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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신학의 해방 20] 내가 본 구약성경(12) (크리스마스) 이전에 (하누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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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08 17: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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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20]

내가 본 구약성경(12)

 

 

(크리스마스) 이전에 (하누카)가 있었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페르시아 왕 사이러스(Cyrus, 550~530 BC)는 바벨론을 점령하자(BC 539년) 그다음 해인 BC 538년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페르시아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고 느부갓네살 왕이 압수한 금은 다시 돌려받도록 허락했다. 이 칙령은 두 개의 언어, 즉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로 된 원본은 유대 역사가에 의해 신학적으로 손질되어 에즈라 1:24에 기록되어 있고, 아람어 원본은 에즈라 6:3~5에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왕 사이러스는 여호야긴 왕의 아들 세스바쌀을 대표자로 세워 유대인 포로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다. 사이러스는 종교의 자유뿐 아니라 다윗 후손인 세스바쌀을 대표자로 임명함으로써 정치적인 자유마저 어는 정도 인정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발전은 많은 유대인에게 희망의 꿈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완전히 자주성이 있는 독립국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페르시아 당국은 아람어(시리아인들의 언어)를 국제어로 사용케 함으로 유대인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는 차차 문자나 기록하는 고어로 변해갔고, 구어로는 아람어가 통용되었다. 예수 시대에도 아람어가 통용되어 예수도 아람어로 그의 뜻을 전파했다. 예수 시대 이전에도 이미 히브리 성경은 아람어를 쓰는 보통 유대인들이 읽기 쉽도록 대충 아람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일본이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을 썼듯이 사이러스도 그와 비슷한 문화정책을 썼을 뿐 위성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국가가 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유다 땅에 다시 돌아온 유대인들은 여호야긴의 후손인 <스루바벨>을 중심으로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된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BC 520-515) 느혜미아(Nehemiah)에 의해 헐렸던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고, 에즈라(Ezra)에 의해 <모세의 언약>이 새롭게 되어 유대교(Judaism)가 마침내 정립되었다. 그러나 BC 515년 성전이 완성되고 유대인 국가가 다시 세워질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유대의 총독이었던 여호야긴의 후손 수루바벨이 신비스럽게도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추측컨데 그를 중심으로한 <메시아 운동(Messianic Movement)>을 혁명의 징조로 보고 페르시아제국이 두려워 하여 비밀리에 제거시켜 버린 것 같다. 사실상 이 당시 활동한 학개(Haggi) 선지자서에 의하면 스루바벨은 다윗혈통의 메시아로 선포되어 있었다.

학개서 2:20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루바벨에게 이렇게 일러라.

‘내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리라. 또 뭇 나라 옥좌를 뒤엎고

뭇 민족의 힘을 꺾으리라. 병거대를 뒤집어엎고

기마대는 저희끼리 싸우다가 서로 칼에 맞아 쓰러지게 하리라.

그날이 오면 만군의 야웨가 말한다….

스루바벨아, 내가 너를 들어 올리리라. 너는 나의 종이다.

만군의 야웨가 말한다. 내가 너를 뽑았으니 너는 옥새처럼 소중하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스루바벨을 중심으로 다윗 국가를 다시 세울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혁명적인 <메시아 운동>을 두려워한 그 당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Darius I, BC 522~486)는 귀신도 모르게 스루바벨을 제거해버린 것 같다. 하여튼 그 후로는 페르시아제국이 존속하는 동안은 다윗 국가를 재건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을 대항하여 정치적 독립국을 세울 희망이 차차 실현성이 없게 되자 유대인들은 그들의 소망을 유대종교 속에 표현하게 되었다. 민족전통인 <야웨신앙>을 보존하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다윗 국가가 재건되리라고 그들은 믿었다. 스루바벨이 사라진 후 <성전중심의 공동체>는 대제사장 여수아(Joshua)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인도를 받는다. 스루바벨에 의해 완성된 성전은 수수하지만 바벨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인들의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신약시대에 로마인들에 의해 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AD 70), 이스라엘인들에게 정신적 양식을 제공한 곳이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제물을 바치며 예배를 드렸다. BC 515년 성전이 건축된 이래 3세대가 지난 후 BC 445년에 느혜미아가 유다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느혜미아의 역할

 

성전이 건축된 해인 BC 515년에서 느혜미아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BC 445년 사이는 페르시아 문화가 극도로 발달했던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려는 주위의 강력한 압력을 의식한 느혜미아는 유대인들을 면밀하게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느혜미아는 주위 이방인들과의 <혼합결혼>을 반대하고 유대인 종교인 <야웨신앙>만을 강조하는 <엄격한 배타주의 정책>을 시도했다.

