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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3] 하향식 그리스도론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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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환 작성일16-03-30 14:0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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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향식 리스도론의 문제점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미국의 선교사들인 아펜셀러(감리교 선교사)와 언더우드(장로교 선교사)가 함께 1885년에 인천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선교한 지 130년이 되었다. 물론 가톨릭 선교는 더 오래되었다. 기독교는 과연 우리 민족을 깨우치고 우리 민족문화를 더 살찌우고 풍부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가? 아니면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현실을 신비화시켜 현실 파악에 눈이 멀게 하고 언제나 제국주의세력과 지배층의 편에 서서 가난하고 억눌려온 백성들을 더 잘 착취하고 지배하는데 적절한 풍토조성을 해왔던가? 민족의 최대 과제인 조국통일을 위해 기독교는 과연 조금이라도 기여를 해왔는가, 아니면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기여를 해왔는가? 냉철하게 반성할 때가 되었다. 유신론주의자로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주의자들인 이북의 사회주의자들을<적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인류의 최고의 적으로 여김으로써 국민이 마땅히 돌려야 할 증오심을 제국주의세력과 이남의 독재정권에 돌리지 않고 오히려 이북 사회주의자들에게 돌리게 함으로써 극소수의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 이남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조국통일에 방해가 되어왔다.

 

이러한 이남의 기독교가 자주, 민주, 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으려면 기독교 교리 자체가 내면에 갖고 있는 반민중적이고 반통일적인 요소를 세밀히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지금까지 이남의 기독교가 조국통일 운동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쳐왔는가 하는 것은 여러 작가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6.25전쟁 이후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 온 기독교인들은 서북청년단을 비롯하여 여러 반북단체를 만들어 <반통일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러면 왜 이남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제국주의 세력들이 벌이는 반공, 반북, 종북놀음에 쉽게 놀아날 수 있었으며 역대의 독재정권을 지지해 왔는가 하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쳐 보아야 한다. 미국이 이남의 기독교를 반공, 반북, 종북 놀음에 이용하고, 역대의 독재정권이 조찬기도를 비롯하여 여러 형태로 독재정권에 협조하게 할 만큼 기독교 교리 자체에 반통일적이고 반민주적인 요소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교리 차체가 가지고 있는 독단성과 절대성 때문에 제국주의 세력들과 이남의 역대 독재자들이 기독교를 교묘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교리자체 속에 식민주의 종주국들이 약소국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쉽게 수동적인 종의 근성을 주입하도록 하는 요소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예수의 속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기독교의 핵심교리인<그리스도론>을 어떻게 정립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선교사들은 약소국에 입국하자마자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구별되는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와 천하고 천한 인간이 되었다"는 <하향식 그리스도론>을 강조하였다.

 

이 교리 자체가 이미 주종관계를 잘 묘사해주고 있다. 서구의 선교사들은 높고 높은 보좌에 앉아있는 성별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강조함으로써 자신들도 모르게 구원을 베푸는 자들은 자신들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낮고 천한 인간은 바로 미개한 약소민들이라고 믿게 하였다. 예수의 우수성과 거룩성, 즉 성별된 특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바로 그 예수를 전하는 선교사 자신들도 그에 비례하여 우수해지고 성별되고 높아지지만, 가난하고 미개한 약소민족들은 자신들의 천함과 무식함이 더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몽매 무지한 교리는 바로 선교사 자신들이 사는 선진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문화제국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식민지 아래서 고통받고 있던 19세기의 조선사람들은 예수가 마치 미국의 선교사처럼 맨션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살며 멋진 서양 옷을 입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가끔 비행기 타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서구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코리안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마치 별세계에 사는 신비한 사람들로 보였다. 선교사들은 높은 보좌에 앉은 예수처럼 숭상받게 되었다.

