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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토론연재5] 주체사상이 밝힌 인간본성과 계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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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8 14:4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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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연재5] 주체사상이 밝힌 인간본성과 계급성

 

 

편집국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회원들의 모임에서 자유토론이 있었다. 토론은 지난번 토론의 연장으로서 주체사상이 밝힌 인간 본성은 계급을 초월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는 내용이었다. 이 모임에는 회원을 비롯해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이 참석하였다. 토론에서 논의된 것을 간추려 소개한다. 회원의 질문에 김현환 소장이 대답한 것을 편의상 질문과 대답으로 표기한다.]

 


 

 

주체사상의 <인간론>은 계급성을 초월한 인간론인가?

 

 

질문: 김 소장님이 <인간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설명하셨는데, 그러면 주체사상의 인간론은 <계급성>을 초월한 <비계급적 인간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멀리 노예제사회나 봉건주의 사회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현재 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들에 의한 노동자들의 지배와 착취, 그리고 지배층들의 부화방탕한 생활을 보면 자본가들과 지배층들이 자주성을 유린하는 존재이지 자주성을 지닌 존재로 볼수 없지 않나요?

 

 대답: 아주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문은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어떤 철학이나 다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사용하는 철학의 경우에도 그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것은 여러 철학에 따라 다 각기 다르지요.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각 철학의 <계급적 입장과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존주의는 <인간>을 “불안과 죽음으로 가는 존재”로 봅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이란 바로 불안, 공포, 절망을 특징으로 하는 존재이지요. 실존주의가 인간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실존주의가 바로 파국과 멸망에 직면한 현대 자본가계급을 비롯한 지배층들을 일반화해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만들어 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토마스주의나 신토마스주의와 같은 종교철학에서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종교적 동물>, 혹은 <신앙심을 가진 존재>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종교 신자>를 일반화해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인간>이라는 일반적 범주를 쓰는 경우에도 그 <인간>을 일반화하는 소재를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규정 자체도 달라집니다.

 

주체사상의 경우에는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근본특성>을 일반화하여 <인간>에 대한 규정이 내려지고 있지요. 앞에서 다룬 인간의 3대 본성인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바로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에 고유한 특성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목적의식적으로 지배하고 개조해 나가는 투쟁을 계속 벌여나가는 역사의 주체가 바로 근로민중입니다. 근로민중은 또한 언제나 낡은 것을 반대하고 새것을 지향하며 새것을 창조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여나가고 있지요. 근로민중은 또한 자기의 <생물학적인, 육체적 욕망>보다도 <사회적인 요구>를 더 중시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집단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면서 거기에 맞게 자기의 행동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은 근로민중이 어떻게 되든 오직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개인 본위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육체적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키려는 욕구에 따라서 자기의 행동을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내세우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을 일반화하여 창조한 개념이지요.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자주성을 유린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계급입니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민중의 <자주성>이 신장 발전되는 것을 반대하지요. 또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이 창조성을 전면적으로 발휘하느냐, 발휘하지 못하느냐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율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한에서만 노동자들의 창조성 발휘에 이해관계를 갖습니다. 자본가계급의 목적은 <고율이윤>의 획득이지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발전>, <창조적 발전>이 아니지요. <의식성>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자본가계급은 결코 사회 전체를 위한 요구에 맞게 자기의 활동을 규제하는 계급이 아니기에 근로민중들이 의식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지요. 자본가계급은 오로지 자기 계급만의 이익과 치부를 위해서 자기의 행동을 거기에 맞게 규정하는 계급입니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철두철미 <개인주의적>이지만 노동계급을 비롯한 근로민중은 <집단주의적>이지요.

 

그러므로 주체사상이 인간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라고 규정한 것은 <참다운 인간>, <참다운 사회적 인간>의 본성을 염두에 둔 정식화입니다.

 

물론 사회적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마땅히 그러한 존재로 되어야 하지요. 원래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그 본연의 자세로 볼 때 마땅히 사회 속에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인간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착취계급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간의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없어지기에 인간이라는 <종>으로부터의 <소외>를 언급한 것이지요.

 

사실상,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개인이 <집단의 성원>으로 됨으로써만, 또한 구체적인 <사회적 제도 속>에서 역사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투쟁하는 집단, 즉 근로민중의 성원으로 됨으로써만 지닐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집단이 개인들에게 교육과 교양을 하는 통로가 기본통로이지만 매 개인들은 다 자기의 <생활처지>, <생활경로>, <교제관계>, 등등이 다 각기 다르지요. 그러므로 매 개인들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수준>은 차이가 있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이 아직 지배층의 <지배논리>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고, 아직 거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이 <자주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노예제사회에서 노예들이 노예노동에 묵묵히 순종하는 한에서는 노예의 처지를 개변하기 위한 <자주의식>을 가질 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노예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노예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노예들도 점차 실제의 생활체험을 통하여 <자주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사실상, 착취사회는 노예들에게 자주의식을 키워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럴 경우 착취사회는 멸망하고 말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노예제사회에서는 <노예의식>, <굴종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기본교육이고 교양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들이 거기로부터 탈피하여 건전한 변혁사상을 가지게 되기까지는 일정한 역사적 기간이 필요하지요. 따라서 선진적 변혁조직, 선진적 당이 대중들에 대한 교육과 교양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개인들의 <자주의식>을 키워주는 문제에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앞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원래 인간은 가장 발전된 존재로서 마땅히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져야 하는 존재인데 <사회제도의 특성>에 따라 자주의식이 마비되고 말살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착취사회제도의 사회적 조건 자체가 인간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그것을 말살시키도록 형성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회주의사회는 그 자체가 사람들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발양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들이 <자주의식>을 가지는 것은 착취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유리하지요.

 

그러나 매 개인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는 데서 결코 <사회적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매 <개인의 노력>, <의식적인 투쟁>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회제도 아래에서도 <자주의식>을 가지는 속도가 더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으며, 자주의식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의식적인 투쟁>의 결과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도 획득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의 형성에 있어서 개인들의 <주동적 역할>이 매주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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