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이신 김일성주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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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2-04-06 11:5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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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이신 김일성주석님
나는 김일성주석님 탄생 110돌을맞으며 그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다시 회고하면서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곤 한다. 만약
김일성주석님과 그의 혁명동지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혁명에 대한 책임감을 내동댕이치고 만주 눈벌판에서 좌절해 버렸다면 과연 조선의 운명과 미래, 아니 세계의
운명과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과 세계의 <자주의역사>, <정의의 역사>는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아니 조선의 자주의 역사가 과연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맹공격 앞에 생존이나 했을까?
김일성주석님께서는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다.
“나는그때 우리가 주저앉으면 조선이 다시 소생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죽어도 조선을 구원할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라자구등판의 눈사태 속에 파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코리아혁명에 대한 책임감은 나에게도 계속 무겁게 엄습해왔다. 아직도
외세가 주둔하고 있는 이남의 민족해방에 대한 책임감과 분단된 조국을 통일해야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없다면 아마 나를 비롯한 재미동포들도 모두 자본주의물결
속에 매몰되어 물질위주의 삶이나 살아갈 것이다. 주석님의 생애는 과거의 일로, 그저 재미있는 회고거리로 넘겨버릴 수 없는 무서운 채찍을 동반하고 있다. 그의
생애는 우리도 지금 여기서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위한 변혁운동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주고 있다.
내가 김일성주석님을 처음 접견한 것은 1989년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였다. 그때 남쪽에서는 임수경전대협대표가 참석하였고
재미동포들도 70여명이 참석하였다. 축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재미동포 대표들 몇분들과 함께 주석궁으로 가서 존경하는 김일성주석님을 직접 뵙는 기회를 가졌다. 주석님께서는
우리 대표들을 보시자 “반갑습니다, 우리 연설은 생략하고
식사나 같이합시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식탁으로 안내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긴장한 우리들을 의식하시고 여기 까만 감자떡이 있는데 한번 맛을 보라고 하시며 “감자는 얼어도 먹고
썩어도 먹습니다, 감자는 버릴게 없습니다, 나는 감자박사입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손수 감자떡을 우리에게 권하시었다. 그러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 인민들이 산에서 감자를 캐는 척하면서 유격대를 위하여 남겨놓은 것을 알면서도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감자를 캐러 내려가지 못해 감자가
썩는 경우가 있었으나 나중에 적들이 후퇴한 후 썩은 감자를 캐서 떡도 해먹고 국수도 해먹던 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시었다. 주석님은 국가원수라기보다는 가까운 이웃 할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주석님께서는 우리 재미동포 대표들에게 많은 동포대중을 묶어세워 애국사업에 기여하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단결해야 힘이 있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1991년 4월 태양절과 1992년 주석님 생신 80돌이되는
4월 태양절때 조국통일북미주협회(통협) 대표들과
함께 주석님을 다시 만나 식사를 같이하는 기회를 가졌다. 1992년에마지막으로 주석님을 뵈었을 때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작은 나라가 자주를 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나라는 제국주의연합세력과 대국들의 간섭과 횡포에 굴하지 않고 자주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왔습니다.” 라고말씀하셨다. 나는 요사이 와서 주석님께서 왜 그때 그러한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재미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
“여러분들은 미국에 사는 동포들이니까 미국실정에 맞게 애국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포들이 단결단합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주석님을 마지막으로 뵙고 난지 2년 후인 1994년뜻하지 않게 존경하는 주석님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평양으로 달려갔다. 주석궁에 계신 주석님의 영구 앞에 나는 엎디어 엉엉 울었다. “2주후면김영삼대통령과
만나시어 조국의 통일을 의논하시기로 하셨는데 이렇게 아쉽게 떠나가시면 조국통일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하고
나는 속으로 외쳐대며 소리내어 울었다.
김일성주석님을 접견한 이래 나는 그를 나의 마음의 기둥, 신념의 기둥으로
늘 생각하며 살아 왔다. 주석님께서 항일혁명의 투쟁 속에서 창시한
<주체사상>은바로 나의 생의 나침반이 되었고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나는 지금 주석님 탄생 110돌을맞아 다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으며 그의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돌이켜보고 있다.
나는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전집을 읽을 때마다 역사에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곤 한다. 주석님께서 인민의 지도자로서
그렇게 존경을 받으시게 된 것은 우선 그의 가족의 전통적인 애국심 특히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어머님 강반석여사님의 애국심의 영향이 컸으며 아버님께서
남겨놓으신 혁명조직인 조선국민회(1917년 3월 23일결성) 회원들의 영향이 컸다.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은개인의
출세를 위한 원대한 뜻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 참된 보람과 행복을 찾는
<혁명적인생관>을가지고 대를 이어가며 투쟁하여 기어이 나라의 해방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혁명정신>을 뜻한다.
