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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기록엔 파월국군의 양민학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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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흥노 작성일15-04-29 10:0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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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기록엔 파월국군의 양민학살이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자격이 있을까?

 

 

이흥노(재미동포전국연합 논설위원)

 

 

 월남전쟁은 1964년에 시작돼서 1975년에 끝났으니, 10여 년이 넘는 긴 전쟁이었다. 국군은 4차에 걸쳐 월남에 파병됐고, 그 수는 모두 31만3천 여 명에 이른다. 파월장병 중에서 불행하게도 4,0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만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고엽제 (화학무기인 오랜지병) 환자를 합하면 부상자는 아마도 수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파월국군 장병 중에 8명의 실종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다. 어떤 전쟁이든 실종자나 포로는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실종자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이것은 적은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이에 대해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실로 비극 중의 비극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실종자나 포로를 끝까지 찾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데 말이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대부분 식민지가 독립국이 됐으나 월남은 여전히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식민지상태의 예속에서 벗어나 완전하고 독립된 자주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호찌민 민족주의자의 구호에 호응한 월남인들은 프랑스와 8년간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기로 무장된 프랑스 군대가 디엔비에프 전쟁에서 완패함으로써 월불전쟁은 1954년에 막을 내렸다. 흥미롭게도 월불전쟁에서 프랑스 군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미국이 이제는 프랑스를 대신해 월남의 실질적 지배자로 변신했다.

 

 1954년에 체결된 제네바협정은 전 월남 총선을 통해 단일 정부를 구성하게 돼 있었다. 월맹 (북월남)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 총선을 추진하겠다고 나섰다. 반대로 미국의 조종하에 있는 남월남은 이를 단연 거부했다. 미국은 독자적 반공 정부를 남월남에 세우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이 전체 월남 총선을 거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총선거는 곧 공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남월남을 미국의 괴뢰에 불과하다고 보는 북월남은 프랑스 군대를 몰아낸 것과 같이 미군도 몰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지전이 있기는 했으나, 남북 월남은 59년 중순부터 정규군에 의한 상호 전투가 시작됐다.

 

 미국은 북월남에 대한 폭격과 확전을 위해 비열한 가짜 통킹만사건 (1964년)을 벌인다. 이를 빌미로 미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파월미군은 제공권을 장악한 데다, 막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10여 년의 값비싼 전쟁을 치르고도 1975년, 끝내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월남을 떠났다. 전쟁 기간 내내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주월미군은 네이팜탄(대량살상무기)와 고엽제 (화학무기)를 무차별 퍼붓고 뿌려서 민간인의 희생은 수백 만에 달했다. 이것은 미국이 벌인 유일한 '초토화 작전'으로 한반도와 월남에서만 적용됐다. 바꿔 말하면,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전쟁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수도 없이 희생됐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과 한국군이 가장 많이 파견됐고, 또한 대부분의 학살이 두 나라 군대에 의해 자행됐다. 미군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총 18건의 민간인 학살이 보고됐다. 그런데 그중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8건이나 된다. 월남 정부 조사발표에 의하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된 월남 민간인은 5천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미군에 의해 감행된 <미라이 학살사건> (3/16/68)은 대표적 양민 대량 학살이다. 이것은 세계적 특급 뉴스가 됐을 뿐 아니라 미국의 반전운동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끔찍한 사건이다. 미 육군소위 케리 (Kelly)의 지시에 의해 무려 350-500명 추산의 여성과 미성년이 대부분 총살됐다. 희생자들 가운데는 성폭행, 고문, 시체 절단 등의 잔인한 짓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군이 자행한 대량학살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풍니. 풍넛 학살>(2/12/68)은 한 마을 전체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 무고한 주민 74명(어린이와 여자가 대부분)을 무참하게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후에 미군 사령관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으나 한국군은 오리발을 내밀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산천초목도 무서워 사시나무 떨 듯했다고 하는 파월국군의 성폭행, 절도, 강도, 구타는 다반사였다고 한다. 종전 후 월남 곳곳에 50-60개에 달하는 학살기념비가 세워졌는데, 실제로는 기념비가 아니라 <증오비>라고 한다. 어떤 <증오비>에는 "하늘을 찌르는 죄악, 만대를 기억하라"고 쓰인 비문이 있다고 한다.

