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애로 맺어진 혈맹적 조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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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10-23 16:3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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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애로 맺어진 혈맹적 조중관계
김정은국무위원장께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코리아전쟁참전 70돌에 즈음하여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찾아 열사들에게 꽃바구니를 진정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로동신문은 2020년 10월 22일 보도하였다. 이어 위 신문은 김정은국무위원장께서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안치되어 있는 모택동주석의 아들 모안영동지의 묘를 찾아 꽃바구니를 진정하고 경의를 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날 김정은국무위원장께서는 다음과 같이 감회깊게 언급였다.
“형제적 중국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우리 인민의 성스러운 조국해방전쟁에 참전한 때로부터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극히 곤난한 형편에서도 항미원조보가위국의 기치밑에 우리를 희생적으로 지지성원한 중국인민지원군의 불멸의 공적과 영웅적 위훈은 우리 인민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조선전선참전은 조국해방전쟁의 위대한 승리에 력사적 기여를 하였다. 조중 두 나라 군대와 인민이 자기 운명을 하나로 련결시키고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피로써 쟁취한 위대한 승리는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뀐 오늘에 와서도 변함없이 실로 거대한 의의를 가진다. 제국주의침략자들을 격멸하는 성전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귀한 청춘과 생명을 다 바쳐 영용하게 싸운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의 붉은 피는 우리 조국땅 곳곳에 스며있다. 우리 당과 정부와 인민은 그들의 숭고한 넋과 고결한 희생정신을 영원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코리아전쟁참전 70돌에 즈음하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회창군에 있는 열사능원과 평양에 있는 우의탑에 화환을 보내었다. 꽃바구니 진정식은 21일에 있었다고 로동신문이 보도하였다.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27일에 휴전한 코리아전쟁에 미국을 비롯한 유엔연합군이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여 10월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부근까지 진격하자 1950년 10월19일 <중국인민지원군>은 코리아전쟁에 참전하였다. 모택동주석은 참전에 앞서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국경 안으로 들어간 뒤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정부, 조선노동당과 기타 민주당과 및 조선인민의 수령 김일성동지에게 우애와 존경을 보이고 군사기율과 정치기율을 엄격히 보여야 한다….또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의 산 하나, 물 한방울,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애호해야 한다.”([해방전후사의 인식 6], 한길사, 1989년, 196 페이지)
모택동주석은 왜 자신의 아들 모안영동지까지 포함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코리아전쟁에 참전시켰을까? 나는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여러번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왜 조선과 중국 양국에서는 조중관계를 피로 맺어진 관계, 즉 <혈맹관계>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중국에서 항일혁명투쟁을 벌렸던 김일성주석을 비롯한 상당수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조국으로 돌아와 새조국의 건당, 건국, 건군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주석이 이끄는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은 공동의 적인 일제를 상대로 싸울 때는 <국공합작>을 했으나 일제가 패망하여 공동의 적이 살아지자 중국 내부에서는 다시 내전이 발발하였다.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수세에 몰렸던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당시 조선측은 중국공산당 가족들과 부상병들을 수용해주었고, 특히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쫒기던 중공군이 조선지역을 통과하게 해주었고 피난처로도 사용하게 해주었다. 1948년 가을 만주 전역에서의 중공군의 승리는 국공내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김일성주석은 이때의 상황을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상세히 기록하였다. 장개석이 반공을 하면서 국민당군대를 총동원하여 해방지구를 침략하는 바람에 중국대륙은 또 다시 국내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어갔다고 김주석은 회고하였다. 김주석의 가장 친한 전우였던 주보중동지는 1946년 초봄 조선을 방문하여 김주석을 만났을 때 김주석에게 동북지방의 형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면서 적아의 역량대비와 군사정치 정세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쫓겨간 다음 일제가 점령하였던 만주땅은 얼마동안 정치적 공백지대로 있었다. 이 지역을 어느 편이 장악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장개석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첨예한 싸움을 벌렸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만주를 중국전토 장악을 위한 주요한 대결장으로 보았다. 국민당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함선과 비행기로 그리고 육로로 수십만의 군대를 들이미는 바람에 갓 조직된 동북지구의 민주연군(중공군과 조선인민혁명군의 연합군)은 우세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김주석은 지적하였다.
주보중동지가 김주석을 만나려고 한 것은 이런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지원을 요청하려는데 있었다. 모택동주석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한때 조직부장을 하다가 중공중앙 동북국의 부서기로 임명된 진운을 평양에 보내어 조선의 지원을 청한 것도 그무렵이었다고 김주석은 기억했다.
김주석은 주보중동지에게 중국의 전우들이 장차 동북에서 진행하게 될 작전과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고 최대한의 지원을 줄데 대해 쾌히 약속하였다. 그때 해방은 되었으나 조선의 형편은 남을 도와줄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김주석은 그런 어려운 조건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조선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동북땅이 장개석의 세상으로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김주석도 생각했다.
