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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핵개발사 다시 쓰기와 ‘최후 결전 ’ 예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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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호석 작성일14-08-19 09: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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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핵개발사 다시 쓰기와 ‘최후 결전 ’ 예견

 
한호석의 개벽예감 <12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사진 1> 이 사진은 평안북도 녕변군 핵시설단지에 있는 흑연감속로 시설의 일부를 오래 전에 촬영한 것이다. 요즈음 녕변핵시설단지를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미국은 쉬쉬하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지만, 녕변핵시설단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게 확장되고 일신되어 왕왕 돌아가고 있다. 거기서 무기급 핵물질이 얼마나 생산되는지 외부에서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원래 북은 1961년에 녕변핵시설단지 공사에 착공하였고, 같은 해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서 북의 핵무기개발을 담당한 1세대 핵과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인 도상록 교수는 "조선이 원자력분야에서 실험과 개발을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놀랍게도,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핵보유국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북의 핵개발사는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 자주민보

  

 

1960년대 후반 북은 이미 핵보유국이었다

 

분단 40년을 맞은 1985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수령님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단호한 결심이다.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 이 인용문은 1985년 당시 평안북도 녕변핵시설단지 우리늄정련공장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일하면서 ‘핵으로 조국통일의 대문을 열자’라는 제목의 합창시를 창작했다는 탈북자가 2004년 2월 28일 <미래한국> 기자와 대담한 기사에 들어있다. <사진 1>


북의 기동예술선전대 작가가 어떻게 북측 최고영도자의 대외비발언에 대해 알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북의 작가들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사상과 의도를 인민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은 최고영도자의 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면 북의 핵무기 개발에 관한 심층정보가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핵탄을 만들려면 고폭실험을 실시해야 하는데, 북이 고폭실험을 실시한 때는 언제였을까? <연합뉴스> 2013년 2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북이 고폭실험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북이 1980년대 후반에 고폭실험을 실시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핵탄을 만들어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 블라디미르 크루취코프(Vladimir Kyuchkov)가 1990년 7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8차 회의에 제출한 보고서 ‘#363-k’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이 “첫 원자폭발장치(first atomic explosive device)를 완성하였다”고 언급하였다. 


당시 소련 국가안보위원회 의장이 보고서에서 언급한 북의 ‘첫 핵폭발장치’는 핵탄미사일 탄두부에 장착하는 핵탄두(nuclear warhead)가 아니라, 초기형태의 핵탄이었다. 초기형태의 핵탄을 소형화, 경량화하는 고도의 기술을 개발해야 핵탄두를 만들게 되는데, 북은 언제 핵탄두를 완성하였을까?


미국의 조선인민군 연구가인 조셉 버뮤디즈(Joseph S. Bermudez)는 ‘제인스정보평론(Jane's Intelligence Review)’ 1999년 7월호에 실린 글에서 북이 1993년 10월 20일 평안남도 평원군 석암리 염소골에서 핵탄두 기폭장치를 실험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전스 프랑스 프레스(AFP)> 1994년 2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위관리 블라디미르 쿠마체프(Vladimir Kumachev)는 북이 핵탄두를 보유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이런 정보를 종합해보면, 북은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를 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위관리가 북의 핵탄두 보유사실을 언급한 때로부터 5년이 지난 1999년 당시 파키스탄 핵개발을 지휘한 총책임자였던 압둔 카디르 칸(Abdul Q. Khan)이 방북하였을 때, 북은 그에게 핵탄두 실물까지 보여주며 핵탄두 설계기술을 전수해주었다. 이에 관해서는 <워싱턴 포스트> 2009년 12월 28일부에 실린 칸의 회고담에서 알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당시 북을 방문 중이던 칸이 평양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산 중의 지하시설을 방문하였을 때, 북측 관계자들은 그에게 “완성된 핵탄두(finished nuclear warheads)” 세 발의 부품들이 담긴 상자를 보여주면서 그 핵탄두들은 한 시간 안에 미사일 탄두부에 장착될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서 북측 관계자들은 칸에게 핵탄두 설계법에 관해 설명해주면서 핵탄두 핵심부품들이 들어있는 상자 6개를 더 보여주었고, 핵탄두 한 발에 설치되는 “64개의 뇌관/기폭장치들”이 들어있는 또 다른 상자 6개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른 공업제품들과 마찬가지로, 핵탄두도 제조기술수준에 따라 저급핵탄두로부터 고급핵탄두에 이르기까지 차등으로 분류되는데, 1999년에 북이 칸에게 실물을 보여준 핵탄두는 어느 등급이었을까?


