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해방 6] 소망의 신학 > 새 소식

본문 바로가기

본회는 동포들의 북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돕고자 북녘 매체들의 글을 "있는 그대로" 소개합니다. 이 글들이 본회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은 아님을 공지합니다. 

 
새 소식

재미 | [신학의 해방 6] 소망의 신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4-25 22:19 댓글0건

본문

 

 

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6]

 

소망의 신학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1932년 나치의 극심한 박해로 독일에서는 더는 교수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1955년 정년퇴직한 후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그 후 시카고대학의 신학부에서 죽을 때까지 조직신학을 강의한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1933년에 쓴 그의 저서 [사회주의의 결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에 종교의 정의가 인간의 근원(roots)으로부터 탈피하여 살려고 투쟁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란 하나의 종교운동이다.” (79페이지)

 

틸리히가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란 바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 문제 그리고 흙, 가족, 국가, 도덕적, 법적, 또는 종교적 전통 등등에 얽매어 사는 문제들을 말한다. 그는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인간이 당면한 현실적인 <요구>, 예를 들면 의식주 문제의 해결, 인권회복,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주 독립하는 문제, 전쟁과 질병, 재난, 등이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역설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 “영혼이란 무엇이냐?”, “종교란 무엇이냐?” “과연 내세란 존재하는가?” 등의 끝도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몰두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투쟁하는 것보다 인간이 당면한 현실적 요구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느냐에 몰두하는 것이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다룬 죤 듀이의 <종교심>에 대한 이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현재 제도적인 종교들이 추구하고 있는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회변혁운동>이야말로 <종교적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폴 틸리히는 위에 언급한 책에서 다시 지적하기를,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위한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은 사회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사회주의 정신을 가지고 투쟁해본 경험이 없는 자들이 아무리 떠벌여도 단지 밖에서 그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위 책 7페이지)

 

신학자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도 그 시대의 요구를 보고 구경꾼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이 직면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관자의 입장을 버리고, 반드시 결단하고 헌신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근로민중의 비인간적인 생의 상황을 보고도 냉담한 체 단지 구경이나 하려는 자들은 사회주의를 비판할 자격이 없으니 비판을 위한 비판을 중지하라는 것이 틸리히의 입장이다. 역사의 요구이며 시대의 당면과제인 노동자들을 비롯한 근로민중의 열악한 노동 현실의 문제, 불평등한 삶을 해결하지 않고는 단지 개인의 구원이나 받기 위해, 즉 틸리히의 용어를 빌리면, 단지 근원적 문제에나 몰두하여 기독교를 믿는다면, 그들의 신앙은 <예언적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비종교적>이라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틸리히는 위에 언급한 그의 책 152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기독교회가 포기해버린 사람들을 위하여 형식적이 이니라 실제로 봉사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여러 민족을 예언적 요구(prophetic demand)에 헌신케 함으로써 사망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하고 있다.”

 

대다수의 이남의 기독교인들은 신을 믿지 않는 이북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딱지를 붙이고 그들과는 상대도 하지 않겠다고 등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의 <예언적 요구>에 헌신하는 자들이면 누구나 종교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빈부 격차의 문제,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문제는 현시대의 <예언적 요구>이다. 이북이 주체사회주의 사회를 확립하고 이러한 일들에 헌신하고 있는 한 그들은 <실제로> 종교적 활동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 폴 틸리히가 지적한 <예언적 요구>란 바로 우리 인류가 지금은 그렇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더욱 바람직한 세상이 오길 기대하는 그러한 인류의 요구를 말한다. 비록 지금은 제국주의자들이 각처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지만,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미래가 오기를 기대하는 인류의 기대를 담은 요구가 바로 <예언적 요구>이다. 지금은 비록 독재정치에 억눌려 살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민주정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는 인류의 요구가 바로 <예언적 요구>이다. 지금은 비록 자본가들로부터 약탈과 억압을 받고 있지만, 생산의 담당자인 근로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요구가 바로 <예언적 요구>이다. 