그 당시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고 있었다. 왕일지동지는 동북해방작전과 관련된 주보중동지의 부탁을 가지고 여러번 조선에 왔다. 그가 처음 온 것이 1946년 여름이 아니면 가을이었을 것으로 김주석은 기억했다. 그 당시 소화가 이끄는 료동군구의 무력이 안산, 해성에 대한 공격을 했다. 그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안산, 해성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군대의 한 부대가 장개석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부대는 그 공격에 밀려 조중국경연안으로 후퇴하였다. 그런데 압록강이 막혀 더 갈데가 없게 되었다. 주보중동지는 이 반란부대를 구원할 방도를 협의하기 위해 대표들을 조선에 보냈다. 왕일지도 그 대표의 한사람으로 라남에 왔다갔다. 그후 김주석은 반란부대가 조선 영토를 거쳐 동부만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중국공산당의 왕일지동지는 1947년 초에 다시 주보중동지를 대신하여 평양을 방문하였다. 그는 조선이 동북해방작전을 여러모로 도와준데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였다. 그는 이번에 2만여명의 부상병들과 가족, 후방인원, 2만여톤의 전략물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면 아무래도 또 조선땅을 빌려야 할 것 같은데 김주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김주석은 그 자리에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즉시 해당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일지동지는 전체 동북인민이 김주석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거듭 사의를 표하였다.
왕일지동지는 그후 1947년 여름경 전략물자운반에서 걸리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양에 다시 왔다. 동북민주연군이 50일동안의 전투에서 8만여명의 적을 살상하고 42개의 성, 진을 해방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전선형편은 여전히 긴장한 때였다. 중국민주연군측 장병들은 신발의 부족으로 큰 곤난을 겪고 있었다. 많은 장병들이 맨발로 진흙탕과 자갈밭을 행군한다고 하였다. 왕일지동지가 김주석을 찾아온 것은 신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김주석은 모든 조선의 신발공장들에서 다른 신발생산은 다 중지하고 중국의 전우들에게 보낼 신발만 생산할데 대한 긴급명령을 내렸다.
동북해방작전과 관련한 중국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1947년의 첫 7개월 동안에 조선에서는 동북민주연군측을 위해 21만t의 물자를 수송해주었고 1948년 한해 동안에는 30만 900t의 물자를 수송해주었다고 한다. 조선을 통과한 인원은 1946년 하반년에 18개 부대에 이르렀고 1947년 9개월 동안에 조선에 들어왔다가 동북근거지로 간 인원은 1만명 이상이나 된다. 1948년에 남양교두를 통과하여 근 9천명이 두만강을 건너갔고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의 적지 않은 민주당파, 무당파와 중국해외교포들이 조선을 경유하여 할빈으로 갔다. 사업상용무로 조선을 통과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의 수는 더욱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김주석은 자세히 회고록에 쓰고 있다.
동북해방작전이 승리적으로 결속된 직후인 1948년 가을에 주보중동지는 왕일지동지와 딸 주위를 데리고 길림성정부 주석 겸 동북군구 부사령원의 자격으로 다시금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때의 방문은 동북해방작전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준 김주석에게 사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보중동지가 기차에 싣고 온 많은 양의 밀가루는 바로 그 감사의 표시였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김주석은 그때 주보중동지부부를 금강산에 보냈다. 김책동지가 동행하면서 안내도 하고 말동무도 하게 해주었다. 주보중동지부부는 금강산에 있는 온천휴양소에서 얼마동안 휴양생활을 하였다. 주보중동지부부는 평양에 돌아오자 김책동지와 함께 만경대도 방문하고 김주석의 아버지, 어머니의 묘소도 찾았다. 그후에는 김주석 자신이 직접 주보중동지부부를 모시고 김정숙어머니와 함께 안길의 묘도 찾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중공군이 내전에서 승리하고 안정되어 갈 때쯤 이번에는 조선에서 1950년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일시적 후퇴시기 주보증동지는 두 조선청년을 편지와 함께 김주석에게 보냈다. 그들은 주보중동지가 동북해방작전을 지휘할 때부터 그의 부관과 운전수로 일하던 조선청년들인 현주영과 김길룡이었다. 주보중동지가 운남성 부성장으로 갈 때 데리고 갔던 유격대원들인데 코리아전쟁에서 인민군대가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조선에 나가라고 등을 떠밀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주보중동지는 편지에서 “몸은 비록 먼 곳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선의 전호 속에 있다”고 하면서 똑똑하고 책임성이 높은 두 청년을 김주석에게 맡긴다고 하였다. 조국이 시련을 겪고있던 때 주보중동지의 그 편지가 자신에게 큰 힘을 주었다고 김주석은 회고했다.
이처럼 중국공산당은 항일투쟁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과 연합하여 싸웠으며 국공내전과정에서도 동북땅에서는 항일유격대출신의 우수한 군정간부들인 강건, 박락권, 최광을 비롯하여 약 25만명에 달하는 조선청년들이 동북해방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위에 지적한 조선으로부터 받은 여러 지원에 보답하기 위하여 코리아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피로 맺어진 중국과 조선의 혁명동지들사이의 우의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김주석은 감회깊게 회고하였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항일혁명시기 간도와 북만에서 그리고 소련 원동의 훈련기지에서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그리고 코리아전쟁에서 그들이 백설같이 순결한 감정을 가지고 피로 나눈 전투적 우의와 우정은 변할 수 없었다고 김주석은 추억하였다. 김주석은 “전우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전우애란 생명력이 강한 사랑입니다. 전우애가 생명력이 강한 사랑으로 되는 것은 그것이 초연 속에서 련마된 사랑이고 동지를 대신하여 불 속에도 들어갈 수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리에 충실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김주석은 역설하였다. <의리>로 하여 인간은 “숭고한 존재”로 되고 <의리>로 하여 인간생활은 “백화만발한 화원”처럼 아름다와진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이러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일제와 미제를 물리치기 위하여 함께 싸운 조중인민들은 한 형제요, 한 자매이다. 이러한 <전우애>로 맺어진 조중 인민들의 <혈연관계>를 끊을 자 이 세상에 없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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