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베트 근거지에 찾아 온 ‘찬란한 슬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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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상일 작성일13-03-04 16:3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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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전한신대학교 교수)
함경북도 온성에서 간도까지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 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1924년)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문학사상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경계가 삼엄한 두만강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밀수출 소금실이 마차로 떠나보낸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불안에 떨며 기다리는 아내와 그를 둘러싼 일제 한말 국경지방의 동포 생활의 엄산한 정경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함경북도 온성은 한반도 지도의 최첨단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 온성은 두만강 상류와도 멀지 않으며 가장 쉽게 만주 간도땅으로 건너 갈 수 있는 지역이다. 두만강 맞은 편 만주에는 마촌이란 동네가 있었다. 이 동네에는 1933년대에 소위 쏘베트 공동체가 비교적 일찍 만들어졌다.
‘쏘베트’란 러시아 혁명이후 혁명을 전파하고 공산주의를 현실에서 실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일명 쏘베트를 유격구 혹은 ‘근거지’라고도 한다. 마르크스 사상의 실험무대라고 할 수 있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물론 쏘베트는 국제 공산당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건너간 조선족들은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쏘베트’란 외래어를 ‘쇠붙이’로 잘 못 알아듣기 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도시 생활을 해 보지도 못했으며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일구어 오며 수천 년간 올망졸망 살아 본 것이 전부이다. 자기가 농사지은 것을 일년 내 먹고 사는 것이 전부였다. 이를 ‘Gemeinschaft’ 라고 한다. 그래서 시베리아에서 불어 온 공산 혁명에 따라 같이 일하고 같이 분배해 가며 내 것 네 것 없이 같이 살아간다는 이념 앞에 조선인들은 대부분을 낯설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공동식당
아직 ‘쏘베트’란 말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한 이주민들에게 가장 낯 선 것은 공동식당이었다. 사람들의 구미란 다 다른 데 공동식당에서는 늘 같은 밥을 같은 반찬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였다. 특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병약자들이나 노약자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어느 저서에 사람들의 구미를 통일시켜야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대목이 있느냐고 불평불만을 털어 놓았다. 이에 대하여 간부들은 “사회개조를 하겠다면서 사람들의 입맛 하나 뜯어고치지 못하는가”라 하면서 핀잔을 주었다. 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어떻게 조절해 혁명을 성공 시킬 것인가.
오늘날 북조선 김일성 사회주의 혁명은 이 와중에 정립되고 탄생되었다.
마촌 동네 어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입 있는 사람들이면 한마디 씩 ‘사회주의 혁명’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계절은 계절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강 건너 근거지에는 지금 조선 땅에서는 듣도 보도 못하던 새로운 소리와 새로운 주장들을 다투어 내 놓고 있었다.
근거지의 봄, 찬란한 봄
유격구에 대하여 일제가 통치하고 있는 지역은 ‘백색지구’라고 한다. 유격구에 적응하지 못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백색지구도 도망쳐 나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김창억과 마동호는 마촌 쏘베트 유격구를 지키는 파수꾼들이었다. 김창억은 온성에서 윤보금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대리고 왔다. 마동호 아버지는 근거지를 박차고 떠나고 말았다.
김창억의 결혼은 화근이 되었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바랐던 유격대 입대에서 실격 당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보금은 밤에 남몰래 남편을 위해 온성 친정으로 도망을 쳐 가고 말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인이 한 번 출가한 다음에 자기 친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온갖 수모를 감당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짓 가운데 하나였다.
이 속이 타도록 한스러운 여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만 강변에는 기러기 떼가 날아든다. 강남 갔던 기러기들이 봄이면 이곳에 모여든다. 남쪽에서는 가을에 몰려드는 것과는 반대이다. 김창억의 아버지 김진세 노인은 떠나버린 며느리를 생각하며 아들놈을 원망하였다. 기러기 울음소리가 마치 며느리 울음소리 같이 그의 귀에 들렸다. 김진세 노인에겐 유격대라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며느리 드려 손자 손녀 보고 여생을 마치려 강을 건너 왔건만 아들이 유격대에 빠져 가문이 망하게 되었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젠장 저 놈의 기러기만 보아도 가슴이 쥐어 짜인단 말이야 하면서 곰방대에 불을 당긴다”
이를 두고 근거지에 찾아 온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한다.