 

 불법으로 강탈한 정권이라는 떳떳치 못한 약점 때문에 박정희는 미국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과감하게 해댔다. 미국의 총애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철저한 반공정책을 수행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군사정권 통치에 거추장스러운 사람이면 빨갱이라는 모자를 뒤집어씌우고 여지없이 투옥, 처형했다. 이것은 미국에 보여주기 위한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월남파병이 미국을 흡족하게 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미국에 국군 파월을 제의했으나 거절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제의를 존슨 대통령이 거절한 이유는 북한의 도발과 소련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끈질긴 애걸복걸 끝에 국군 파병이 허락됐다. 외화벌이를 위한 파병이라고 알려졌으나 이것은 부차적 문제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미국의 돈으로, 미국의 무기로 무장된 파월국군을 가리켜 "총알받이" 혹은  "용병"이라는 따가운 비판이 국내외에서 일었다. 파월장병과 파월기술자들은 숱한 사회적 문제를 남기고 종전과 동시에 월남을 떠나갔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버리고 달아난 수많은 어린 혼혈아들이었다. 아버지도 없이 자란 혼혈아들은 지금 모두 40대에 접어들었다. 무엇 보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과 그나마도 전쟁에서 지고 줄행랑을 쳤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반만년 우리 역사에 단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얼룩진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좀 늦은 감이 있어도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하노이를 방문해서 깊이 사과하고, 양국 간 친선 화해를 다졌다는 것은 참으로 보기에도 좋고 옳은 일을 했다는 평가들을 한다. 그러나 이를 두고 파월장병들과 일각에서 항의하고 비판했다는 것은 실로 낯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국립묘지에 안장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수없이 파헤치는 몰상식한 일도 서슴없이 해대는 판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말이다. 마침 이번에 처음으로 파월국군에 의한 학살 생존자들이 서울을 방문해 산 증언을 한다. 이들에게 진정한 사과의 뜻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행했던 과거사를 우호 친선의 역사로 아로새길 절호의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사과, 환영, 친선이 아니라 과거 적대관계의 재현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꼴을 보여주고 말았다. 학살 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란'(64) 씨와 '탄'(55) 씨는 '번'(53) 호찌민시 전쟁박물관장과 함께 서울 소재 평화박물관(관장 이해동 목사)의 초청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파월군인단체와 고엽제전우회원 수백 명은 이들의 행사장에 예외 없이 나타나 확성기를 통해 훼방을 놓고 협박까지 했다. 이들은 서울의 초청자 측을 "좌경"으로 몰았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조작, 허위"라고 외쳤다. 심지어 초대된 학살 생존자들을 "베트콩"이라고도 했다. 이들은 "참전영웅을 학살자로 몬다"고 고성을 질러대기도 했다. 진짜 영웅이라면 자신을 영웅이라 하지도 않았을 테고 생떼를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 학살 생존자들은 숙소에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사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도 참가해 위안부 할머니들과 같이 일본의 반성을 촉구했다. 한쪽은 한국군, 다른 쪽은 일본군이라는 가해자만 달랐지, 같은 전쟁의 피해자라는 비극의 주인공들이기에 쉽게 서로 공감하며 아픔을 나누기도 했다. 이들은 귀국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잘못된 역사와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 월 양국이 평화의 길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그 길을 가는 데에는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올바를 성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요지의 뼈있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우리가 일본을 향해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한 월 두 나라는 공통의 역사와 운명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 분단, 그리고 냉전이 가져다준 피어린 전쟁을 경험했다. 특히 두 나라 비극의 역사에는 모두 미국이 관여돼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유사점을 지적하면, 프랑스의 패배로 열린 제네바협정 (1954년)에 따라 전 월남 총선이 실시돼야 했으나 무산됐다.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남북 총선이 아니라 남한 단선 (1948년)이 치러졌다. 막후에는 역시 미국이 깊숙이 개입됐었다.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 후, 3개월 내에 했어야 할 평화협정 체결도 무산시켰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이 월남 확전을 위해 조작한 통킹만사건 (1964년)은 아직도 의혹이 풀리지 않고 있는 천안함사건 (2000년)에 비유할 수도 있다.

 

 월남전쟁은 우리에게 남다르고 특별한 교훈을 남겼다. 양민학살은 물론이고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었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독일의 전후 태도에 대해 너도 나도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본다. 그러나 자신이 마땅히 월남 국민에게 해야할 사죄를 거부한다면 이율배반이 아닌가. 오히려 진실을 덮고 부정하는 데 급급해서야 어떻게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 할 수 있겠나 말이다. 우리는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전쟁을 치뤘고 남의 나라 전쟁에 침략군으로 참전했던 부끄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이 전쟁역사는 우리에게 민족의 평화 번영, 나아가 세계평화에 기여해야 할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하달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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