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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352] 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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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6-17 07: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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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352] 32년 지났어도 이루지 못한 민주주의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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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로 귀결된 민주항쟁

 

항쟁의 열기로 들끓었던 1987년 6월, 그로부터 어언 32년 세월이 지난 2019년 6월 10일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 홍익표는 논평에서 “더불어민주당도 6.10민주항쟁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완성과 한반도 평화의 길을 국민과 함께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6월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강령에서 천명한 정당이 집권당으로 되었고, 32년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인권변호사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되었다. 이런 사정을 보면, 지난 32년 동안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지만, 눈에 보이는 겉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돌이켜보면, 6월민주항쟁기간에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총궐기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타도하려고 하였던 전두환 독재정권은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실현된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야합한 보수대연합에 의해 이른바 ‘문민’이라는 명목으로 변형된 독재정권이 또 다시 출현하였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싸웠건만,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서 가장 초보적인 과업들 가운데 하나인 선거제도개혁(직선제 개헌)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6월민주항쟁의 집단적 체험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까지 얼마나 멀고 험한 투쟁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한국의 민중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 모두가 그런 이치를 깨달았다. <사진 1> 

 

▲ <사진 1>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민주항쟁에 참가하여 투쟁하던 청년 한 사람이 전투경찰이 난사한 직격최루탄을 맞고 다리에서 떨어져 숨졌다. 민주주의를 위해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바친 대학생 출신 노동자 이태춘 열사였다. 위의 흑백사진은 1987년 6월 27일 부산에서 거행된 이태춘 열사 장례행진의 한 장면이다. 이 흑백사진 속에는 장래에 대통령이 될 인권변호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채 열사의 영정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든 노무현 인권변호사와 그의 곁에 있는 문재인 인권변호사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노무현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고, 문재인 인권변호사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항쟁의 앞장에 섰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함께 싸웠던 인권변호사 두 사람이 각각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32년이 지나도록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2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부정부패와 폭압만행을 저지른 독재정권들 가운데서 특별히 악독했던 3대 독재정권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97년까지 간판만 바꾸면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한국의 독재정권들, 그리고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하였던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 그리고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존재하였던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정권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으로 4대에 걸쳐 지속된 독재정권기에 1979년 10월 부산마산민주항쟁,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1987년 6월 6월민주항쟁이 일어나 수많은 시위군중이 피를 흘리며 싸웠건만, 독재정권은 그때마다 간판만 바꿔달면서, 무려 36년 동안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계속되었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가 집권하여 4대에 걸친 독재정권의 세대교체는 종식되었지만, 김대중 정권의 출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한 보수적 정권교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독재정권과 박근혜 독재정권의 연속적인 출현에서 보듯이 보수적 정권교체는 매우 불안정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에서 진행된 보수적 정권교체가 필리핀과 칠레에서도 똑같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 동안 존속하였던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개된 2월민주항쟁으로 막을 내리고, 1986년 코라존 아퀴노가 이끄는 민주당계 정당연합체인 통합국가민주기구가 집권하여 보수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다른 한편, 칠레에서 1974년부터 1990년까지 16년 동안 존속하였던 피노체트 독재정권은 1990년 빠뜨리씨오 아일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의 집권으로 막을 내리고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한국, 필리핀, 칠레에서 일어난 보수적 정권교체는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세계 각국에 존재하는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은 당명에 민주라는 두 글자를 얹혀놓고, 민주주의라는 말만 요란하게 늘어놓을 뿐이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에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도 없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로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들이 집권한 이후에 펼쳐놓은 현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2. 불평등과 불공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9년 6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에서 진행된 6월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행정안전부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로만 생각하면 이미 민주주의가 이뤄진 것처럼 생각할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더 자주 실천하고, 더 많이 민주주의자가 되어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가 더 커지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경제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은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여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지만, 불평등과 불공정은 아직 청산되지 못하였으므로, 한국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전변시켜 민주주의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등과 불공정도 아직 청산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도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한국 사회에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은 극단적으로 벌어진 빈부격차로 표출되었고, 불공정은 극도로 악화된 대량실업과 부정부패로 표출되었다.  

