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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신학의 해방 14] 내가 본 구약성경(6) 예언자들의 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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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19 20:0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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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14]

내가 본 구약성경(6)

 

 

예언자들의 갈길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조용하고 여린 역사의 음성(열왕기상 19:12)

 

 

솔로몬 왕(B.C. 922년에 패망)의 화려한 40년간의 생활은 노예들의 강제노동의 대가였다. 그는 거대한 성전을 짓는데 7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무수한 백성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했을 뿐 아니라, 정부청사, 왕의 집, 그리고 이집트 출신 왕비의 집으로 구성된 궁궐을 짓는 데 13년 동안이나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러한 솔로몬 왕의 <강압정책>은 특히 북쪽 10 지파의 결합체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정부와의 사이를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세금부담>과 <강제노동>은 솔로몬 지파인 <유다 지파>보다 북쪽의 10 지파에 더 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언약의 공동체> 내의 큰 불화는 남쪽 지파인 유다족이 세운 다윗 왕이 강제로 북쪽 10 지파가 세운 왕 사울을 몰아내고 정치적으로 피상적인 통일국가를 이룬 때부터였다.

 

솔로몬 왕의 말년에 느밧(Nebat)의 아들 여로보암(Jeroboam)은 솔로몬 왕의 관리로서 요셉 지파의 부역 총책임자로 일하던 아히야(Ahijah)가 이끄는 혁명운동에 참여하여 북쪽 10 지파를 단합하고 솔로몬을 치려 하였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그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아히야세력을 치니 여로보암은 도망하여 이집트왕 시삭(Shishak)에게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

 

한편 이집트는 B.C. 1211년 미르넵타(Merneptah)왕이 죽자 3세기 동안 정치적인 침체상태에 빠져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에 이르는 80년 동안 이스라엘과는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리비아의 귀족 출신인 시삭(B.C. 935~914)은 22대 왕국을 건설하고 이집트를 다시 근동을 주름잡는 강력한 나라로 키울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집트 왕 시삭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여로보암을 기꺼이 맞이하고 보호해준 것은 그가 관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로보암을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길러서 잡아먹자는 속셈이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는 왔다. B.C. 922년 솔로몬 왕이 죽자 시삭은 여로보암을 후히 대접하여 북이스라엘에 보내어 그곳 10 지파를 모아 남쪽 예루살렘 정권에 반란을 일으키는 거사를 은밀히 도왔다. 이집트 왕 시삭은 오랜 정치철학인 <분리하여 정복한다>는 원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결국 이스라엘을 둘로 갈라놓아 국력을 약화하는데 성공했다. 솔로몬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Rehoboam B.C. 922~915)은 그의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지지를 받아 쉽게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북쪽 10 지파의 결합체인 이스라엘 족들에게 왕으로 환영받기 위하여 르호보암은 옛 종족동맹의 중심지였던 세겜을 방문하였다. 그때  이집트에서 돌아온 여로보암이 온 이스라엘 회중을 거느리고 르호보암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임금님의 부친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습니다. 이제 왕께서는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가한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으로 섬기겠나이다”(열왕기상 12:4).

 

