 세우는 데서 선차적으로 풀어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출발적인 문제이지요. 철학사상에는 세계란 무엇이고 세계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대하여야 하는가를 비롯하여 풀어야 할 문제들이 수없이 많지요. <철학의 근본문제>는 철학에서 풀어야 할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들의 근본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출발적 문제라는 점을 앞의 토론에서 이미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어떤 문제를 근본문제로 제기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 가에 따라 철학의 근본원리와 그에 기초한 철학의 전반적 체계와 내용이 달라지게 됩니다.

 

앞의 토론에서 강조했듯이 마르크스주의는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의 상호관계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보고 물질의 일차성, 존재의 일차성을 논증한데 기초하여 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질의 운동>에 의하여 변화발전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한편, 주체철학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문제가 마르크스주의에 의하여 유물론적으로 해결된 조건에서 <사람과 세계의 관계문제>, <세계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의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새롭게 제기하고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철학적 원리>를 논증하였다는 것을 앞의 토론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이 철학의 근본문제와 철학적 원리는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데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됩니다.

 

간단히 말하여 <사회>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공동체>를 말합니다. <사회>가 하나의 <물질적 존재>라면 <역사>는 그것의 <운동>이지요. <사회의 운동>이 <역사>이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를 붙여서 <사회역사>라 부릅니다. 요약하여, 주체사상의 <사회역사 원리>란 앞에서 토론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를 <사회역사>에 구현하여 체계화한 <사회역사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그러면 우선 주체사상에서는 <사회>와 <사회의 구성요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대답: 마르크스는 그의 논문 [철학의 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철학의 근본문제, 즉 물질과 의식, 존재와 사유에 관한 문제를 사회역사에 확장하면 결국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에 관한 문제로 되고 이 문제를 유물론적으로 해결하면 사회적 존재가 일차적이고 사회적 의식이 이차적이다.”

 

위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으로 구분하고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에 대해서 <일차적>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여기로부터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의 반영이며 <사회적 존재>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요.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의 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사회가 <생산력>, <생산관계>, <자연지리적 조건>,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회란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에게 <객관적 조건>을 이루는 <사회적 존재>란 바로 생산력, 생산관계, 자연지리적 조건,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마르크스주의는 보았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에 대한 이해는 사회를 <물직적 체계>로 보지 않고 <관념>, <정신>, <신>이 지배하는 <관념의 영역>으로만 보는 <관념론적 사회관>을 극복하는 데서는 중요한 기여를 하였지요. 마르크스주의는 오래 동안 기독교의 관념론적인 사회관인 <구속사관>과 투쟁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요소>를 보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는 제한성이 있지요. 물론 사회를 자연과의 <공통성의 면>에서만 보면 사회는 <물질적인 존재>가 틀림 없지요.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가 앞에서 지적한 요소들을 <사회적 존재>의 구성요소들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자연과의 사이에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연과 질적으로 다른 특성도 가지고 있지요. 따라서 사회를 자연과의 공통성의 면에서 파악한 기초위에서 일보 전진하여 사회를 자연과의 <차이성의 면>에서 파악하는 것이 사회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인식하는 방법으로 됩니다. 즉 자연과 사회의 <물질적 공통성>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자연과 사회의 <차이성>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 유물론적 기초위에서 사회를 보다 심오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연과 사회의 물질적 공통성을 부인하는 <관념론적 사회관>은 사회를 <물질적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비과학적입니다. 기독교의 <구속사관>이 여기에 속하지요. 그러나 자연과 사회의 <물질적 공통성>을 시인하는 조건에서 자연과 사회의 <근본적 차이성>에 기초하여 사회를 파악하는 것이 <사회>에 대한 인식에서 진보로 됩니다. 이것은 인식 발전의 필연적 요구로부터 사회를 자연과의 차이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를 생산력, 생산관계, 자연지리적 조건, 인구로 보는 것이 과연 올바른 관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회란 쉽게 말하여 <사람들의 집단, 공동체>라는 것을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요. <사람>을 떼어 놓고 사회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회의 중요한 기본 구성요소인데도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구성 요소인 생산력, 생산관계, 자연지리적 조건, 인구에는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우선, <생산력>을 살펴 보면 생산력에는 단지 인간의 <노동력>만이 포함됩니다, 이 노동력 자체는 인간 자체가 될 수 없지요. <노동력>은 단지 인간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즉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우선 일정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이고, 다음에 이러한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의 하나인 <노동력>을 포함한 <생산력>을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은 단지 인간이 일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인간의 한 면만이 그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생산력을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 다음으로, <생산관계>를 보면, 생산관계란 생산과정에 참가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생산관계는 단지 관계이지 그 자체가 사람은 아니지요. <물질적 실체>인 사람들이 생산과정에서 맺는 관계가 생산관계이니까 생산관계 자체가 인간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역시 자명합니다.

