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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제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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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환 작성일15-03-22 13:4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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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제3회)

 

 

편집국

2015-03-20

 

 

최근 김현환 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이 발표한 논문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은 길이 관계로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하고 있다. 

 

이 논문은 주체사상이 사람중심의 철학이기 때문에 인간관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찰방식에서도 사람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세계와 사물현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철학이 주체철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김 소장은 최근에 이남의 일부 철학자들이 주체사상의 인간관에 대하여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답하면서 주체사상의 독특한 인간론을 해설하고 있다.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제3회)

 

 

 

김현환(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인간론에 대한 결정론과 비결정론

 

일부 학자들은 주체사상이 인간의 활동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기초하여 설명하는 것은 <비결정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체사상이 과연 유물론적 <결정론>이냐 아니면 <비결정론>이냐 하는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인간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며,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는 주체사상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러한 오해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주체사상이 철학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을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이해한 점이다. 과거의 철학사를 돌이켜 보면, 유물론은 일반적으로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즉 저급한 물질에서부터 고급한 물질 모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속성, 성질에 주되는 주의를 돌렸다.

 

이에 반하여 관념론은 고급한 존재에 있는 속성, 성질, 예를 들면, <의식>, <생명>과 같은 것에 주되는 관심을 돌리면서 그것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였다. 그리하여 관념론자들, 특히 생의 철학자들은 <생명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생의 철학>이란 곧 <생명의 철학>이라는 뜻과 같다. 생의 철학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근원적 방향>은 생명 그 자체의 방향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에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찾았다.

 

생의 철학자 니체는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생물학적 생명, 생물학적으로 생존하려는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로 표현하면서 <권력에의 의지>에 의해서 <생명의 방향>이 새롭게 설정된다고 믿었다. 니체는 바로 이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 사상은 주저인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집중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다음으로 생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쇼펜하우어의 <생존의 의지>나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더욱 개악시켜 모든 생명물질의 근저에는 <생의 충동>(엘랑비탈)이라는 것이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생의 충동>에 의해서 이른바 <창조적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보고 <생명>을 비물질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와 같이 생의 철학자들은 생명을 단지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으로만 이해하고 이 생물학적 생명, 육체적 생명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함으로써 생명을 왜곡했던 것이다. 이것이 관념론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으로 생물학적 생명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생의 철학 주장을 반박하였다. 마르크스는 <생명>을 신비한 것으로 보지 않고 <물질의 존재방식>으로 보았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이나 [자연변증법]과 같은 저서들에서 “생명이란 단백질의 존재방식이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단백질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생명은 단백질을 이루는 “화학물질들의 부단한 자기갱신”이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란 신비한 것이 아니라 단백질이란 특수한 <물질의 존재방식>이라는 점을 엥겔스는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생명의 물질의 존재방식, 생명의 물질적 근원 자체를 지적했을 뿐,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규정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못했다.

 

주체철학은 처음으로 <사회정치적 생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사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사는 존재이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살며 발전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자기의 요구를 자신의 사회적인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사회적인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가 <자주성>으로 표현된다. 또한, 그러한 요구를 실현하려는 사회적인 생활능력이 <창조성>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생명활동을 자체로 규정하는 특성은 <의식성>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표현된다. 사람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져야만 사회정치적 생명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살며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주체철학은 사람이 <자주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노예적 굴종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사회적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간다. 사람이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가는 그 자체는 외부환경의 요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환경의 제약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명으로서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사회적 생활력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 자체는 인간 자체의 <생명의 요구>로 된다. 즉 그것은 인간 자체가 살며 발전하기 위해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요구로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을 객관세계를 반영한 주관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생명체의 <생명의 요구>이고 이 요구를 실현하는 <사회적 생활력>이다. 그러므로 자주성과 창조성은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로 된다.

 

그런데 인간의 모든 활동의 궁극적 원인은 사회의 <경제관계>에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이다.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엘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활동은 언제나 뇌수, 즉 의식을 경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충동에 불과하다. 이 충동의 충동, 그 충동을 일으키는 배후에 있는 근원적 충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의 경제관계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사람이 <사회관계>, 그중에서도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기 때문에 경제관계로부터 인간의 활동 요구와 목적이 나온다고 보았다. 물론 사람이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자기의 활동에서 사회의 경제관계에 의해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땅히 자기의 활동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관념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장 발전된 존재,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 자기를 제약하는 경제적 관계 자체도 지배하고 개조하기 위한 활동을 벌려 나간다. 따라서 경제관계를 포함한 모든 사회관계와 자연을 지배하면서 살며 발전하려는 인간의 요구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가장 발전된 존재에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요구이다. 따라서 이 요구 자체는 결코 경제관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인자>가 아니라, 사회적 생명체에서 객관적으로 나서는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이다.

 

인간 자신의 창조적 생활력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는 인간 밖에만 있고 인간 자체에는 없다고 보는 것은 일면적 이해이다. 지난 시기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은 인간 활동의 <물질적 기초>를 밝혀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공헌을 하였고, 또 그것은 진리이다. 관념론자들은 사회의 경제관계, 물질적 기초와 동떨어진 <주관적 자의>, <주관적 정신>에 의해서 인간 활동을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관념론적 결정론>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사람의 활동에서 사회적 물질적 기초인 경제관계에 의한 제약을 시인하고 그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가장 발전된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보고 있다. 이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살며 발전하려는 요구 자체는 생명 자체의 객관적 요구로 되기 때문에 이러한 <자주적 요구>와 <창조적 능력>이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결정인자>로 된다는 것을 주체사상은 과학적으로 밝혔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에 기초해서 인간의 활동을 설명하는 것이 결코 <비결정론>이거나 <관념론적 결정론>으로 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적 존재>인 동시에 객관적인 <물질적 존재>이다. <사회정치적 생명체>도 어디까지나 <물질적 생명체>이다. 물질적 생명체로서 살며 발전하려는 인간의 요구는 생명 자체의 객관적 요구로 나선다. 그러므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은 인간 활동을 규정하는 요인으로 된다. 따라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에 기초한 인간 활동에 대한 설명방법이 결코 유물론을 떠난 <비결정론>으로 될 수 없다.

 

이러한 주체사상의 결정론을 정확히 이해해야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활동을 설명하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와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주체사상의 고찰방법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변증법에서는 보통 사물들의 <연관>으로부터 그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운동>을 파악하고, 이 운동을 통해서 <운동의 담당자>를 알아내는 고찰방식이 지배적이었다. 지난 시기는 모든 사물이 상호 고립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형이상학의 주장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변증법적 이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연관>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상호작용이야말로 <운동>이며, 바로 이 운동이 모든 사물의 <질적 표현>이니까 운동을 통해서 이 운동의 담당자인 <사물>을 알 수 있다고 과거의 변증법은 이해했다.

 

그러나 주체사상은 우선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기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서 <운동>을 하고, 이 운동을 통해서 인간과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고 개조하는 활동을 벌여나간다고 인간의 활동을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인간론으로부터 나오는 <인간의 활동>에 대한 고찰방식이다.

 

사실상, <사물>이 있고서야 그 <운동>이 있고, 이 운동이 있고서야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이 있으며, 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상호관계>가 맺어진다고 보는 주체사상의 고찰방식이 더 철저한 유물론적 고찰방식으로 된다. 주체사상의 인간론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과 그 진수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게 되면 주체사상의 다른 내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끝)

 

 

연재

► 주체사상의 과학적 인간론 (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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