이 순간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낼 가장 엄숙한 순간이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이 지혜가 있고 총명하여 세계사를 보는 안목이 조금만큼이라도 있었더라면 북조 이스라엘 10 지파가 요구한 조건을 들어주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라의 분열을 막고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고 교만하기 끝이 없던 르호보암은 경험 많은 대신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나라는 그만 둘로 갈라지고 말았으니 이집트왕 시삭이 계획했던 대로 되어갔던 것이다. 결국, 북쪽 이스라엘족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워 남쪽 유다와 대치하게 되니 나라는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솔로몬 왕국이 단지 하룻밤 사이에 여로보암과 그 추종자들이 추진한 혁명세력에 넘어가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르호보암 왕이 여로보암이 이끄는 이스라엘 혁명군을 쳤다면 쉽게 진압했을지 모르지만, 군대를 빼내어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을 치는 동안 남쪽 국경에서 이집트의 시삭의 군대가 쳐들어올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거시적인 세계적인 안목을 갖지 못하고 단지 눈앞의 권력 잡는 데만 몰두하던 이집트의 꼭두각시 여로보암과 유다왕 르호보암 때문에 나라는 둘로 갈라져 서로 반목질시하며 내란을 일으켜 서로 싸우는 동안 이집트왕 시삭은 B.C. 918년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 그리고 에돔, 블레셋 일대를 모두 침략하였다. 열왕기상서 14:25~28에 표현된 바와 같이 르호보암 왕 제2년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야웨의 전과 궁궐의 모든 보물을 샅샅이 뒤져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집트의 간섭은 끊임없이 계속된 가운데 북쪽으로부터는 새로운 위험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윗왕 때부터 주종관계를 맺고 있던 외교관계를 청산하려고 줄기차게 시도해온 시리아(Syria)는 솔로몬 왕조가 둘로 갈라져 약해지자 남침할 야욕을 갖게 되었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은 간헐적으로 내전을 일삼아오던 차 남조 유다왕 아사(B.C. 913~873)때 북조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로 쳐내려오자 아사왕은 시리아의 왕 벤하닷(Benhadad)에게 야웨의 성전과 왕실의 창고에 남아 있던 은과 금을 모조리 거두어 바치며 이스라엘을 유다 영토에서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다. 기회는 왔다고 무릎을 치고 시리아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 성읍으로 쳐들어와 이욘, 단, 아벨벳 마아가, 긴네렛, 그리고 납달리 전 지역을 점령해버렸다(열왕기상 15:20 B.C. 878년경). 이후 북이스라엘에서는 살해, 자살, 모반이 연이어 일어났다.

 

짐리(Zimri) 장군 같은 자는 엘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된 지 7일 만에 이스라엘군 총사령관 <옴리 장군>의 쿠데타에 의해 죽고 <옴리 왕국>이 시작되었다. 옴리 왕은 사마리아 성을 새로이 세워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시리아를 쫓아내고 포에니시아의 왕의 딸 이세벨과 그의 아들 아합과 정치적 결혼을 시켜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옴리의 아들 아합 왕때 북쪽에서는 거대한 아시리아(Assyria) 제국이 남으로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유다, 이스라엘, 시리아 같은 소국들에게는 암담한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암담한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모세의 정신적 상속을 받은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분단된 남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쳤으니 여기서는 옴리 왕조 때에 활동한 3명의 뛰어난 선지자들, 즉 미가야, 엘리아, 엘리사를 소개하겠다.

 

 

예언자(Prophet)의 의미

 

 

