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 <내 마음의 교향곡> 《노래하라 만경대갈림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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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8-03 10:0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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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4] <내 마음의 교향곡> 《노래하라 만경대갈림길이여》
편집국
리준무 선생이 이끄는 우륵심포니는 매년 뉴욕에서 서너 차례 정기공연을 하고 있으며, 지난 4월 공연이 121회 공연이었다. 그가공연때마다 세계 유명음악뿐 아니라 북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북과 미국이 대결을 멈추고 평화 친선의 관계로 발전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음악으로 통일의 새시대를 열고자 하는 그의 애국적 노력은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북의 음악에 대해 좀더 알고자 하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음악세계>에 실린 <내 마음의 교향곡>을 연재한다.
내 마음의 교향곡
리준무(재미동포)
1. 위인송가
음악과 더불어 영생하는 김일성주석
《노래하라 만경대갈림길이여》

만경대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주석의 위대한 헌신의 한평생을 생각하며 숙연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그것은 이곳에 고향보다 먼저 강선의 로동계급을 찾으셨던 위인의 불멸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져있기때문이다.
1925년 열네살의 어리신 나이에 만경대고향집사립문을 나서시여 광복의 천리길에 오르신 김일성주석은 스무해동안이나 조국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을 승리적으로 마감하고 마침내 조국에 개선하시였다.
김일성주석은 1945년 10월 9일 항일의 나날 그렇게도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도 새 조국건설을 위해 강선으로 향하시였다.
사람들은 그날을 가리켜 김일성주석이 1945년 10월 2일 해방된 조국땅에 첫 병기공장을 건설할 터전을 잡아주신 평천리에 대한 현지지도와 함께 현지지도의 시작이라고 말하고있다.
그날의 만경대갈림길에 깃든 사연을 전해들은 온 나라의 민중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는 김일성주석께 고마움을 금치 못하면서 새 조국건설에 모두 떨쳐나섰다.
조선의 근로대중들은 위인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이곳에 만경대갈림길혁명사적기념비 《강선으로 가시는 길에서》를 세워놓았다.
지금도 그날의 뜻깊은 사연을 노래한 가요 《노래하라 만경대갈림길이여》는 이북, 이남과 해외동포들속에서 널리 애창되고있다.
노래가사는 리종성이 쓰고 김영신이 곡을 붙였다. 창작년도는 1970년이다.
광복의 피어린 길 헤쳐오시며
스무해 긴긴 세월 못 잊던 고향집
열려진 사립문을 지척에 보시며
장군님 지나가신 만경대갈림길이여
푸르른 백양나무 기쁨에 설레고
늙으신 조부모님 기다리시건만
새 조선건설의 불길을 지피시려
장군님 고향 먼저 강선을 찾으시였네
···
1945년 10월 9일 강선으로 가시는 길에 김일성주석은 만경대로 갈라져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차를 세우게 하셨다. 그리고는 만경대쪽을 가리키며 동행하던 일군에게 저기가 바로 만경대라고, 좋은 곳이라고 하시며 대신 한번 들어가보라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그 일군은 놀랍기도 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기신듯 김일성주석은 20년만에 보는 고향이라고, 들어가면 늙으신 조부모님이 계실것이라고, 자신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그리고 나라가 해방되였으니 며칠있지 않아서 자신도 돌아올것이라고 알려드리라고, 또 좋은 세상이 올것이라는것도 말씀올리라고 이르시였다.
김일성주석은 잠시라도 만경대의 고향집에 들리실것을 간절히 청하는 일군에게 다음에 들리겠다고 하시면서 강선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시였다.
항일혁명투쟁시기 간고한 행군길에서나 숙영지의 우등불가에서 늘 그리워하신 고향 만경대가 지척에 있었지만 발걸음을 돌릴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주석님심중을 어찌 다 헤아려볼수 있겠는가.
김일성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가문이 만경대에 뿌리내리게 된 경위를 이렇게 언급하시였다.
