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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역사관의 확립 [2부] 새로운 역사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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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4-08-23 09:5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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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역사관의 확립

[2부] 새로운 역사관(하)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체사관이 <역사적 진보의 기준>을 사람, 민중에게서 찾음으로써 역사발전의 <객관적 기준>인 <생산방식>을 무시하는 관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수준>을 <역사적 진보의 기준>으로 보았다. 한편, 주체사관은 <역사적 진보의 기준>을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수준>으로 보고 있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결국 사회적 운동인 역사적 운동은 본질에 있어서 <주체의 운동>, 즉 <사람의 운동>이다. 생산력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재부>와 <사회적 관계>는 다 주체인 사람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운동, 발전은 본질에 있어서 <주체의 운동, 발전>이고, 이러한 <주체의 발전수준>은 그 <속성의 발전수준>에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하면, 이 주체의 발전수준은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수준>에서 표현된다. 그래서 주체사관은 역사의 진보적 기준을 주체인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생산력>도 사회적 진보를 측정하는 하나의 척도로 된다. 사실상 사회가 발전할수록 생산력은 더욱 더 발전한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사회적 진보를 재는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지금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생산력 수준은 사회주의 나라들의 생산력 수준보다 훨씬 높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제도>가 <사회주의 제도> 보다 더 발전된 제도라고 말할 수 없다. 역사발전의 견지에서 볼 때, 사회주의 제도가 자본주의 제도 보다 더 발전된 제도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수준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더 높다. 이것은 결국 <생산력의 발전수준> 하나만 가지고는 사회제도를 평가하는 가장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척도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사회발전을 평가하는 데서 기본을 주로 <물질경제 발전>으로 보고 사회발전 과정의 기초를 <물질적 생산>에서만 보는 유물사관으로는 역사발전 자체도 올바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주체사관은 사회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발전되어 나아감에 따라서 생산력을 비롯한 <물질적 재부>도 창조되어 나가고, <문화적 재부>도 창조되어 나가고, 그리고 <사회관계>도 역시 개변되어 나간다고 보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수준>, <정치제도의 발전수준>, <문화의 발전수준>은 모두 다 <주체인 민중의 발전수준>에 의해서 규제된다고 주체사관은 보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발전의 수준>은 결국 <주체인 민중의 발전수준>이다. 그런데 이 민중의 발전수준은 민중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자주의식의 수준>과 <창조적 능력의 수준>에서 표현되고, 또한 주체인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객관화된 <생산력의 수준>, <물질적 재부의 수준>, <문화적 재부의 수준>, <사회관계, 사회제도의 수준>에서 표현된다.

 

<생산력의 발전수준>이라는 것은 결국 주체인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이 객관화된 물질적 수준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산력을 포함한 물질적 부의 수준, 문화적 부의 수준, 사회관계, 사회적 제도의 발전수준을 다 집약적으로 표현한 척도가 바로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수준>이다. 즉 경제, 정치, 문화, 사상의 발전수준을 다 종합적으로 표현한 척도가 바로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수준>이다.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에는 해당한 사회제도가 이룩한 모든 성과와 모든 가치가 종합적으로 담겨지게 된다. 생산력의 발전수준에는 주체인 민중의 창조적 능력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까 생산력의 발전수준이라는 것은 결국 주체인 민중의 창조적 능력이 자연에 대한 관계에서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표현해 준다.

 

다음으로, 사회에 대한 관계에서 주체인 민중의 <창조적 능력>은 사회를 개조하는 <변혁적 능력>, <정치적 능력>을 역시 표현해 준다. 사회의 사상의 발전수준은 바로 민중의 <자주의식>의 발전수준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주체인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수준>은 사회발전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진보의 성과들을 집약적으로, 종합적으로, 보편적으로 표현하는 척도로 된다. 따라서 <역사의 진보의 기준>을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수준>에서 찾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의 차이를 알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과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지금의 사회주의 사회를 보면, 비교적 노동시간이 길다. 그리고 아직까지 힘든 <육체적 노동>이 남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 자체가 <창조적인 과정>이다. <사회주의의 노동>은 노동자들의 <지적 계기>와 <육체적 계기>를 더욱 더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은 생산력과 기술의 발전수준이 낮지만 사회주의 하에서 기술의 발전방향, 기술의 공정방향이 노동자들을 힘든 노동에서 더욱 더 해방하는 데로 지향되고, <생산과정>에서 그들의 육체적, 지적, 계기를 조화롭게 결합시키어 그들을 더욱 더 전면적으로 발전된 인간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설사 노동시간이 짧더라도 <소외된 노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손상시키는 노동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아직 노동시간이 길더라도 인간 자신의 <자주적 본질>을 발전시키는 노동이고, 인간 자신을 더욱 더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노동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하의 노동과 사회주의 하의 노동은 그 성격상 질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자주의식>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적, 사상문화적 조건들이 다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아직은 사회주의 하에서의 노동시간이 길지만 노동자들의 <자주의식>을 높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자본주의 사회에 비하여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창조적 능력>을 높이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북의 사회주의 사회는 교육의 천국이다. 전반적인 12년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있으며 사람들이 나서부터 죽을 때 까지 계속 자기 발전을 위하여 연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북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창조적 능력을 끊임없이 높여 나갈 수 있다.