그리스 말 <prophetes>란 <다른 사람들, 특히 신들을 대신하여 말해주는 대변자>란 뜻이다. 히브리어 <Nabi>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란 뜻이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자신들을 야웨의 말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보내진 사자(messenger)로 간주했다. 이들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마치 환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으리라는 의사의 예언을 듣는 순간 환자의 <현재의 순간>에 보다 깊고 오묘한 의미를 던져주듯이, 역사가 처한 <현재의 위급성>을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지금 곧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세계사적인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그들의 민족이 처한 위기를 백성들에게 알려 외국군대의 침입을 막도록 남과 북이 단합할 것을 호소했다. 예언자들이 눈앞의 자신들의 권력과 안녕만을 꾀하고 있는 지배층들이 순환적인 자연신 바알보다는 역사의식을 깨우쳐주는 <출애굽의 신, 야웨>를 믿고 하나의 백성으로 뭉치기를 바랐던 것은 <하나의 민족적 이상>으로 전 백성이 뭉치지 않고서는 민족이 처한 국제적 위기를 모면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바알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명확한 <역사의식>을 가진 <역사의 신 야웨>의 메신저로서 현재에 백성들의 결단을 요구했다. 황홀한 <무아경의 예언>은 가나안 종교인 바알신앙과 관계있는 것으로 나중 이스라엘 예언자들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열왕기상 18장 28절에 표현된 바와 같이 바알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리며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는 것이 그들의 예언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예식으로 바알선지자들은 <황홀한 광휘>는 맛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역사가 처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역사의식의 고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원래 이러한 <광적인 예언>은 소아시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가서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에 전달되어 술신 디오니서스(Dionysus)의  예배형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언자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을 떠나 개인적인 광적 흥분에 도취하게 되면 그들은 쉽게 직업화되어 궁궐 사제들처럼 왕의 통치 밑에 녹을 받으며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언자들이 직업화되어갈 때 그들의 예언은 야웨 하나님의 말씀, 즉 전 백성들의 울부짖음의 선포보다는 오히려 왕족들의 이권이나 대변해주는 아첨 소리로 타락해갔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백성들의 역사의식을 깨우쳐주던 위대한 예언자들은 이러한 <직업 선지자들>과 동일시되기를 원치 않았다(Amos 7:14)

 

 

미가야(Micaiah) 선지자

 

 

미가야 선지자는 옴리 왕의 아들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활동한 사람으로 “만사가 왕의 뜻대로 되리라”고 예언한 <궁실 예언자들>과는 달리 옴리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으며 400명의 궁실선지자들처럼 <복종인(yes-man)>이 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는 뻔했다. 쇠로 만든 뿔을 가지고 광적인 예언을 하던 왕실 예언자 <시드키야>가 <미가야>에게 달려와 뺨을 때렸으며 아합 왕은 미가야를 골방에 가두어버렸다. 그러나 미가야는 <역사의 신 야웨>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 속에 처한 상황에 대한 <역사적인 계시>를 그것이 아무리 왕과 일반대중들이 본 견해와 다르더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담대히 예언했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으며 곧 그의 예언대로 아합 왕은 라못길리앗에서 시리아군에게 전사했다.

 

이 미가야 선지자 때부터 예언은 더 이상 왕족들과 귀족들의 비위나 맞추어주는 직업 예언자들의 <자장가>가 되는 것을 멈추고 이스라엘 <민족정신>을 나타내는 <모세 신앙>에 더 민감하게 해줌으로써 <역사적 현재>를 보다 새로운 의미와 힘을 가지고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미가야의 예언은 백성들 각자가 역사 속에 차지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해주었고 그들 각자의 <소명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것은 9세기에 활동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아(Elijah)의 경우에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엘리아 선지자

 

 

옴리 왕은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이 된 후 포에니시아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시돈 왕인 이스바알의 딸 이세벨(Jezebel)과 그의 아들 아합과 결혼시켰다. 솔로몬 왕이 그의 외국 아내들을 위하여 그들이 믿던 신전들을 지어주었듯이, 아합 왕은 <바알성전(Baal Temple)>을 지어 그 안에 제단과 어머니 여신 아세라(Asherah) 상을 모시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바알신은 가나안 자연신의 포에니시안 형태의 신으로 <바알 멜카르트(Baal Melkart)>라고 불렀는데 <출산의 신>으로 알려졌다. 이세벨은 거만하고 당당한 여자로 그녀가 목적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해내는 형태의 여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믿던 포에니시아의 바알신에 대한 광신적인 전도사로서 포교에 힘썼다. 이세벨은 포에니시아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400명의 아세라 예언자들을 불러들여 국가 예산에서 그들을 먹여 살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정신인 <야웨신앙>에서 떠나 <바알종교>를 믿도록 전도사업에 힘썼다(열왕기상 18:19). 이세벨은 야웨 예언자들의 목까지 베며 야웨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아합 왕과 백성들의 순진한 관대함과 무관심주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신앙인 <야웨신앙>을 좀먹게 하였다. 야웨신앙의 제단은 허물어지고 선지자들은 살해되고 나머지 야웨신앙자들은 지하로 숨어버렸다.

