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해방 9] 내가 본 구약성경(1),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새 소식

본문 바로가기

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새 소식

재미 | [신학의 해방 9] 내가 본 구약성경(1),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20 19:07 댓글0건

본문

 

 

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9]

 

 

내가 본 구약성경(1)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는 천지창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해방하는 출애굽, 즉 엑소도스에서 출발하는데 그 위대한 과업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모세이다. 이스라엘 종족이 언제 이집트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집트의 왕자로 자란 모세는 뒤늦게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고 왕자리마저 포기하고 동족의 고난에 참여하였다.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이집트 사람 하나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사방을 살펴본 뒤 주위에 아무도 없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여 모래 속에 파묻어버렸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사실이 발각된 것을 알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달아나 그 곳에서 미디안 종교를 믿는 사제 이드로를 만나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깊은 산골에서 양을 치는 동안 자신의 귀양살이 신세는 물론 그의 동족들의 운명을 곰곰이 생각하니 가슴이 저절로 아팠다. 자나 깨나 강제노동으로 울부짖는 동족들의 모습이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모세야, 모세야,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 이집트인들이 잔악하게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것을 어찌 묵인하고 너는 이 산중에서 양이나 치고 있느냐? <바로> 왕에게 돌아가 그의 학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거라.”

 

모세는 이 역사의 부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깊은 고뇌 속에서 신음하던 중 환상을 보게 되었다. 숲이 불타는 가운데,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라.”

 

는 미디안 광야의 신 <야웨(Yahweh)의 음성이 들려왔다. 우리가 누구의 입장에 선다고 할 때 영어로 “in one’s shoes” 라고 한다. 나의 입장에 선다고 할 때 “in my shoes”, 너의 입장에 선다고 할 때 “in your shoes”라고 한다. 모세가 지금까지 신었던 신발은 과거의 이집트 궁궐에서 형성된 가치관, 도덕관, 세계관, 그리고 종교관, 등을 말한다. 지금부터 모세가 신어야 할 새로운 신발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주체적으로 갖추어야 할 새로운 세계관, 가치관, 도덕관, 그리고 종교관, 등을 뜻한다. 그 새로운 신발, 즉 새로운 세계관, 가치관, 도덕관, 종교관은 바로 인간은 민족을 초월하여 역사 앞에 동등하다는 <인간 평등의 정신>, 즉 <인간 해방의 정신>에서 생겨난다. 이집트의 왕 <바로>의 강제노동으로 고난을 받던 이스라엘 동족들의 울부짖음은 하늘에 사무쳐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이제 이스라엘 동족을 종살이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모세 자신이 이집트 궁궐에서 배워 익숙하던 지배적이며, 고압적이고, 약탈적이며, 향락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종살이하는 동족에게 필요한 저항정신, 민족 해방정신, 자주정신으로 재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자주정신>으로 재무장하고 동족을 종살이에서 해방하겠다고 역사 한가운데 뛰어들려고 결단하는 순간이 바로 모세가 야웨의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burning bush)>를 체험한 각성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거룩한 순간>이었다. 종의 멍에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운명을 박차고 일어서는 불타는 열정은 바로 야웨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강제노동을 시키며 종살이 신세로 몰아넣는 일체의 악의 세력에 항거하여 일어서는 순간은 바로 야웨와 통하는, 즉 역사와 통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바로 거룩한 땅에서 <불타는 떨기>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모세도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는 오랫동안 바로 왕의 궁궐에 살면서 이집트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환히 알고 있었다. 이집트의 거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비교할 때 종살이하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인들은 단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역사의 부름을 받아 각성한 역사의식은 가지게 되었지만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력과 경제력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로 왕에게 달려가려고 시도하다가는 다시 주저앉아 외치기를,

 

“내가 무엇인데 감히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는가?” (출애굽기 3:1)

 

하며 마음이 약해져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한 내면적 투쟁, 즉 강한 자아와 약한 자아와의 투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때 역사의 힘은 그를 계속 몰아대었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출애굽기 3:12).

 

라고 역사의 신 야웨는 말했다. 역사적 사명에 그를 부른 <의미의 인격체>인 야웨 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고 스스로 물었다. 모세는 그를 떠밀고 있는 거대한 역사의 힘의 근원자가 과연 누구인지 물었다. 그때 역사의 신은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I am who I am).