 

그러면 이북 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소외된 노동>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노동과정이 소외되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수단과의 결합방식>이 자본주의 사회와 서로 다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주인이니까 주인으로서의 생산수단과 결합되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어 있지 못하고 단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있으니까 노동자가 자본가의 <임금노예>로서 <생산수단>과 결합되어 있다.

 

노동과정 자체의 기술적 측면을 놓고 볼 때, <노동과정>이 같은 조작을 계속 반복하기 때문에 <단조로움>을 피할 수 없고, 그로인하여 결국 노동과정이 창조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술적 측면에서 사람들이 계속 육체적으로 쇠잔하게 되고 <지적 발전>이 이룩되지 못한다. 이북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술발전 과정 자체가, 즉 노동과정 자체가 사람들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노동을 피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고, 기술도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북에서는 노동과정 사이 사이에 오락 프로그램도 있고, 악기를 비롯한 특기를 배우는 시간도 있으며, 스포츠를 즐기는 시간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이 더욱 더 기계화 될수록 사람들의 육체적 에너지, 정신적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짜내는 방향에서 기술이 발전되고 기술공정이 짜여져 있다.

 

한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지적인 계기>와 <육체적 계기>를 조화롭게 결합시키겠는가 하는 방향에서 기술공정이 짜여 있다. 이북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기계 하나를 설계하는 데서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겠는가, 사람들의 육체적, 지적 에너지를 쇠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그것을 건전하게 발양시키면서 그것의 발전을 보장하겠는가 하는 방향에서 기계가 설계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사회의 경험을 보면, 노동자들로부터 최대한의 노동력을 짜내어 <고율 이윤>을 획득하는 방향에서 기술공정이 발전되어 왔다. 인류의 정상적인 기술발전은 인간의 육체적, 지적 발전을 발양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북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사회주의 제도가 확립되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은 청산되지만 아직 그 차이는 남아 있다. 이 차이를 없애는 근본방도는 <문화혁명>이며, 온 사회의 <인테리화>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란 <기능노동>과 <무기능 노동>의 차이, <복잡노동>과 <단순노동>의 차이이다. 모든 사람들을 다 기술기능과 과학지식 습득에서 대학졸업 정도 이상의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이북 사회주의 정부와 당이 내세운 <온 사회의 인테리화>의 과업이다. 그래서 온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대학졸업 정도 이상의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당면과제이다. 이 과업이 완수되면 모든 사람들이 임의의 장소에서 인테리가 할 수 있는 복잡노동, 기술노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기술혁명>을 통하여 사람들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여 노동의 육체적 계기와 지적 계기를 조화롭게 결합시켜 사람들을 <전면적으로 발전된 인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업이다. 이러한 과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이북 정부와 당은 자동화, 로보트화, 전자계산기화에 더욱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술의 일반적인 발전방향을 보면, 지난 시기에는 <생산물>을 만드는 데 노동자의 <육체적인 조작과정>이 기본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물을 만드는 데서 실지로 생산물이 생산되어 나오는 과정은 아주 짧은 시간이 조요된다. 지금은 설계를 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것이 기본과정으로 되고 있다. 앞으로 기술노동,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인원수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인원수보다 훨씬 더 많아지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산업, 공업에 종사하지만 그곳에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기술노동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수가 더욱 더 많아지고 있다. 이것이 현대 생산발전의 방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발전 자체의 요구로부터 기술노동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지만 이 사람들이 다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이 다 자본가에게 착취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자본가에게 착취를 받는 <노동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노동이 설계를 하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착취를 당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즉 그들의 <잉여노동>이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기 때문에 그러한 노동과정 자체도 근본적인 성격상 소외된다.

