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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신학의 해방 5] 공통의 신학, 통일 신학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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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환 작성일16-04-17 21:0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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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공통의 신학

 

-통일 신학의 모색-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종교와 종교심의 차이점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종교심>이란 <초자연적 신>에 대한 신앙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구별되는 독특한 경험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미국이 낳은 철학자 죤 듀이(1859~1952)는 <종교(religion)>와 <종교심(religious)>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종교>란 항상 제도적 기구를 가진 독특한 신앙 신조들과 실천사항들을 의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심>이란 어떤 제도적 실체나 신앙 신조의 체계를 뜻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모든 인간의 이상(ideal)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뜻한다”([공통의 신앙], 1934, 9~10페이지).

 

듀이는 인간 공동의 그리고 자연스러운 관계와 동떨어진 종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파괴하고 격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듀이는 현 제도적 종교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인간의 경험 속에 내포된 <종교심>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종교심>이란 <경험의 질적인 내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우리가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는 <적응력>, <새로운 방향감각>,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주느냐 하는 영향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독특한 경험이 질적으로 종교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초자연적 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삶과 그 삶의 조건에 얼마나 인간 유기체가 잘 적응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신교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과 소통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개적 질문에 답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면 누구나 “하나님이 직접 내게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이다.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경험을 했다는 자신들의 <경험의 질적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가난한 가정의 주부가 새벽기도를 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체험했다고 하자.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여 교회에서 나와 집에 돌아와 굶고 있는 자식들과 술 취한 남편을 보고 그 부인은 화가 치밀어 욕을 퍼붓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장사를 나갔다고 하자. 그런 반복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매일 아침이 되면 다시 새벽기도에 나가서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고 내려와 또 그 치욕적인 삶을 반복한다고 하자. 그녀의 실생활에서 질적으로 달라진 내용이 무엇인가? 단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과 소통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그 질적 변화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적으로 그녀의 생활내용이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결과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죤 듀이는 인간과 초자연적 신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기체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가져오는 결과, 즉 얼마나 더 잘 환경에 적응하느냐에 따라 그 열매를 측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적응>이라는 말은 듀이에게 있어서 <종교심>을 정의내리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적응에는 3종류가 있다고 듀이는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가 <수동적 적응(accommodation)>이다. 어떤 제한된 환경 속에서 그 환경에 따라 인간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아무리 눈과 추위를 걱정해도 별도리가 없다. 이런 경우 눈과 추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눈과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사람들이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아무리 불평해도 소용없다. 비 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소극적인 태도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단지 <독특한 행동양식>에 변화를 줄 뿐 <전 인간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두 번째는 첫 단계보다 더 높은 <적극적 적응(adaptation)>이다. 우리는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할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요구와 목적, 가치, 이상에 맞게 외부환경을 변화시킨다. 예를 들면, 추위와 더위를 피하려고 집을 짓고, 난방을 설치한다거나, 더 빠른 의사소통을 위해 전화를 만들고, 빠른 교통을 위해 차와 비행기를 만든다. 또한, 가뭄에 대비하여 수리시설을 만들기도 한다. 이 변화과정 역시 <전 인간적 인격>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첫 단계의 적응보다는 더 적극적이다

 

