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나
1994년 김일성주석이 서거한 후 금수산의사당에 김주석이 애용하던 금고가 있었다. 그 금고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세계의 시민들은 그곳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큰 돈다발이 나올까?그런데 막상 그 금고를 열어보니 그안에 김책동지와 함께 찍은 사진 한장이 나왔다. 원래 김주석은 사진들을 다 당역사 연구소에 보관하였는데 김책동지와 함께 찍은 사진만은 직접 금고에 따로 보관하여 두었다. 이것은 김주석이 전우인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잊어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김주석이 김책동지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를 할 때였다. 김책동지는 북만성위와 동북항일연군 3로군 대표로 회의에 참가하였다. 여러달 하바롭스크에 머물다보니 김주석과 김책동지는 서로 많은 대화를 하였다. 그때 김책동지를 만나보고 받은 인상이 참으로 커서 첫 상봉을 하던 때의 광경을 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김주석은 회고했다. 나이 40이 채 되기도 전에 이미 앞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김책동지의 침착한 모습이 첫눈에 김주석의 마음을 끌었다고 했다. 김주석과 김책동지는 통성이 끝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서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김책동지는 벌써 1930년 길림에서부터 김주석을 찾았다. 김주석도 김책동지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서 직접 부대를 데리고 북만에까지 갔다왔다. 투쟁무대가 북만이건 동만이건 그들은 그때 모두가 다 조선혁명을 생각하였고 자기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혁명가라는 것, 단체의 소속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쳐야 할 조선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고 김주석은 회억했다. 이런 공통성이 동만과 북만의 조선혁명가들로 하여금 오래전부터 서로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하였다.
김책동지의 선친은 나라가 망하자 바로 가족을 데리고 간도로 들어갔다. 그 집안에 혁명바람을 끌어들인 것은 김책의 형 김홍선이었다. 김책동지의 동생도 이름난 혁명가였다. 김책동지는 간도에서 농사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야학에 다니었다. 그때부터 그는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화요파의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그러다 감옥에도 잡혀들어가게 되었다. 김책동지는 영도권쟁탈로 일관된 파쟁의 내막을 알고는 권력다툼을 일삼는 공산당 상층인물들에게 환멸을 느끼었다. 파쟁 속에서 멸망해가는 공산주의운동 실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국제당이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는 놀라운 소식이 감방안에까지 날아왔다. 파쟁으로 피투성이가 된 당이었지만 그 당마저 해산되었다고 하니 김책동지는 가슴이 아팠다.
김책동지는 감옥 안에서도 감옥 밖에 나와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이 한가지 생각만 했다고 한다. 결론은 기성세대에 의거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자는 것이 김책동지가 감옥을 나와 간도로 들어갈 때 다진 맹세였다. 김책동지는 간도 땅에 들어서자 그동안 아버지와 안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집에는 어린 두 아들만 남아 있었다. 일제의 순사들이 자기를 잡아가려고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김책동지는 두 아들을 처남네 집에 맡기고 급히 마을을 떠났다. 김책동지가 아들들과 헤여져서 바로 찾아간 곳이 녕안현인데 거기에서 친지들로부터 길림방면에 “기성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새 세력이 등장했다는 것, 그 지도자가 김성주라는 것,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인망이 있고 친화력이 강하다는 것, 군벌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석방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책동지는 동료들한테서 그런 말을 듣자마자 곧 김주석을 찾아 떠났지만 그때는 이미 김주석이 길림을 떠난 뒤였다.
그래서 김책동지는 북만쪽으로 갔다가 국민당군대에 붙잡혀 또 감옥으로 끌려갔다. 김책동지는 그후 감옥문을 나서기 바쁘게 또 다시 군벌경찰한테 붙잡혀 미결수로 있게 되었다. 그는 약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의 만주땅이라는 곳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김책동지는 사형장까지 끌려나갔다가 반일사상이 강한 진보적인 장교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김책동지는 그때 사형장을 떠나면서 세상이 영 무심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는 과정에 김책동지가 얻은 교훈은 자신이 젊어서부터 혁명을 하느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감옥이나 노상에서 보내면서 큰 일은 하지 못하고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무장을 잡은 다음부터 비로소 주동에 서서 적들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하바롭스크에서 김주석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웃으며 고백하였다.
“적들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혁명가들을 허재비로 압니다.”