언제인가 김형직선생님은 아드님이신 주석님과 주석님의 할아버님, 할머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지원의 사상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라를독립시키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내 몸이 찢기여
가루가 될지언정 일본 놈들과 싸워 이겨야 하겠습니다. 내가 싸우다 쓰러지면 아들이 하고 아들이 싸우다
못하면 손자가 싸워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김형직선생님의 사상을 김일성주석님 자신이 그대로 이어받아 항일혁명투쟁을 전개하셨고 다음으로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민족의 자주위업을 수행해나가셨고 지금은 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서 대를 이어 주체혁명위업을 계승하고 계신다.
이러한 조선의 최고지도자의 계승은 결코 왕조의 계승이 아니라 조국의 자주적 해방을 위한 <혁명전통의계승>이다.
또한,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주석님께서 가장 깊게 받으신 교훈은 <혁명동지>에 대한 사상이다. 주석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께서 조선독립을 위한 길에서 동지 한명을 얻기 위하여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다니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나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아버지를 통하여 동지를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배웠다.”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쓰시었다.
또한, 주석님께서는 회고록에서 “나라와
인민을 위한 진심만 있으면 좋은 동지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뜻이고 마음이다, 돈은 없어도 뜻만 통하면 서로 동지가 될 수 있다, 동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좋은 동지를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아버님의 동지애의 사상에 대한 말씀을 회고하시면서
그때 아버님께서 해준 말씀은 지금도 자신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언급하시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아버님께서 한평생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어떤 권력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나라의
해방과 근로인민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서슴없이 바치셨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리고 아버님은 물욕과
사리사욕도 없었으며 자신을 생각하기에 앞서 민족을 생각하고 자신의 가정을 생각하기에 앞서 조국을 먼저 생각하며 찬바람을 맞받아 일생을 쉬임없이
걸어가심으로써 인간으로서도 청렴하게 살았고 혁명가로서도 결백하게 살았다고 회고하시었다. 그래서 주석님께서는
어떻게하나 아버님의 뜻을 이어 한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시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석님께서는 아버님의 혁명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고 아버님이 조직하신 <조선국민회> 조직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시었다. 주석님은 한창 혁명활동을 하시던 과정에서 철주동생과 형권삼촌을 잃으시었고 그리고 이국땅에서 어머님도 병환으로
잃으셨다. 그리고 그를 지도자로 아끼며 따르던 김혁, 차광수, 최창걸, 리광, 등 혁명동지들을
수없이 잃으셨다. 이러한 피바다위에서 주석님의 오늘의 위대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의 위대성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라 그의 희생적 민족해방운동과 항일투쟁이라는 혁명적 투쟁 한가운데서 이룩된 것이다. 주석님의
항일혁명활동에 대한 기록을 읽노라면 1920년대와 1930년대에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조선 인민대중들의 투쟁의 역사가 소상히 눈에 어리여 온다.
주석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서 그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갖게 되는 점은 또한 그의 인민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신때문이다. 그의 위대성은 바로 그분이 인민을 하늘같이 여기시고 인민 속에 들어가시어 인민과 더불어
인민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데 있다. 이러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기시는 사상에서 주체사상이 태동하였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자신의 인민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시었다.
“〈이민위천〉, 인민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것이 나의 지론이고 좌우명이었다.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으로 믿고 그 힘에 의거할데 대한 주체의 원리야말로 내가 가장 숭상하는 정치적
신앙이며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한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
이 <이민위천>사상이야말로
주석님의 모든 노작의 매 페이지마다 흐르는 근본사상으로서 주석님께서 어려서부터 아버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주석님께서 어리셨을 때 중국으로 이주해서 사시게 되었지만 아버님은 그를 일부러 고국에 보내어 학교를 다니게
하셨다. 그 깊은 뜻은 바로 주석님께서 조선의 현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어려서 아버님의 권고로 조국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시었는데 당시의 우리 조선인민에 대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시었다.
“가장귀중한 체험은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를 깊이 리해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인민은 소박하고 근면하면서도 용감하고 강의한 인민이었다. 어떤 곤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예절이 바르고 인정이 풍부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연정회의 간판을 가지고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리고 있었으나 노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의도대로 조선민족, 조선인민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주석님의 혁명사상은 인민을 우매하고 미개한 계몽대상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인민이야말로 스승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기본동력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라!》, 이
구호는 주석님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주석님께서는 실로
<인민적품성>과<인민적 사고방식>을지닌 지도자로서 인민들 속에 들어가 직접 그들의 육성,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짓, 몸가짐을 자신의 눈과 귀,
손으로 손수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하시었다. 그것은 인민들 속에는
철학도 있고 문학도 있고 정치경제학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민 속에 들어가는 것은 보약을 먹는
것과 같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 독약을 먹는 것과 같다고 믿고 계시던 주석님께서는 생전에 다음과 같이 생을 총화하시었다.