 

한편, 이북 같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의 육체적 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그들의 노동이 근본적인 성격상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는 데 <자본주의의 노동>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 그 자체 하나만 보거나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것만 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자주의식>을 높일 수 있으며, 더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면적인 이해이다.

 

위에서 시도한 여러가지 분석을 종합해 볼 때, <생산력의 수준>이 아니라, <주체인 민중의 발전수준>,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전 수준>이 <역사적 진보>의 가장 보편적이고,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기준으로 된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진보를 가장 올바로 보는 관점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다음으로,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체사관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사회발전의 동력>을 찾지 않고, 또한 <계급투쟁>을 사회발전의 <추동력>으로 보지 않고, <민중>에게서 <사회발전의 원인과 동력>을 찾고 있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계속 반복하여 강조했듯이, 유물사관은 역사발전 과정을 <생산방식>의 교체과정으로 보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사회발전의 원인이 있고, 다음으로 이 모순을 반영해 일어나는 <계급투쟁>에 사회발전의 동력있다고 이해했다. 물론 이 관점은 사회발전의 일정한 <원인>과 <동력>을 설명하는 데 합리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역시 중대한 제한성을 갖고 있다. 우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즉 <발전된 생산력>과 <낙후한 생산관계>와의 모순에 사회발전의 원인이 있다고 할 때, 생산력과 생산관계 그 자체는 아무런 <요구>나 <의욕>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유물사관은 이 모순이 결국 생산력의 발전을 보장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지향하는 <사회세력>과 <낡은 생산관계>를 그대로 계속 고수하려는 <사회세력>간의 모순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사회발전의 원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새로운 사회셰력>과 <낡은 사회세력>간의 모순이라고 유물사관은 해석했다.

 

그런데 현실적인 역사과정을 볼 때, <새로운 사회세력>과 <낡은 사회세력>간의 모순,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예를 들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모순이 과연 <사회발전의 원인>으로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선다. 물론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 모순이 없다면 자본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변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의 모순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되는가, 아니면 <조건>으로 되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지만 아직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아무리 착취계급과 비착취계급 사이에 모순이 첨예하게 존재해도 비착취계급이 자주적으로 살려는 <요구>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착취를 그대로 감수하게 된다. 노예사회의 발전역사를 보아도, 노예들은 오랫동안 자기의 처지를 응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노예노동>에 묵묵히 종사해 왔다. 노예사회의 말기에 와서야 노예들은 노예제도의 불합리성을 점차 께닫고 노예폭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니까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변혁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모순>이란 어디까지나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이다. 모순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관계> 자체가 그 어떤 <운동의 원인>으로 될 수 없다. 운동의 원인은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적 실체>에 있다. 즉 관계를 맺고 있는 <물질적 실체>의 <속성>에 운동의 원인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체인 <노동자 계급>이 <자주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착취와 압박에 순종할 수 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예속과 구속을 반대하고 자유스럽게 살려는 <자주성>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를 반대하는 혁명을 하는 것이다. 결국 운동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볼 때, <관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실체>에 있고, 물질적 실체의 <속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자주성>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에 모순이 첨예화 되어도 절대로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과의 모순에서 자본가 계급도 노동자 계급도 이 모순을 담당하는 두 세력이다. 그러면 <운동의 원인>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중에서 어디에 있는가? 자본주의 제도를 철폐하기 위한 <운동의 원인>이 역사발전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노동자 계급, 즉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계급에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회주의 혁명의 대상인 자본가 계급에게 혁명의 원인이 있을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의 원인>은 노동자 계급의 <자주성>에 있다. 그리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모순은 이 혁명이 일어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만약에 자본가 계급의 착취와 압박이 없다면 혁명을 할 필요가 없다.

 

위의 분석의 결과를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사물발전의 원인>은 <새것을 대표하는 실체>의 <속성>에 있다. 따라서 선진적 계급과 반동적 계급 사이의 모순을 담당한 선진적 계급의 <자주성>에 혁명의 원인이 있고, 이 <모순>은 혁명이 일어나기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된다. 이러한 주체사관의 이해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그리고 그것을 반영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모순이 혁명의 원인으로 된다는 유물사관의 이해는 일면적이다. 그러한 주장은 <원인>과 <필수적 조건>을 구분하지 못한 일면적 인식에 불과하다.