 

이러한 <예언적 요구>에 맞게 1960년대와 70년대에 인천과 영등포를 비롯한 여러 공장과 회사, 등 산업현장에서 선교한 조화순 목사, 조승혁 목사, 죠지 오글 목사(오명걸), 등 산업선교회 목회자들의 경험을 예를 들어 <소망의 신학>을 논해보려고 한다. 이들 산업선교사는 산업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에 직면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신학적 좁은 견해는 차차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추상적이던 신학적 견해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을 직면하면서 처참하게 땅으로 떨어져 현실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명이 셋방을 얻어 겨우 살아가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노동자들도 많았다고 인천 동일방직에서 일한 조화순 목사는 지적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보고 그들의 신학적 견해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올리던 무수한 기도는 더는 이들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만 드린다고, 죄만 회개한다고, 그리하여 거듭난다고 노동자들의 현실이 전혀 달라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 필요한 것은 허무주의적인 절망, 즉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회복되어 <소망>을 갖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절실한 것은 먼지 속에서 육체를 병들게 하는 노동조건의 개선, 기아임금의 인상, 살만한 셋방을 얻어주는 일, 등이 더 시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존에 관한 보다 절실한 육체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단지 의식 수준에서만 죄의 회개, 거듭나는 문제, 내세관, 등에 관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먼지와 쇳가루를 마셔가며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우선 절실한 것은 신선한 공기였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임금인상, 주택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공장주들이 이익을 덜 보고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데 공장주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취하려고 할 때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자들이 모두 허무주의에 빠져 소망이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 현실을 개선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렵게 직장을 얻어 겨우 먹고 살며 가족까지 돌보아야 하는데 직장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이들 노동자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들에 필요한 것은 어떤 막연한 <소망>이다. 이들 노동자는 이 어둠의 장막을 걷어줄 한줄기 <소망>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동자를 구해줄 자가 누구인가? 오직 자신들 밖에 누가 있단 말인가? 산업선교에 참여한 목화자들은 이들 노동자들에게 공장의 주인은 물건을 생산해 내는 노동자 자신들임을 알게 할 사명을 갖게 된다. 노동자로 인천 동일방직에 취직한 조화순 목사는 1972년 인천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과 합심하여 노동자들의 복지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민주노조를 결성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동일방직 노조는 직원 복지문제 같은 데는 거의 관심이 없는 어용노조였다. 전 직원의 80%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의 권익문제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이런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마침내 여성노동자들이 명실상부한 주체가 된 민주노조가 출범하였다. 그러자 사측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민주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며  공권력 투입에 맞서 알몸으로 처절하게 저항하다 심지어 똥세례까지 받는 유명한 사건이 터졌다. 조화순 목사는 군사정권과 자본의 폭력성에 몸서리를 쳤다.
 

인천의 동일방직뿐 아니라, 영등포 등 여러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부당한 사측에 대항하여 노동쟁의를 벌였다. 이들 노동자는 차차 자신들이 종이 아니라 주인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주인이라는 주체의식을 갖게 되자 노동자들은 그들을 종으로 만들고 있는 직접적인 대상인 공장주를 상대로 싸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주인이라는 각성, 이 의식의 변화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였다. 또한, 조화순 목사를 비롯한 산업선교에 가담한 기독교인인 노동자들은 그러한 투쟁 한가운데서 만이 기독교의 핵심사상인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재생을 더 깊이 깨달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도 의미 없던 예수 탄생의 이야기, 산상설교, 비유, 예수의 설교, 십자가 이야기,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노동자들의 투쟁 한가운데서 그들의 인생의 해방 이야기로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이 노동자들의 인간 회복운동 때문에 산업선교사는 <사회주의자들>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조화순 목사도 3번의 옥고를 치렀다.