《우리 가문은 김계상할아버지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만경대에 뿌리를 내린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대부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평양 중성리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는데 생활이 너무도 구차하여 평양에 사는 지주 리평택의 묘지를 보아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채 얻어가지고 1860년대에 만경대로 이사해왔다.》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다나니 우리 집안은 매우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다가 3대를 두고 외독자로 내려오던 우리 가문이 할아버지(김보현)대에 와서는 아들딸 6형제를 보게 되여 열명가까운 대식구로 불어났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나 자손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보려고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남들이 다 자는 이른새벽에도 쉬지 않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진거름을 모았다. 밤이 되면 등잔불밑에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고 멍석을 틀었다.
할머니(리보익)도 밤마다 물레질을 하였다.》
나는 만경대고향집을 여러번 방문하였다.
만가지 경치를 한눈에 보며 즐길수 있다는 만경대는 산천경개가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서 고향집앞에 있는 남산에 올라 대동강과 평양의 경치를 굽어보면 한폭의 그림을 감상하는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민족의 태양이 솟아오른 만경대고향집은 너무나 소박하였다. 너무 의외여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중국의 호남성에 있는 모택동주석의 고향집을 가보아도, 미국의 대통령들의 생가를 가보아도 이렇게 서민적이진 못했다.
세계 그 어느곳에도 만경대고향집처럼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 되여 수많은 민중들의 뜨거운 마음이 쉴새없이 물결쳐오는 유서깊은 곳은 없다.
키낮은 사립문에 들어서면 어린시절 김일성주석이 광복의 천리길에 오르기 전까지 사용하였던 방이 보이고 그 건너편에 소여물 써는 작두와 옛날에 쓰던 간단한 농기구들과 할머니가 쓰시던 물레 등 가시도구들이 보존되여있는 헛간이 있다.
고향집 장독대에 놓여있는 쭈그러진 독에 깃든 사연과 주석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해설강사의 설명은 우리의 마음에 절절하게 와닿았다. 인류의 태양으로 추앙받고계시는 주석님가문의 살림형편도 우리네 농촌마을의 가난한 생활형편과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 민족이 일일천추로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조선의 별은 이렇게 민족의 비운이 무겁게 드리워져 암울했던 그 시기에 이 유서깊은 만경대고향집에서 찬란하게 솟아올랐던것이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지적대로 김일성주석은 우리 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온 세계가 공인하는 인류의 태양이시라는 사실에 스스로 공감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이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걸으신 광복의 천리길은 일제식민지통치의 검은 구름이 덮인 조국강산에 민족재생의 서광을 비쳐준 영광의 길이였으며 인민대중의 자주위업, 주체혁명위업의 새 기원을 열어놓은 력사의 길이였습니다.》라고 그 의미를 언급하시였다.
봉건통치배들의 실정으로 나라를 빼앗기여 도탄에 빠진 겨레의 운명, 숨막히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속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랭혹한 현실을 보면서 10대의 어리신 김일성주석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이 우리 민족은 일제를 몰아낼수가 있고 독립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시였고 그 신념은 더욱 굳혀졌다.
김일성주석의 가슴속엔 한시바삐 조국을 되찾고 그 모든것을 영원한 우리의것, 조선의것으로 만들고싶은 념원으로 가득차있었다.
어리신 김일성주석은 압록강가에서 강건너쪽 이국땅으로 선뜻 발걸음을 옮겨놓지 못하시였다. 조국을 하직하면 언제 다시 이 강을 건너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압록강을 건느려다 돌아서서 강뚝우에 나딩구는 조약돌을 하나 집어들고 손바닥에 감싸쥐시였다.
조국의 표적이 될수 있고 조국을 추억할수 있게 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지고 가서 소중히 간수하고싶으셨던것이다.
이렇게 기약없이 압록강을 건느시는 어리신 김일성주석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으랴.