 

느혜미아는 유대인 공동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자격표준을 내세웠다. 그 첫째가 <출생>이었다. 느혜미아는 예루살렘 성벽을 구축한 후 혈통가계(genealogy)대로 모든 주민을 등록하게 했다(느혜미아 7:5~69). 그리고 신명기법에 의하여(신명기 23:3 이하) 엄격하게 이방인들과의 <혼합결혼>을 반대했다.

 

유대인이 되는 두 번째 자격 기준은 토라(Torah, 오경)와 성전을 충실하게 떠받드는 것이었다. 느혜미아는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보도록 했고 십일조를 내어 성전 직원들을 돌보게 했다. 이 두 가지, 즉 <족보>와 <종교적 헌신>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구별짓는 표준이 되었다. 느혜미아는 협소한 <배타적 유대교>를 고의로 강조함으로써 페르시아 문화와의 동화를 막고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하게 했다.

 

유대교의 아버지 에스라의 활동

 

느혜미아가 총독으로서 두 번째 집무를 시작하던 BC 428년에 학자이면서 사제인 에스라(Ezra)가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일부 학자들은 느혜미아보다 앞서 BC 458년에 에스라가 돌아온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 받은 모세의 법을 통달한 선비였다(에스라 7:6). 그는 바벨론에서 <모세의 법전(The Book of the Law of Moses)>을 가지고 왔다(느혜미아서 8:1). 에스라는 율법의 지시에 따라(레위기 23:42~43)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을 지키며 민족전통을 새롭게 하였다. 오경(Pentateuch)은 야웨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직접 모세에게 전달한 책이라는 권위가 부여되고 절대화된 것은 바로 이 에스라에 의해서였다. 에스라는 오경의 내용을 <모세전통>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책의 규율에 따라 살 것을 강조했다.

 

사실상 오경은 모세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야웨작가>, <엘로힘작가>, <신명기역사가> 그리고 <사제작가들>에 의하여 여러 세기를 걸쳐 창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에스라는 엄격하게 율법(오경)을 준수하는 법률주의(legalism)를 강조했는데 이것이 바벨론 포로 이후의 유대교의 특징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엄격한 법률주의적 유대교는 차차 형식주의에 흐르게 되고 <성전예배 형식>은 깊은 참회, 성실성, 기쁨, 등이 빠진 단지 텅 빈 예식뿐으로 흘렀다. 이와 같은 형식주의적 유대교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거만한 자존심과 독선을 주었지만 대부분 서민에겐 자학과 운명에 대한 비애만 안겨주었다. 느혜미아와 에스라가 유대민족의 보존을 위하여 실시한 유대교의 <배타주의>가 차차 <혈통계보>나 <할례>, <안식일법>, 등을 지키기는 일로 <선민의식>을 갖게 하는 그릇된 형식주의를 낳고 말았다.

 

율법주의적 유대교는 인간의 <창조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에 <예언 정신>은 질식되어 차차 예언자들이 거의 끊기고 말았다. 제삼 이사야, 학개, 스가리야, 오바디아, 말라기, 그리고 요엘 같은 소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위대한 대선지자들의 혼의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때는 거룩한 공동체의 기초가 바로 율법(Law)이었으니까 그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인물들은 율법이나 연구하여 그것을 해설하고 가르치는 에스라 같은 서기들이었다. 따라서 8세기와 7세기의 유명한 예언자들이 시대의 사건들을 해설하고 역사의 나갈 방향을 제시하며 왕들의 정책을 비판한 반면, 율법주의의 유대교 시대에는 예언자들이 모두 유대교 교회 성원으로서 교회예배에 봉사하는 것이 예언자의 주된 기능이었다. 이들 사제 예언자들은 까다로운 예배형식을 배우는 데 시간을 허비했고 예배에 쓰는 시편들을 암송하는데 허다한 시간을 낭비해야만 했다.

