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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인동 작성일13-07-10 12:2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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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선택 - 핵미사일 자위력
 


오인동(재미정형외과의사) 

1958년 이래 미국의 핵 위협에 북은 재래식 무장으로 버텨오다 1994년 <북미기본합의 
(Agreed frame work)>를 이뤘다. 2002년 말 미국이 ‘북미합의’를 파기하자 북은 그때부터 
본격적 핵개발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동안 한반도문제는 남.북.미.중 4자간의 일로 다루어져 
왔으나 미국이 동맹 일본을 참여케 하느라고 러시아까지 끼워 넣은 6자 회담으로 확대해 
남북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드디어 6자가 북의 ‘비핵화와 Korea반도의 평화체제’를 
모색할 2005년 <9.19공동성명>을 내왔다. 그러자 다음 날 미국은 북이 마카오은행을 통해 
돈세탁을 한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며 북 계좌를 동결하자 공동성명 사항은 한 발작도 
진전하지 못했다. 참을 수 없게 된 북은 2006년10월9일, 제1차 핵시험으로 미국에 경고를 
보냈다. 그 뒤 곡절 끝에 북핵 폐기를 위한2007년 6자회담 2.13과 10.3합의 대로 북은 
영변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핵불능화를 했지만 그 뒤에도 더 이상 진전은 없는 채 
2008년을 끝으로 6자회담은 열리지도 못했다. 

돌이켜 보건대 핵/미사일 문제로 합의한 수많은 조항을 어긴 쪽이 약자 북인가, 패권적 
강자 미국인가 ? 미국은1993년 6월11일 뉴욕에서 채택한 북미공동성명, 2000년10월 
조명록/클린턴 북미공동코뮈니케 공약도 이행하지 않았다. 약육강식이 국제관계의 상식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남녘 수구언론에서는 합의를 어긴 쪽은 무조건 북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더 
크게 복창해 왔다. 아들 부시 정부 국무장관 라이스까지도 퇴임 뒤 미국이 "축구경기 
도중에 골대를 옮긴다 (Moving the goal posts in the middle of a football game)" 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만 이런 기사는 남녘언론에서 별로 보이지 않는다. 6자회담의 남녘대표들도 
이런 어이 없는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미국의 횡포에 침묵하고 동조하는 자신들을 어떻게 
정당화 했을까 궁금하다. 남녘의 이런 비열하고 어리석은 언행은 결국 남북관계에서 남에게 
더 큰 손해를 자초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는 것일가. 국내에서는 국가보안법이 두려워, 
국제외교에서는 나라의 자주권이 없어 자기 주장을 펴지 못하는 남녘 조국을 바라보는 
재외동포들은 그저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질곡 속에 북은 인민들의 허리띠를 조여가면서 핵미사일 개발에 매진해 드디어 
자위력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2011년 필자의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기념강연 원고 
<조국의 남과 북에 드리는 말씀> 중 남과 북에 한 쓴소리를 접한 북의 한 관료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우리는 비핵화를 주장하면서도 나라의 생존을 위한 강요된 선택으로 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국가의 생존보존을 위한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질서와 체계에서 벗어 나기 위해 핵전파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습니다. 이 역시 강요된 선택입니다. 자기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선택도 할 수 없다면 결국 자기 운명을 남의 손에, 바로 자기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남이 북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전해 왔다. 

북은 미국과의 합의 사항에‘말대말, 행동대행동’의 원칙으로도 지켜지지 않은 뼈저린 
경험을 해 왔다. 이제 미국의 의도를 알게 되어 실력으로 맞설 날을 위해 미사일과 
핵무기개발을 꾸준히 해 왔다는 것이다. 각 나라의 국익을 위해서는 정의던 불의던 밀어 
부치고 마는 국제관계역학에 따라 유엔안보리 15개국들도 패권 미국의 주도를 따르고 있다. 
합의사항을 지켜주지도 못하는6자회담의 유용성이 없어져 2008년 말 이후 더 이상 회담은 
열리지도 못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취임하자 북은 미국에 미리 경고라도 하듯이 우연히 
필자가 평양의학대학병원에서 북의 정형외과의사들과 인공관절치환수술을 전수하고 있던 
2009년5월 제2차 핵시험을 했다. 2010년 말 우라늄농축시설을 미국에 공개하고 2011년 
헌법 전문에 핵보유를 명기했다. 