 

▲ <사진 2> 위의 사진은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사진에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초호화 고층아파트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타워 팰리스이고, 사진에 보이는 허물어져 가는 판자집들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의 극빈층 거주공간이다. 세계경제연단(WEF)이 2015년 9월 7일에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12개국의 사회경제상황을 분석하였더니 한국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정책에서도 최악이고 구조적 부패도 최악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오늘 문재인 정부 시기에 불평등과 구조적 부패는 더욱 악화되었다. 32년 전, 500만 명에 이르는 시위군중이 항쟁의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피흘려 싸웠지만, 오늘 한국에서는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불평등과 불공정, 빈부격차와 구조적 부패가 더욱 만연되고 있다. 이것이 보수적 정권교체가 가져온 오늘의 참담한 현실이다.     

 

명백하게도,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는 민주주의가 전혀 실현되지 못한 비민주적인 사회다. 독재정권은 사라졌으나,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연된 사회를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청산될 때,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사회역사적 발전이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아져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폐절될 때,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오늘 한국 사회에 만연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민주주의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사회에서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라,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class-dictatorship)의 직접적 산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이 절대다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구조적으로 지배, 억압하고 착취, 수탈하는 독재라는 뜻이다.

 

모든 형태의 독재는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에 의해 자행되는 계급독재이므로, ‘개인독재’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같은 독재자들은 계급독재의 집행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별적 독재자들이 퇴출되었다고 해서, 계급독재가 폐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3.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는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극우정당이 집권하면,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을 동원하여 진보정당을 해산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농민과 중산층을 억압하는 가장 폭력적이고 극악한 고강도 계급독재를 자행하게 되는데, 이런 고강도 계급독재를 패씨즘(fascism,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둘째, 극우정당이 퇴진하고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할 때, 고강도 계급독재는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다. 민주당 계렬의 우익정당이 집권하더라도 대립적 사회계급관계는 폐절되지 않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는데, 그런 사회정치체제를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고 부른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악법(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2018년 8월 9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가 진행한 제1183차 정기목요집회의 장면이다. 민가협은 1993년부터 서울 종로2가에 있는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촉구하는 집회를 매우 목요일마다 진행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민가협은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들어서자 문재인 대통령이 양심수를 사면석방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박근혜 독재정권이 퇴진하고 문재인 우익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도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은 여전히 만연되어 있고, 더욱이 지난 시기 역대 독재정권들이 탄압의 도구로 사용하던 국가보안법도 철폐는커녕 개정도 되지 않았다. 이런 고착현상은 오늘 한국 사회가 패씨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익정치인들은 저강도 계급독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미화, 분식하지만,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계급적 지배의 강도와 계급적 착취의 강도가 이전보다 조금 약해졌을 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이 여전히 만연되어 있다. 전후맥락을 면밀히 따져보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산생시키고,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산생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2019년 현재 한국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가 자행되는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고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권력과 재부를 과점한 극소수 사회계급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이 혹독한 불행과 고통을 겪는데 비해, 저강도 계급독재 아래서는 억압강도와 착취강도가 약간 낮아지기 때문에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여전히 당하면서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때로 순응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저강도 계급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불평등과 불공정을 참고 견디게 만든다.  

 

고강도 계급독재와 저강도 계급독재를 구분할 때, 6월민주항쟁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그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 독재정권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6월민주항쟁 이후 고강도 계급독재가 저강도 계급독재로 이행된 것이 아니라, 고강도 계급독재가 여전히 지속되었던 것이다. 왜 이런 최악의 씨나리오가 펼쳐졌던 것일까? 