어느 나라에서나 핵개발은 국가기밀사항에 속하므로, 북의 핵개발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 수 없지만, 외부인으로서 북의 핵탄에 관한 정보를 가장 자세히,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압둘 카디르 칸의 회고담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2011년 9월 15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팍스 뉴스(Fox News)> 온라인판에 칸의 ‘자백서(Confession)’ 전문이 실렸는데, 그 ‘자백서’에 따르면, 북은 칸 자신과 미르자 박사(Dr. Mirza)에게 파키스탄 핵탄보다 기술적으로 더 진보한 “완벽한(perfect)” 핵탄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에서 핵개발을 이끄는 최고 수준의 핵과학자들이 북의 핵탄을 직접 관찰하고 그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자기들이 만든 핵탄과 비교하여 북의 핵탄이 완벽하다고 평가했으니, 북의 핵탄제조기술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살펴보면, 북은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던 1985년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완벽한 기술로 제조된 핵탄두를 다량 보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이 핵개발에 착수한 때로부터 불과 10년 남짓한 기간에 숱한 과학기술적 난제를 해결하고 ‘완벽한 핵탄두’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한 칸의 ‘자백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백서’에는 칸이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에게 핵개발기술을 전수해준 북의 핵공학기술진 대표자와 여러 차례 만나 협의하는 장면이 서술되었는데, 칸은 그 대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강 장령(Gen. Kang)”이라고만 적었다. <워싱턴 포스트> 2011년 7월 6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칸이 만난 그 장령은 강태연(Kang Tae Yun) 소장이다. (Yun은 윤으로도 읽을 수 있으므로 강태윤일 수도 있다.) ‘자백서’ 원문의 그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강 장령의 상관에 따르면, 북은 코리아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아 핵무기 몇 발(a few weapons)을 제작하였다.”


위의 인용문이 들어있는 문맥을 앞뒤로 읽어보면, 강태연 소장의 상관이 칸을 직접 만나 위와 같은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고, 강태연 소장이 자기 상관으로부터 들은 사실을 칸에게 말해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북과 파키스탄은 핵개발부문에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북은 파키스탄 핵과학자들을 초청하여 핵탄두 실물을 보여주고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해주었고, 파키스탄은 자기 영토에서 북이 비공개핵실험을 실시하도록 허용하였을 만큼 서로 협조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의 핵공학기술진 대표자와 파키스탄 핵개발 총책임자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핵관련 비밀정보를 교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이 1955년경에 소련으로부터 무기급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받아 핵탄을 만들었다는 위의 인용문은 사실로 보인다. 무기급 핵물질과 핵무기 설계도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는 핵기술지원에는 비밀합의 체결절차가 따르는 법인데, 1955년경 북과 소련도 그런 내용의 비밀합의를 체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중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였던 시기에 그 사업을 지휘한 네룽전(聶榮臻) 중국인민해방군 원수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측과 ‘새로운 무기 및 군사기술장비 생산과 종합적인 원자력산업 발전에 관한 합의’를 채택한 때는 1957년 10월이었다. 이 비밀합의를 채택함으로써 중국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57년부터 소련의 핵기술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중국이 22킬로톤급 핵탄을 터뜨린, 자국의 첫 핵실험을 실시한 때가 1964년 10월 16일이었는데, 중국보다 조금 앞선 1955년경부터 소련의 핵기술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북도 1960년대 중반에 핵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 중반 북에서 핵탄을 만들었던 핵전문가들은 1956년부터 소련의 모스크바공학물리연구소, 바우만고등기술대학, 모스크바에너지연구소에서 각각 공부하고, 두브나(Dubna)와 오브닌스크(Obninsk)에 있는 핵과학연구시설들에서 현장실습까지 마친 300여 명 이상의 우수한 북측 1세대 핵과학자들이었다. 조셉 버뮤디즈가 ‘제인스정보평론’ 1994년 2월호에 실린 글 ‘북코리아의 핵기반시설(North Korea's Nuclear Infrastructure)’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함경북도 길주군에 ‘원자무기훈련소’를 설치한 때는 1958년 1월이었는데, 그 때 벌써 핵탄사용훈련을 실시하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주목하는 것은, 1955년경 소련으로부터 무기급 플루토늄 200kg과 핵무기 설계도를 입수한 북이 그것을 가지고 핵탄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미국의 핵전문가들은 북이 녕변핵시설단지에서 추출한 무기급 플루토늄 40kg으로 핵탄 약 10발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그런 계산범에 따르면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핵탄 약 50발을 보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대 후반 북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 핵보유국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북의 핵개발사는 고쳐 쓰여야 한다.