 

이들은 지금의 무수한 교회 성직자들처럼 역사적 사건들에 관해서는 관심을 쓰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나치 치하에서 독일의 폭군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순교한 본 헤퍼 목사는 교회 자체의 문제와 그 부흥에나 신경을 쓰는 목회 일보다 <역사적 사건>을 예언하는 예언자가 되고 싶다고 감옥에서 고백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예수가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은 망각하고 율법만 강조하던 바리새 종교인들을 비판한 것도 유대교의 형식주의 때문이었다. 그러한 엄격한 율법주의 속에서도 예언활동은 계속되었으니 배타적인 형식주의에 반기를 든 무명의 작가가 룻기서(Book of Ruth)를 써서 다윗 왕마저도 모압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혈통 가계>를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유대교를 비판했다. 에스라-느혜미아 이후 예언활동은 새로운 표현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에 크게 영향을 미친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이었다.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

 

묵시란 그리스말로 <apokaluptein>에서 유래된 것으로 <들어내다, 제시하다>는 뜻이다. 이 묵시문학에는 이상한 영상들, 상징들, 그리고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엄격한 배타주의적인 율법주의와 그리스, 로마제국의 박해에 대비하기 위한 생존방식의 문학 형태였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대표적인 묵시문학은 <다니엘서>인데 이 <다니엘서>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페르시아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하고(BC 336),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13년간 계속되다가 BC 323년에 알렉산더가 갑자기 33세로 요절하자 그 거대한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서 동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는 실루서스 장군이 차지하고, 이집트는 프톨레미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수도는 각각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였다. 팔레스타인은 처음에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에 지배를 받다가(BC 323~203년경), 나중에는 시리아의 실루서스 왕국에 의해 통치된다 (BC 200~198).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은 군사적인 정복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 문화>를 전 세계에 전하여 <한 세계(one world)를 이룩할 꿈을 가졌다. 그가 요절한 후에도 그의 장군들은 세계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려던 알렉산더의 정책을 충실히 이행했다. 근동 어느 곳에서나 지적인 면, 스포츠, 예술적인 면 구석구석까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특히 그리스어가 세계어로 통용되도록 강요되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인 헬레니즘(그리스의 옛 이름 Hellas에서 나온 말)을 그들의 유대교 신앙에 큰 도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이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의 통치 아래에 있는 동안은 유대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요되지 않았다. 많은 상류층 유대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헬레니즘과의 큰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환영하였다. 프톨레미 2세(BC 285~246)때에는 유대인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을 셉튜아진트(Septuagint)라고 부른다. 그러나 헬레니즘에 익숙지 않은,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출신 <하시딤 파>는 그들의 조상들이 믿던 유대교 신앙에 매달려 헬레니즘을 받아들여 그리스화 되어가는 지식층을 증오하였다. 나중 이 하시딤 파들은 <바리새인파>로 된다. 이들 하시딤 파들은 헬레니즘보다 민족전통이 담긴 토라를 더 숭상하고 성전예배에 매달렸다.

 