과연 공산 혁명 가능할까
백색지구로 도망치지 않는 사람들도 공동창고에는 곡물을 적게 바치고는 대부분의 양곡을 자기 집 움 속에 숨기거나 백색 지역 친척집에 쌀을 보내고 다시 찾아 올 생각들이나 하고 있었다.
김일성 장군은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공산주의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불가능하겠구나. 1933년대와 1934년 대에 세기와 더불어 짊어진 한 혁명아의 고민이었다. 국제 공산당의 지시도 무시할 수 없고 주민들의 불평불만도 감싸 주어야 할 이중 고민이 첩첩이 쌓여만 간다.
그런데 여기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혁명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있었다. 화요파나 엠엘파와 같은 종파주의자들이었다. 국경의 밤은 이어진다. “봄이 와도 꽃 한 폭 필줄 모르는/강건너 신천으로부터/바람에 눈보라가 쏠린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그러나 지금의 남의 땅이 된 동만 일대는 아직 칼바람이 분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일제의 탄압보다는 내부에서 부는 돌개바람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소위 화요파와 엠엘파와 같은 종파 분자들이 일으킨 5월 30일 폭동의 후과는 참혹하였다. 마르크스 이론은 맹목적으로 적용함으로 농부들의 집에서 숟가락 하나 까지 공출해 가고 화전민들이 일구어 놓은 밭뙈기마저 토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지주라 하면 씨알을 말리는 5월 폭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쏘베트 근거지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무주공산이 된 만주 땅에 몰려든 조선 이주민들을 보는 중국인들의 시각이 좋을 리 없었다. 일제의 억압을 피해 강을 건너 왔건만 중국인들은 조선 사람들은 ‘부정선인’ 혹은 ‘소귀자’라 불러 일제의 앞잡이들로 보며 경계하고 멸시한다. 이것이 일제 식민지 기간에 겪었던 우리의 운명이었다.
안수길의 ‘북간도’의 첫 장면은 만주에서 조선인 두 인삼 장수끼리 싸움이 붙었는지 일본과 중국 순사가 서로 끌고 가려는 장면이다.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 온 것이 좌경모험주의자들이다. 인민들이 지금 현장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가는 염두에도 없이 오직 순수 마르크스 이론 적용에만 골몰하고 혈안이 돼 있었다.
그들은 정의감에 붙 타 있었다. 종파적인 야심 때문인가. 근거지를 해치려고 작심하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인가. 이 종파 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는 한 편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간도가 우리 조상 땅이라 하면서 고토회복을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자들이다.
처녀들의 댕기에 찾아 온 봄
이 두 집단은 서로 그 이념이 상반되지만 요즘 말로 하면 멘붕(정신적 파탄 붕궤된자)이다. 이 소용돌이와 암초 같은 잡초들 사이에서 희망의 새싹은 돋아나고 있었다. 계절은 변함없이 바뀌고 있었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들의 댕기에는 빨갛고 파란 꽃들이 드려져 있었고 버드나무 줄기들엔 봄물이 한껏 오르기 시작하였다.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이 가는 출구가 있다. 그것은 변절이다. 그렇게 가장 진보인 것처럼 자처하던 박두칠이 국제당에서 파견한 당원을 사살하고 도주 하였다. 화요파 권일균 유격대원 유현민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도주하였다. 이렇게 근거지의 봄빛은 찬란할지 몰라도 역설적이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란 역설 말이다. 땅 빼앗기고 봄마저 봄 같지 않은 계절의 변화 속에 살아 갈 갈피를 잡지도 못할 지경인 것이 근거지의 봄이었다.
유격대장 김일성 장군은 이 상처받고 찢겨진 영혼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친히 쟁기를 잡았다.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소를 따라 이럇 이럇 하며 지나가는 쟁기에는 만주벌 검은 옥토가 마치 시루떡 같이 척척 접어 넘어간다. 동네 어른들과 아녀자들까지 나와 과연 유격대장이 쟁기질을 할 줄이나 할 줄 아는 지 신기하게 쳐다본다.