1997년 뉴욕에서 출판된, 미국의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코리아의 양지 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 따르면, 1957년 8월 백악관은 ‘국가안보문서 5702/2호’에서 미국 핵무기를 남측에 배치하는 조치를 결정하였으며, 1995년 뉴욕에서 출판된, 미국의 분석가 마이클 마자(Michael J. Mazaar)의 책 ‘북코리아와 핵탄(North Korea and the Bomb)’에 따르면, 미국은 1958년 초부터 남측에 핵포탄, 핵탑재미사일, 핵폭탄, 핵지뢰를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미국의 집중적인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서 북이 자체 기술로 제작한 핵탄 약 50발을 보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1969년 미국군 정찰기 격추사건이 일어났을 때, 만일 미국이 북에게 핵공격을 감행했더라면, 북도 주한미국군기지들과 주일미국군기지들을 핵보복공격으로 파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북이 1960년대 후반에 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제조한 핵탄 약 50발은 북이 1999년에 칸에게 보여준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두가 아니라 1950년대 핵기술로 만든 크고 무거운 핵탄이었다. 2001년 11월 1일 미국의 분석가 대니얼 핑크스턴(Daniel A. Pinkston)이 청취한 탈북자의 진술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1966년 또는 1967년에 미사일 탄두부에 장착할 핵탄두를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미국의 분석가들인 로벗 노리스(Robert S. Norris), 윌리엄 아킨(William N. Arkin), 월리엄 버(William Burr)가 공동집필하여 ‘원자과학자휘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1999년 11월/12월 합본호에 발표한 ‘그것이 있었던 곳(Where They Were)’이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1967년 중반 미국은 핵탄 약 3,200발을 태평양지역에 배비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약 2,600발은 남측과 오키나와에 배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이 압도적인 핵무력으로 대북핵공격을 노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으로부터 그처럼 집중적인 핵위협과 핵공갈을 받던 북이 그에 맞서 1960년대 후반에 이미 핵탄개발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기존 핵탄을 소형화, 경량화한 핵탄두개발을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단 40년을 맞은 1985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려 한다”는 “단호한 결심”을 표명하면서 언급한 핵개발은 1950년대 핵기술로 오래 전에 만들었던 핵탄과 다른, 새로운 핵기술로 신형 핵탄을 개발한다는 뜻이었고, 그런 신형 핵탄을 만들어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는다는 뜻이었다. 북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핵보유국이었으므로, 1985년으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완벽한 기술로 제조된 신형 핵탄두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사진 2> 이 사진은 파키스탄 펀잡(Punjap)주의 카후타(Kahuta)에 있는 핵연구단지인 칸연구소 정문을 촬영한 것이다. 그 곳의 지명을 따서 카후타연구소라고도 불린다. 바로 이 곳에서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파키스탄 핵무기 개발 총책임자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국책사업을 지휘하였고, 바로 이 곳에서 파키스탄 핵과학자들은 1993년과 1994년 사이에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으로부터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받았다. 중국과 같은 시기에 핵개발에 착수한 북은 다른 핵보유국에게 관련기술을 전수해줄 만큼 세계적인 기술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1990년대에 미국의 감시를 따돌리고 북으로부터 핵탄두제조기술과 미사일제조기술을 전수받아 파키스탄의 핵무력을 증강시킨 압둘 칸은 미국의 미움을 받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가택연금을 당했고, 당시 핵무력 증강의 군부책임자였던 무샤라프도 나중에 미국의 미움을 받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반역죄로 법정에 끌려나갔다.     © 자주민보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현지에서 가르친 북의 핵공학기술진 