이를 계기로 북은 66년의 북미관계를 총체적으로 결산한 모양이다. 즉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을 
지속하는 한 북미대화와 협상 또는 6자회담을 통해서도 평화협정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습이다. 2012년 강성대국 진입을 표방해온 북은 놀랍게도 추운 겨울 12월에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의 은하로켓으로 실용지구관측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그동안 
세계의 여러 나라가 북과 같은 탄도미사일 능력의 미사일 기술로 수 많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 놓았지만 유엔이 제재결의를 한 적은 없다. 그러나 미국은 남과 더불어 이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실험으로 규정하고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결의를 채택했다. 이에 맞서 
북은 2013년 2월, 미국을 겨냥 했다는 강력한 핵탄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한 3차 핵시험을 
했다. 남측과 미국의 선도로 유엔안보리도 더 강화된 대북제재를 결의 했다. 이에 북은 ‘2차, 
3차 대응 조치’를 한다며 북미관계 정상화를 공세적으로 압박했다. 

미국과 남은 계속 북핵폐기를 외치고 있다. 평화협정이 되었더라면 북의 핵미사일 
개발은 없었을 것이다. 핵 없는 이라크, 핵 중도 포기한 리비아가 미국의 침공을 당했고, 
이스라엘 핵무기에 대응해 핵개발 하는 이란이 미국의 위협을 받고 있다. 북은 남에게 
‘제재는 곧 전쟁이며, 침략에는 조국통일대전’ 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과 남의 도발에 
북은 상응하는 수단으로 평화체제를 이뤄 보겠다는 결심을 한 자세이다. 북은 이제 미국과 
남과 결판의 마당에 이르렀지만 “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은 가능 하다는 
단서도 남겨 놓은 채였던 것이 2013년 봄의 상황이었다. 

조국을 떠나 40여 년 미국을 살면서 분단종식에 뜻을 두고6.15선언실천 위원들과 상.하원 외교위원회를 방문 모국의 평화문제를 면담/ 논의 했고, 국무부 성 김(S. Kim) 6자회담대사, 로버트 킹(R. King) 북 인권대사와도 면담/건의도 해보았다. 클린턴/오바마 대통령에 보낸 Korea정책건의서에 대한 답신도 받아 보았고 미국 시민단체와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촉구도 해보았다. 또 재미동포로 남과 북을 자유롭게 방문하여 양측을 보아왔고 또 미국을 안과 밖에서 볼 수도 있었다. 

세계질서 주도 패권국 미국은 북과 평화 할 필요도 뜻도 없었다. 가만이 있어도 국익이 되었고 또 미군을 남녘에 계속 주둔시켜야 할 필요에 남한이 잘 따라 주었다. 미국은 평화협정을 외면하기 위해 북의 재래식 미사일, 생화학무기 등을 구실로 삼았고 테러지원국 멍에도 씌웠었다. 철저한 경제봉쇄로 북을 빈곤으로 몰아 넣어 주민들의 아사사태마저 생기자 인권탄압 이라는 인도적 명제로 규탄도 해왔다. 

동북아에서 한반도는 정전상태로 계속 있어야 되고 북은 미국의 적성국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평화협정을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이고 전쟁연습 이나 위기상황 조성은 미국 국익에 기여하고 있다. 미국은 북을 ‘불량국가’로 지속시키고자 해왔고 남은 충직한 추종자로 안성맞춤이다. 미국은 이런 남.미.북 삼각관계를 이용해 능숙하게 중국을 견제하며 언제나 북이 두렵다며 미국의 봉이 되기를 자원하는 남에서 국익을 챙기며 지내고 있다. 북핵 때문에 평화협정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핵 없던 40년(1953-93)동안에도, 핵 의혹만 있던 15년 (1994-09)에도 평화협정을 기피해 온 것이 오늘의 현실을 초래했다. 

한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의 차이로 강대국에 휘둘려 분단 되고 남북이 전쟁까지 한 조국이지만 남과 북은 통합해야 할 상대이지 적이 아니다. 남과 북 서로 적국 짓 많이 하면서 말 할 수 없이 커다란 희생과 손해를 자초해 왔다. 이런 조국이 밉고 어리석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쩌랴, 그래도 나의 모국이고 조국이다. 그리고 이제 정신 차리면 일찍이 민족사에 없던 찬란한 조국을 건설해 낼 수 있다. 이제 북은 핵미사일 보유국/ 우주회원국이 되었다. 남은 경제발전과 더불어 전자 과학기술 강국이 되었다. 다행이다. 우리 겨레의 슬기이다. 결국은 하나로 통합해야 할 이 분단국의 앞날을 북이 미친 듯 공세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이 기회 놓치지 말고 어떻게 분단종식의 기회로 키워나가야 할지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평화협정 거부 60년 - 속뜻 