김책동지는 무장을 하지 못하면 무장한 강도들 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 자신마저 지켜낼 수 없더라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생의 교훈”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김책동지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 합법칙성”이라고 김주석은 판단했다.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하며 민족적 독립이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의 결말은 대체로 무장투쟁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항일혁명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기본요인도 자체의 독자적인 <혁명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그당시 민족해방투쟁 무대에 김구파, 이승만파, 여운형파를 비롯하여 각이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본 것은 김주석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그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청원이나 파업이나 붓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최고형태인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일제와 완강하게 싸웠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항일혁명 투쟁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진리였다. 이 교훈은 해방후 조선으로 하여금 새 조국건설과 사회주의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전 행정과정에서 “혁명적 군건설노선”을 확고히 틀어쥐고 “강력한 혁명무력”을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게 하였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김주석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국력도 총대에서 나오고 민족적 자부심도 총대에서 나옵니다. 군대가 강해야 민족이 부흥하고 나라도 륭성번영합니다. 총대를 떠난 자주성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총대에 녹이 쓸면 인민이 노예가 됩니다.”
김책동지는 자신이 감옥밥을 먹고나서야 공산주의운동을 재래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것과 “종파”를 없애지 않고서는 민족해방이나 계급해방은 고사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이 김주석을 만나려고 한 것은 길림에 나타난 새 세력이 조선공산당 산하도 아니며 <종파>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참신한 새 세대들의 집단”이라는 말을 듣고 그런 세력이라면 서슴없이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에게 털어놓았다.
김책동지는 자기 행로에서 “인생이라고 할만 한 것”이 있다면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부터라고 하였다. 그전의 생활은 방황과 모색 과정이었다는 것이었다.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때로부터 그는 북만당과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주요직책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북만의 조중혁명가들과 인민들은 한결같이 김책동지를 “노숙하고 세련된 혁명가”로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김책동지는 혁명가의 표본이었다. 그는 “범같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었으나 사실상 그 누구보다도 대원들을 사랑하는 정치일군이었다. “혁명군대의 전투력은 무엇인가, 동지애이다, 혁명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라, 사랑하되 자기의 심장처럼 사랑하라, 혁명동지보다 더 귀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는 것이 김책동지가 대원들에게 강조한 사상이었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김책동지는 비록 지금 중국동지들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조선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김주석에 대하여 “자주성”과 결부시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김책동지 자신도 조선인 대원들에게 그들이 비록 중국인 부대에서 싸우지만 항상 “조선혁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혁명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사람 자신이 해야 한다, 늘 자기 조국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김주석은 기억했다.
“혁명”에 대한 견해, “인민”에 대한 관점, “자주성”에 대한 입장으로부터 시작하여 “당건설”과 “국가건설”, “군건설”은 물론,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면에서 김주석과 김책동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김책동지가 김주석이 자기의 생활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이 놀랍다고 말하자 김주석은 자신도 처음부터 김책동지를 주시해 왔다고 고백하였다. 김책동지는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얼굴도 모르고 만나도 못본 사람들끼리 서로 주시하고 그리워했다면 그거야 연분이지.” 하고 대답하였다. 김책동지가 김주석을 만나려고 길림에 찾아온 것이 1930년 여름이니 그들의 우정은 벌써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만항일유격대 부대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던 김책동지는 나이로 보나 혁명투쟁 경력으로 보나 만주빨찌산의 조선인군정간부들 중에서 “좌상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김주석은 높이 평가하였다. 그때에는 김주석은 아직 <국가수반>도 아니고 <당총비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책동지는 소련사람들 앞에서나 중국사람들 앞에서나 김주석을 “조선혁명의 대표자로, 지도자”로 높이 내세워주었다.
김책동지가 자기보다 9살이나 아래인 김주석을 그처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도자로 내세워준 이유에 대해서 김주석은 김책동지가 혁명을 하자면 “영도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 영도중심의 두리에 모두가 하나로 튼튼히 뭉쳐야 한다”는 사상이 온몸에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영도중심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결국은 김주석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김책동지는 처음으로 하바롭스크에서 김주석을 만난 다음부터 계속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되어 시종일관 변함없이 김주석을 따르고 받들어주었다. 그는 시국이 어떻게 변하건 상관치 않고 김주석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왔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1920년대 길림시절에 김혁, 차광수, 등의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이 김주석을 <영도의 중심>으로 내세웠다면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김책, 최용건, 안길, 서철, 강건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주석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김주석을 <통일단결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과정을 통하여 조선혁명에서는 비로소 “영도중심”이 형성되었다. 이 <영도중심>을 형성하는 데서 김책동지는 특출한 공헌을 하였다고 김주석은 회억했다. 조선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 역사에서 김책동지가 차지하는 몫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김주석은 보았다.