세 번째는 보다 <깊고 포괄적인 적응(adjustment)>이다. 이 깊고 포괄적인 적응은 이러저러한 외부의 환경과 관련하여 이러저러한 내적 요구에 따라 변하는 게 아니라 <전 인간적인 존재>, 혹은 <인격>에 변화를 준다. 이러한 변화는 내부나 외부의 어떤 환경의 굴곡과 관계없이 우리의 <전 인간> 속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변화는 흩어진 자신의 여러 요인을 통일시켜준다. 이것을 <종교적 적응>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성 속에서 어느 시 한 편을 읽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전 인간적 존재와 삶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생에 대한 자세를 새로이 결단하는 태도의 변화는 단지 우리의 요구의 만족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전 인간적이다. 어느 부유한 가정의 한 학생이 그저 출세하여 잘 먹고, 잘 입고, 세도 부리며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일류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하자. 그러다가 의식화 그룹에 소개되어 그의 이웃과 사회, 그리고 더 나아가 민족이 안고 있는 문제들, 예를 들어, 조국분단의 문제, 미제에 의한 신식민화의 문제, 독재정치, 자본의 횡포, 항시적인 전쟁위협,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과의 불평등, 등의 문제들이 바로 그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역사 속에서 위의 사회문제들을 푸는데 헌신하기로 하고 시위에도 가담하고 조직을 만들고 활동하다가 감옥에도 갔다고 하자. 이 학생의 변화는 앞의 두 적응보다 깊고 포괄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 인간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환경이 변하여도, 감옥에 가도, 매와 추위와 더위 같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계속된다. 이러한 적극적이고 전 인간적인 변화를 듀이는 <종교적 적응(religious adjustment)>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적응을 이룩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이러한 종교적 적응, 변화, 결단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세계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갖고 참된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된다. 삶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자기 자신이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세계를 적극적으로 개조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자주적인 생활태도를 갖게 된다.

 

역대의 예언자들과 성인들이 이러한 종교적 결단, 변화에 도달한 분들이었다. 물론 우리 평범한 모든 사람도 매 순간순간 이러한 종교적 결단을 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다. 어떤 독특한 종교의 교리나 초자연적 신에게 헌신하는 것만이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내용 속에 종교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각자가 민주주의, 정의, 평화, 평등, 자주, 등과 같은 포괄적 이상(ideal)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통일을 이루는 곳에는 <종교적인 경험의 질적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고 죤 듀이는 생각했다.

 

사실상 이들 인간적인 이상들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자기 생명을 내놓을 때도 있어야 하고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죤 두이는 그의 책 [공통의 신앙] 27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심>, <영적인 내용>을 정의 내리고 있다.
 

“Any activity pursued in behalf of an ideal end against obstacles and in spite of threats of personal loss because of conviction of its general and enduring value is religious in quality.<어느 한 궁극적인 이상이 지닌 그 일반적이고 영구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 때문에 많은 장애물과 개인적인 손실에 대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추구되는 어떤 활동도 질적인 차원에서는 종교적(영적)이다. (위 책 27페이지)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궁극적 이상(ideal end)을 실천하기 위하여 해방 후 김구, 여운형, 등 얼마나 많은 애국자가 생명을 바쳤으며, 그 후 4.19와 5.18, 6.29 때, 그리고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이남의 청년들과 진보적 인사들이 감옥에 가고 어려움(obstacles)을 당했으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었(personal loss)는가? 얼마나 많은 애국자가 <조국통일>이라는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다가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가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었는가? 전태일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가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헌신하다 생명까지 바쳤다. 듀이는 이러한 <인간적인 이상들>을 실현하기 위여 헌신하는 모든 활동을 다 <영적인 종교적 활동>이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에만 [영적인 것], [종교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죤 듀이처럼 인간 유기체와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심>을 해석하게 되면 여러 종교적 신조나 도그마, 그리고 여러 사상, 철학, 이념으로 분열된 집단과 집단,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장벽을 허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로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고 남과 북으로 70년 동안 분단된 코리아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더 나은 자연과 사회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인간의 이상에 헌신하는 곳에는 종교적 가치가 있다>고 듀이처럼 해석하게 되면 반드시 이북이 <비종교적>이라고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북도 인류의 생명인 <자주성>이라는 궁극적 이상(ideal end)을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사회주의>라는 궁극적 이상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지극히 종교적이다. 그리고 이북 사람들은 모두 분단된 우리 코리아 민족의 지상과제(ideal end)인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으므로 아주 종교적이다. 이들 이북 민중들은 <자주성>과 <사회주의>라는 궁극적 이상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연합세력들과 이남의 보수세력들로부터 항시적으로 전쟁과 경제제재, 정권붕괴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궁극적 이상인 <자주성>과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으니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죤 듀이가 강조하는 <경험의 질적 내용>으로 종교심을 보게되면 이북 사람들도 모두 종교적이고 영적이다. 그러니 이북에 종교의 자유가 있느니 없느니 시비할 필요도 없고, 이북이 기독교 신을 믿지 않는다고 이북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로 몰아 적대관계를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본다. 듀이가 강조하듯이 <경험의 질적 내용>으로 <종교심>을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남과 북이 공통으로 가져야 할 자세이다.