 

역사의 신 야웨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엘리아 선지자>였다. 엘리아는 오랫동안 요단강 건너편에 위치한 거친 사막에서 야생생활를 하다가 시돈지방의 사랩다로 가서 그곳에서 과부의 신세를 지며 지내다가 때가 왔다고 생각되자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그는 직접 아합 왕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사람은 왕 자신과 왕의 가문입니다.

왕께서는 야웨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겼습니다”(열왕기상 18:18).

 

엘리아는 역사의식이 없이 그저 왕과 이세벨의 정책에 맹종하고 있는 순진하기만한 백성들 앞에 서서 그들을 꾸짖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야웨가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열왕기상 18:21).

 

백성들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엘리아는 야웨의 예언자로서 살아남은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지만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이 후원하는 바알종교의 선지자들은 450명이나 됨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면서< 민족정신>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엘리아를 따라  <민족의 이상>인 <야웨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호소했다. 엘리아는 카멜산에 백성들을 모으고 허물어진 야웨의 제단을 다시 고쳐 쌓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야웨신앙을 다시 일깨워 현재 돌아가고 있는 역사적 현실을 깨달은 백성들은 눈이 뜨이자 그들의 <민족정기>를 말살시켜온 바알 예언자들을 모조리 잡아왔다. 야웨의 선지자 엘리아는 바알 예언자들을 귀손 개울로 끌고가 거기서 모조리 살해했다(열왕기상 18:40).

 

그러나 이세벨은 아직 아합의 궁전에서 거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엘리아 선지자를 죽일 계획을 했다. 전국에 초비상령이 내려졌다. 엘리아는 겨우 목숨을 구하여 두려워 떨면서 급히 도망하여 유다땅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곳에 종만 남겨두고 자신은 하룻길을 더 나아가 거친 들판에 이르렀다. 거기 싸리나무 덤블 밑에 쪼그리고 앉아 야웨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기도했다. 이세벨이 민족정신을 가진 야웨 예언자들을 모조리 잡아죽일 때 겨우 살아서 요단강 건너편 거친 사막에서 숨어 살았는데 다시 사막으로 쫓겨난 엘리아는 결국 예언자들이 갈 길은 죽음밖에 없음을 깨닫고 더 이상 살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역사의 음성>, 즉 역사의 신 야웨의 또렷한 음성이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산 호렙(시내)으로 가라.”

 

그는 40일 밤낮을 걸어 거룩한 언약의 산 호렙에 이르러 그곳 동굴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그가 시내산 위에 서 있는데 야웨 하나님의 계시가 내려왔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시내산 위에서 언약의 율법을 받던 모세를 연상시키는데 결국 엘리아가 시내산에서 깨달은 진리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으로 형성될 때 지녔던 <모세 전통(Mosaic Tradition)>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엘리아의 경우에는 모세 때와는 달리 야웨의 임재가 바람, 지진, 그리고 불 속에 나타나지 않고, 폭풍이 지난 뒤에 오는 <고요함> 속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역사의 폭풍이 지난 뒤 그 역사를 통하여 엘리아에게 들려오는 <조용하고 여린 역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 후 그는 야웨의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엘리아야! 너는 이 산 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되돌아가라.”

 

위의 말은 야웨가 바로 모세에게 한 꾸지람과 똑같다. 엘리아는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이란 <신비적인 명상>에서가 아니라 <행동>에서 그 생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웨는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의 영역에서 행동함으로 그의 선지자들도 그의 역사적 행위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웨의 계획은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서 앉아 기도나 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 아합과 이세벨의 악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변혁을 시도하러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아가 희망을 품었던 것은 이스라엘에 아직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야웨신앙을 지닌 7,000명이 있었으니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변혁을 시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야웨신앙>의 원천지인 시내광야에서 엘리아가 깨달은 진리는 바로 이러한 역사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야웨의 부름이었다. 그는 다마스커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님시의 아들 예후(Jehu)를 만나 그와 변혁을 시도하였다.