그때 소련 원동의 기지에는 북만에서 싸우던 사람들도 와 있었고 남만출신들도 와 있었다. 그곳에서 나서 자란 조선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서로가 자기 부대를 내세우고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게 되었다면 혁명대오가 단합되지 못하고 중심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 원동의 기지에 모인 조선공산주의자들 속에서는 “지방주의”라든가 “영도권 쟁탈”과 같은 놀음이 한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순결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었지만 김책동지와, 최용건동지, 안길동지, 서철동지, 강건동지와 같은 노장들이 처음부터 김주석을 지도자로 내세우다보니 “영도중심”이 확고해졌다는 것이 김주석의 분석이었다. 김책동지는 원동의 기지에 있을 때부터 진심으로 김주석을 내세우고 보호해주었다.
1941년 봄에 김주석이 소부대를 데리고 나갈 때에 그와 동행하게 될 호위성원들 한사람한사람에 대하여 김책동지는 마음을 썼다. 김주석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일본군에 대한 최후공격 작전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도 김책동지가 김주석 모르게 국제연합군의 조선지휘관들만 따로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다. 김주석의 신변호위와 관련된 회의였다. 김책동지는 “각자가 경각성을 높여 김일성동지의 신변호위를 잘해야 겠다, 김일성동지는 조선인민과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하는 령도자이니 목숨으로 옹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이 조국에 개선하자마자 김책동지는 김주석의 호위와 관련된 모임을 또 열었다. 김책동지는 “조국에 와보니 듣던 것보다 정세가 훨씬 더 복잡하다, 테로분자들의 준동이 여간 심하지 않다, 정신을 차리지 않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평안남도당의 책임비서 현준혁이도 테러분자들한테 피살당했다, 김일성장군이 개선했다는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라, 공개할 때가 있으니 함부로 루설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경위대원이 된 심정으로 김장군의 호위를 각별히 잘해야겠다”고 호소하였다. 후에는 김책동지가 주동이 되어 김주석을 보호하는 <경위대>도 조직하였다. 김책동지는 김주석에게 참으로 충실했다.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 김책동지는 사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당건설도 하고 군건설도 하고 국가건설도 하고 산업건설도 하느라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고 김주석은 회상했다.
김책동지는 “수령의 권위”를 절대화하였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그는 김주석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채운 다음에야 통화를 시작하군 했다고 김주석은 기억했다. 그는 병석에 있을 때에도 김주석한테서 오는 전화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받군 했다고 한다. 옆에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늘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수령을 진심으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김책동지는 “김일성수령이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김책동지는 건달군들과 아첨쟁이들, 불평분자들, 이기주의자들, 종파쟁이들에게 매우 엄하고 무섭게 대했다. 그러나 그는 아래 일꾼들과 인민들 앞에서는 무한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김책동지는 배신을 꿈꾸는자들을 몹시 증오했기 때문에 박헌영도 그 앞에서만은 처신을 조심스럽게 하였고 김두봉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했지만 김책동지만 보면 슬슬 피해다니었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김책동지는 “가식과 위선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해방직후 그의 아들이 만주에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단추 2개가 달린 베적삼에 짚신바람이었다. 김책동지가 아들을 김주석한테 인사시키려고 했지만 아들은 짚신바람으로 어떻게 장군님을 만나겠는가고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 “짚신바람이라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네가 김일성장군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걱정말고 어서 들어가자, 지금까지 내처 발을 벗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부자집자식들 흉내야 낼 수 없지 않느냐, 장군님께서는 네가 짚신에 이렇게 입고 온 것을 더 좋아하신다, 네가 만약 좋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찾아왔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를 데리고 김주석 방으로 들어갔다.