오인동(재미정형외과의사) 

1953년 남북전쟁이 정전된 뒤 20년은 북이 남북평화협정을 하자 했고, 1974년부터 지금까지 40년은 북미평화협정을 촉구해 왔다. 통틀어60년, 북이 촉구해온 평화협정 체결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2012년 12월 북이 인공위성을 궤도 올려놓자 미국은 유엔안보리를 통해 대북제재결의를 채택했다. 이에 북은 2013년 2월, 제3차 핵시험을 했고 또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가 뒤 따랐다. 그리고 3월부터 두 달 동안 미한합동 대북핵전쟁연습이 시작 되었다. 이에 북은 핵대핵의 실력으로 북미평화협정을 이뤄 보겠다는 결전에 나선 모습이었다. 더불어 남과도 조국통일대전을 무릅쓰겠다고 했다. 평화협정은 정전의 주당사자인 북과 미국 사이에 체결 되어야겠지만 서명국 북/중/미, 참전국 남/북/미/중 또는 최초 전쟁 상대였던 남/북 사이에 이루어져도 평화체제는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60년 동안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은 배경을 제3자적 재미동포의 입장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60년 역사를 압축하려다 보니 역사적 변환에 기여한 내용만을 중심으로 했다. 내용이 단순화 되고 결과만이 기술된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시각에서 벗어난 점은 없을 것이다. 

1950년 통일을 이루기 위해 북이 남을 선제 공격한6.25전쟁은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좌절 되었고, 미군의 도움을 받은 남의 북진통일도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이루지 못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은1953년 7월27일, 유엔/미국군, 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의 서명으로 정전되었다. 대한민국 군사령관은 북진통일 없는 정전에 반대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정전협정엔 “3개월 안에 참전국 정치회의에서 외국군 철수와 평화적 해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개월 뒤인 1953년 10월1일 미국과 남은 협정의 기본조항을 무시하고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미군의 철수가 아니라 무기한 주둔을 규정했다. 뒤늦게1954년 봄, 제네바 에서 참전 유관국 정치회의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차이로 아무 성과가 없었다. 유엔 회원국으로 참전 했던 여러 나라의 군대는 단계적으로 철수했으나 지금도 3만여 명의 미군이 남녘에 주둔하고 있다. 반면 북이 중국인민지원군을 북녘에서 완전 철수시킨1958년부터 미국은 정전협정을 위반 하며 핵미사일을 남녘에 배치하고 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일단의 전쟁피해 복구를 마치고 해방 15년을 맞은1960년 북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 남에게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그 뒤 계속 남에게 외국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으나 남도 미국도 응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과 동시 분단 이래 30년 동안 열세에 처해 있던 남의 경제력이 북과 비슷해 진1974년 남이 북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유엔에 가입 하자고 처음 제안 했다. 이에 북은 미군에게 군사통수권을 넘겨준 이유로 북남평화협정 제안에도 응하지 못한 남측 이다. 그런 남이 어떻게 불가침에 대한 보장을 할 수 있겠는가? 또 북남이 따로 유엔에 가입하자는 것은 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북은 ‘남의 군사통수권을 장악하고 남을 지배하고 조정해온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협의하자’ 는 제의를 미국의회에 보냈다. 이즈음 베트남전쟁에서 조차 패퇴하게 되는 동맹 미국에 안보를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남은 자주국방을 위한 핵개발을 시도하다 미국에 들켜서 중단 되었다. 

북미평화협정 제안에 침묵해 오던 미국이1978년, 남북이 먼저 대화하고 미국이 참여하는 
3자 회담을 제안했다. 북은 군사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남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며 실권자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했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없자 북은 1984년 다시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하고, 남과는 불가침조약을 맺는 3자회담을 역제의 했다. 그러나 미국도 남도 응하지 않았고 그 뒤 1990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 붕괴되는 대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미국이 세계 유일강국이 되자 남은 북에 유엔동시가입을 다시 촉구했다. ‘조선은 하나’ 정책을 견지해 온 북은 남북이 한 의석으로 가입 하자고 했다. 남이 이 제안에 반대하자 결국1991년 9월 북과 남은 유엔에 따로 가입하게 됐다. 이때 북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유엔군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제기했다. 군사주권이 없는 남은 평화협정 대상에서는 제외 되었지만 그 해 12월 남과 북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 를 했다. 나아가 남은 과거의 적국 소련(1991년), 중국(1992년)과 수교를 이룬 반면 미국과 일본은 북과의 수교를 거부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조국반도에서의 냉전은 계속되어 왔다. 