설음과 비분에 감싸인 조국산천을 몇번이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김일성주석은 그 누군가가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고 노래한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압록강너머로 무거운 걸음을 떼시였다.
준엄한 항일의 나날 달빛이 흐르는 밀림속의 숙영지 우등불가에서 청년빨찌산대장 김일성주석은 한시도 잊을수 없는 정든 고향 만경대를 그리시며 몸소 창작한 《사향가》의 선률속에 향수를 달래였고 조국을 그리워하는 대원들에게 고향의 봄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노래 《사향가》도 불러주시였다.
그렇게 못 잊어하며 그리워하시던 고향이건만 해방의 새봄을 안고 조국에 개선하신 김일성주석은 나라의 부강번영과 민중들의 행복을 위한 길을 먼저 택하고 강선의 로동계급을 만나기 위해 떠나신것이였다.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광복의 천리길에 오르신 때로부터 항일의 나날 한시도 잊은적 없는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 말이다.
김일성주석은 이렇게 현지지도를 시작하시였으며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무려 2만 600여곳을 찾으시였다.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고 인민에게 최고의 행복을 안겨주시려 한평생을 바친 주석님의 은혜를 근로대중들은 오늘도 잊지 못하고있다.
만경대갈림길은 강성국가에로 이어지는 길이였다.
만경대와 더불어 빛날 력사의 갈림길에 수놓은 애국헌신의 발자취, 그것은 강선의 로동계급으로 하여금 해방후 일제가 파괴한 전기로를 2달만에 되살려 첫 쇠물을 뽑고 그처럼 간고하였던 1956년 1만t의 강재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펴겠다고 하신 김일성주석의 교시를 받들고 6만t능력의 분괴압연기에서12만t의 강편을 밀어내여 부강조국건설의 굳건한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하게 한 거대한 힘의 원천이였다.
집단적혁신운동으로 주석님의 령도적권위를 보장한 1950년대 천리마대고조의 전통을 이어 오늘의 대고조앞장에 강선의 로동계급을 내세워 더욱 빛나는 만경대의 갈림길이다.
2008년 12월 강선을 찾은 력사의 그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자체의 힘과 기술로 나라의 전력조건과 원료조건, 전극조건에 맞는 현대적인 초고전력전기로를 몇달동안에 건설함으로써 강철생산을 획기적으로 늘일수 있는 전망을 열어놓은 강선의 로동계급을 크게 치하하시였다.
그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봉화를 지펴올려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천리마의 고향인 강선이 끓어야 온 나라가 들끓고 강선의 로동계급이 소리치며 힘차게 내달려야 전국의 로동계급의 발걸음이 더 빨라지고 인민경제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강성국가건설을 위한 총진군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를수 있다고 뜨겁게 고무하시였다.
그러면서 강성국가건설의 전환적국면이 열리고있는 벅찬 시기에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서 지펴올리는 혁명적대고조의 봉화는 온 나라 전체 인민을 격동시키는 새로운 총진군의 불씨로 될것이라고, 강선의 로동계급은 전후 어려운 시기에 강철로 우리 당을 믿음직하게 받들던 그때처럼 다시한번 천리마를 탄 기세로 세기를 주름잡으며 혁명적대고조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격려하시였다.
조국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심장을 불태우시며 끝없이 이어온 김정일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의 길이야말로 해방직후 김일성주석이 고향 만경대를 지척에 두고 강선을 찾으신 력사의 갈림길과 맥을 같이하고있고 뜨겁게 잇닿아있는 성스러운 길이였다.
만경대갈림길과 더불어 빛나는 김일성주석의 애국헌신의 숭고한 뜻은 김정일국방위원장시대에 와서 더욱 찬란한 현실로 꽃펴났으며 그에 토대하여 북부조국의 축복받은 땅우에 기어이 최고수준의 인민생활이 보장되는, 그래서 세상이 부러워하는 강성국가가 일떠서게 될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