 

이들 산업선교사들은 옥고를 몇 차례 치르면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 속에 재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적 현실을 깊이깊이 생각하였다. 공장사고로 이름 없이 죽어가는 직공들의 죽음, 무수한 학생들과 진보적 인사들의 감옥에서의 죽음, 등을 직접 감옥에서 목격하면서 이들 산업선교사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하는 경험을 하였다. 한 산업선교 목회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죽음이란 그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에게나 공포로 생각되지만 죽음을 개의치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나 죽음이다. 정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분들에게는 죽음은 결코 죽음일 수가 없다. 영원한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죽으려는 자들에게는 사망이란 오히려 영원한 삶이며 행복이다.”

 

이들 산업선교사는 감옥에서 죽음을 극복한 무수한 코리안 청년들과 진보적 인사들을 보고 그들의 인생에 엄습해오는 <전율적 기쁨>을 느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의 그 뜨거운 <사랑의 정신>, 그 <해방의 정신>은 바로 전 세계를 구원할 십자가의 정신, 즉 부활의 정신임을 감격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산업선교사는 고난 중에서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준비한 자에게 엄습해오는 <소망의 기쁨>을 맛보았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고난 당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고난을 겪는 자들만이 현실참여를 통해서 변해가는 역사적 미래를 직감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현실을 개혁하는 혁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언제나 낙관적이고 소망에 부풀어 있음은 혁명운동 한가운데서 그들 자신부터 이미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 각성해가는 것을 알게 되며 그들의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 악의 세력들이 두려워하며 현실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역사적 주체자들인 이들 죽음을 극복한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역사의 부산물로 머물러 그 역사의 찌꺼기나 치우며 살지 않고, 그 역사를 개혁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주인은 일부 지배층들이 아니라, 바로 열심히 일하고 노동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는 노동자들임을 이들 산업선교사는 깨달았다. 그들의 인간 회복을 위한 노동투쟁 한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부활>과 <부활한 자의 십자가>의 변증법적 진리가 실현되리라고 믿게 되었다. 이들은 이 불가사의한 진리를 감옥에서 투쟁하는 가운데서 깨달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던 역사적 배경을 깨닫게 되면서 지금 산업선교사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 바로 예수의 때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길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처한 구체적인 역사의 산물이 십자가였듯이 지금 이들이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코리아의 역사의 산물이 바로 자신들을 비롯한 여러 진보적 인사들의 감옥살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시대가 요구한 십자가를 통하여서만이 부활이 임했듯이 이들의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감옥살이를 통하여서만이 역사의 부활은 임하고 만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들 산업선교에 가담한 목회자들이 감옥을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대에 사회주의자로 몰릴 위험성이 내포된 산업선교회에 투신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고의로 자진해서 십자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들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예수의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히 마땅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과 독재자들이 전 사회를 감옥화하는 그 속에서 감옥의 길은 지극히 당연히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이들 산업선교사는 감옥에 갇혀 정상과 비정상이 뒤바뀌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이 걷고 있는 이 길이 색다른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진 예수를 믿는 기독자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코리안으로서 해야 할 노동자의 해방,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코리안들이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대다수 코리안들이 당연한 일을 하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을 하는 산업선교사들이 비정상적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이 비정상이라면 정상적인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의 끝은 무엇이겠냐고 이들은 묻는다. 그런 인생이 얻는 최후의 승리가 무엇이겠냐고 이들은 자문한다.

 

 일반 사람들은 명에, 부, 권력, 혹은 다른 사람을 패배시켰을 때 그것을 승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생의 첫발부터 우리가 어느 쪽에 편들어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인간해방을 위해 살고 있다면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아무리 비참하고 실패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승리자라고 이들은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그의 공생애의 첫발부터 이미 승리자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사는 산업선교사들 자신들도 모두 승리자들이라고 이들은 믿고 있다.

