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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노병들을 받들어 모시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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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8-08 15:2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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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노병들을 받들어 모시는 나라


 

 

 

김정은국무위원장은 지난 7 27일 전국의 전쟁노병들을 평양에 초청하여 성대한 환영식과 연회를 베풀어주고 여러 곳의 관광도 함께시켜 전쟁노병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환영해드렸습니다.

 

나는 이런 기사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을 적으려 합니다.

 

북조선이 전쟁노병들을 이렇게 다심하고도 각별하게 대우해 주는 나라이니 지금도 강위력한 군을 가진 나라일 수밖에 없지요. 목숨 바쳐 싸운 이들에 대한 위로와 감사도 가족들에겐 큰 위로가 되지요. 전쟁노병들은 당연히 국가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국가의 최상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에선 전쟁노병들을 최고의 특수층으로 대우한다고 합니다.

 

북사회의 특수층은 남에서 말하는 특수층과 다릅니다. 조선의 최고 특수층은, 일제시대 독립을 위한 항일 투사와 그의 가족과 후손들, 조선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와 가족들, 전쟁노병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 금, , 동메달을 딴 운동선수들, 그리고 과학자들, 박사들, 학교선생들과 의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모든 대우에서 <우선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처럼 돈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요. 남조선에선 특수층이라고 말하지만 북에서는 특수층이 아니고,"나라를 위해 헌신한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부를것입니다. (저의 개인생각입니다만)

 

북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 사람들이 특수층이지, 남조선처럼 지위나 돈과는 관계가 전혀 없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죽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선 국가가 인민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살수 있는 사회임으로 돈이 문제가 아니고 명예를 더 중시하는 사회이지요. 북은 인민들이 누구나 모두 직업을 갖고 있어 취업율 100%인 세계 유일한 나라입니다.

 

저의 경우를 하나 간단히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1982년도에 고향방문할때까지는 북의 정부에서는 나를 전쟁사망자로 취급하여 저의 부모에게 사망통지서를 보냈답니다. 당연하지요. 전쟁이 끝나 몇십년이 되었는데도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그리하여 우리집 형제들이 아마도 사망한 저때문에 자연스럽게 특수층에 속했던가 봐요.

 

나의 동생들이 노동당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우리집은 과수원이 있는 집이었어요. 나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평양의대를 나와 함흥시립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추측이지만 북에서 볼 때, 내 형제들이 노동당에 입당할 자격이 없다고 봐요.  그런데 내가 함흥의대 다니는 중, 재학생 130명과 함께 평양의 인민군 제1군관학교에 간 후 없어졌으니 전사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한 내가 1981년도에 미국에 살아있다고 편지가 왔으니 우리 친척은 물론 온 동네가 큰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해 1982년 봄에 고향방문하게 되었지요. 그때 나의 가족과 지인들은 모두 "가지 말라고 내가 가면 죽는다고 모두 극구 말렸어요.

 

그러나 나는 죽어도 가야겠다고 했어요. 첫번째로 조선전쟁의 참가자로 전쟁이 끝나자 마자 되돌아가 가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둘째로 우리 부모가 형제중에서 나를 제일 사랑했는데 그런 내가 부모에게 효도한번 못해본 불효자식이 된 것이 너무나 가슴아프고 원통했어요.

 

나는 죽어도 부모님의 묘에 가서 실컷 울면서 불효자식의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그래서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였지만 그러나 나의 고향방문 의지를 아무도 꺾을 순 없었어요.

 

비장한 마음을 갖고 갔는데, 생각외로 북에서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더군요.  나의 과거와 남쪽에서의 생활에 대해 북에서 일체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내원은 나에게 "내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자기는 따라가겠다고 공손히 말하고 아주 친절하고 나의 모든 편리를 도와주었어요.

 

남쪽에선 안내원을 "감시원"이라고 악담을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이었어요.

 

그 안내원은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하고 그가 없으면 길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을것입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편리를 봐주고 돈 한푼 안드는 안내가이드였습니다.