 

또한, <인구>에 대해서 말하면, 인구란 사람들의 수효, 인구 밀도를 말하지요.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일정한 사람들의 수, 즉 일정한 인구 밀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구가 사회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간주되는 근거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인구도 역시 인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 밀도, 사람들의 숫자를 말하지요.

 

따라서 사회의 구성요소를 구분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으로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인 <사람>을 등장시킬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제한성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구성요소를 올바로 구분해 보자면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요.

 

이처럼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관>의 <공적>과 <제한성>을 올바로 분석한데 기초하여 사회의 구성요소를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사람>을 중심에 놓고 보아야 한다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습나다. 앞의 토론에서 언급했듯이, 주체사상이 내세운 철학의 근본문제 자체가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이니까 그것을 사회현상에 구체화 하면 <사람>과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로 됩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람>과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를 고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주체사상은 <사람>과 사람에 의해서 창조되고 개변되는 <사회적 재부>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를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한편으로 되고,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조건>을 이루는 다른 한편으로 됩니다. 여기서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 즉 사회적 조건을 창조하고 개변하는 것은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사람>과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는 결코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과 같은 일차성, 이차성, 독립성, 의존성과 같은 관계가 아니지요. 그것은 <창조자>와 <창조물>과의 관계이지요. 따라서 주체사상의 사회관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에 대하여 일차적이라는, 즉 사회적 존재의 우선성의 명제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의 관계는 일차성과 이차성, 독립성과 의존성의 관계이지만, <사람>과 <사회적 조건>과의 관계는 <창조자>와 <창조물>과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주체사상의 사회관이 존재의 우선성을 무시하는 관념론적 이론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지요.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관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그 <제한성>도 올바로 보고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에 대하여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러기 위하여 사회의 구성요소를 고찰하는 데서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사람은 <객관적인 존재>인 동시에 <자주성과 창조성을 지닌 존재>, 즉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존재>이지요.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를 창조할 수 있고 자기의 요구에 맞게 그것들을 개변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재부>, 즉 물질적, 문화적 수단들은 다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객관화 된 것이지요.

 

동물은 자기의 생존 과정에서 얻은 경험들을 생물학적인 <유전의 방법>으로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발전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과 성과들을 자신의 육체에 체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자기의 육체 밖에 <객관화시켜> 놓을 수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은 <노동수단> 같은 <물질적 재부>와 과학, 예술 같은 <문화적 재부>, 즉 육체 밖에 객관화 된 물질적, 문화적 재부들을 만들어 내어  그것들을 대를 이어가면서 계속 이용할 수가 있지요. 바로 여기에 사람의 우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재부>란 사람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객관화 된 것입니다.

 

<사회관계>도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지만 그것 역시 사람이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살기 위하여 사람 자신이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에는 인간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표현되지요. 그리고 이 사회적 관계를 개변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지요. 그래서 주체사상은 인간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그가 지니고 있는 자주성과 창조성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조건>을 이루고 있는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는 인간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복무하는 요소로 됩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사회를 <사회관계의 총제>로 본 마르크스주의의 일면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사회를 <사람들의 유기적인 결합체>, 즉 사회를 <사람을 주인으로 하고 사람들과 사회적 재부가 사회적 관계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전일체>로 보는 주체사상의 이해가 <사회의 본질>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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