미소냉전의 해체에 따라 미국은 1991년 12월말, 남녘에서 전술핵무기를 철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 이후에도 수시로 핵잠수함까지 참가해서 대북 미한합동 핵전쟁연습을 계속해 왔다. 공산주의 경제의 결함과 동유럽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의 붕괴로 북은 구상무역마저 할 수 없게 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1950년 전쟁이래 미국의 대북 정치/ 군사/ 경제적 봉쇄로 외화난, 식량난, 에너지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하여 북은 산업동력 (에너지)을 마련하려고 남의 경우에서처럼 핵발전소 건설에 나섰다. 이에 미국은 1992년 북에게 핵무기개발 의혹을 제기했고 영변의 중수로 핵발전소 폭격위협까지 했다. 이에 북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을 하고 미국과 대결 했다. 지난 20년 동안 북미평화협정을 거부해 오던 미국은 1994년 10월, 북의 핵개발을 견제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북미기본합의> (Agreed Framework)를 하기에 이르렀다. 합의 내용은 북의 중수로를 동결하고 100 만 KW 경수로 2기 건설, 경제제재 완화, 국교정상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남은 이 합의에서 소외 되었지만 미국의 의도에 따라 북의 경수로 핵발전소 건설비용을 떠 맡게 되었다.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경제제재는 계속되고 관계정상화에도 진전이 없자 북은 판문점 정전기구를 무력화 했다.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도 외면하고 <북미기본합의>사항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하여 북은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시험을 함으로써 미국에 합의사항 준수를 압박 했다. 마침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화해/협력/교류가 활발해 지며 통일기조도 높아져 갔다. 이에 일본 고이즈미 수상도 북일수교를 위한 <평양선언>을 2002년 9월에 내 왔다. 놀란 미국은 곧10월 초 켈리(J. Kelly) 특사를 북에 보내서 대뜸 우라늄고농축 의혹을 제기했다. 북은 핵국가가 비핵국가를 핵으로 위협 하면 피해국은 자위를 위해 어떤 수단도 강구할 수 있는 것이 국제법이라고 했다. 10여 일 뒤 미국은 북이 우랴늄고농축을 시인 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 완공을 약속했던 발전소 건설이 31% 진척된 상태에서 <북미기본합의>를 파기했다. 기본합의를 관장하기 위해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보스워스(S. Bosworth)의장 조차도 "기본합의는 서명한지 2주일도 안돼 고아가 되었다 (The Agreed Framework was a political orphan within 2 weeks after its signature)" 했다. 

앞에서 본대로 맨처음 정전협정을 위반한 것도 , 미한합동 북침핵전쟁연습을 계속한 것도, <북미기본합의>를 파기한 것도 미국이다. 그런데도 남에서는 언제나 북이 합의를 위반 했다는 미국의 논조를 복창하고 있으니 해외동포가 밖에서 보면 정말 한심하고 부끄럽다.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역학역사에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약속을 먼저 어기는 측이 누구인지 남녘정부와 남녘언론만 모르는가? 북이 매번 합의사항을 어겼다면 조목조목 근거를 대보기 바란다. 게다가 이런 말을 하면 남녘에선 빨갱이, 요새는 ‘종북’이라니 한심하다 못해 논리적으로 대꾸할 말이 없으면 무조건 ‘좌빨’이라고 욱박지르는 수구세력이 가엽기까지 하다. 이런 현상이 받아드려 지는 소위 ‘자유민주국가’라는 내 모국이 부끄럽다. 세계의Korea전문가들은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북도 자체 붕괴하리라는 예상 속에 미국이 체결한 것이 <북미합의>였다고 한다. 

하다 못해 합의 당사자였던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도 ‘북이 1994년 기본합의를 안 지킨 것은 없다’고 했다. 핵발전소 완공을 약속 받고 중수로를 동결한지 8년 만에 단 1 Kw전력도 얻지 못한 채 참담하게 빈손이 된 북은 NPT에서 완전탈퇴 했다. 그 다음 해 2003년 초 핵 없는 이라크의 핵무기를 제거한다며 침공하는 미국을 본 북은 자위력 구축 즉 핵무기만이 나라를 지켜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북은 이때부터 작심하고 중수로에서 꺼낸 핵폐기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무기화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4년 뒤인 2006년 10월 처음 핵 시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 어떤 일들이 일어 나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자.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11-22 02:24:13 종합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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