 

1950년대 중반부터 오랜 기간 극비로 추진되었던 북의 핵개발에 관해 정보를 거의 갖지 못한 국제사회는, 녕변핵시설단지에 건설한 흑연감속로를 가동하여 추출한 무기급 핵물질로 플루토늄핵탄 약 10발을 만든 북이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라늄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그 원심분리기를 설치한 우라늄농축시설을 녕변핵시설단지에 건설하여 현재 가동하는 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정보부족에 빚어낸 착오다. 국제사회가 알지 못하는 것은, 북이 처음부터 두 종류의 핵탄을 동시에 만들기 위한 핵무기 개발에 달라붙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의 핵탄이란 우라늄핵탄과 플루토늄핵탄이다.


북은 2009년 6월 13일에 발표한 외무성 성명에서 우라늄농축이 시험단계에 들어섰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북측 외무성이 그 성명을 발표한 시점보다 조금 앞선 2009년 5월 초순 미국 국가정보국장실(ODNI)은 미국 연방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보는 미국 정보기관 일부인사들의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북의 우라늄농축은 그런 공식발표내용과 달리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미래한국> 2006년 10월 21일부에 실린 탈북자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가 1985년 8월 인민군에서 제대하여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하던 시기에 작품창작을 위해 열람하였던 핵개발과 관련된 대외비문건들 가운데는 “북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평가가 들어있는 문건도 있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회고담은 북이 이미 1985년 이전에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를 자체 기술로 제작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북은 1985년 이전에 언제쯤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를 만들었을까? 이에 대해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찾을 길 없지만, 북이 1962년 1월 소련으로부터 받은, 고농축우라늄을 원료로 쓰는 2메가와트급 실험용 원자로를 녕변핵시설단지에 설치하는 작업을 끝마친 때가 1965년 6월 중순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북은 1967년 이후 그 우라늄원자로의 성능을 4메가와트급으로, 8메가와트급으로 차츰 강화시켜나갔는데, 이것은 북이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우라늄농축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1960년대 후반에 우라늄농축기술을 보유하였던 북은 그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1990년대 중반에 기존 우라늄핵탄보다 기술적으로 더 발전된 신형 우라늄핵탄을 제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정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압둘 카디르 칸의 ‘자백서’에 따르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북이 파키스탄에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이 파키스탄 핵연구단지에 머물렀는데, 북의 핵공학기술진은 그곳에서 원심분리기와 그 부품들을 제작, 조립하는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가르쳤다(instruct)”는 것이다. <사진 2>


당시 파키스탄의 우라늄농축기술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은 이전에 P-1 원심분리기를 자체로 제작하였던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신형 P-2 원심분리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이 그처럼 높은 수준의 우라늄농축기술을 가진 파키스탄 핵기술자들을 현지에서 가르쳤다면, 이미 그 무렵 북의 우라늄농축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워싱턴 포스트> 2009년 12월 28일 보도기사와 압둘 카디르 칸의 ‘자백서’ 내용을 종합하면, 1993년부터 1994년까지 기간 중 어느 시점에 북이 파견한 핵공학기술진은 파키스탄이 만든 P-1 원심분리기 20기와 P-2 원심분리기 4기를 달라고 요청하여 귀국할 때 가져갔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주목한 미국의 분석가들은 북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농축기술을 전수받고 나서 우라늄농축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그런 추정은 빗나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위에서 언급한 칸의 ‘자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백서’에 따르면, 당시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의 핵공학기술진은 무기급 핵물질을 만드는 고농축우라늄 생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고농축우라늄 생산설비 설계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파키스탄이 만든 원심분리기만 귀국할 때 가져갔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고농축우라늄 생산기술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은 북의 핵공학기술진이 귀국할 때 이상하게도 원심분리기만 가져간 것은, 북이 자체로 만든 원심분리기 성능을 개량하여 경수로에 들어가는 저농축우라늄을 생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의 핵공학기술진이 파키스탄 원심분리기를 가져가기 훨씬 전에 북은 이미 독자적으로 원심분리기를 만들었고, 농축우라늄을 생산하였으며, 고농축우라늄을 가지고 우라늄핵탄도 만들었다.