 

 

4. 1987년 6월 민주로조가 없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 아래서 계급적 지배와 계급적 착취를 가장 가혹하게 당하는 사회계급은 노동계급(working class)이다. 계급독재 아래서 농민도 억압과 수탈을 당하지만,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이 아니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전혀 갖지 못한 노동자는 자본가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사회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지만, 농민은 토지와 농기계, 농기구 같은 자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인다. 자기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개별적으로 생산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농민은 독자적인 사회계급으로 되지 못한다.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사회계급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사회계급, 곧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이고, 나머지 근로대중은 사회계층(social stratum)으로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계급은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누구보다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그런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조직하고, 농민과 도시중산층 등 다른 사회계층들과 전략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항쟁을 주도할 때,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위대한 변혁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민주로조를 건설한 노동계급의 조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끄는 주도력량으로 된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에 한국에는 민주로조가 없었고, 독재정권에 순응하는 어용로조만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로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투쟁에 앞장선 노동계급의 자주적 조직이다. 오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바로 그런 조직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일어난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하여 지역별, 업종별로 민주로조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456개 단위로조가 참가하고, 16만 명 조합원이 망라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때는 1990년 1월 22일이었고, 전노협이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된 때는 1995년 11월 11일이었다. 

 

다른 한편, 한국의 농민들은 6월민주항쟁 직전인 1987년 2월 26일 전국농민협회를 결성하였고, 1989년 3월 1일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했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에서 선봉투쟁에 앞장선 대학생들은 6월민주항쟁 직후인 1987년 8월 19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결성했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1986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노동계급은 1,400만 명을 넘어섰지만, 그들 대부분은 조직화, 의식화되지 못하였다. 1987년 6월에 존재하였던 단위로조 2,742개는 모두 어용로조들이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87년 8월 4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 강당에서 진행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제1차 전국회의 현장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6월민주항쟁의 지도부를 구성하였던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이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야당정치인, 종교인, 사회단체대표가 주도하였고, 전체구성비율에서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마땅히 민주항쟁의 주도자로 나서야 할 민주로조가 세상에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기에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사회계층들이 연대련합하여 항쟁을 주도하게 된다. 6월민주항쟁은 바로 그렇게 전개되었다. 1987년 5월 27일에 결성되어 6월민주항쟁을 주도하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계급계층적 구성에서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196명이 참가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종교인 683명, 교육자 413명, 사회단체대표 343명, 야당정치인 213명, 농민 171명, 여성 161명, 문화예술인 100명, 언론출판인 43명, 노동자 39명, 빈민 18명, 청년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노동자는 1.78%, 농민은 7.8%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주도한 것은 1987년 4월 21일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추로 하여 창당된 통일민주당과 1985년 3월 29일 민주주의정치활동가들이 결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었다. 민통련 의장은 문익환, 부의장은 계훈제, 김승훈, 사무총장은 이창복이었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는 데서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동계급이 민주로조를 아직 조직하지 못한 상황에서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으므로, 항쟁지도부는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목표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항쟁지도부에서 발언권이 강한 우익정당(통일민주당)이 자기의 구상대로 항쟁을 이끌어갔다. 당시 우익정당이 6월민주항쟁에서 추구한 전략목표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각계각층 군중 500만 명이 총궐기하였으나, 민주항쟁의 투쟁력량이 민주변혁의 추진동력으로 전화, 발전되지 못하고 유실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5. 진보정당 없이 일어난 민주항쟁

 

민주로조로 조직화된 노동계급의 투쟁력량은 민주항쟁을 이끌어가지만, 민주로조가 새로운 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정권을 수립하는 과업은 언제나 정당에 의해 수행된다. 민주로조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투쟁을 이끄는 영도조직이라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정권수립의 직접적 담당자다.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역사적 과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 곧 독재정권을 퇴출시키고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과업은 민주로조가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로조가 주도적으로 참가한 진보정당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나면, 독재정권은 퇴출되고 민주정권이 수립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실현될 수 없고, 극우정당과 대립하는 우익정당이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우익정권을 수립하는 보수적 정권교체가 실현된다. 

