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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토론연재15] 예수는 과연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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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7-21 16:5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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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연재15] 예수는 과연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나?

 

 

편집국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들의 모임에서 자유토론이 있었다. 토론은 예수는 과연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는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는 내용이었다. 이 모임에는 회원을 비롯해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이 참석하였다. 토론에서 논의된 것을 간추려 소개한다. 회원의 질문에 김현환 소장이 대답한 것을 편의상 질문과 대답으로 표기한다.]

 


 

질문: 평소에 품고 있던 질문을 꼭 하고 싶었는데 결국 기회가 왔네요. 최근에 쓰신 [두 갈래의 메시아상]을 읽어보고 용기를 내어 질문을 해봅니다. 예수는 정말로 동정녀(처녀)에게서 탄생했나요?

 

김현환: 이스라엘인들은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기름을 부었다는 뜻), 즉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요. 그러면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해야 한다고 믿었을까요? 예수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초대교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처럼 완전무결해야 하니까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죄많은 <인간의 씨>를 받고 태어나면 안된다고 본 것이지요. 이 당시는 <남성위주>의 사회이니까 여자의 <유전>은 중요시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단지 몸만 빌려 이세상에 탄생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유전 받지 않게 되니까요.   

 

근대 <개신교 신학의 아버지>, 혹은  <자유주의 신학>의 시조>라고 불리고 있는 독일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Schleiermacher 1768년- 1834년)는 이 <동정녀 탄생>이 결국에는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자의 몸을 빌리면 죄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데 현대에 와서는 자식의 유전에 남자의 유전인자 뿐 아니라 여자의 유전인자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그리스도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녀탄생>을 생각해낸 것이지만 그들의 <죄의 유전>에 대한 생각이 너무 일방적인 남성위주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그는 잘 지적한 것이지요. <처녀탄생>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을 해석하는데도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판하고 나섰지요. 

 

이사야서  7:14에 나타난 그 유명한 임마누엘<Immanuel(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에 대한 예언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졌다고 믿게 되었고, 어떤 그룹에서는 7:14에 나오는 문구는 <처녀탄생>을 나타내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마태복음 1:23에 기록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일부 사람들은 믿었지요. 그러나 사실상 이사야가 한 예언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즉 시리아군이 BC 735년에 예루살렘을 쳐들어가 다윗왕조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장차 태어날 <어린 아이>는 약한 왕 아하즈와 같지 않고 나라를 재건하여 다윗왕조를 계승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7:14에 나타난 여인은 <아하즈의 아내 왕비>를 말하는 것이며 <어린 아이>는 다음 왕이 될 <히즈키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구약학자 F. L. Moriarty는 [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271페이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7:14에 나오는 <동정녀> 혹 <처녀>는 히브리 성경에 보면 정관사 <the>가 붙어 있고, 동정녀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betula 대신 <결혼할 정도로 성적으로 완숙된 젊은 여인>을 나타내는 alma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여기서 염두에 둔 여인은 정관사가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하즈의 아내 왕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7:16~17에 나타난 대로 이 <임마누엘> 아이는 <히즈키아 왕>을 지적한 것이지요.

 

<메시아사상>은 이사야 말년에 가서 발전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이 <임마누엘 아이>는 야웨신앙이 결핍된 아하즈와는 달리 야웨신앙을 충실히 이행하며 정치를 할 것이며 민족의 고난기에 살지만, 그가 아주 늙기 전에 아시리아가 침입하게 되면 유다의 두 원수인 두 왕, 즉 시리아의 르신과 북쪽 이스라엘 왕 베가를 쫓아내게(7:16~17)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그 당시 역사적 고난에 참여할 메시아 아이는 도시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거친 광야에서 백성들과 함께 살리라고 이사야는 내다보지요.