 

 

엘리사(Elisha) 선지자

 

 

아합 왕의 학정에 반대한 예언자의 활동은 엘리아를 뒤이어 그의 제자 엘리사가 떠맡게 되었다. 결국, 예후의 변혁이 성공하여 이세벨은 창문에서 떨어져 죽게 되고 아합 가문의 남은 자들은 모조리 학살되었다. 예후는 엘리사의 한 제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예후 왕국이 시작되었다.

 

 

민족정신의 재부활

 

 

위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민족정신>의 확립과 그 민족정신을 상실하지 않고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한 민족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깨닫게 된다. 민족정신의 상실과 분열은 결국 민족 멸망을 초래하고 만다는 사실을 위 역사의 사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포에니시아의 여인 이세벨이 결국 이스라엘을 포에니시아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정기인 <야웨신앙>을 파괴하고 그녀의 종교인 <바알신앙>을 주입한 것처럼 지금 코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은 기독교 신앙과 자본주의 사상을 주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종교가 민족정신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거의 천만에 가까운 교인들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가 코리아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서구화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되풀이하여 강조되었다. 최근 우리 나라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천관우 씨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국사 전공, 동양사 전공, 서양사 전공을 합한 전 사학과는 해마다 모집인원이 여러 외국어 문학과 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한국사를 지망하는 수는 동양사, 서양사에 비하여 해마다 줄고 있다는 소식이다(11페이지).

 

기독교를 제외하고 가장 번창한 것이 일본의 창가학회(일련정종)로서 1966년에 서울에 총지부를 설치, 현재 전국에 144개 지부와 848개 반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포교활동을 벌인 결과 이남에 150만 명의 신도 수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일본 천리교 역시 총지부를 서울에 두고  500개의 교회와 700개의 포교소, 신도 37만명을 가지고 있다. 천리교는 서울, 진해에 두 개의 고등공민학교와 두 개의 유치원(대구, 진해)을 운영하고 있으며 [도우보]라는 월간지까지 발간하면서 종교전파에 애쓰고 있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와 일본 종교들이 이남을 정신적으로 식민화시키는 일에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여러 기독교 종파들과 신흥 일본종교들의 침투로 이남 동포들은 <민족적 정기>를 상실하고 <사대사상>에 빠져들고 있다.

 

1965년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자들인 PKI(인도네시아 공산당)를 몰살하기 위하여 수하르토가 이끄는 군인들이 집단살해를 시도하던 때  9월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는  <미국은 서양사상을 퍼뜨려달라(to spread Western ideas)>고 그에게 150 million rupiahs를 뇌물로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폭로했다. 사상적 침투는 한 나라를 식민화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민족적 이상>을 빼앗기고 나면 백성들이 뭉칠 초점을 상실하게 되니 쉽게 정치 경제적으로 식민화 되고 만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역대 위정자 중에서 백성들에게 조금만큼이라도< 민족적 이상>을 준 사람이 있었는가? 그래도 최근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6.15민족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그 속에서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 즉 <민족의 자주정신>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지난 70년 동안 이남을 실제로 지배해온 미국과 친미, 친일 사대주의자들은 <6.15 자주정신>을 배격하고 다시 사대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아직 외세의 신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무수한 코리안 예언자들이 혹은 감옥에, 혹은 산속에, 혹은 군중 속에 숨어, 혹은 아주  내놓고 활동하고 있다. 저 외래 사상에 젖어 있는 사대주의자들이 패하고 <민족 자주정신>을 믿고 있는 천지인들이 결국 승리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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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1] 참된 앎의 삼 단계

[신학의 해방, 서론] 신학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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