 

그런데 32년 전 6월민주항쟁은 극우정당의 집권이 우익정당의 집권으로 교체되는 보수적 정권교체마저 실현하지 못했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노태우 독재정권으로 간판만 바꾸는 독재정권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직접적 담당자로 되어야 할 진보정당은 6월민주항쟁이 끝난 뒤 3년이 지난 1990년 11월 10일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되었는데, 1990년 1월 22일에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같은 해 11월 10일에 창당된 민중당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처럼 민주로조와 진보정당이 서로 분리된 비정상적인 정치현실이 펼쳐진 가운데, 1992년 3월 24일에 시행된 제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민주로조가 참가하지 않은 진보정당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든든히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부분적 실현을 위한 민주변혁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2017년 10월 15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당원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민중당 출범식 장면이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결성된 진보정당은 온갖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청산하는 민주주의강령을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제시하는 한편, 조직화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힘에 의거하여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게 된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대중적 지지기반을 강화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를 부분적으로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진보정당의 민주주의강령은 그 정당의 전략목표이며 존재근거다.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은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당건설사업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말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로조와 자주적 농민조직의 힘으로 건설된 진보정당은 진보적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며, 바로 그 길에서 전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을 추진하고,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사회역사발전경로는 민주로조 건설과 자주적 대중조직 건설 → 진보정당 건설 → 진보적 정권교체 → 민주변혁 → 새로운 민주사회 건설로 이어지는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힘이 진보정당으로 결집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독재정권이다. 그래서 독재정권은 민주로조와 자주적 대중조직들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진보정당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이를테면, 박근혜 독재정권은 2011년 12월 6일에 창당된 통합진보당에게 말도 되지 않는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웠고, 우익언론매체들은 통합진보당을 ‘종북정당’이라고 집중공격하였고, 그런 광란적 분위기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독재정권의 폭거로 104,692명의 당원과 5명의 국회의원을 가진 통합진보당은 창당 3년 만에 강제해산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줄기찬 노력은 강제해산으로 막을 수 없었다. 통합진보당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진보정당이 2017년 10월 15일에 창당되었으니, 그 정당이 바로 민중당이다.  

 

민중당은 자기의 기본정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건설”하고, “민중 자신의 힘으로 노동존중, 인간존중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진보집권”을 전략목표로 제기하였고,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고, “민중이 경제의 주인이 되는 평등사회를 실현”하고, “평화지향의 중립적 통일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민중당의 강령(기본정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명백백한 민주주의강령이다. 그것은 낡고 썩은 사회를 뒤집어엎고,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변혁강령이며, 사회과학용어로 표현하면, 대립적 사회계급관계 위에 구축된 계급독재를 폐절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민주변혁강령이다. 32년 전 6월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런 민주주의강령을 가진 진보정당이 있었더라면 민주항쟁은 민주변혁으로 전화, 발전되었을 것이다.  

 

 

6. 모습을 드러낸 씨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리브시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살해만행과 장기집권음모에 분노한 각계각층 군중이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대도시들에서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군중은 화염병을 던져 각지의 파출소들과 경찰차량들을 불태웠다. 항쟁의 폭발력은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었고, 최루탄을 난사하는 전투경찰의 진압으로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날로 불어나는 시위군중이 총공세를 벌여 경찰저지선을 돌파하는 날, 전두환이 있는 청와대까지 들이닥칠 판이었다.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해지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최후의 대책을 꺼내들었다. 1987년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국방장관, 고위급 군지휘관들, 안기부장을 청와대로 불러 비상회의를 진행하면서, 최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이 논의한 최후의 대책은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짓밟으려는 유혈진압대책이었다. 1980년 5월 군대를 출동시켜 광주민주항쟁을 짓밟고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살인악당이 6월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었다. 

