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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낙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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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18 12:5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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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낙관주의

 

 

 

총을 잡고 일제와의 판가리싸움에 나선 항일 유격대원들은 모두가 다 언제나 비관을 모르고 <혁명적 낙관>으로 사는 낙천가들이었다. 1940년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를 겨냥하여 수백명씩 또는 수천명씩 무리를 지어 사면팔방에서 달려드는 적의 파도식 토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험한 판국에서도 조선유격대원들은 비관을 모르고 여유있게 씨름까지 해가며 낙천적으로 살았다고 김일성주석은 회고했다.

 

사람이 정신적 여유가 없거나 생활에 대한 낙관이 없으면 어려운 정황 속에서 씨름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김일성주석은 생각했다. 조선유격대원들과 같은 신념의 강자, 의지의 강자들만이 적의 포위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꿈도 꾸고 노래도 부르고 씨름놀이도 해가며 낙천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동서고금에 없는 “낙천가들의 집단”이었다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세계에 이름난 군대도 많고 유격대도 많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만큼 “혁명적 낭만과 열정으로 약동하는 생기발랄하고 전도가 양양한 군대”는 없었을 것이라고 김주석은 평가했다. “역경을 웃음으로 다스리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 이 세상이 통채로 꺼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낙천가들의 집단”이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김주석의 체험에 의하면 신념을 가지고 혁명하는 낙천가들은 옆에서 무슨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며 내일 당장 교수대에 오른다고 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신념도 없이 모두가 혁명을 하니까 나도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혁명에 뛰어든 사람들은 곤경에 처할 때 “아늑한 곳”으로 달아나버린다는 것이다.

 

1939년 가을에 돈화원정을 할 때 조선항일유격대는 식량의 부족으로 심한 곤난을 겪었다. 적들을 따돌려야 식량공작을 하겠는데 토벌대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내처 행군해가다보니 어데 가서 식량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데도 없었다. 대원들은 언덕을 넘을 힘도 없었다. 어쩌다가 휴식구령이 내려지면 땅바닥에 아무데나 들어누워 피곤을 풀군 했다. 출발구령이 떨어진 다음에도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는 대원들도 있었다.

 

어느날 점심때에 김주석은 약간 경사가 진 평평한 능선에서 휴식을 선포한 다음 대원 몇사람을 데리고 개울가에 내려가 돌을 들추면서 그밑을 더듬다가 큼직한 가재 한마리를 잡았다. 김주석이 그 가재를 물가에 내던지자 경위대원들이 <가재다!> 하고 일제히 환성을 올리자 대원들은 앞을 다투어 개울물에 들어섰다. 며칠씩 굶은 사람들 같지 않게 다들 신바람이 나서 가재잡이를 하였다. 온 대오가 가재잡이로 흥성거렸다. 발을 질질 끌면서 힘들게 대열을 따르던 동무들까지 개울물에 뛰어들었다. 대원들은 휴식하던 자리에 돌아와 불을 피우고 가재를 구워먹었다. 잠간 동안의 가재잡이가 대오의 분위기를 일신시켜놓았다.

 

물론 몇마리의 가재를 먹었다고 단번에 배가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재를 잡느라고 첨버덩거리는 사이에 대원들은 시장기도 피곤도 다 잊어버렸다. 그 가재잡이가 있은 다음부터 행군속도는 곱절이나 빨라졌다. 김주석은 그날 대원들의 명랑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방금전까지 지쳐서 언덕을 넘지 못하던 사람들, 휴식구령이 떨어지면 피곤에 못이겨 아무데나 퍽퍽 쓸어지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저처럼 명랑해질 수 있을까 하고 김주석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주석은 <가재잡이>가 대원들의 <낙천성>을 계발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가재를 잡느라고 떠들어대는 사이에 피곤도 풀리고 기분도 전환되었으며 힘도 나고 며칠 굶은 사람들 같지 않게 명랑해졌다는데 김주석은 놀랐다. 가재잡이가 대오에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하게 한 것은 대원들의 “낭만적인 정서”를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김주석은 보았다.

 

1939년 무산지구 전투가 끝난 다음 적들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를 소멸해보겠다고 사방에서 새까맣게 달려들고 있을 때 화룡땅 한복판인 옥돌골이라는 마을에서 군민합동 단오명절놀이가 벌어졌다. 그때 축구경기까지 하였다. 오래간만에 공을 차다보니 헛발질을 어떻게나 많이 하는지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적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단오절 행사를 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임기응변의 전법과 혁명적 낭만으로 들끓는 담대한 심장을 지닌 조선인민혁명군의 병사, 지휘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김일성주석은 <혁명가>란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혁명가는 미래를 락관하는 사람들입니다. 혁명 그자체가 원래 미래에 대한 꿈이나 새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세계에 대한 숭고한 리상을 가지고 그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꾸준하게 투쟁해나가는 사람이 혁명가입니다. 미래에 대한 락관이나 혁명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사람들은 애당초 투쟁의 길에 나서지도 않을 것이며 설사 혁명에 뛰여들었다 하더라도 전진도상에 가로놓인 엄혹한 시련과 난관을 도저히 이겨내지도 못할 것입니다.”

