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해방 11] 내가 본 구약성경(3) 야웨 신앙과 바알 신앙과의 갈등 > 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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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 [신학의 해방 11] 내가 본 구약성경(3) 야웨 신앙과 바알 신앙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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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02 22:2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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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11]

내가 본 구약성경(3)


 

야웨 신앙과 바알 신앙과의 갈등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가나안 문화에의 동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박의 집> 이집트에서 엑소도스하여 모세와 함께 사막에서 40년간 모진 고생을 다 하였다. 거친 사막에서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구수도 늘어났고 경제력도 높아졌고 군사력도 강해졌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이집트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요단강이 흐르는 가나안에도 이미 가나안족이 발전한 농경문화를 이루고 성을 쌓고 살고 있었기에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40년간 광야에서 고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물이 부족한 광야에서 살기에는 인구가 너무 팽창하였다. 이들은 강한 이집트를 정복할 힘은 없었으나 사막에서 키운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가나안을 정복하여 그곳에 들어가 보니 이미 오랫동안 요단강 가에서 이루어놓은 가나안의 발달한 농경문화는 이스라엘의 유목문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참 앞서 있었다. 마치 로마가 군사적인 힘으로 그리스를 점령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의존했던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키운 거친 군사력으로 가나안 땅이야 정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쉽게 가나안 문화를 받아들여 동화되어 갔다. <종족동맹>이 가나안 문화의 중심지였던 세겜(Shechem)에서 형성되었던 것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사막의 신 <야웨>는 <흙>과는 관계없는 떠돌이 방랑자들의 신이었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인들은 경작해야 할 <토양>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사막에서는 주로 하늘과 별과 달과 관계하며 짐승들을 쳤지만 이제 강가에 안착한 이스라엘인들의 문제는 점차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 집중되었다. 즉 추수할 곡식을 위한 비의 필요성, 사계절 변천에의 의존성, 그리고 전 근동지방의 관심거리인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비료의 문제, 등이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과거의 사막에서는 야웨는 백성을 통제하는 힘을 가진 <역사의 신>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 가나안에서는 <자연의 순환>을 통제하는 신들(gods)과의 경쟁 속에서 야웨(Jahweh)가 과연 생존할 것이냐 하는 것이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름진 가나안의 발달한 농경문화 속에서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민족적 이상>, 즉 사막에서 형성된 <야웨 신앙>을 과연 지켜낼 수 있겠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하였다.

 

이 <야웨 신앙>의 신봉은 결국 <민족의 자주성>을 견지하느냐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사기 3장 5절과 6절에 잘 표현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족, 헷족, 아모리족, 브리스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섞여 살면서 서로 시집 장가가다 보니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고 신명기 역사가는 한탄하며 기록하고 있다.

 

사막에서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적 이상인 <야웨 신앙>을 버리고 쉽게 가나안의 <자연신>을 섬기게 된 데 반대하고 나선 이들이 바로 이들 <신명기 역사가들>이었다. 이들 신명기 역사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흥망성쇠는 “야웨에게 복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신명기 역사가들의 역사신학은 사사기 2:6~3:6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그들을 건져내고 사막에서 언약을 맺은 <야웨>를 버리고 주위의 다른 종족들이 섬기는 이방 신들(gods)을 믿음으로 율법을 어기고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둘째로, 따라서 야웨의 분노가 그들에게 불타올라 그들을 적군의 손에 넘겨주어 고통을 받게 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이 고통 중에서 다시 회개하며 야웨께 부르짖으니 야웨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측은히 여겨 그들의 적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사사들(judges)을 보내어 그 사사들이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니 사사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나라가 평안하였다는 것이다.

 