 

나에게 운전수가 달린 독일제 Benz 차를 지정해 주어 고향방문 끝나는 15일동안 이용했습니다.  당시 북에는 전부가 Benz 차만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안내원이 말하기를 당시 조선이 Benz 차 회사의 최고 큰 고객이였다고 말했어요. 도착 첫 날에는 호텔을 정하고 평양시내구경을 하고 다음 날 내가 원한대로 함흥에 갔어요.

 

전쟁때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이나 함흥 모두 형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너무나 놀라게했습니다.

 

평양, 함흥 모두 5-6층 아파트로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었어요.  평양은 그 당시 서울보다 더 잘 건설되어 있었고 후생시설이 더 잘되어 있었고 도시계획이 잘되어 있어 공원도 60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평양은 미국 Washington DC 와 같은 도시풍의 인상을 주었어요. 대부분의 건물안 내벽은 거의가 모두 대리석으로 지었고 생들리에 등으로 장식되고 가는 곳마다 색다른 모양의 분수들이 많았고 대동강 한가운데 두개의 150m 높이 올라가는 분수가 높이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울과 비교하여 너무나 놀랐어요.  형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평양이나 함흥이 그렇게 많이 변해있는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남쪽언론들이 국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했어요.

 

지금도 변하지 않고 똑같지만.....

 

함흥에 도착하니 형제들이 모두 마중나와 나를 부등켜안고 한없이 모두 울었지요.  함흥에 5일간 형제들 집에 함께 지내면서 부모산소에 가서 성묘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쏟았어요.  나의 모교 함흥의대도 방문했어요.

 

함흥의대 학장이 나보다 4년 후배인 사람인데 나의 학적부를 보여주면서 최우등한 나에게 "만일 선배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제 자리에 앉았을 것인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쟁통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적부가 남아있는 것이 놀랍고 학장이 나를 극진하게 예우해주는 것도 너무나 고마웠어요.

 

함흥의 두 동생들 집에서 교대로 자면서 남동생이 하는 말이 "형님 덕분에 내가 노동당원이 되었어요. 형님이 전사하신 줄 알고 전쟁이 끝난 후에 형님의 '전사통지서'를 아버지가 받고 우리 모두 한없이 슬피 울었다는 말을 듣고 나 또한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을 쏟았죠.

 

그리고 우리 모두 형님 제사상을 차리고 모두 슬피 울었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오시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소". 하며 나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형이 이렇게 33년만에 집에 돌아오니 동생들의 눈물이 당연하지요.

 

함흥 시장과 조선노동당 시당위원장이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함경남북도에 고향방문한 첫번째 재미동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동생들이 전사자가 된 나로 인하여 북의 소위 <특수층> 이 된 사실을 나에게 전하여 주어 몸소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 이북당국이 이남의 거짓선전처럼 나를 해치거나, 나의 과거에 대해 일체 물어보지 않는 것에 대해 예상외로 놀랐습니다.

 

체류하는 동안 나의 예상을 뛰어넘어 그저 대우만 잘 해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녘에 기생하는 외세주의자들과는 달리 역시 마음이 넓고 세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마움에 가슴 뜨거움을 느낍니다.

 

조선전쟁이 끝난 후 바로가지 못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1982년에 북조국을 방문하고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늦게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고 극진히 대접해주는 북당국의 조치와 배려에 대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기만 했습니다.

 

고향 방문하고 돌아온 후 온갖 허위 날조와 모략중상을 받은 것은 남녘에 기생하는 친일, 친미 외세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과 특기였습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고 똑같지만........... 남녘 당국은 말로만 이산가족면회를 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처럼 북의 고향의 가족, 친척방문한 많은 사람들을 고향방문하지 못하도록 음과 양으로 온갖 악랄한 모략 중상을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남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성과 이북의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이 방문자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인도주의를 주창하는 자들의 민낯입니다. 외국생활에서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 가족방문한 저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악랄한 허위 모략을 하는 그 사실이 이남의 보주의자들은 반통일 외세주의자들임을 자인하는것입니다.

 

북조선에서 전쟁노병들을 대우하는 국가적 행사로 기념일을 정하고 우대하는 미덕을 보고, 과거 고향방문할 때가 회상되고 그리워 한자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시금 다짐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상(재미동포)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0-08-08 15:26:18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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