 

혁명가의 인생관이나 인간적 품격, 그들의 생활신조와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신념이나 의지, 불굴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누구보다도 이상과 포부가 웅대하고 어떤 환경에서나 그 이상과 포부가 꽃피게 될 미래를 확고하게 낙관한다는데 있다고 김주석은 믿었다. “혁명적 신념과 의지와 낙관”은 혁명가가 지녀야 할 “3대특질”, 혁명가의 “사상정신적 품격”을 이루고 있는 “3대 요소”라고 김주석은 주장했다.

 

언젠가 외국기자들이 김주석께 “80의 연세에 50대의 건강을 지니시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가”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김주석은 그의 장수의 비결은 “낙천적으로 사는데 있다”고 대답했다. 한 인간의 생리적 연령이 생활을 얼마나 낙천적으로 하는가 하는데 따라 좌우되는 것처럼 “한 나라 혁명의 성패나 생명력은 혁명적 낙관주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사람은 낙천적으로 살아야 하루를 살아도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사기가 없이 우울하게 생활하는 군대는 단결도 안되며 싸움도 잘할 수 없다. 혁명적 신념과 의지는 미래에 대한 낙관에 기초할 때 더욱 더 강한 것으로 되고 혁명의 최후승리가 이룩될 때까지 확고히 견지되는 것이라고 김주석은 믿었다. 김주석은 <혁명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설해 주었다.

 

“혁명가가 된다는 것은 감옥과 교수대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의 길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하여 미래에 대한 드팀없는 락관을 가지고 일편단심 혁명승리를 위해 한몸 다 바칠 결의와 각오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 위업에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혁명적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혁명가들처럼 산다는것을 말합니다. 미래를 위해 남들이 걸어보지 못한 초행길도 서슴지 않고 걷는 것이 혁명가들이며 설사 그 길에서 어떤 어려운 시련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 높은 각오를 가지고 물과 불 속에도 서슴없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혁명가들입니다.”

 

바로 여기에 혁명가들의 인생이 “값있고 보람있는 것”으로 되는 이유가 있다고 김주석은 생각했다.

 

김주석의 경험에 의하면 혁명대오에서 도주한 자들은 예외없이 “미래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린 비관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혁명이 상승할 때 그 기류를 타고 우연히 혁명대오에 뛰어들었다가 고난이 중첩되고 정세가 불리해지면 혁명이고 뭐고 자신만이라도 살아보자고 달아나버린 “의지박약자들”이었다고 김주석은 술회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이긴다고 믿은 사람들은 김주석과 함께 끝까지 혁명의 길을 걸었고 이길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혁명을 중도반단하고 대오를 떠나가버렸다.

 

“혁명적 낙관주의”는 저절로 생기는것이 아니다. 부단한 교양과 사상단련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혁명적 낙관주의이다. 적이 아직은 강하고 혁명이 언제 승리한다고 기약하기 어려운 때에 미래를 낙관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사상교양”, “사상단련”을 부단히 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그 어떤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군대로 될 수 있은 것은 대원들에게 초기부터 힘을들여 <사상교양>을 잘 했기 때문이었다고 김주석은 평했다. 혁명의 지도부는 시종일관 유격대원들을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으로, 불요불굴의 투쟁정신과 혁명적 낙관주의로, 혁명위업의 정당성과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교양하였다.

 

지휘관의 “정신상태”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김주석은 강조하였다. 지휘관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전사들의 신념과 의지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전사들의 낭만이 지휘관의 신념에 따라 좌우되는 것처럼 인민대중의 낙관주의는 지도자의 신념과 배짱에 따라 결정된다. 유격대원들은 김주석이 이긴다면 이긴다고 믿었고 김주석이 웃음을 지으면 혁명의 전도가 밝다고 생각하였다. 김주석이 낚시질을 하거나 코노래로 조금 흥얼거리기만 해도 그들은 다음 작전은 이미 다 이긴 작전이라고 판단하군 하였다.

 

대원들에 대한 신념교양, 낙관주의 교양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된 것은 “문예활동”이었다. “혁명적인 문화오락”을 떠나서는 항일유격대의 생활을 논할 수 없고 “혁명적인 노래와 춤”을 떠나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 걸어온 승리의 노정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김주석은 강조하였다.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은 김정일위원장은 “조선혁명은 노래로부터 시작되었고 노래 속에서 전진하여 왔으며 노래와 함께 승리한 혁명”이라고 지적하였다. 조선혁명처럼 노래와 밀착된 혁명, 노래로 엮어진 혁명은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김주석은 평했다.