넷째로, 그러나 그 사사들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우상숭배>에 빠져 <민족적 이상>인 <야웨 신앙>을 버리고 주위 백성들의 문화에 쉽게 동화되어 야웨는 다시 그들에게 화가 나서 그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신명기 역사가가 되풀이하여 강조한 중심 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민족적 이상>인 <야웨 신앙>에 몰두하여 충성을 다했을 때는 <외래 사상>과 <외래 군대>와 싸워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야웨>를 버리고 그 당시 근동에 존재하던 다른 외래 신들(gods)을 믿게 되고 타민족의 문화에 동화되었을 때는 쉽게 그들의 적에게 먹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때 극소수의 예언자적 소명을 띤 신명기 역사가들의 끈질긴 경고가 없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이란 그 당시 근동의 종족들에게 흡수되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을 것이다. 신명기 역사가들이 지나치게 <야웨 신앙>을 강조한 것은 배타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신들이 믿고 있던 <야웨 신앙>만 강조하고 주위의 민족들이 믿던 다른 이방 신들을 멸시한 나머지 다른 민족을 대량학살해도 된다고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집트의 지배 밑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종살이하던 과거를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명기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의 이상>인 <야웨 신앙>을 지켜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할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가나안인들이 강력한 농경문화를 이루고 강한 성을 쌓고 살았는데도 유목민들인 이스라엘인들에게 쉽게 패한 것은 가나안 종족들 내부에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일부 가나안의 귀족 지배층들이 농민들을 종으로 부려먹으며 혹사하고 착취하였기 때문에 사막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갔을 때 가나안의 하층 계급들은 이스라엘인들을 해방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 가나안의 하층 계급들은 침략자들인 이스라엘인들과 합세하여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귀족 지배자들을 제거하고 하층 계급들이 주인이 되는 새나라를 세우려 했을 것이다. 종살이하며 사막을 헤매본 사람들과 귀족들에게 종살이하며 혹독한 착취를 받아 본 노예들만이 종살이하는 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가난하고 굶주린 가나안의 종들이나 사막을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배고프고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구약성서 학자인 존 브라이트는 그의 책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요단강을 건너자 무수한 가나안의 마을과 동네가 그들과 한편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겜의 경우에 그것은 정복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스라엘 일부였다…… 내부로부터 정복된 이스라엘”(p.139).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인들을 대량학살하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고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식민주의자들은 세계 각처에서 원주민들을 대량학살하고 기독교의 선교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가나안 정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유럽의 청교도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 이르러 인디언들을 대량학살하고도 죄로 여기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면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부 지역에서 전쟁한 것은 사실이나 대개의 경우는 서로 조약을 맺거나, 서로 결혼하여 동화되었거나, 혹은 겁을 먹고 투항하였거나, 일부는 노예들의 반란 같은 내부분열로 쉽게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 사막에서 야웨를 믿던 자들과 새로이 그들과 결합한 가나안의 여러 종족은 <세겜>에 모여 <야웨 백성>이 될 엄격한 언약을 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한 유언은 바로 이러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족들은 큰 마찰 없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동맹사회>를 이루어 오랫동안 잘 지내왔다. 단지 신명기 기자(D 작가)가 그들의 민족적 이상인 <야웨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주위 열강들 속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면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후에 사제작가들(P 작가)이 <야웨 신앙>을 지나치게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배타주의>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가나안 바알

 

 

그러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알(Baal)과 아쉬타르트((Ashtart)의 경배로 표현된 <가나안 종교>를 잠시 알아보자. <바알>이란 주님(Lord), 혹은 소유자(owner)란 뜻으로 땅을 소유하고 토지의 산출력을 통제하는 <남자 신>을 가리킨다. 그의 여성파트너가 바로 레이디 아쉬타르트이다. 농업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자연은 아직도 신비로 둘러싸여 있어 <어머니 땅>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고대 근동에서 모든 문화는 토양의 산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연의 신비는 종교적으로 표현되었다. <바알>은 땅의 주인으로서 그 산출력은 그와 그의 배우자인 <아쉬타르트> 사이의 성적인 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황폐하던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와 비가 내려 물과 흙이 혼합될 때 신비스러운 토양의 산출력은 다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지에 새로운 삶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자연의 재생은 바로 바알과 그의 파트너 아쉬타르트와의 성교 때문이라고 가나안 농민들은 믿고 있었다. 따라서 비를 기다리는 인간은 단지 거룩한 신의 결합에 단순한 구경꾼으로 머무르지 않고 바알 드라마의 의식을 제정하여 산출력을 극도에 달하도록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나라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슷했다고 본다. 그 당시에 <바알 예배의식>을 무시한다는 것은 오늘날 농부들이 토지를 가꾸는 데서 과학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고 보겠다.

 