 

<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시기 유물사관은 일반적으로 <대립물의 투쟁>에 사회발전의 동력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대립물의 투쟁>이란 단지 운동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운동 자체에 운동의 동력이 있다는 것은 과학적 이해로 볼 수 없다. 운동이란 사물의 변화이고, 과정임으로 변화와 과정 자체에 동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와 과정을 담당한 <물질적 실체>에 <추동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 이해로 된다.

 

물론 <대립물의 투쟁>을 통하여서만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지 그 자체가 <동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새것을 지향하고, 새것을 대표하는 사물체의 힘, 능력이 동력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창조적 능력>, <혁명적 능력>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된다. 그러나 이 동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이 자기의 힘을 발휘해서 자본가 계급과 투쟁하지 않고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투쟁 자체가 변혁의 필수적 조건이지만 투쟁 자체가 다 동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 계급도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즉 자본가 계급은 낡은 생산관계를 옹호하기 위하여 투쟁한다. 낡은 것을 옹호하기 위한 투쟁은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될 수 없다. 일반적 의미에서 투쟁이 동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위한 투쟁>,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만이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투쟁이 동력으로 된다고 주장하면서 투쟁만을 미화하는 것은 좋은 것으로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부사이에 투쟁이 동력으로 된다고 생각하고 부부사이에 계속 투쟁하게 되면 그 가정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분단된 코리아 반도에서 대립물의 투쟁이라는 문제를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남과 북의 대립되는 사상과 체제를 강조하는 것이 조국통일에 이롭기 보다는 해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온갖 투쟁을 다 발전의 동력으로 보면서 온갖 투쟁을 다 미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발전의 원인과 동력에 관한 문제도 어디까지나 사람, 민중을 중심에 놓고 고찰해야 역사발전의 원인과 동력이 바로 <물질적 실체인 민중>, <역사의 주체인 민중>에게 있다는 것을 올바로 알 수 있다. 지난 시기 유물사관이 주장했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착취계급>과 <비착취계급> 사이의 모순, 또한 그들의 투쟁 자체는 어디까지나 발전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실체인 민중 자체에서 발전의 원인과 동력을 찾아야만 사회발전의 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민중>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사회발전의 <원인>과 <동력>을 해석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본질과 기본적인 합법칙성의 견지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해로 된다. 이처럼 주체사관은 <민중>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원리를 기초로 삼아 역사에 대한 가장 과학적이고 심오한 이해를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주체사관은 역사과정에서 <주체적인 면>을 위주로 하면서 여기에 <객관적인 면>을 결합시키는 보다 발전된 역사관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즉 주체사관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과학적 진리성>에 기초하여 그 제한성을 극복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김정일위원장이 1996년 7월26일에 발표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에서 강조했듯이 주체철학과 그에 기초한 주체사관은 독창적인 철학이고 사관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을 비교하면서 주체철학과 주체사관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요즘 이북에서는 철학과 대학생들에게는 몰라도 일반 민중들에게는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을 비교하면서 주체철학과 주체사관을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사회나 이남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과 소련이 붕괴된 후 사회주의 사상은 이미 죽은 사상으로 여기고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기초하여 주체사상과 주체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반공을 국시로 여기고 전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하여 가르치지도 않고 죄악시 하던 이남 사회를 떠나 미국이나 유롭으로 유학을 떠난 나 같은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에 빠져 한동안 씨름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 것이다. 최소한도 미국과 유롭에서는 사상의 자유는 있으니까 나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모든 사회과학의 서적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에 심취하다가 주체사상을 접한 나는 주체사상과 주체사관이 관념론이라고 생각되었다. <생산양식>을 중심으로 자연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사회역사를 설명하지 않고 다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 <속성>, <사람 중심>, 운운 하는 것이 바로 관념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피디계열의 운동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들이 초기 유학생이었던 나처럼 주체사상과 주체사관에 대해 깊은 편견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유물사관을 비교하면서 주체사상과 주체사관을 길게 해설할 필요를 느꼈다. 일딴 어떤 사상과 사관에 빠져 버리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오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글이 많은 독자들에게 주체사상과 주체사관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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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사회역사관의 확립

   ↳ [2부] 새로운 역사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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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명백해진 긴장격화의 장본인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6월 2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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