“나는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활동을 시작하였고 오늘도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혁명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인생을 총화하고 있다.”
주석님께서 자신의 생신때마다 생일잔치상을 차려주려는 간부들의 성화를 뿌리치시고 인민들 속에 들어가 현지지도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석님께서는 두메산골,
외딴섬, 농장, 도시, 공장 등 조선 어느 곳이나 현지지도하지 않으신 곳이 없을 정도로 사면팔방을 오가시며 인민들과 대화하시고 부탁하시고
인민들에게서 배우시며 한생을 사셨다. 그는 항일혁명당시에도 혁명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꾸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당에 승인이나 받으려 하고 윗자리나 차지하려는 것을 비판하시면서 무산대중을 위한 혁명을 한다면서 대중을 떠나 자꾸 위로만 올라가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자, 아래에 내려가 노동자,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자고 새 세대 청년혁명가들에게 당부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아래 즉 인민들 속으로 내려가자고 호소하시면서 “혁명가의 생명은 군중 속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며 군중을 떠날 때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시었다. 주석님께서는 선행세대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 그리고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운동 전략이나 노선은 결국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의 추동력인 인민대중을 믿지 않고 외면하였기 때문에 붕괴된 것이라고
진단하시었다. 수백만 인민의 조직된 힘에 의거해야 일제를 타도할 수 있겠는데 지난 시기 운동가들은 혁명도
독립운동도 특수한 몇몇 사람들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초기 혁명운동가들도 기초축성은 하지 않고
몇몇 상층인물들로써 당중앙을 선포하는 방법으로 당을 쉽게 만들었으며 인민 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3인 1당, 5인 1파식으로
서로 분열되어 권력쟁탈전이나 벌렸다. 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의 몰락도 결국 따지고 보면 지도자들이 인민들
속에 들어가 인민을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켜야 했는데 단지 정권차원에서 행정명령식으로 내려 먹이는 방법으로 인민을 통치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석님의 판단이었다. 혁명의 실패는 혁명의 주체이며 추동력인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인민 속에 들어가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조직사상적으로 조직해야 된다고 김주석님은 믿으시었다.
내가 주석님을 존경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인민을 통일단결시키셨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혁명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운동가들의 통일단결과 조직성원들과 인민대중의 일심단결이다.
주석님께서 초기혁명투쟁을 전개하실 때도 운동권이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민족진영과
공산주의진영 속에서도 수많은 파들이 서로 싸우고 중상모략하며 역량을 낭비하고 있었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도
이 속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실제로 희생도 많이 되었다.
공산주의진영의 엠엘파, 화요파, 서상파, 등 종파분자들은 하나같이 공명주의와 소부르죠아영웅주의에 물젖은 행세군들이었고 고질적인 사대주의자, 교조주의자들로서 운동을 파괴분렬시키는데 광분하였다. 엠엘파들은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이 될수 있다고 믿고 테로나 일삼고 김일성주석님을 중심으로 한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애써 꾸려놓은 연합전선조직을 다
파괴시키곤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인민을 이간시켜 놓곤 했다.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애국심>이라는공통적인
사상감정만 있으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다같이 민족해방을 위한 하나의 궤도에서 서로 화합하고 단결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보시고 부단히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을 시도하시었다. 물론 그는 <민족주의운동>의 한계점을 잘 알고 계시었다. 민족주의운동은 인민대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인민들과 이탈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계급혁명이라면 엠엘파들이 주장하듯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혁명의 동력으로 되겠지만 조선혁명의 성격자체가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인만큼 노동자, 농민은 물론 청년학생, 지식인, 애국적 종교인, 민족자본가들도 다 혁명의 동력으로 보고 <민족해방>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반일애국역량을 다
집결하고 다 동원하자는 것이 주석님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이었다.
주석님께서는 <민족해방>이라는대전제를
첫자리에 놓는다면 어떤 민족운동진영과 어떤 계급, 계층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보시었다. <민족>을 첫자리에 놓고 모든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도 있고 주의도 있지 민족이 없이 공산주의, 민족주의는
해서 무엇하며 하느님은 믿어 무엇하겠는가고 주석님께서는 물으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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