 

황금보석 꾸민 집의 높은 보좌에 앉아 있는 성별된 예수를 믿고 구원받겠다는 교리는 바로 낮고 천한 코리안 자신, 더 나아가서 미개하고 물질문명이 뒤진 조선민족을 경시하고 선교사의 나라들을 숭상하는 사대사상을 고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 높은 하늘에서 내려와, 즉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하향식 그리스도론>이나,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예수가 다시 낮고 천한 인간세계에 내려온다는 재림론은 서구 강대국들에 미개한 약소국들을 식민화하는데 멋진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었다. 이러한 하향식 그리스도론은 바로 나와 나의 민족을 경시하고 선교사들의 나라를 숭상하는 사대 정신을 주었다. 

 

둘째로, 이러한 높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천한 인간이 되었다는 <하향식 그리스도론>은 반민중적인 독재자들을 지원하는데 역시 큰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부터 인간과 성별된 예수가 낮고 천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하향식 그리스로론>은 바로 독재자 자신들 권좌의 신성불가침을 강조하고 독재자 자신들이 낮고 천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러한 교리는 또한 기독교 성직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예수의 대리자로 생각하게 하고 자신들을 신성화하며 자신들의 교권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강조하여 거룩한 독재자들로 만들어 버렸다. 성직자들은 예수처럼 낮고 천한 교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로 간주하고 교인들에게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는 신적인 위치를 독차지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성직자들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바로 이러한 교리에서 생겨난 것이다.

 

독재자 박정희가 이남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으로 선전하면서 모든 경제성장을 독재자 한 사람의 은혜로 이룩된 것처럼 선전한 일이나 한 교회의 부흥을 목사 한 사람의 능력인 것으로 강조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위에서 밑으로 내려온다는 <하향식 그리스도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하향식 그리스도론>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반대화적>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구원을 베푸는  것만 강조함으로써 독재자가 백성들에게 명령하고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설교나 하는 일방적인 주종관계의 인간관계를 낳고 말았다. 학교에 가면 역시 선생 혼자 강단에서 가르치고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듣고 쓰고 외우기만 한다.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한 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북을 복음화시켜 복음으로 통일하자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기들이 가진 것만이 복된 소식, 즉 복음이고 이북 사회주의자들은 복음화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한 기독교인들이 이북과 대화할 기회는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이 이북 민중을 인격체로 인정하고 이북의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배울 진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서로<주고 받을 생각>을 해야만 서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 자체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하향식 그리스도론>은 이북 사회주의자들의 장점마저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어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이북 사회주의자들을 개종시키겠다는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대화에 임할 수가 없다. 대화란 우선 주겠다는 생각보다 상대방의 사상과 이념을 존중하고 상대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우고 무엇인가 받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대화할 수 있다.

 

넷째로, 성별된 하나님의 아들이 천한 인간이 된다는 <하향식 그리스도론>은 인간들을 무능하고 비열한 자들로 만들어줌으로써 매사에 위에서 무엇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인간이 되게 하였다. 적극적으로 주체인 내가, 더 나아가서 주체인 우리 민족이 <자주적인 사상>을 가져도 우리가 직면한 식민지 지배문제, 분단의 문제, 먹고 사는 의식주 문제, 질병 치료의 문제, 등 수도 없이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은데 이러한 수동적 자세로 어떻게 그러한 문제들을 풀 수 있겠는가? 특히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자주의식을 가져도 민족해방을 이루고, 분단을 청산하고 민족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어려운데 자꾸 위에서, 즉 하나님이, 미국이, 독재자가 민주화해주고, 통일해주기를 기다리게 되니 민주와 통일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향식 그리스도론>을 강조하는 교회를 오래 나가면 나갈수록 <자주성>을 상실하게 되고 찬송의 가사처럼 자신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비하하게 된다. 따라서 남을 의존하게 되는 사대근성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은혜나 기다리는 수동적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능동적으로 자신과 우리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주성을 상실한 사람들이 어찌 민주와 통일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서구지향적이고, 반민중적이고, 반대화적이고, 수동적인<하향식 그리스도론>을 극복하고 민족적이고, 민중적이고, 대화적이며, 능동적인 인간화된 그리스도론을 확립하여 결국 민족통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을 확립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의 중심되는 관심사이다.