 

 

초자연주의 종교의 문제점

 

 

<초자연적 신>과의 관계에서만 <종교심>을 논의하던 종래의 정의를 뒤집어엎고 죤 듀이는 <인간 유기체>와 자연과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심>을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지적했다. 이러한 종교심의 의미와 정반대되는 것이 바로 <초자연주의>이다. 초자연주의란 인간의 공통 경험과 관계없는 초인간적이고, 기적적이고, 신비적인 질서를 뜻한다. 이 초자연주의의 문제점을 알아보자.

 

첫째로, <초자연주의>는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구별하여 인간이 자연과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역량을 약화시킨다. “초자연적 힘에 대한 의존은 인간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공통신앙>, 46페이지)고 듀이는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초자연주의는 인간이 추리하고 실험하는 능력을 파괴한다. 초자연주의가 제안한 목표들은 처음에는 고무적이더라도 그 목표가 달성될 수 없으며, 또한, 현재의 우리 경험과 관계가 없으므로 결국 실망하고 만다. 인간은 어차피 구체적인 자연과 사회에서 살아야 하며 그 자연과 사회의 물질을 다루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초자연주의가 제안하고 있는 목표와 자연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따라서 초자연주의는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물질세계를 다루는 절차를 무시하기 때문에 일종의 독단적 태도를 준다. 그리고 초자연주의자들은 인간 밖의 초자연적 힘을 기다리기 때문에 삶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초자연주의는 일종의 <반계몽주의>이다. 그러기 때문에 초자연주의는 결국 인간 삶에 해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초자연주의에 의존하는 것과 자연력의 사용, 둘 중의 하나를.” (죤듀이. [공통의 신앙], 81페이지)

 

둘째로, 초자연주의는 자연을 떠난 초현실적인 이상을 믿음으로써 인간과 자연을 분리한다. 듀이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의 혼연일체를 주장하고 이 자연과의 유대관계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낳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종래의 초자연주의자들이 느끼던 종교심보다 더 깊은 종교심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자연주의는 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초자연주의는 인간과 인간과의 상호 공동의 경험과 의사소통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초자연주의는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회에서 가족, 이웃, 시민과의 관계,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탐구 속에서인데, 초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은 이 구체적인 관계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스스로 <거듭 낳다>느니,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그런 독특한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단지 <구원의 대상>으로 대하기 때문에 공통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종래의 초자연주의적 종교들, 특히 기독교는

“양과 염소, 구원받은 자와 타락한 자, 이미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로 구별하여 왔다. 교회 울타리 밖의 사람들과 초자연적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단지 자기와 똑같은 교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형제로, 그리고 한 가족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여겨왔다([공통의 신앙], 84페이지).

 

이렇게 초자연주의는 인간과 인간을 구별하고 있다.

 

넷째, 이러한 초자연주의는 결국 개인과 개인뿐 아니라 집단과 집단, 더 나아가 민족과 민족끼리 서로 반목질시하게 만든다. 교리가 다르다고 같은 종교 내에서도 여러 파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다. 이남의 장로교가 사소한 교리 차이로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갈라지고, 또 예수교 장로회가 <합동 측>과 <연합 측>으로 갈라져 서로 정통성 경쟁을 하고 있다. 종교가 다른 민족끼리 서로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초자연주의는 인간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가장 나쁜 이기주의적 개인주의를 낳게 한다고 듀이는 맹공격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초자연주의 종교는 <참된 종교심>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죤듀이는 인간과 자연과의 결속감을 신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다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신뢰하고 있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심>이란 초자연적 신과의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유기체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초자연주의 신앙 속에서는 인간의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자연과 동료 인간과의 자연스러운 관계가 파괴되며, 따라서 종교가 인간과 인간끼리, 그리고 다른 집단과 집단끼리, 다른 민족과 민족끼리 서로 반목질시하게 하여 전쟁마저 치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듀이는 우리 인간 모두에 <공통된 종교 신앙>, <통일신앙>을 창출해내려고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신의 개념