그러던 차에 BC 198년 시리아 왕 앤디오커스 3세(BC 223~187)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팔레스타인은 결국 시리아의 지배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앤디오커스 3세는 열렬한 헬레니즘의 숭상자였다. 그의 친 헬레니즘 정책은 앤디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앤대오커스 4세(BC 175~163)에 의해 계승되어 광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그는 자신을 이 세상에 현시된 신(Zeus)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세상에 현시된 신인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이 제우스 신에게 가장 잘 예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뜩이나 헬레니즘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대인 서민 대중들은 그들의 <유일신 야웨>에 도전하는 자칭 신인 예피파네스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에피파네스는 이집트와의 전쟁 때 낭비한 돈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광신적 헬레니스트인 에피파네스는 유대인 종교를 파괴하고 헬레니즘을 완성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 어머니 중 그 자식들에게 할례를 주면 사형에 처하고, 토라의 복사판을 모두 불태우고,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엄벌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유대교를 뿌리 뽑기 위하여 그 자신이 직접 BC 168년 예루살렘에 그의 부대를 끌고 들어왔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를 드리는 제단 위에다 제우스 신상을 걸어놓았으며,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게 했다(다니엘 9:27, 11:31, 12:11). 여기저기 제우스 신전을 짓게 했고 제우스에게 돼지 제물을 드리게 하고 돼지고기를 먹게 했다. 에피파네스 군대들은 칙령이 충실히 이행되는지 감시했다. 이런 공포시대에 대부분 유대인은 왕의 명령에 복종했으나 극소수는 죽음을 내놓고 그들의 전통신앙을 지켰으며 혹자는 숨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산간마을에 사는 시골 사제인 <마타디아스>는 제우스에게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고 감시하던 시리아 병사뿐 아니라 제사 지내러 오던 유대인까지 죽여버리고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수도 적고 무기도 적은 그들은 게릴라 전술로 시리아군사에 맞섰다. BC 166년 마타디아스가 죽게 되자 그의 맏아들 유다스가 지휘권을 맡게 되었는데 유다스는 전술 전략이 하도 뛰어나 시리아병사를 마치로 내려치듯 강하게 물리쳤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라는 의미를 지닌 말인 <마카비어스(Maccabeus)>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시리아 군대뿐 아니라 헬레니즘에 동화되어 민족을 파는 자들도 동시에 제거해버렸다. 유다스는 마침내 앤디오커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습격하고 평화조약을 요구했다. 그는 마침내 BC 165년 12월 25일에 성전제단을 다시 건축하고 유대인의 전통적 예배를 보며 잔치를 베풀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크리스마스 절기에 지내는 <하누카 절기(Hanukkah Feast)>, 즉 <헌당식 절기>, 혹은 <빛의 잔치(Feast of Lights)>이다. 마침 로마가 동양의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는 틈을 타서 이 마카비아 형제들 유다스, 요나단 그리고 시몬은 로마의 폼페이(Pompey)가 BC 63년에 예루살렘을 장악할 때까지 거의 1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예수의 탄생 날자(크리스마스)도 결국 (하누카)에 맞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다.

 

다니엘의 묵시

 

이 <마카비아 전쟁>이 발발한 직후 무명의 하시딤(Hasidim) 회원에 의해 [다니엘서]가 기록되었다. 그는 헬라식 생활방식에 반기를 들고 유대인들에게 강요되는 이방신의 강제신앙을 반대했다. 그가 다니엘서를 쓴 목적은 시리아 황제에 의해 강요된 제우스 예배로 멸망 직전에 있던 그들의 <전통신앙>인 <야웨신앙>을 불러일으켜 박해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보존할 것을 당부하는 일이었다. 역사의 진로는 야웨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신하도록 해주며 백성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백성들이 악한 왕의 손에 의해 역사가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의 손에 의해 통치된다고 믿게 되면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다니엘서]는 이와 같은 암담한 역사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인 <마카비아 혁명신앙>을 반영한 것이었다. 다니엘이 자신을 가장하고 책 내용을 숨기기 위하여 과거 바벨론 포로시기에 기록된 것처럼 고의로 꾸몄지만, 실상은 마카비아 혁명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BC 167). 만약 다니엘서가 책 서두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아킴 왕 제3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때 써진 것이라면 수 세기 후에 걸친 미래역사를 미리 내다본 것으로 된다. 이 무명의 작가는 현재 그 시대가 처한 역사적 현실을 과거의 역사적 이야기로 꾸며내어 암담한 역사가 끝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종말의 때>가 속히 임하기를 기다렸다. 적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비밀코드를 써서 그는 이미 오래전에 발생한 이야기와 영상 속에서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교묘하게 묘사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은 마카비아 혁명가들이 읽을 때는 쉽게 시리아 황제 <에피파네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고 다이엘 세 친구는 바로 마카비아 형제들 유다스, 요나단, 시몬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다니엘서 3:17~18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 메삭, 사드락, 그리고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대답한즉슨,