 

원래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시종일관 표현되어 왔다(사도행전 2:23, 3:22, 7:37, 마가 2:12 등 참조). 초대교회는 그 당시 가장 밑바닥층에 속한 암 하 아레츠(Am Ha-aretz)란 대중들에 의하여 탄생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낮고 천한 하층민들에게 주인의식, 즉 정체성을 주었다. 이들 예수를 따르던 하층민들은 예수가 죽은 후 자신들의 고난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과 일치시켰으며 이 고난받고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상향식 그리스도론>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이 늘 미워하던 지배자 하나님 아버지로 상징되는 지배층들, 즉 외세인 로마, 헤롯당, 가야바로 대표되는 사제그룹의 자리에 수난자 인간 예수를 앉힘으로써 지배자들을 제거시켜버리려는 강한 심리적 욕망을 나타냈다. 이들 초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높은 하늘로 승천한 예수가 다시 속히 재림하여 저들 식민주의자들인 로마와 사회의 지배층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종말의 때>가 오기를 열열하게 기다렸다. 이 <종말론적인 소망>이야말로 초대 기독교의 중심되는 신앙의 내용으로 기독교 가르침의 최전면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하층민들로 구성된 초대 기독교인들이 품고 있던 <종말론적인 기대감>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회정치적인 혁명의 수단으로 그들이 처한 절망적인 사회구조악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자 점점 더<종말론적인 기대감>으로 불타오르게 되었다. 즉 가까운 장래에 승천한 예수가 다시 재림하여 그들에게는 행복을, 지배층들에는 처벌을 주는 최후의 심판날을 더욱 열광적으로 기다리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압박받던 하층민들이 형제애로 함께 뭉쳐 소망과 증오에 불타 종말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당원들(Zealots)과 시카리 파(Sicarii)가 정치적인 영역에서 제국주의자인 로마와 지배층에 항거하여 혁명을 시도했지만, 이러한 사회정치적 혁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로지 환상 속에서나마 그와 똑같은 <혁명적인 소망>을 갖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환상 중에 품고 있던 소망을 표현해 놓은 것이 초기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었고, 특히 그들이 가졌던 예수에 대한 생각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내용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아버지 같은 권력을 가지고 그들을 착취하고 지배한 권력층인 로마 식민주의자들, 귀족들, 사제들을 심하게 증오했다.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통을 받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까지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되었다.>는 생각은 결국 신적인 아버지를 제거시키려는 무의식적인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인간이 하나님으로 승격된다>는 이론을 열렬히 지지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이란 바로 그들의 지배자인 로마 황제, 헤롯당, 사제들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러한 이유로 짧은 시간 내에 기독교가 억압받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쉽게 전파되었던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차차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던 예수에 관한 견해가 변하였다. <인간이 승격하여 하나님이 되었다.>는 견해가 바뀌어 거꾸로 <항상 하나님이었고 창세 전에 이미 존재했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세월이 가면서 기독교 신도들의 구성요원에 큰 변화가 생겨 기독교인들의 <사회 심리적 요인들>이 변했기 때문이다. AD 2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로마제국의 중산층과 상류층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상당한 지배층의 지위에 있던 여인들과 기독교 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한 상인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점차로 지배층의 기독교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지배층의 신도들은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소망>을 지녔던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핵심 사상인<종말론적인 소망>, 즉 예수가 재림하여 불공평한 세상을 심판할 것을 기다리던 소망은 후퇴해 버렸다.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다. 결정적 구원의 사건이 이미 과거의 예수 사건에서 발생했다고 믿게 되었다. 예수의 출현 자체가 이미 기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원의 문제는 이제 <내면적이고, 정신적이며, 비역사적인 개인 문제>로 되어버렸다. 구원이란 <구체적인 역사적인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으로 보증된다는 것이었다.실제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은 이미<완성된 정신적인 구원>에 대한 신앙으로 바뀌었다. 형제들의 평등한 공동체였던 초대교회가 이제는 로마제국의 절대군주의 영상을 반영한 관료적인 계급을 지닌 교회(the Church)로 변질되었다. 가톨릭 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교황>이라고 부른 것만 보아도 교회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교회가 발전하여 지배자들의 종교가 되어감에 따라<예수의 본성>에 관한 개념은 점점 더 비역사적이고 비혁명적인<영적인 견해>로 변해버렸다. <인간이 승격하여 신이 된다.>는 <상향식 그리스도론>은 거꾸로 <신이 내려와 인간이 되었다.>는<하향식 그리스도론>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이신(Nicene) 종교회의에서 추기경들의 투표로 아사나시우스(Athanasius)의 교리가 채택되었다.그 내용이란 창세 전부터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도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리안(Arian)의 견해는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은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똑같은 속성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더 강조했다. 이러한 아리안의 견해는 배척을 받았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열광적인 소망이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에 대한 만족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기독교는 사실상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의 문제를 혁신하고 발전시키는 혁명적인 일 대신에 과거의 기록에 대한 역사연구가 기독교의 사명이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결국 지배층들의 종교로 변신한 기독교는 권력과 재산은 하나님이 허락한 은사이며 하층민들은 단지 지배층들이 나누어주는 것을 받아먹으며 생존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믿게 하는데 사제들과 지배층들의 노력은 드디어 성공했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는 초기 기독교회의 교리처럼<지배자인 아버지의 타도>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대신 아들 예수의<자기 부정>에 강조점을 두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받는 예수의 <자기 부정적인 요소>만을 강조하여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마저도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자기 부정>을 했다는 교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하여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개인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바뀜에 따라 교회와 지배층들은 사회안정에 해롭지 않은 돌출구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내면적 죄>를 강조하게 되었고 끝없는 자기학대적인 <고행>이 시작됨으로 지배층들의 안정은 더는 도전받지 않게 되었고, 안심하고 마음대로 대중을 지배하고 착취하게 되었다. 이제 지배계급은 하나님의 인정까지 받아가며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층민들을 지배하고 약탈하게 되었다.