 

 

<종교심>이란 <초자연적 신>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인간 유기체와 자연적 그리고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 내리고 초자연주의 종교의 문제점을 맹공격한 상태에서 과연 <신>에 대한 개념은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다면 <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죤 듀이에 의하면 신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집단경험의 역사적 유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예배의 대상으로는 동물, 귀신, 조상, 자연물, 태양, 등의 천체, 등등의 다양한 형태를 띠어왔다. 그에 따라서 예배형태도 천태만상이었다. 그러나 모든 하등종교에서나 고등종교에서 똑같이 공통된 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언급된 <초자연적 존재>와 <영생>, 이 두 가지였다.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원시인들은 자연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원시적인 지식과 도구로는 계속하여 엄습해 오는 자연의 공포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원시인들은 천둥이 쳐도, 홍수가 나도, 지진이 나도, 계절이 바뀌어 식량이 떨어지고 추위가 와도,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도 다 그 원인을 <보이지 않는 힘>, 즉 천상의 <초자연적 존재>가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그들의 최대의 희망은 <안정>과 <평안>을 찾는 것이었다. 죤 듀이는 1929년에 쓴 그의 책 [확실성의 탐구]의 서두에서 “위험한 세상에 사는 인간은 확실성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불안한 삶의 현실이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원론>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듀이는 위의 책 10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한 개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자연을 다루는 도구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수난을 당했을 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잡으려 한다. 지금처럼 과학적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원시인들은 점을 치거나, 기우제 같은 예배를 드리거나, 요술을 통해 자연을 통제해보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태에서 원시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불안 속에서 인간은 <영원>, <질서>, 그리고 <안정>을 원했고, 그들의 불안을 제거해줄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원과 질서, 안정을 지닌 <초자연적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과 자연 세계는 변화무쌍하고, 불안하고, 무질서한 일시적인  것으로, 초자연세계는 안정되고, 질서가 있고, 변화가 없는 영원한 것으로 갈라 생각하게 되었고, 인간은 무능하나 초자연적 신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절대적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현실 타개를 위하여 생각해낸 <이상(ideal)>이 <절대적 존재>로 바뀌었다. 이것이 <신의 유래>인 것이다.

 

그러면 <이상(ideal)>이란 어떤 것인가 알아보자. 인간의 <이상>이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 직면하여 그 현실을 개선 발전시키기 위하여 상상해낸 <바람직한 목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이상은 자연 세계와 구별되는 <초자연적 현실>이 아니라 <행동의 계획>에 불과하다. 모든 이상은 자연과 사회의 환경 속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의 개선 발전을 위하여 가능성을 투사한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이상적 가능성을 투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이상들을 실현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여러 결핍과 불완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 이상의 근원이라고 듀이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이상에 대한 정의는 종래의 고전철학과 전통적 종교가 갖고 있던 정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다른 점은 <이상>이 <초자연적 신>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 세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듀이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What I have been criticizing is the identification of the ideal with a particular Being(내가 비판해온 것은 이상을 어떤 특별한 존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The Common Faith], 48페이지).

 

듀이는 이 이상(ideal)이란 자연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조건 속에 그 뿌리를 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을 <여호와>니 <알라>니, 등의 특별한 초자연적인 신적 존재로 일치시키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듀이의 분석에 의하면, <이상>은 상상으로 시작되지만 <상상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상>은 물질과 사회적 경험세계의 <실제적 재료>에 의해 창조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기관차는 스티븐슨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전보 역시 모르스 이전에는 존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만들어질 조건들은 이미 물질적 재료와 에너지 속에, 그리고 인간능력 속에 있었다. 상상력이 자연 속에 현존하는 재료들을 재조정하여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상상력을 통하여 자연 속의 재료들이 가능성에 따라 새로이 재조정되어 새로운 이상을 창조해낸다. 이러한 새로운 이상은 처음에는 희미하고 불확실한 형태에서 출발하지만, 이 이상이 제삼 제사 숙고되고 그 실천적 실험을 거듭함에 따라 분명한 윤곽을 갖게 된다. 이처럼 <현실 속에서 상상을 통해 시작된 이상이 다시 인간의 실천력을 통해 현실화되는 끝없는 관계>를 듀이는 <신>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주장한다.