미국의 분석가인 데이빗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는 2010년 10월 19일 미국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된 토론회에서 압둘 카디르 칸과 은밀히 핵거래를 해오다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포섭된 스위스 기술자 프리드릭 티너(Friedrich Tinner)와 그의 두 아들이 2004년 5월 스위스에서 사법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스위스 당국자들은 그 피체자들의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에서 아주 정교하게 작성된 신형 핵탄 설계도를 발견하였는데, 그 설계도가 어느 나라에서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 신형 핵탄 설계도는 1999년에 방북한 칸에게 북이 실물로 보여준 바로 그 핵탄의 설계도인 것이다. 북으로부터 신형 핵탄 설계도를 받은 칸은 자기의 핵거래 대상자인 티너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가 스위스 사법당국에게 압수당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이 파키스탄에게 제공한 신형 핵탄 설계도가 우라늄핵탄 설계도라는 사실이다. 1998년 5월 30일 북이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사막 핵실험장에서 비공개핵실험을 실시할 때 사용한 핵탄은 플루토늄핵탄이었는데, 파키스탄에게는 우라늄핵탄설계기술을 전수해준 것이다. 북은 그 동안 우라늄핵탄만 만들어온 파키스탄에게 더욱 발전된 우라늄핵탄설계기술을 전수해주었던 것이다. 

 

 

핵개발로 통일의 전환국면 열어놓으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은 절반 정도 실현되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대외비발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북측 언론매체들은 북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미국의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설 강력한 억제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핵무기를 가져야 했다는 대응적 핵개발론을 거론해오고 있지만, 이미 30여 년 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북의 핵무력이 미국의 핵위협과 핵공갈에 맞서는 억제력이라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그런 측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위의 인용문에서 명백히 밝힌 것처럼 북의 핵무력이 한반도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공세력이라는 사실이다. 북이 핵무력을 보유하게 된 근본목적이 한반도 통일 실현이라는 점에서, 북의 핵무력은 러시아나 중국의 핵억제력과 성격을 달리 하는 핵공세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핵공세력을 갖게 된 북은 그 힘을 가지고 한반도 통일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려고 하였을까?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5년에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언급한 비공개발언에는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는 내용이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는 핵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려 한다”고 말했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우리는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는 말은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의미심장한 뜻을 지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개발로 조국통일을 시작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북의 핵개발이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를 일으켜 한반도 정세가 통일실현단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 가운데 첫 번째 정세변화는, 미국이 다른 핵보유국에 대해 감히 전쟁을 도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북이 핵개발로 미국의 대북전쟁도발의지를 꺾어놓는 변화를 뜻한다.  