 

혁명, 그자체가 하나의 “장중한 교향곡”이고 “노래를 낳는 터전”이라고 김주석은 보았다. “노래를 떠난 혁명이란 있을수 없다”고 그는 믿었다. 북만원정때 유격대에 냉냉하던 군중을 쟁취한 것도 노래였고 유격대를 피해 달아났던 중국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었던것도 그들이 사랑하는 노래 <소무가>였다고 김주석은 추억했다.

 

김일성주석은 중학시절부터 스스로 가사도 쓰고 곡도 지었다고 진술했다. <조선의 노래>, <반일전가>,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는 김주석이 작사작곡한 것들이다. 김주석은 어려울 때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얻군 했다고 말했다. 식량이 없어 맹물로 끼니를 이어갈 때에도 노래를 부르며 힘든 고비를 넘기군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러는 사이에 김주석 자신도 성장하고 혁명도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 고난의 행군>때 경위대원들이 눈 속에 파묻혀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여러날 아무것도 먹지 못한데다가 지칠대로 지쳐서 힘이 진했기때문이었다. 그때 김주석은 눈 속에 지쳐 누워있는 대원들에게 다가가 조용히 <적기가>를 불렀다. 대원들은 그 노래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쓸어졌던 자리에서 일어나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당시 조선유격대에는 전문예술단체도 없었고 직업적인 창작가나 배우들도 없었으나 항일유격대원들은 스스로 가사도 쓰고 곡도 붙이면서 <유격대 행진곡》과 같은 훌륭한 혁명가요들과 혁명적인 연극, 가극, 춤들을 수없이 만들어냈다.

 

적들이 에워싸고 있던 유격구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은 연예공연을 자주 조직하였다. 연예공연은 산에서도 하고 주민부락에서도 했다. 연예공연을 할 때에는 주변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엄호하였다. 공연은 명절날에도 하였고 큰 전투를 치른 다음에도 하였으며 부대에 신입대원들을 많이 받아들였을 때에도 하였다. 어디서 무슨 공연을 하든지 유격대가 추구한 종국적인 목적은 군대와 인민을 강의한 혁명정신으로 무장시키고 그들 모두를 불굴의 혁명투사로 만들자는데 있었다.

 

유격대의 연예공연은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일유격대원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에도 문화오락과 공연활동으로 기분전환을 하군 하였다.

 

 

혁명이란 사상의지나 규율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상의지, 도덕의리와 함께 “낭만적인 감정정서”를 가지고 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김주석은 주장했다. 나서자란 고향산천과 부모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감정”을 떠나서 <애국주의>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김주석의 견해였다. 자기 집단에 대한 애착과 헌신의 감정도 없이 공산주의사상과 같은 심원한 사상을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생각이라고 김주석은 보았다. 항일혁명의 전 과정은 풍부한 감정정서를 가진 낙천적인 유격대원들이야말로 자기의 지도자와 그 지도자의 사상에 끝까지 충실하며 혁명승리에 대한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한몸을 바쳐 조국이 기억하고 인민이 기억하는 위훈의 창조자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고 김주석은 지적했다.

 

박길송동지는 최후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국이여! 나는 그대를 자랑한다, … 공산주의! 이것은 바로 세계의 청춘이다, … 조국의 광명한 미래를 키워내는 요람이다, …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있기 때문에 이처럼 웃으면서 죽는다.”

 

적들의 고문에 두눈을 잃은 최희숙동지는 최후를 앞두고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고 했다. 일제의 순경들이 이계순동지에게 반성연설을 한마디만 하면 목숨도 살려주고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말했을 때 이계순동지는 “이 원수놈들아, 내 귀가 더러워진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아직도 몰랐느냐? 조국광복의 날은 멀지 않아 온다!”고 부르짖었다.

 

이처럼 항일혁명의 길에서 희생된 모든 투사들은 다 “혁명승리에 대한 불변의 신념과 풍부한 감정정서를 지닌 낙관주의자들”이었다고 김주석은 추억하였다. 혁명가는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보다 내일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그 내일을 위해서는 꽃나이에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는 피끓는 투사들이다.

 

지금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의 연속적인 군사연습과 제재소동으로 하여 조선 인민은 여러면에서 심각한 곤난을 겪고있다. 정치도 군사도 경제도 문화도 모두 엄중한 도전을 받고있다. 조선은 70년동안 전쟁상태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조선인민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혁명적 낙관주의>이다.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전체 당원들, 인민군인들, 인민대중은 모두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자력갱생, 간고분투하며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조선의 미래는 창창하다.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0-09-18 12:53:25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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