 

좀 더 자세히 이 문제를 설명하면, 듀이에게 있어서 <신>이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잠재능력과 자연의 물질적 재료와 에너지를 더욱 깊게 심화시키고 그리고 더 넓게 확대하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신>이란 인간의 창조적 잠재능력과 자연 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재료와 힘을 연결하게 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듀이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There are forces in nature and society that generate and support the ideals. They are further unified by the action that gives them coherence and solidarity. It is this active relation between ideal and actual to which I would give the name ‘God’.” (이상들을 낳게 하고 지지하는 힘들이 자연과 사회에 존재한다. 그 힘들은 결집력과 결속력을 주는 행동으로 더욱 통일된다. 나는 이러한 이상과 실현 사이의 적극적인 관계에 <신>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The Common Faith], 51페이지>

 

이와 같은 <신>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는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자주, 평화, 정의, 평등, 행복, 복지를 위해 노력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구와 소망을 우리의 경험에서 떠난 <초자연주의>와 화해시키려는 힘든 과정에서 해방시켜준다. 이런 새로운 <신>의 정의는 초자연주의에서 떠나 인간이 직면한 긴급한 문제들([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에서 심판자가 강조한 의식주, 질병 치료, 감옥문제)에 더 큰 관심을 두고 그 해결을 위해 헌신케 한다. 듀이가 볼 때 많은 사람이 구체적인 <통일된 원칙>이 모자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라는 <통일된 원칙>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정서적이고 상상적인 지주 역할을 한다고 생각되어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하고 신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고 듀이는 말했다. 이와 같은 경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신의 개념을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세계관과 인간관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위에 지적한 죤 듀이가 정의한 <종교심>과 <신관>을 이해하게 되면 이북의 사람 중심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을 배척할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면 이북의 주체사상도 인간의 <자주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창조적 과정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죤 듀이가 이야기하는 <통일된 원칙>으로서의 <신>을 믿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북은 인류의 궁극적 이상(ideal end)인 진리와 정의, 평화와 안정, 자주와 평등,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있으며 분단된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ideal end)인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모두 헌신하고 있으므로 아주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명백하게 <정의>를 대표하고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굴함 없이 싸워온 <정의의 강국>이라고 선포하고, 이제부터는 온갖 침략과 약탈을 일삼아 온 <악마의 제국>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연합세력들과 강대국들을 굴복시키고 징벌하며 세계의 잘못된 <정치풍토>를 바꾸어 세계역사를 새롭게 정립해 나갈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오랫동안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횡포에 억눌리며 지배와 예속, 재난과 희생만을 강요당하면서도 항거 한번 못해본 약소국들에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북의 정의(justice)와 자주, 평화를 위한 헌신적 활동은 죤 듀이가 지적한 장애물들(obstacles), 즉 항시적인 전쟁의 위협, 경제제재, 체제전복, 등과 생명의 위협(personal loss>을 받아가면서도 이루어낸 것이다. 이러한 정의와 자주, 평화를 위한 이북의 헌신적 행동은 죤 듀이에 의하면 지극히 <종교적>이다. 특히 이북은 이제부터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만들어놓은 불공평한 국제질서를 과감하게 바꾸어 이 세상의 모든 나라의 <자주권>과 <평등권>이 보장되고 신뢰와 존중의 토대 위에 서로 협조해나가는 <공정한 인류사회>를 건설해 나가겠다고 천명하였다. 이북의 이러한 <평등한 국제질서>와 자주권과 평등권이 보장된 <공정한 인류사회>의 건설이라는 궁극적 이상(ideal end)을 위하여 헌신하는 활동이야말로 죤 듀이에 의하면 참으로 <종교적>이다. 죤 듀이의 종교심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이남보다도 오히려 이북이 더 종교적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공통의 신앙> 혹은 <통일의 신앙>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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