16년만에 짚신바람으로 찾아온 아들을 데리고 김책동지가 김주석의 방에 나타났을 때 김주석은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그때 심정을 토로했다. 그날은 김책동지보다 김주석이 더 울었다고 했다. 그가 오래동안 헤여졌던 자식들과 눈물나는 해후를 했지만 그들과는 4년 남짓하게밖에 생활하지 못했다. 김책동지가 과로로 갑자기 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안고있던 부담이 너무나 컸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김주석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한창 전쟁중이던 1951년 1월 30일이었다. 그때 최고사령부가 건지리에 있을 때인데 그날 저녁 김책동지가 불쑥 김주석을 찾아왔다. 그가 하는 말이 “지난 12월 24일이 김정숙동무의 생일이었는데 수상동지가 적적해하시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이 바빠서 오지 못했다, 이달도 다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처신이 잘된 것 같지 않고 또 그냥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찾아왔다.”라고 하면서 걸음이 늦어진 것을 두고 사과하였다. 그날 김책동지는 왜 그런지 기분상태가 감상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그날 김주석 앞에서 뒤축이 꿰진 양말을 감추느라고 애쓰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김주석은 생생히 기억했다. 김주석은 김책동지에게 “일만 하지 말고 몸을 좀 돌보시오, 이 엄동설한에 살이 보이는 양말을 신고 다녀서야 어떻게 견디겠소, 나를 생각해서라도 몸을 조심하시오.”라고 하면서 새 양말을 꺼내 신겨주었다.
그는 최고사령부를 떠나면서 김주석을 보고 “장군님, 미국놈들과의 싸움은 저희들이 하겠으니 장군님께서는 너무 과로하지 마시고 건강에 류의하여 주십시오.”하고 권고하였다. 그것이 그가 김주석에게 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그날 밤도 김책동지는 집무실에서 철야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김책동지는 한생을 김일성주석의 충직한 전우로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래서 김주석은 그를 더 잊지 못해하면서 그의 사진을 금고에 두고 자주 꺼내보았다. 김책동지가 서거한 다음 김주석은 그의 자식들을 친 부모처럼 돌보아주었다. 외국에 유학도 보내고 잔치도 차려주고 손녀가 태어났을 때는 축하도 해주고 집에 종종 불러다가 음식도 같이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김책동지를 위해 무엇인가 더 해주지 못한 것만 같아 김주석은 늘 허전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조선혁명이 시련에 부닥치거나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할 때면 김주석은 김책동지를 생각하며 금고 속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김주석은 김책동지의 묘 앞까지 차를 타고가지 못한다고 했다. 김주석은 그의 묘지를 찾을 때는 차를 타고가는 것이 죄스러워 대성산 밑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가군 했다고 한다. 김책동지가 저 세상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주석의 마음이야 변할 수 없다는 것이 김주석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김주석은 혁명을 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가슴깊이 새긴 것중의 하나가 “동지에 대한 체험”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결사의 각오를 품고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귀중한 것이 바로 동지이고 동지애입니다. 진실한 동지는 제2의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충직하고 의리 깊은 동지들이 뭉치면 하늘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동지를 얻으면 천하를 얻고 동지를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고 말하군 합니다. 동지라는 말은 뜻을 같이한다는 말인데 뜻이란 곧 사상입니다. 일시적인 리해관계나 타산에 의하여 맺어진 동지관계는 공고할 수 없으며 때에 따라 쉽게 깨여지고 맙니다. 그러나 사상의지적으로 결합된 동지관계는 영원하며 총알도 단두대도 그런 동지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혁명은 령도자에 대한 충정으로 숭고한 모범을 보여준 수많은 동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동지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의 은하계를 이루고있습니다.”
김책동지가 서거한 다음 조선정권은 그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성진시와 그의 심혈이 깃든 청진제철소 그리고 평양공업대학을 각각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공업대학”으로 명명하고 인민군대의 한 군관학교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김책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웠졌다.
금고의 사진을 비롯한 이 모든 것은 김주석이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잊어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말하여준다. 수령의 추억 속에서의 영생, 그것은 인간이 한생을 통해 지닐 수 있는 영광 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이며 혁명가가 한생을 바쳐 도달할 수 있는 행복 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이다. 김책동지는 그 영광과 행복의 상상봉에 있는 영생하는 인간이다. 김책동지는 <제2의 김주석>이다. 지금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비롯하여 그와 함께 일하는 당일꾼들, 정부의 일꾼들, 군일꾼들은 모두 <제2의 김주석들>이다. 제2의 김주석들이 지금 세계역사를 바꾸고 있다. 이들은 <자본중심의 세계>를 변혁하여 <인간중심의 세계>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제2의 김주석들에 의해 자주의 세계, 평화의 세계, 평등의 세계가 반드시 이땅에 이룩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