그러나 북의 핵개발은 미국의 대북전쟁도발의지를 억제할 수는 있었으나 완전히 꺾어놓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자기의 핵무력만 믿고, 대북핵전쟁연습을 지속적으로 감행해오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북의 핵무력이 자기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정보를 파악한 뒤에도, 그런 사실을 극구 숨기는 한편, 북의 핵무력을 속으로 두려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얕보는 척하는 기만술을 펼치고 있다. 핵대국의 체면을 유지하여야 자기의 추종국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궁색한 처지에서 미국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사진 3> 이 역사적인 사진은 2000년 10월 23일 오후 3시 7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머물던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서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회담은 중간에 10분 휴식시간을 두고 세 시간 동안이나 진행되었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에서 논쟁이 없이, 모든 게 다 잘 되었습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특사로 2010년 10월 10일 백악관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가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회담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당시 10월 12일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각각 발표된 조선-미국 공동성명에 미국 대통령의 방북일정이 명기될 만큼 북미관계는 격동적 전환국면에 도달해 있었다. 만일 미국 내부의 방해세력들이 클린턴의 방북을 극력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구한 북미담판이 2000년 말에 성사되었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6.15 공동선언이 실현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 자주민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근본적인 정세변화 가운데 두 번째 변화는 북미핵협상을 추진하는 것이다. 북은 자기가 핵개발을 추진하는 경우, 핵확산금지를 가장 중대한 과업으로 여기는 미국이 북의 핵개발에 크게 자극을 받아 대북핵협상에 응할 것이고, 일단 미국이 북미핵협상에 응하면 그 협상기회를 이용하여 미국을 북미담판까지 끌어갈 수 있으리라고 예견하였던 것이다. <사진 3>  
그러나 북의 핵개발이 북을 상대조차 하지 않던 미국을 북미핵협상으로 끌어내는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였으나 북미담판까지 끌어내지는 못하였다. 북이 요구하는 북미담판에 끌려나가는 것은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미국은 북미담판을 요구한 북의 초강경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속 없는 각종 다자회담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북미핵협상을 끊임없이 공전시키다가 결국 9.19 공동성명마저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원래 북은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여야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판단은 일제식민지강점기에 이룩된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오랜 전통을 지닌 북에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인정되었다. 그런 까닭에 지난 시기 북은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북미담판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시기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고 ‘최후 담판’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북이 미국을 북미핵협상에 끌어내고 ‘최후 담판’에로 끌어가려고 하였던 정책전환의 배경에는 급격한 정세변화가 놓여있었다. 1990년대에 북에 휘몰아쳤던 세계사회주의진영 붕괴의 파장과 북의 건국 이래 가장 혹심하였던 ‘고난의 행군’과 ‘사회주의강행군’의 연속적인 시련이 그것이다. 그처럼 극도로 불리한 정세 속에서 북의 핵무력이 수행해야 하였던 당면목표는 북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수호전’의 승리였고, ‘사회주의수호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북은 대미협상기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006년 10월 9일 북이 실시한 제1차 지하핵실험은 북이 ‘사회주의수호전’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였기 때문에 대미협상기조를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말해주는 사변이었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핵개발로 한반도 통일의 전환국면을 열어놓으려고 하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구상은 절반 정도 실현되었고, 나머지 절반을 가득 채워 한반도 통일위업을 완성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이 추진해온 제1방도와 제2방도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대외비발언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 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북이 핵무력으로 한반도 통일의 실현과정을 마무리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북에서 나온, 통일방도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분석하면, 북이 두 가지 통일방도를 추진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추진해온 두 가지 조국통일방도들 가운데서 제1방도는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한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들이 추진해온 두 가지 조국통일방도들 가운데서 제2방도는 북이 ‘최후 결전’까지 가지 않고 북미담판에서 승리하여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킨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제1방도는 북미전쟁을 통한 통일방도라고 볼 수 있고, 제2방도는 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핵확산금지를 가장 중대한 과업으로 여기는 미국은 북이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을 뒤늦게 알고 크게 자극을 받아 다급한 김에 덜컥 대북핵협상에 응하기는 하였지만, 북이 요구하는 북미담판에 끌려나가는 것이 북에 대한 정치적 굴복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기 때문에 북미담판을 요구하는 북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실속 없는 각종 다자회담을 늘어놓으며 북미협상을 끊임없이 공전시키다가 결국 9.19 공동성명마저 외면하고 말았다. 따라서 북이 추진해오던 제2방도(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는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한반도 통일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2009년 7월 16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말한 것은 북미담판을 통한 통일방도를 더 이상 추진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발언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북이 추진할 통일방도는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한 뒤에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려는 남측 정권과 공동으로 그 선언을 전면 이행함으로써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제1방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음이 자명해진다. 


제1방도를 실현하려는 북이 세계 최대 핵대국인 미국과 맞붙은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려면, 미국 수도권을 비롯한 미국 본토 전역을 각종 핵타격수단으로 타격할 수 있는 강력한 첨단핵무력을 가져야 하였다. 북이 수직갱발사식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발사하는 핵타격미사일, 부분궤도폭격체계(FOBS), 전자기파(EMP)공격체계 같은 각종 핵타격수단을 가져야 미국 수도권을 비롯한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고, 그런 강력한 핵무력을 가져야 미국의 핵공격의지를 꺾어놓을 수 있는 것인데, 북이 이미 그런 첨단핵무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들에서 상세히 논증한 바 있다.