 

이제 하층계급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비참한 생활과 고통이 지배계급의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하층 계급들이 불행한 것은 자기들 죄 때문이므로 남을 탓할 것 없이 자신들을 탓할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지 끊임없는 속죄와 고행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속죄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지배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감을 대중들 자신들의 죄의 탓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가톨릭 교회는 침략성을 지닌 대중들의 죄책감을 강조하여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것은 비난과 공격의 방향을 지배계급으로부터 고난받는 대중들에게 돌리는 것을 도왔고, 교회는 이 고난 당하는 대중들에게 선량하고 사랑이 충만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공해 주었다. 왜냐면 교회는 사제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대중들의 죄책감에 대한 용서와 속죄를 줄 수 있는 권위를 주었으니까. 교회가 노골적으로 면죄부까지 팔아먹은 예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하여 가톨릭 교회는 지배계급에 두가지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첫째로 착취와 억압받던 대중들이 품고 있던 침략성의 방향을 전환한 것과 둘째로 대중들로 하여금 교회와 지배층에 더욱 의존하게 하여 심지어 감사와 사랑과 존경심마저 갖도록 만들었다. 이리하여 교회와 지배자들은 전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받지 않고 안심하고 하층 계급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도 감사와 사랑과 존경마저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마저도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정도로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대중들이 당하는 고통도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위에 언급한<교회(Church)>라는 개념은 전혀 낯선 것이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교회는 점차 지배층들이 들어오면서 계급조직을 가진 단체로 변질하였고, 교회 자체가 회원들이 모이는 단체 이상의 <거룩한 기관>이 되었다. 이 거룩한 기관인 교회는 <구원>을 중개하게 되었고 신도들은 교회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렇게 변질한 결정적인 원인은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인간이 신이 된다>는<상향식의 그리스도론>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표면상으로는 확대 발전되어 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발육 불가능의 위축된 종교가 되어버렸다. 초기의 가장 밑바닥층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지배자들로 상징되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변혁적인 경향을 띠었던 기독교는 완전히 패배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지배계급을 지원하는 순응주의 기독교가 승리하여 마침내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이리하여AD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Nicaea) 종교회의에서 220명의 추기경 중218명이 찬동하여 서명한 니케아 신조(Nicene Creed)가 발표되었다. 니케아 신조 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만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요, 창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자요, 하나님의 하나님이요, 빛의 빛이요, 바로 하나님의 바로 하나님이요, 지음을 받은 자가 아니고 태어난 자요, 아버지와 똑같은 실체를 지닌 자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느니라.”(필자 역)