 

엄청난 억압의 구조인 신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의 이남의 현실 속에서 민족이 마땅히 가야 할 민족해방의 길을 가려면 화려한 외세의 문명보다는 초라하지만 우리의 것을, 분단보다는 통일을, 독재보다는 민주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감옥에서 깨달은 진리이다. 외세의 주구 노릇이나 하며 살지 않고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면 이미 거대한 식민지 세력에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없다. 분단 하에서 안주하려 하지 않고 민족통일의 길을 택하게 되면 사상범에 걸려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독재자에 아부하며 살지 않고 민주정권 수립의 길을 택하게 되면 감옥행이다. 이들 산업선교사는 이 사실을 실생활 체험을 통하여 절감했다.

 

예수가 활동할 당시 가장 천한 하층계급의 편을 들어 그들의 인간해방운동을 벌이다 그 당시 지배세력인 로마, 헤롯당, 가야바로 대표되는 종교집단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었듯이 오늘날 코리아의 제국주의 세력과 독재세력에 대항하여 민중을 해방하려고 변혁운동에 참여한 코리안들이 투옥과 죽임을 당했지만, 그들이 바로 코리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이들 산업선교사가 그 답답한 감옥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크리스도의 깊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무수한 예언자들도, 예수도, 산업선교사들도 모두 별다른 인간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모두 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들이 다른 것은 위에 언급한 대로 인간의 평등을 믿고 억눌린 자들의 편을 들어 살았거나 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들도 모두 약한 인간의 의지력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했다. 무수한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난 날까지 저주하기도 하고 하나님에게 자신들을 죽여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예수도 십자가 위에서 <라마 사박다니>, 즉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쳤다.

 

산업선교사들도 감옥의 좁은 방에서 참을 수 없는 고독을 견딜 수 없어 몸부림쳤다. 이들도 가끔 우울증에 빠져 질식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더구나 감옥에 있는 동안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란 단지 암담한 소식뿐이었다. 이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가정형편인들 오죽했겠는가? 면회 오는 가족들의 핏기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얼마나 낙담을 했겠는가? 그리고 이들을 <빨갱이>로 모는 언론을 보면서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이와 같은 암담한 상황 속에서 이들도 때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맛보았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동료 친구 목사들은 큰 교회를 맡아서 잘 살고 명예도 누리며 살고 있는데 가족들이 제대로 먹지 못해 핼쑥한 얼굴을 한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인간해방운동인 노동자 운동을 <빨갱이>로 낙인 찍어 온갖 박해를 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 예수가 병자를 고쳐주었더니 그를 가리켜 귀신의 두목 바알세블에 홀려 그런 일을 한다고 지배층들이 비난했듯이 이남의 지배층들은 산업선교회가 붉은 귀신에게 홀려 노동자운동을 한다고 비난을 했다.

 

사실상, 이들 산업선교사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면 버림받았다는 느낌일 것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 제자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았다고 생각될 때, 그 무시무시한 고통, 고뇌 그리고 고독을 참을 수 없었다. 사실상 죽음의 공포는 죽음이 가져오는 육체적 고통에서보다 <버림받았다는 공포>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어린 자식들에게 무능하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의 조소하는 눈초리도 느끼겠고 더구나 동료 기독교인들로부터 실망을 주는 말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 동지들로부터 배신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오는 버림받았다는 절망의 공포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을 극복했을까?

 

절망한 이들은 다른 한편에서 너무나 감격스러운 인간관계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옥에 혼자 앉아 있지만,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이들은 결코 혼자 감옥에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아내 그리고 어린 자식들도 그와 같이 싸우며 그와 같이 변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들의 어린 자식들이 이미 아빠 혹 엄마, 언니, 누나가 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지 조금씩 그 의미를 깨닫고 기특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코리아의 혁명 과정에 참여한 분들은 각자의 한 인간이 이미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은 물론 부부관계가 변하고 자식들과 형제자매들이 새로운 인간들로 성장 발전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가정이 변할 뿐 아니라, 동료 목사 중 상당수가 그들을 면회하여 사식을 넣어주고 격려해주었다. 교회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을 제거해준 극적인 일들은 노동자들이 밤일하여 번 잔업수당 중 1,000원 혹은 2,000원, 때로는 과일 몇 개를 감옥에 들여보내 주기도 했다. 이 <사랑의 힘>은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에너지이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는 미래의 조국의 청사진이다. 노동자들이 밤일하여 번 박봉의 돈으로 사식을 넣어주는 일,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진귀한 사랑의 불꽃이었다. 이런 사랑으로 인해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치유될 수 있었다.