2012년 1월 1일 북에서는 새로운 최고영도자가 이끄는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었는데, 한반도 통일문제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김정은 시대’는 북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통일방도인 제1방도를 실현하기 위해 미국과 ‘최후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북의 최고영도자로 추대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에게 넘겨준 제1방도를 실현하기 위한 ‘최후 결전’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기간에 실제로 단행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사진 4> 2012년 8월 25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선군절 경축연회가 열렸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경축연회 연설에서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하였음을 사상 처음 공식 언명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조선인민군은 발사명령, 돌격명령만 내리면 즉각 전 전선에 걸쳐 전면타격을 개시할 수 있는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다.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은 2013년 4월까지 지속되었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추진하였던 제1방도와 제2방도 가운데 제2방도 추진과정이 미국의 거부로 중지된 가운데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제1방도를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최후 결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 자주민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8월 25일 선군절 경축연회에서 “지금 이 시각 나의 명령을 받은 영용한 인민군장병들은 미국과 남조선괴뢰들의 무모한 전쟁도발책동에 대처하여 전투진지를 차지하고 적들과의 판가리결전을 위한 최후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최후 결전’을 단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에 조선인민군은 실제로 준전시태세에 돌입하였다. <사진 4>


이와 관련하여 남측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을 알려준 것은 미국의 관영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RFA)>이었다. 2012년 11월 7일 그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10월 20일경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고, 11월 3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공동명의로 작성된 준전시상태에 관한 명령서가 북측 전역에 하달되었다고 한다.


당시 북에서 선포한 준전시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가? <동아일보> 2013년 8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2012년 8월 ‘준전시사업세칙’을 개정하였는데, 미국과 남측이 북의 최고존엄을 모독한 경우, 대북군사도발을 감행한 경우, 북의 최고이익을 침해한 경우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한다고 규정했다고 한다. 그런 규정에 따라 북은 ‘최후 결전’에 즉각 돌입할 수 있는 준전시상태를 2012년 11월 3일에 선포하였던 것이다.


만일 사태가 준전시상태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 북은 즉각 전시상태로 넘어가게 되는데, 전시상태 선포에 관해서는 북이 2004년 4월에 제정하고 2012년 9월에 개정한 ‘전시사업세칙’에 밝혀져 있다.


그런데 당시 미국과 남측은 북이 2012년 10월 20일경 사실상 준전시상태에 돌입하였고, 11월 3일에는 준전시상태를 공식 선포하였다는 정보를 은폐하였기 때문에 남측 국민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당시 대선열기에 휩싸인 남측 국민들의 눈에는 긴박한 군사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선열기에 휩싸인 남측 국민들이 긴박한 군사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것과는 대비적으로, 미국군과 한국군은 준전시상태에 돌입한 북의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다급한 군사행동을 연이어 취하였다. 이를테면, 2014년 10월 24일 미국은 자국 잠수함들 가운데 가장 큰, 수중배수량 18,000t급 핵추진잠수함 오하이오호(USS Ohio)를 부산항에 급파하였고,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군산공군기지에서는 ‘맥스 썬더(Max Thunder)’라는 명칭의 한미공중연합훈련을 이전보다 더 강화하여 실시하였다. 11월 27일 청와대에서는 전군 지휘관회의가 진행되었고, 같은 날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전군 작전지휘관회의가 진행되었다. 12월 6일과 7일 미국은 남측 정부관리들을 참가시킨 가운데 ‘확장억제수단운용연습’이라는 명칭으로 한반도에서 핵전쟁준비태세를 점검하는 도상훈련(tabletop exercise)까지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은 2013년 4월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상황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일정한 잠복기를 거치고 있는 중이다.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전쟁위기상황이 어떻게 재발될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2014년 8월 이후 북에게는 ‘최후 결전’을 단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출처: 자주민보]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08-19 10:01:30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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