 

위 니케아 신조에는<인간이 신이 된다>는 변혁적인 <상향식 그리스도론>의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지녔던 원래의 변혁적인 <인간이 신이 된다>는<상향식 그리스도론>을 재확립하여야겠다. 그러기 위하여 첫째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인간적인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구체적인 역사 한가운데에서 실제적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산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인간 예수는 그가 살던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을 위하여 살다 보니 그 당시의 지배층들에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그 당시의 지배층들인 외세인 로마와 헤롯당, 그리고 종교지도자 가야바의 합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다. 우리의 메시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역사의 한가운데서 민족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 그리고 종교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다가 십자가를 지고 죽은 예수만이 메시아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메시아는 황금 보석 꾸민 집에 있는 높은 보좌에 앉아 있다가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한 지배계급에 복이나 주러 내려오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중세 봉건적인 왕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는 우리의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우리의 메시아는 미국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투쟁한 자주적인 코리안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의 메시아는 이남의 역대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한 민주인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는 분단이라는 골고다 언덕을 넘어 통일이라는 부활의 아침을 가져오기 위하여 종북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린 통일인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초대교회의<인간적인 그리스토론>을 다시 부활시킴으로써 서구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며 서구인들도, 독재자도, 성직자도 모두 평범한 인간임을 강조해야 한다. 미국은 그 높은 식민지 종주국이라는 지배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고, 근로민중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독재자는 그 권좌에서 내려와야 하며, 그 높은 강대상에서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성직자들은 강대 밑으로 내려와 교인들과 같이 둘러앉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가 그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우리와 같이 고생하며 같이 대화하는 인간 예수상을 가질 때 가능하다. 지배층의 교리인<신이 위에서 내려와 인간이 된다>는 성육신의 <하향식 그리스도론>을 다시 <인간이면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상향식 그리스도론>을 다시 확립할 때 가능하다.

 

예수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계시 자체이며, 초자연적 메시아라고 강조하는 자들은 예수의 본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예수를 포함해서 13명으로 구성된 첫 모임의 활동을 보라. 예수는 절대로 제자들을 상하관계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왜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은혜를 베푼다는 주종관계로만 볼까? 예수가 제자들에게 배운 점은 없을까? 예수가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서 배운 점도 많고 받은 점도 많이 있었다고는 왜 생각지 않을까? 사람 하나하나는 묘한 존재이다. 나는 4년간 교편을 잡은 사람으로서 학생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더구나 어떤 학생들은 그 인간 됨됨이라든가, 역사를 보는 눈이라든가, 그 근면성, 그 인격에서 나보다 훨씬 더 우수한 학생도 많았다.