 

과부의 동전 세 푼에 해당하는 이 노동자들이 넣어준 사식을 먹는 산업선교사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눈물로 사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 눈물 섞인 사식의 맛 속에서 그들의 <소망의 신학>은 싹터 나왔다. 이들 산업선교사는 예수는 왜 학식 있고 유명한 귀족 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택하지 않고 무식하고 천한 어부들과 세리들 중에서 택했을까에 대해 의문을 던져본다. 전 인류를 구원하겠다던 하나님의 아들이 단지 무식한 12명이면 충분했단 말인가? 그는 치밀한 계획 속에 수십만의 엘리트들을 훈련해도 세상을 구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무식한 소수의 제자에 의해서 예수 사랑의 정신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기독교의 교리 중 가장 핵심 되는 교리 하나가 <종말론>이다. 종말론이란 오랫동안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 즉 <끝의 교리>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독일 신학자 몰트만(Moltmann)은 그의 저서 [소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에서 마지막 일들에 관한 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이 오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한 결코 마지막의 때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악인과 선인이 구별되고 악인은 심판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는다는 의미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조하는 일에 참여해야만 그러한 심판의 때를 불러올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eschatology, eschato(끝) + logos>이란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면 그리스 말, <logos>란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을 뜻하기 때문에 끝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위책17페이지). 몰트만에 의하면 미래란 현재의 계속이며 정기적인 재발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논리적인 진리(log-ical truth)>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들> 속에서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론>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미래 그 자체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명백한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 <현실의 미래성>과 그 <미래의 가능성>, 그리고 그 <미래를 극복하는 힘>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몰트만은 주장하고 있다. (위 책 17페이지). 따라서 기독교는 현재를 변혁하여 현재를 개혁해가는 중에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산업선교사들이 이남의 역사적 현실 한가운데서 현재를 개혁하며 현실을 극복하려고 헌신하는 가운데 <소망의 신학>을 말하는 것은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과 일치한다고 보겠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선교사들이 표현하고 있는 <소망의 신학>은 바로 몰트만이 말하는 <논리적 진리>, 즉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을 대표하고 있다고 본다. 신학이 만약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을 다루지 않는 학문이라면 이미 <논리적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란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역사적인 현실적 문제의 핵심 속에 참여하여 그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가운데 미래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종말론>이란 <열정적 고통>이며 지금 그리고 항상 그곳에 존재하는 현실 자체인 메시아에 의해 불붙게 되는 <열정적 갈망>이기 때문에 종말론을 중요한 교리로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결코 <내면적인 세계의 종교>도 아니며, <외부세계의 종교>도 아니라, 바로 <소망의 종교>라는 것이다. (위 책16페이지). 산업선교사들이 지금 여기서 항상 고난받고 있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랑의 공동체>를 열정적으로 소망하며 역사적 현실을 개혁해가는 것은 결코 내면적인 죄나 용서받고 심리적인 평안함이나 받기 위함도 아니며, 더구나 저세상의 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그리고 지금 인간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점에서 <로고스>를 실천하고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보았다. <그리스도>란 여기서 그리고 지금 항상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보면 그 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 시대의 <로고스>, 즉 현실이었듯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산업선교사들을 비롯한 무수한 코리안들이 오늘날 코리아의 로고스, 즉 현실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이란 산업선교사들의 투쟁이 말해주듯 이 세상에서 도피하고 저 세상을 갈망하는 도피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미래는 단지 역사적 미래이기 때문에 고난받는 인류가 투쟁을 통해 건설할 <사랑의 공동체>야말로 미래의 교회 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부활 속에서 <하늘의 영원>을 소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가 서 있는 바로 <지상의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를 <지상의 소망>으로 믿듯이 산업선교사들을 비롯한 무수한 코리안들의 옥중 고통을 <코리아의 소망>으로 믿는 것이다. 지금 독재정권 아래 감옥화되어가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힘차게 활동하는 코리안 로고스들에 의해 세계평화의 날은 반드시 이 땅에 임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 민족에 떠맡긴 십자가이다.