 

출에급기 3:14절에 보면 역사의 신 야웨는 계속 말하기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가 너를 보내셨다고 하라.”고 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Eheyeh인데 이 말은 히브리어 동사 <to be>의 미완료 시제의 일인칭형이다. Be동사 원형은 히브리어로 Hayah인데 그 미완료시제 일인칭형 Eheyeh(I am)의 중요성은 이 말이 to be의 <미완료시제>란 점이다. 이 말은 야웨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자>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의 존재는 물건과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즉 <생성과정(becoming)>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신 야웨는 진화발전적인 <역사적 개념>으로서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에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계속 발전하는 <미완성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종족의 독특한 하나님 <야웨(Yahweh)>란 앞에서 설명한 be동사의 3인칭 단수(He is)인데, 출애굽기 3:14에서는 신이 직접 말하기 때문에 일인칭 단수로, 즉 <I am>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믿게 된 독특한 하나님 야웨는 <스스로 존재하는 주체자>로서 끊임없이 자주성을 발전시켜가는 <미완료 존재>로서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기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여 자주 독립된 주체성 있는 백성으로 완숙되어 가기를 바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한 신 야웨는 바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종살이하던 노예 신세에서 자신들을 해방해준 <해방자 야웨>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야웨의 유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인 야웨(Yahweh)라는 이름은 출애굽 당시에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 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야웨는 미디안 종족인 키나이트족(Kenites)의 <산신>이었는데, 미디안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살며 미디안인들의 신 야웨의 예배의식을 배운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거친 사막에서 형성된 미디안 광야의 산신 야웨는 나중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서 접하게 되는 순환적인 자연신 <바알>과는 달리 직선적이고 진화 발전적인 <역사의 신>으로서 한 곳에 머무르는 <안보의 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나일강변의 이집트신 <다곤 예배의식>에 젖어있던 모세는 자연적 <순환의 신>보다 거친 사막에서 인간과 같이 옮겨다니며 인간 역사에 관여하는 <역사의 신 야웨>를 믿고 그 신의 부름을 받았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모세는 미디안에 있는 호렙(Horeb)산에서 야웨로부터 소명을 받게 되었다(출애굽기 3:5). 그 호렙산은 <시내산>으로도 불리워지는데 미디안사람들의 예배처로서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고 있었다. 모세가 <야웨(Yahweh)>란 이름을 어디서 받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의 경험 속에서 야웨는 특별한 의미, 즉 <해방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인들은 신(Elohim: 일반적 개념의 신)이란 그들의 고난과 억압과 강제노동의 부르짖음을 듣고 적극적으로 역사 속에 참여하며 인간의 고난에 참여하는 <개인적 신 야웨>로 경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세에 의해 시도되어 이스라엘 전 백성들이 믿게된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오로지 하나의 생생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출애굽기 20:2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야웨 너의 하나님으로 너희를 이집트, 즉 속박의 집에서 해방한 자니라”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야웨를 경배한다는 것은 그 <해방의 사건>을 기억하고 그 역사적 요구에 응답하며 그 약속 속에 사는 것을 뜻하였다. 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즉 엑소도스를 통해 그들을 해방한 야웨 밖에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어떤 신도 알지 못했다. <야웨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억압의 현장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적, 즉 인간해방을 위하여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야웨는 그 자신을 그의 행위, 즉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인들이 믿는 <야웨 신앙>의 핵심내용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목적이 인간의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초월하여 하나님과 <직접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런 경우 개인은 거대한 대양의 한 물방울처럼 희미한 존재로 여겨지며 개인의 자아는 신성 속에 흡수되어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것은 구약성서가 다루고 있는 신비주의와 구별된다. 모세가 야웨 하나님과 만난 사건은 오히려 그 개인의 <정체성>을 더 명확하게 해주었으며 역사적 상황의 구체적인 요구에 대하여 보다 명확하고 예리한 의식을 갖게 해주었다. 야웨 하나님의 음성, 즉 역사의 음성 속에서 모세는 인간이 책임져야 할 과업을 부여받았으며 신의 <역사적 드라마>에 참여하도록 권고를 받았다.

 

“자 오늘, 내가 악독한 독재자 <바로> 왕에게 너를 보내노니 그에게서 내 백성을 해방하라.”

 

라는 권고를 모세는 받았다. 하나님의 음성은 문자 그대로 <불타는 숲>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회고한 바와 같이 새로운 의미와 깊이로 새로이 해석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들을 수 있다. 모세와 같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소명과 책임을 지는 결단력은 이스라엘인들의 야웨 신앙의 특색이었다.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역사적 요구에 무관심한 채 신비주의에 몰두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주의로 간주되었다.

 

 

나의 이름은 군대

 

 

신약성경 마가복음 5장 1절에서 20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예수는 어느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이란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가 배에서 내리자 무덤 사이에 거처하고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그에게 달려와 소리소리 질러댔다. 그는 고랑과 쇠사슬에 묶여 있었지만 쉽게 그것들을 부숴버렸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 사이에서 고함을 질러대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 귀신들린 자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 그는

 

“군단(Legion)이라 하오. 수효가 많아서 그렇소.”