저녁이 되자 김대장은 김창억의 아버지 김진세 노인댁을 찾아가 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저는 죄를 지은 몸이 옵니다”라고 머리 숙여 채 20을 갓 넘긴 김일성장군 앞에 머리를 조이며 사죄를 한다. 무슨 사연이요 하고 말해 보시오 하니. 바로 며느리 보금이 이야기였다. 자기 때문에 유격대 입대가 거절된 남편을 위해 대왕청하 물에 몸을 던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온성 친정으로 갔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 모든 잘 못이 자기 때문이라고 고해성사나 하듯이 김대장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오랜 침묵을 깨고 김장군은 노인을 향해 “같이 새끼나 꼬면서 이야기나 합시다”고 청한다. 노인은 더 몸 둘 바를 모르고 장군님께서 이 궂는 일을 어떻게 하시냐고 당황해 한다. 김일성 장군은 “저의 조부님도 노인과 같은 농사꾼입니다. 아까 방에 들어 올 때에 맡은 짚 냄새는는 마치 고향집에 온 것 같게 했습니다” 라고 하자 김노인은 또 놀라며 장군님도 우리와 같은 농사군 이십니까 반문한다.
이렇게 사람들과 동고동락 하는 것으로 장군의 근거지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쏘베트의 이상을 부정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 사상을 어떻게 현실 속에 구현해 낼 것인가가 그의 고심 거리였다. 그렇다고 국제당이 명령 내리는 대로 따라 했다가는 근거지 자체가 거들이 날 지경이다. 이 직면한 국면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다산의 여전제 같은 토지개혁
다시 말해서 토지의 분배를 어떻게 현명하게 해 낼 것인가. 22세의 김일성장군은 백발 노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토지에 대한 실태 조사를 정확하게 해 내고 있었다. 쏘베트의 주문과 지시도 참고를 하면서 몰수해야 될 토지와 분배해야 될 투지를 2중으로 구분하였다. 토지에 대한 분배는 농호 단위로 하지 말고 일 할 수 있는 노력 인구에 따라 하도록 했다.
일 할 수 있는 사람 중심으로 한다는 말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주민호구 조사부부터 만들어 한 호구당 일 할 수 있는 노동 인구가 정확히 얼마인지를 계산해 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몰수해야 될 토지에 대해서는 무조건 몰수 할 것이 아니라 몰수된 토지의 평수와 토질을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조사하게 하였다. 즉, 토지의 비옥도, 위치, 여러 가지 자연 조건에 따라서 1등전, 2등전, 3등전으로 분류하게 하였다. 그러면 누구에겐 1등전 누구에겐 2등전과 3등전을 줄 것인가. 이 방법은 일찍이 정다산이 구상한 여전제와 닮은 모습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제도는 해방 후 북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토지분배 위원회 위원들은 머리에 수건을 둘러메고는 구수밀의 하여 가며 불평불만 하나 없이 분배 작업을 하였다. 1등전은 고농과 빈농, 항일유격대 가족들, 그리고 혁명 열사들의 가족들에게 분배하였다. 나머지 2등전과 3등전도 위치와 비옥도에 따라서 땅이 비옥하지 않으면 평수를 늘려주었다.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 그 자체였다.
그 결과 쏘베트 정책에 반대하여 유격구를 떠나 백색지구로 갔던 농민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근거지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마동호의 아버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몰래 근거지로 들어오다 밤에 마동호의 친구에게 잡혀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다시 찾아 온 이들에게도 김일성 장군은 하나 푸대접하지 않고 재분배를 해서라도 이들이 동등하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김일성 장군은 자기가 꼰 새끼를 직접 들고 다니며 평수를 재기도 하고 자기가 쟁기질 한 흙을 한 움큼 집어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부스러뜨려 보기도 하면서 토질을 가늠해 보았다.
그 어느 봄날 십리평에서 밭들을 다 둘러보고 동림촌으로 돌아가던 해 질 무렵 봄 하늘의 연무 속에 감빛으로 보이는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비탈 밭 옆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서 참새들이 무슨 경사라도 난 듯이 야단스럽게 우짖었다. 사슴과 노루들도 인간이 행복하니 자기들도 등달아 즐거운 듯 기쁨에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1930년 대 근거지의 봄은 슬픔에 차 있으면서도 찬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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