농사짓는 데 익숙하지 못한 이스라엘인들이 토지의 신들을 믿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엑소도스의 신 야웨>와 <사이나이 언약>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군사적 위기가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를 찾았고, 농사에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바알>을 믿게 되었다. 마치 현대인들이 종교와 과학을 동시에 믿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 아마도 <야웨 신앙>은 공식적인 공공신앙이었고 <바알 신앙>은 가정과 농사를 위한 사적인 신이었던 것 같다. 하여튼 가나안 농경문화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에게 그 두 종교는 서로 모순되거나 배타적이 아니었다. 더구나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 세대는 광야에서 모세와 같이 지냈던 세대가 아니었다. 역사적 상황이 다른 데다가 세대가 달라졌는데 그들에게서 똑같은 야웨 신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은 사제작가들(P 작가)의 지나친 욕심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종교를 믿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배울 것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가르쳐줄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다른 신도 허용하지 않는 <질투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낸 것은, 즉 <야웨 앞에 다른 어떤 신>도 허용치 않은 그런 <배타적 신앙>을 만들어낸 것은 그 시대의 독특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가나안 농경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이방 신들(gods)과도 잘 동화되어 갔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동화는 좋으나 자신의 <자주성>을 상실하고 남의 것에 빠져 정체성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게 큰 문제이다. 신명기 작가들과 사제작가들, 예언자들이 순환적인 <자연신 바알>보다는 그들의 <민족적 이상>인 <역사적 신 야웨>를 강조하면서 민족과 자신의 <자주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자신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의 종교나 사상을 무조건 무시하고 야웨 신앙만을 절대화하는 <독단적 자세>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코리아 반도에 들어왔을 때 <대종교>, <단군교>, 등 우리 민족의 고유한 독특한 종교와 풍습, 사상, 등을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적대시하였다. 내가 주일학교를 다닐 때 “내 앞에서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에 얼마나 세뇌당했던지 소풍 가서 불교사찰에 들어가게 되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으며 사찰 방문을 죄로 여기게 될 정도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에 몰두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조상을 생각하며 온 가족이 모여 지내는 제사는 종교이전의 문제로서 살려야 할 좋은 점들이 많이 있다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디를 가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을 것을 강요하고 야웨 신앙만을 강조하여 원주민들의 문화를 무시하고 파괴하였으며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광분하였다. 기독교가 제삼세계에 들어가 원주민들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주인의식을 주기는커녕 현실 도피적 <내세주의>, 자기 것을 버리고 기독교만 믿어야 한다는 <교조주의>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것은 지나치게 가나안 주민들의 신인 <바알>을 무시하고 <야웨 신>만을 강조한 편협된 선교사들의 <배타성>과 <절대성> 때문이었다.

 

사실상, 요단강 가에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가나안인들은 어떤 돌발적인 변화를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자연질서의 조화와 율동을 유지하며 그들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하여 순환적인 자연신 바알을 믿었다. 이와 같은 발전을 위한 파괴보다는 안녕과 안보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나온 바알 신앙은 가나안의 지배층인 귀족들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즉 현상을 유지해주는 수단이었다. 마치 지금의 지배층의 종교가 되어버린 일부 기독교회들이 단지 지배층들의 신분을 보장해주고 축복해주는 수단으로 변질한 것과 같다고 보겠다.

 

매 주 기독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안정된 생활을 하는 지배층들에 들려주는 자장가가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집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무기이다.”

 

피카소는 진정한 종교란 집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처럼 단지 인간실존을 꾸미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종교란 투쟁의 한 부분이라고 믿었다. 앞에서 길게 강조한 <야웨 신앙>이 바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의 투쟁, 즉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싸운 투쟁의 종교였다. 야웨는 역사 속에 자신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신으로서 단지 자신들의 안녕만을 위하여 남을 종으로 삼는 귀족들의 신, 지배자 이집트의 신 <다곤>을 파멸시키는 <역사의 신>, 즉 <해방의 신>이라는 것이다. 특히 <바알 신앙>에 도취하여 자신의 안일과 평안만을 찾으며 자기 보수에만 열중하는 동안 사방의 적들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극소수의 각성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에인들에게 계속하여 경고했던 것이다

 

미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현대의 가나안으로 간주하고 있다. 모든 것이 풍부하다. 가난한 제삼 세계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부를 이루고 있고 세계를 다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를 비롯한 현대무기들을 다 갖추고 있다. 나는 3년간 시카고의 하이드 팍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미국 신학의 근본정신은 <해방의 신>, <역사의 신 야웨>를 믿는 <야웨 신앙>이 아니라, <바알 신앙>, 즉 현대의 가나안인 <미국의 안보>를 위하는 자연신을 섬기는 <순환 신앙>임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사회에서 저임금으로 살아가고 있는 근로대중과 제삼세계의 근로대중들을 구원시키는 <엑소도스의 하나님>, <해방자 야웨>는 미국의 대부분 신학교와 교회들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의 하나님 야웨>, <해방의 신, 야웨>는 미국 지배층들의 안보에 도전이 되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에 대부분의 신학교와 교회에서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미국의 교회들은 미국의 안보의 신 <바알 신앙>, 즉 <기복 신앙>을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하나님, 진화 발전하는 직선적인 하나님, 완성을 향해가는 <미완료의 신 야웨>는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부르짖는 야웨 백성들의 해방 소리를 듣고 각 민족과 근로대중의 해방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속박의 집>,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한 야웨를 섬기던 이스라엘인들과 가나안의 하층 대중들이 합세하여 세겜에서 종족연맹을 맺고 중앙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 야웨에게 공통의 헌신을 함으로써 뭉쳐 강한 민족국가를 이루었듯이 세계 각처에서 각 민족과 근로민중은 <하나의 이상>, 즉 <해방정신>, <자주정신>으로 단결하여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비하여야 한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총을 가진 미국 백인들이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여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며 평화스럽게 살던 인디안들을 대량학살하고 정복하게 되었는지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1854년 미국의 14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한 연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중의 일부를 소개하며 이 글을 끝맺겠다.