 

라고 대답했다. 로마 군대의 일 군단은 6천 명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2천 명인 것으로 보아 아마 일 대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로마 군대의 일 대대의 인원 수는 2천 48명이었다. 어쨌든 무장한 2천 명의 로마병 같은 귀신떼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그곳 산기슭에는 2천 마리의 돼지떼들이 놀고 있었는데 귀신떼들은 예수께 간청하여 자신들을 저 돼지떼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예수가 허락하자 악령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떼에 들어가니 2천 마리의 돼지는 미쳐날뛰며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을 내리달아 바닷물 속에 빠져 몰사하였다고 한다. 그때 귀신들렸던 거라사인 사람은 옷을 바로 입고 <온전한 정신>이 되어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동네 사람들은 예수가 그 지방에서 떠나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악령들렸던 자만이 더 이상 예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따라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예수는 거절하고 혼자 떠나버렸다. 2천 마리의 악령이 나가자 <온전한 정신>을 회복한 자는 그가 살던 지역을 두루 여행하며 예수의 행적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 거라사인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사건 속에는 세 종류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첫째는 악령들린 자요, 둘째는 돼지떼요, 셋째는 예수이다. 귀신들린 자의 경우, 그는 2천 마리나 되는 잡다한 악령들에 의해 완전히 사로잡혀 자신의 <주체성>을 모두 상실해버렸다. 귀신 2천 마리가 그의 자아를 좌우하게 되니 그의 자주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개인도 민족도 자기가 자기인 바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나면 귀신떼가 설쳐대니 미친 세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단지 짐승처럼 이리뛰고 저리뛰며 고함을 질러대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헛소리로서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거처하는 곳을 보라. 죽은 송장들의 해골과 뼈다귀만이 묻혀 있는 무덤 사이가 아닌가? 그는 단지 죽은 송장들의 친구일 뿐이다. 산에서 나무들과 돌, 잡풀들, 그리고 죽은 송장들의 해골과 뼈다귀들에게나 외쳐대니 누가 그 미친 소리를 들어주었겠는가? 그는 돌로 제 몸을 찍고, 제 몸을 긁어 상처를 낼 뿐이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이 자에게 예수가 갑자기 그의 <이름>을 물은 것은 바로 이 때였다. 귀신 2천 마리에게 자신을 빼앗기고 귀신떼에 발목잡혀 죽음의 골짜기를 방황하고 있는 그 사람이 무슨 이름이 있겠는가? 악령들린 자는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묻자 <군단>이라고 대답하고 <숫자가 많다>고 대답했다. <숫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군대 수로, 핵무기 수로, 돈 액수로, 학위 수로, 교인 수로, 헌금 액수로, 등 <숫자>로 자신의 <이름>, 즉 <정체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1980년도에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을 광주에서 죽이고,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을 삼청교육대에서 혹사 고문한 귀신의 두목이 별의 숫자를 늘여 어깨에 달고 으시대며 상전국의 인정을 받아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적도 있었다.

 

수천 명의 로마군대에 둘러싸여 선량한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먹고 죽이던 미치광이 헤롯 왕이 바로 자신들의 <이름>, 즉 <주체성>을 팔아버린 친 로마 유대인들과 더불어 미쳐 날뛴 일이나, 지금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으로 선량한 젊은이들을 수 백 명 죽이고도 패션쇼나 하고 다니는 독재자의 일이나 모두 거라사인의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귀신 2천 마리를 거느리고 쇠고랑과 쇠사슬마저 쉽게 부숴버리던 거라사인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지닌 <이름>이 있는 예수 한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듯이, 헤롯이 군대를 이끌고도, 가야바가 종교무리들을 이끌고도, 빌라도가 위력한 로마병과 무기들을 이끌고도 예수의 <산 정신>이 무서워 죽였듯이, 지금 이남의 독재정권은 미국과 재벌들, 그리고 기독교의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이름>, 즉 <주체성>을 가진 이석기 씨를 비롯한 진보주의자들이 두려워 종북 빨갱이 귀신에 걸렸다고 감옥에 가두고 있다. <이름>이 없는 귀신떼들은 이름이 있는 <온전한 정신>을 지닌 한 사람을 두려워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에 그들의 <이름>, 즉 <주체성>을 팔아버리고 악령들렸던 친일파들은 또 다시 귀신의 두목만 바꾸어 그들의 이름을 재빨리 바꾸어버리고 민족의 이름을 팔고 있다.