 

김구 선생의 말 같이 

 

“우리 민족이라고 어찌 옛날 희랍민족이나 로마민족이 한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과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또 인류 전체가 의좋게 잘 살게 하자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그것을 공상이라고 일컫지 마십시오. 아무도 하지 못했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입니다. 이 큰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 놓은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 민족은 비로소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고 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본 것이 될 것입니다.” ([백범 일대기], 이원모 저 16페이지)

 

김구 선생은 우리 민족이 떠맡은 세계사적 사명을 이미 남북이 둘로 갈라질 때부터 앞을 내다보고 예언한 것이다. 무수한 코리안들이 감옥에서 투쟁하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이 분단을 해결하기 위함인 것이다. 왜냐면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외세와 그 추종자들의 반 인간적, 반민주적, 반민중적, 더 나아가 반민족적 정책 때문에 근로민중들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생존이 위협을 받고, 독재정권이 존속하게 되고, 이산가족의 슬픔이 지속하고, 국가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고, 더 나아가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 남북분단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평화를 이룩하는 길은 세계를 통일할 사명이 우리 민족에 부여되었다는 의미이다. 조국분단의 골고다 언덕 위에 선 저 험한 십자가, 무수한 선량한 코리안들의 피를 흘리게 했고, 지금도 흘리고 있고, 미래에도 흘려야만 하는 저 잔인한 십자가, 우리 남북 민족이 세계 인류를 위하여 대신 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세계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이것이 몰트만이 말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부활>과 <부활한 자의 십자가>의 변증법적인 진리이며 산업선교사들이 본 소망의 신학이다. 

 

 

 관련기사

►[신학의 해방 5] 공통의 신학, 통일 신학의 모색

[신학의 해방 4] 메시아국가로 등장한 이북

[신학의 해방 3] 하향식 그리스도론의 문제점

[신학의 해방 2] 진리의 영

[신학의 해방 1] 참된 앎의 삼 단계

[신학의 해방, 서론] 신학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해석학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호평받는 《보통강》, 《별무리》액정TV, USB기억기
[기자회견]"온 겨레가 총궐기하여 한미합동 북침전쟁연습 저지하자"
"그거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북 민화협, 만고역적 박근혜무리에 역사의 준엄한 철추를 내려야
6.15남측위 긴급성명, ‘모든 군사적 행동 중단’ 촉구
헌정사상 최초, 현직 대통령 피의자 입건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북한의 눈으로 남한을 한번 보자!
최근게시물
<개벽예감 240> 미국의 핵무력증강은 패망 자초할 경거망동
여성들의 모습에 비낀 사회상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3월 19일(일)
《가짜 뉴스》
Trump Inherits a Secret Cyberwar Against North Korean Missil…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3월 15일(수)
조선외무성 대변인 공화국은 핵무기금지협약협상을 위한 유엔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언급
“사대매국적 ‘사드합의’ 원천무효!”
DUBIOUS Story of Kim Jong Nam’s Death
법령 《세금제도를 완전히 없앨데 대하여》
[2017 한반도 정세] 1. 북한, ICBM을 언급하다
헌정사상 최초, 현직 대통령 피의자 입건
Copyright ⓒ 2000-2017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