 

이 연설은 피어스 미국 대통령이 지금의 <시애틀 시>의 인디언 지역을 팔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자 그에 대한 답으로 쓴 연설이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를 읽고 감동한 나머지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캐나다 접경도시이며 태평양 연안인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시애틀 시>가 되었다.

 

“나와 함께 온, 지금 당신들 앞에 서 있는

한 무리의 이 사람들은 나의 부족이며 나는 그들의 추장이다…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땅에 온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다.

당신들과 우리는 모두가 이 대지의 아들들이며,

어느 한 사람도 뜻 없이 만들어진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 땅에 와서, 이 대지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가?

어떤 꿈을 당신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주려는가?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릴 뿐이다. 그래서 행복한가? …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들 황색인(혹은 붉은 얼굴)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곳이 바로 우리 황색인들에겐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형제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잎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 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췬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 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황색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해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아메리카대륙에 살던 인디안들은 <천지인 합일정신>을 가지고 자연과 더불어 평화스럽게 살던 우리 코리안 조상들과 참으로 많이도 닮았다. 아메리카대륙의 공기, 물, 흙, 광물, 동물, 등 모든 자연물을 거룩하고 신성하게 보고 그들과 잘 조화를 이루며 평화스럽게 살던 천지인인 인디안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게 대량 학살된 이유가 무엇인가? 가나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더불어 평화스럽게 살던 가나안인들이 유목민인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된 이유가 무엇인가? 천부경에 나오는 <천지인 합일정신>으로 자연과 더불어 평화스럽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코리안들이 주변 강대국들에게 계속하여 침략을 받아 식민지 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나치게 자연과 더불어 평화스럽게 사는데 도취하여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지의 영기는 나의 영기이고, 천지의 마음은 나의 마음>이라고 믿고 살아온 아메리칸 인디안들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나, 코리안들의 <천지인 합일 정신>이나, 가나안인들의 <바알 신앙>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자는 고귀한 정신들이다. 그러나 유롭에서 아메리카에 건너온 백인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오로지 기독교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기독교 경전인 성경만이 거룩한 책이기에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며, 기독교 교회당만이 거룩한 곳이기에 이곳에 와서 예배를 봐야만 구권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침략적인 독단에 인디안들은 대비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훌륭한 <천지인 합일정신>을 가지고 사는 순진한 천지인들을 지키기 위하여 최소한도 침략자 백인들을 막아낼 정도의 <무기>를 준비해야 했다. 아메리칸 인디안들이 < 활>을 가지고 백인들의 <총>과 <대포>를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코리안 천지인들이 <활>을 가지고 일본의 <총>을 이겨낼 수 없었다.

 

위의 연설문에서 추장 <시애틀>이 미국 대통령 피어스에게 길게 호소했듯이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여러 코리안 애국자들이 강대국들에 청원도 해보았고, 일본 점령자들에게 간절한 호소도 해보았고, 맨손으로 학생봉기와 3.1 봉기도 일으켜보았으나 다 실패하였다. 이때 일본군에게 총을 빼앗아 <무장 투쟁>을 벌렸던 항일 빨지산들이 있었다. 이들 항일빨치산 출신의 코리안들이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자주성>을 생명으로 하며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사회주의>를 <민족적 이상>으로 내세우고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침략에 준비하기 위하여 최고 지도자, 당, 군대, 대중이 <일심단결>하여 <선군정치>를 해왔다. 그리하여 지금 이북은 미제국주의를 비롯한 어떤 강대국들의 침략도 막아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북이 민족 내부의 <계급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모든 주민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를 확립함으로써 민족 내부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외부의 침략을 완전히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이북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바로 위에 지적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답이 될것이다. 지금부터 3,000여년 전에 있었던 <야웨 신앙>과 <바알 신앙>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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