 

나는 미국에 와서 대학생들로 구성된 성서연구모임도 해보았고<밀알 교회>도 해 보았다. 나는 이들 회원과 교인들에게 한 번도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모임에서는 언제나<나>와 우리 민족을 중심에 두었고 나와 우리 민족의 구체적인 문제, 나와 우리 민족의 미래의 삶을 강조했으며 모든 종교나 이데아도 <나>와 우리 민족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들 상당수의 학생과 교인들은 분단문제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연구함으로 민족의 설움과 슬픔, 분단의 비극, 독재의 비극 등을 깨닫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독재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민족통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기독교도 사회주의도 나와 나의 민족을 위해 필요한 것들임을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열고 둘 다 연구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인간이 안식일(사상, 이념, 철학, 종교)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수와 제자들의 운동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절대로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과 늘 같이 대화하며 제자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예수가 지금의 독재자들이나 거룩한 성직자들같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인도하였다면 어찌 십자가를 질 때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겠는가? 인간은 자주적인 존재이다. 어찌 교회를 다니는 자들이 단지 신앙이 다르다고 남편과 부인이 갈라지고,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가족이 분열되며, 민족이 둘로 갈라지며,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가? 유대교인들이 상종치 않던 세리들, 몸 파는 여자들, 심지어 종족과 종교가 다른 사마리아인들을 만나던 예수를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이 어찌 이념이 다르다고 동족인 이북 동포들을 적대시할 수 있는가? 자기 교회에 나와야만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유치한 독단적 구원론을 버려야 한다. 기독교회에만 인간구원이 있다는 절대성을 버려야 한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예수가 로마의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죽었는데 어찌 교회가 지금의 로마인 미 제국주의에 아부하며 미 제국주의 세력이 민족을 남북으로 분열시키고, 심지어 경상도와 전라도마저 분열하여 통치하고 있는데도 미국을 구세주로 여긴단 말인가?헤롯왕의 비행을 폭로하다 목이 베인 세례요한의 예언은 지금의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다시 본래의 예수 운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80년도에 있었던 광주 양민들의 대량학살과 최근에 있었던 300여 명의 젊은 학생들을 <조용히 있으라>고 해놓고 죽인 세월호 사건은 이남교회가 잠들어 있음을 알려준 적신호였다.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남교회는 독재자들을 위하여 조찬기도나 해주었고, 내세만 강조하여 현실을 도피시켰고, 나의 구원만 강조하여 이기주의적인 개인주의에 빠지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깨어버렸고, 이북의 사회주의를 <적그리스도>로 몰아 분단고착화에 기여하였다. 이제 이남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체질을 개선할 때가 되었다.

 

제자들과 일대 일의 깊고 넓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낮고 천한 인간이 종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정체성을 불러일으켰던 예수의 운동으로 지금의 교회가 되돌아갈 때 교회도 살고, 나도 살고, 민족도 살고, 마침내 분단도 청산될 것이다. 하늘 저 높고 높은 황금보석 꾸민 집에 왕으로 앉아 있는 예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나, 분단시대를 사는 코리안들, 전쟁과 재난과 기근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세계시민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기독교도, 불교도, 어떤 사상과 이념과 종교도 모두 나와 나의 민족을 더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여 우리 민족의 대과제인 통일을 이룩하고 민주화된 자주통일국가를 이룩하는 데 필요한 활력소들이다.

 

이북이 어떤 이념을 가졌든, 어떤 정치제도를 가졌든 간에 그들도 내 동포요 내 나라에 사는 형제자매로서 방법이야 다를지 모르지만, 그들도 우리나라를 외세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족이다. 기독교회를 향하여 그동안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하여 피 흘린 선각자들이 외치고 있다.

 

 “교회여, 가난한 자에게 배불림을, 눈먼 자에게 눈뜨게 함을, 갇힌 자에게 석방을, 병든 자에게 치료를” 선포한 예수의 인간 해방운동으로, 인간 통일운동으로 되돌아가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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