 

한편, 미가 선지자의 메시아 탄생에 관한 꿈은 이사야가 본 예루살렘의 <다윗의 후손>에게서가 아니라, 다윗이 그 소박한 목동 생활을 시작한 <베들레헴>의 보잘것 없는 가정에서 메시아가 태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예수탄생으로 해석되어 마태가 인용한 미가서 5:1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부족들 가운데서 보잘것 없으나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1,123페이지에 보면 미가서 4:1~5:15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과 미래 왕국의 회복에 관한 <종말론적 희망>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편집자들이 삽입시킨 것으로 미가 선지자의 직접적인 예언이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아 예언>도 미가 선지자가 직접 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윗 왕을 상기시키는 <베들레헴>을 지적한 것은 아마도 <다윗 언약 신학자들>이 나중 편집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미가 선지자가 직접 한 예언이라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메시아는 악만 꾀하는 도시 <예루살렘>의 궁실에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천한 백성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뜻이지요. 이스라엘을 통일한 다윗 왕이 그 인생의 출발을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시골 <베들레헴>에서 목동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중 백성들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뜻을 하나로 뭉쳐 통일된 국가를 이룰 수 있었듯이 이스라엘의 위기, 즉 아시리아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궁궐의 타락된 생활에서 벗어나 광야, 즉 베들레헴에서 새 출발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목동이 왕이 되는, 즉 하층 사람들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세상이 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위대했다는 것은 결국 그 당시 이스라엘 민중이 위대하였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가 위대했던 것은 하층민들의 뜻을, 그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년 때부터 다윗왕권의 <절대 신성불가침주의>가 팽대해 갔으며, <왕실신학자들>은 <다윗왕조의 메시아주의>로 발전시켜 다윗의 도시 <예루살렘>을 절대화하여 시온주의(Zionism)를 만들어냄으로 북쪽 이스라엘 땅이었던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극히 멸시했습니다. 이러한 왕실예언자들은 천막에 거하며 그의 백성들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는 <야웨, 살아있는 역사의 신, 해방의 신>을 화려한 성전에 가두어두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일삼고 있었지요.

 

예수시대에도 상황이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가야바로 대표되는 궁실신학자들은 로마와 헤롯당과 합작하여 성전에서 장사나 일삼고 있었으며 사마리아와 예수가 자란 갈릴리는 저주받은 땅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설 땅은 천민들이 들끓는 땅, 예루살렘 귀족들이 멸시하고 적대시하던 보잘것 없는 땅 갈릴리뿐이었습니다. 아니 그러한 천민들이 사는 갈릴리에서만이, 천민들 중의 한 사람에게서만이 백성들의 깊은 한숨과 뼈저린 가난의 맛을 알아주는 메시아가 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거친 미디안광야에서 오랫동안 양을 치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노예신세에서 해방해준 메시아가 되었고,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이름 없는 집안에 태어나 양을 치던 목자 다윗이 가나안을 통일하고 전 민족을 통일시킨 메시아 왕이 되었으며, 버려진 땅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젊은 청년 예수는,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누가복음 4:18)

 

배고픈 자들에게는 배부르게 해준 이유로 궁실신학자들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 메시아의 모델이 되었지요.

 

저주받은 땅 갈릴리에서 인간해방을 부르짖다 십자가를 진 예수와 마태복음에 나열한 긴 다윗왕의 족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최초의 책 마태복음 1:1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왕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는 첫 절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을 쓰던 때의 왕실신학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주받은 땅 갈릴리에서 머리 둘 곳이 없어 헤매던 떠돌이 청년 예수를 다시 궁실신학자들이 화려한 왕관을 씌워 죄악의 도시 예루살렘에다 가두어 두었으니 한심한 일이지요. 살아계신 역사의 신 야웨를 예루살렘 성전에다 가두어 두고 밥벌이를 일삼던 궁실신학자들처럼 요사이 기업화된 자본주의사회의 대형교회들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마저 화려한 교회당에다 가두어두고 밥벌이를 일삼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지요.  현대판 <다윗왕조 계약 신학자들>은 신도들의 <이기적 보신주의>를 <내세의 환상>으로 영구히 타락시키고, 그들의 한과 분노를 감상적인 <자선주의>로 길들여 제거해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와 <빈 무덤>으로 인생을 끝낸 갈릴리의 예수와 현대의 화려한 대형교회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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