 

돼지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돼지떼는 순진하고 악의가 없지만 문제는 귀신떼에 사로잡힌 악령의 두목이 순진한 돼지들에게 악령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순진한 돼지떼는 아무 것이나 다 잘 받아 먹는다. 귀신의 두목이 주는 악령마저 받아들인다. 그 결과는 자신들도 미쳐 죽음의 바다를 향하여 비탈길을 내리달아 바닷물에 빠져 익사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들 주위에는 자신들의 신앙만 절대적이라고 믿고 다른 신앙은 적대시하는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절대적 신앙은 인간이 처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상대화하여 볼 수 있는 눈을 멀게 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의 악령이 이끄는 대로 절벽을 내리달아 깊은 바다에 몰사할 위험성이 있다. 짐 존스 목사와 그를 따르던 신도들의 집단자살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러한 절대적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인간이 처한 역사적 상황보다도 종교적 도그마나 교리를 더 중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절대적인 종교적 교리로 인간을 판단해버린다. 같은 동족마저 이념이 다르다고 몰살시켜도 된다고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정신 상태는 지금 병적이다. 이들 절대신앙의 신봉자들은 거라사인의 악령들렸던 자와 돼지떼들이 몰살한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예수를 두려워하며 그 지경을 떠나라고 간청했듯이 이름, 즉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을 그들의 교회에서 떠나라고 한다. 정신병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온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 거라사인 사건이 주는 교훈은 어던 종교의 교리나, 도그마, 그리고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 아무리 좋은 것들이라도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맞게 상대화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절대화하는 한 그 종교의 도그마, 교리, 사상, 이념은 오히려 인간을 <죽음의 절벽>으로 돌진시켜 <죽음의 바다>에 빠뜨려 몰살하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역사의 신 야웨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인들은 인간인 우리 자신이 성장 발달해감에 따라서 우리의 <이름>의 의미도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나>라는 존재가 성장 발전해감에 따라서 나의 <이름의 의미>도 변화되어간다. 내가 비겁자이면 나의 이름은 비겁자란 뜻이며, 내가 도둑질을 하면 나의 이름의 뜻은 도둑놈이란 뜻이고, 내가 거지노릇을 하면 나의 이름의 뜻은 거지란 뜻이며, 병을 고치는 자이면 병 고치는 자란 뜻이다. 이와 같이 신이 역사적인 존재이듯이 인간도 <역사적인 존재자>이다. 인간을 고정된 물건처럼 이미 구원을 받았느니 안 받았느니 하고 고정된 관념으로 보려는 일체의 시도는 소위 말하는 <우상 숭배>일 뿐이다. 예수에게서 이미 진리가 완성되었다고 보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고정적인 구원론은 바로 반예수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우리의 <이름>이 고정관념이 아니라 변화 발전적인 <역사적 개념>이라면 사실상 우리의 이름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Erch Fromm)은 하나님의 이름은 역사적 개념으로서 인간이 생성 발전해감에 따라 그의 이름의 뜻이 달라지듯 신도 그 이름의 뜻을 달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고 말했다.

 

모든 인간의 종교적 교리, 도그마, 사상, 이념을 상대화 할 수 있는 <이름>을 가진 <주체자> 한 사람이 중요하다. 그러한 자기 정체성을 지닌 인간들끼리의 만남이 필요하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닌 공동체에서 믿는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 즉 야웨 하나님으로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박의 집>, 이집트에서 <해방한 자>이다. 야웨 하나님은 구체적인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여 인간의 문제 한가운데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활동하는 <역사의 신>이다. 이 역사의 신 야웨는 우리의 <이름>, <온전한 정신>, 즉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게 해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주적인 하나님>이다.

 

 

 

 관련기사

[신학의 해방 8] 인본주의적 자유종교운동의 한 예

[신학의 해방 7] 대변혁기의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주체사상

[신학의 해방 6] 소망의 신학

►[신학의 해방 5] 공통의 신학, 통일 신학의 모색

[신학의 해방 4] 메시아국가로 등장한 이북

[신학의 해방 3] 하향식 그리스도론의 문제점

[신학의 해방 2] 진리의 영

[신학의 해방 1] 참된 앎의 삼 단계

[신학의 해방, 서론] 신학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해석학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북의 ICBM에 문재인의 정체가 드러나다
No to THAAD & Stop the War Games!
미국 북에게 공식사과
문재인의 오판과 착각
련발적인 탄토탄세례, 《미국이 잘못 뉘우칠 때까지》
임동원, "문재인, 미국에 'NO'라고 말하라"
The Game Is Over and North Korea Has Won
최근게시물
코리아전쟁의 도발자는 누구인가 (31, 32)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8월 10일(목)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7일(금)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21일(금)
북 외무성, 선의로 방북하려는 미국인들에게 북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다
범민련 남측본부, 15일부터 홈페이지 운영재개
김종훈 “민중이 직접정치하는 당을 만들겠다”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29일(토)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8월 11일(금)
"조선반도판세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미 국무부, ‘북한 여행 규제 조치’ 예고
코리아전쟁의 도발자는 누구인가 (43)
Copyright ⓒ 2000-2017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