 

“저희는 임금께서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해주실 힘이 있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넣어도 저희를 거기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을 섬기거나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신상 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은 마카비안 혁명시대에 읽는 독자들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또한, 다니엘이 2:31~36에 나오는 사람의 형상 중 금머리는 바벨론 왕국을, 은으로 된 가슴과 두 팔은 메다아 왕국을, 구리로 된 배와 두 넓적다리는 페르시아 왕국을, 쇠로 된 정강이는 알렉산더 왕국을, 그리고 쇠와 흙으로 된 발은 시리아와 이집트로 갈라진 두 헬레니즘의 왕국을 가리킨다는 것을 그 당시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왕국들은 다니엘이 7장~12장에서 본 영상처럼 악을 누적하다가 모두 멸망했고 에피파네스(작은 뿔)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르게 되어 역사는 <종말의 때>를 향하여 줄달음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작은 뿔이 악을 발하다가 죽으면 천상에서 구름을 타고 <인간의 아들(Son of Man)>이 나타나는데 그가 주권과 영화와 나라를 떠맡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다니엘은 예언한다(7:13~14).

 

이 <인간의 아들>은 신약시대에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메시아의 대용어로 사용되었다(마가복음 8:31). 그러나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천상의 인물은 언약의 공동체(Covenant Community)를 가리킨다. 악한 황제이며 신 제우스인 에피파네스에게 절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즉 <언약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만이

 

“난을 면할 것입니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입니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다니엘서 12:1~3)

 

이와 같은 묵시문학의 큰 기여 중의 하나인 미래의 삶에 대한 교리는 늦게 생겨났지만, 그리스인들의 <영혼불멸설>과는 달리 이스라엘인들의 역사 감각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인들의 미래에 관한 관념에 의하면 개인은 한 뜻, 한 신앙으로 뭉친 <언약의 공동체>에 참여하지 않고는 삶의 충만함을 체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의 미래란 <이 세상적>이지 결코 <저 세상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고난을 반드시 역사 속에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동양의 신비주의와는 달리 유대인들의 미래관은 결코 이 세상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전 역사적 드라마가 역사의 신 야웨, 해방자인 야웨의 계획에 따라 운영된다는 확신 속에 현재의 고난들을 직면할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의 <부활의 개념>은 해방의 신 야웨가 악의 세력들을 모두 제압하고 승리하는 역사적 드라마 완성의 때, 즉 종말의 때에 온 백성과 함께 이 세상 고난을 이기고 모든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부활은 바로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그리스, 그리고 로마로부터의 해방, 즉 엑소도스를 이루기 위하여 이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며 투쟁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 이스라엘인은 개인의 부활이란 전 공동체, 즉 전 민족의 부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무수한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언약의 전통인 <모세전통>, 언약의 신앙인 <야웨신앙>, <언약의 사랑>, 그리고 <언약의 공동체>인 <민족>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느혜미아, 에스라, 그리고 무명의 선지자들이 지나치게 <유다주의>를 강조한 것은 무리는 있었지만, 강대국들의 문화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강대국들은 한결같이 <세계주의>, 혹은 <우주론>을 내세우며 고유한 약소국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파괴하고 강대국들의 사상과 이념을 강제로 혹은 유화정책으로 주입해왔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의 무수한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도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언어와 민족전통을 고수하고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요사이 일부 코리안들은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에 빠져 교회에서마저 <개인 구원>을 외쳐대고 있으며, 일부 코리안들은 마치 자신들이 <세계인>이나 된 것처럼 <세계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미 제국주의가 <세계주의>를 제창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다시 코리아 반도에서 전쟁을 계획하고 있는데 어찌 개인 구원과 세계주의를 외쳐댈 수 있는지 한심스럽다. <마카비아 혁명>이 절실한 때이다.

 

<내가 본 구약성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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