 

<뉴욕타임스> 1987년 7월 6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 경찰이 시위군중을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87년 6월 19일 밤, 전두환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서울과 다른 대도시들의 외곽을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한국군 부대들이 출동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두환은 갑자기 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기사에 당시 긴박했던 상황이 담겨있다. 보도에 따르면, 1987년 6월 20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해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던 전용기 회의실에서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급박한 상황을 놓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씨거는 몇 시간 전에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내온 상황보고를 받고 밤잠을 설친 채, 아침 일찍 슐츠 국무장관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을 긴장시킨 것은 전두환이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군 출동을 검토하고 있다는 긴급보고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자제하라는 친서를 이미 보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 전두환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아무도 몰랐다. 씨거는 슐츠에게 자기가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수행하지 않고 서울로 날아가 전두환에게 미국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슐츠도 그 의견에 찬성하였다.       

 

국무장관 슐츠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1987년 6월 22일에 발표한 공식논평을 통해 한국 군부가 6월민주항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했고, 슐츠와 헤어진 씨거는 6월 23일 허둥지둥 서울에 나타났다. 씨거는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90분 동안 회담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전두환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진 긴박한 움직임을 시간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두환이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한 때는 6월 19일 오전 10시였고, 그가 위수령을 발동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한국군에게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내린 때는 6월 19일 밤이었고,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난 때는 6월 24일 오후였다. 그런데 6월 20일 새벽 전두환은 자기가 몇 시간 전에 내렸던 위수령발동지시와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갑자기 취소하였다. 전두환의 갑작스러운 취소와 씨거의 청와대 방문 사이에는 무려 4일이라는 시차가 있다. 이런 정황은 전두환이 씨거를 통해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취소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어떤 다른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취소결정을 내렸음을 말해준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워싱턴포스트> 1987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씨거가 서울에 도착한 6월 22일 이전에 “워싱턴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개입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미국 국무부는 그런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 요구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전두환으로부터 시위진압출동명령을 받은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항명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인 항명이 아니었다. 전두환이 6월 19일 오전 10시에 청와대에서 소집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 발동과 한국군의 시위집압출동을 전두환과 함께 논의한 한국군 고위지휘관이 불과 몇 시간 뒤에 마음이 바뀌어 전두환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고 항명하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항명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에 관한 역사기록에서 오랜 기간 은폐되었던 항명사태의 진상은 1987년부터 3년 동안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정태익이 <조선일보> 2013년 12월 9일부에 실은 기사에서 드러났다. 정태익의 서술에 따르면, 전두환이 안보위기를 빌미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해 친위군사정변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으로 전해졌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각급 장교들을 통하여 한국에서 군사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신속히 한국군의 각급 장교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지휘체계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내막을 살펴보면, 1987년 6월 20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이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한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리브시는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을 차단한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1987년 6월 25일 전역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1987년 6월 24일 오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개스턴 씨거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다. 전두환-씨거 회담은 90분 동안 진행되었다. 회담에는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최광수와 당시 주한미국대사이었던 제임스 릴리가 배석하였다.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야당지도자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하게 압박하여 장기집권음모를 포기시켰음을 말해준다. 그보다 앞서 6월 19일 오전 10시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진행된 비상대책회의에서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고, 그날 밤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켜 6월민주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전두환의 시위진압출동명령을 거부하는 항명사태를 일으켰고, 전두환은 하는 수 없이 시위진압출동명령을 취소하였다. 이런 돌발적인 항명사태는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리브시의 긴급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6월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진행된 전두환-씨거 회담에서는 무슨 대화가 오갔을까? 전두환-씨거 회담이 있었던 때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6월 24일 자정,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면서, 그에 대한 사면복권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유혈진압을 감행하려고 광분하던 전두환이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태도돌변은 미국이 씨거를 청와대에 보내 전두환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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