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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1] 참된 앎의 삼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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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현환 작성일16-03-14 21:1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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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해방

 

편집국

 

 

김현환 박사는 기독교 목사로서 1980년부터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변혁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으며 각종 저술활동과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많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서 조국통일과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여 김현환 박사는 체계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저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는 기독교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1987년도에 완성하여 공개하였다. 김현환 박사는 이 저서를 통해 절대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신학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에 대해 과학적으로 해설하였으며 궁금해하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그는 29년이 지난 지금 변화한 정세와 오늘의 현실에 맞게 저서 내용을 다시 수정보완하였다. 서문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저서 <신학의 해방>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사회변혁의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신학의 해방>을 연재한다.

 


 

[신학의 해방 1]

 

참된 앎의 삼 단계

 

 

김현환(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사실들과 정보들을 많이 암기하는 것을 앎이라고 믿어왔다. 고립된 사실들과 정보들을 많이 암기하는 것도 앎이지만 그것은 단지 초보단계의 앎에 불과하다. 고립된 사실들과 정보들을 연결시켜 개념화하여 일반이론을 창출해내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형성된 개념들과 일반이론들을 기계적으로 많이 암기하였다고 해서 참된 앎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참된 앎의 제2단계에 불과하다. 이러한 개념들과 일반이론들이 우리의 흥미, 태도, 관심사, 감정 그리고 행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에 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떤 교육학자들은 위의 지식의 첫 단계를 <사실레벨>, 둘째 단계를 <개념레벨>, 그리고 셋째 단계를 <가치레벨>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람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들(facts)과 그 사실들을 연결하여 개념화한 개념들(concepts)이 과연 사람의 요구와 이해관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체사상에서는 이것을 <사상>이라고 보고 있다. 주체사상에서는 지식이란 사물의 본질과 운동법칙을 반영한 의식형태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사상이란 사람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의식형태라고 주체사상은 말한다. 지식은 중립적이지만 사상은 <자주적인 사상>과 <반동적인 사상>으로 구별된다. 사람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이 <자주적인 사상>이고, 기득권을 가진자들의 반동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한 사상이 <반동적인 사상>이다.  자주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을 이용하여 민중의 생명인 자주성을 지켜주고 신장발전시키는 반면, 반동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을 이용하여 민중을 탄압하고 착취하고 있다. 자주적인 사상을 가진 나라들이 핵물리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주성을 지키고 세계의 자주화에 힘쓰고 있는 반면, 반동적인 사상을 가진 제국주의연합세력들은 핵물리학을 이용하여 약소국들에서 전쟁을 일으켜 양민들을 대량살상하고 파괴와 약탈을 일삼고 있다. 이처럼 지식은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을 보면 지나치게 사실레벨에만 치중하다 보니 학생들은 마음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함을 느끼어 공부에 진절머리를 내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인식능력의 개발에 주력을 둔 개념레벨의 교육을 강조하다 보니 교육을 단지 상아탑 속에서 행해지는 지적 훈련으로 축소해버리는 위험성이 내포돼 있었다. 학생들이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내리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 하는 가치레벨의 교육은 무시되어왔다. 마치 가치레벨의 교육은 종교가 떠맡아야 하는 것처럼 여겨져왔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마음이 분리될 수 없듯이 지적훈련과 가치판단의 교육이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전 인격적인 존재이다.

 

또한, 여러 종교단체에서 행해지는 가치레벌의 교육에 있어서 문제점은 정확한 가치판단이란 정확한 사실과 정확한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하는데 확인되지 않은 관념론적인 사실과 개념에 바탕을 둔 어떤 가치를 절대화하고 강조하는 점이다. 사실을 잘못 수집하여 개념화할 때 거기서 나온 일반이론이란 잘못될 수가 있고 그런 일반적 개념에 기초한 어떤 가치판단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거짓 사실과 거짓 개념에 기초하여 생겨난 가치판단을 아무 곳에나 적용할 때 얼마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흑인 신학자 제임즈 코운(James Cone)이 그의 책 [흑인신학의 해방](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코운에 의하면 몽매무지한 기독교인들의 절대주의와 문자주의는 항상 종교에 대한 의심을 제거시키게 함으로써 신도들로 하여금 신과 조국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정치적 압박을 정당화하게 해왔다는 것이다. 흑인노예가 인정되던 시절에 흑인들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종들이 되도록 강요되었다. 백인들이 늘 강조하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13장 1절에서 말한 “종들아 주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했다는 것과 구약에서 흑인인 함(Ham)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보다 열등하니까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늘날도 백인신학자들은 <무저항주의>가 유일한 기독교 사랑의 표시인 양 흑인들에게 무저항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억압자들이 흑인들의 가치판단을 독재적으로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다. 예수가 권고한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말과 “일 마일을 가자하면 두 마일까지 가주라”는 충고는 흑인들이 백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학대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흑인들은 1세기에 일어난 예수의 행위를 20세게에 그들이 취할 행위에 문자 그대로의 안내자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서가 흑인들의 가치판단을 결정하는 안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68페이지).

 

이러한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이 범하는 실수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실들을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잘못 수집하여 잘못 개념화했기 때문에 거짓된 가치판단이 나오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약시대인 예수와 바울시대에도 사람들은 땅이 네모지다고 생각했고, 사회체제는 노예제 사회로서 노예제도가 당연하게 여겨지던 원시성을 면하지 못한 시대였다.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성서를 무조건 21세기에 적용하려는 문자주의 기독교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앎의 의미부터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참된 앎이란 무엇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부터 새롭게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소위 진리를 추구한다는 종교인들이, 그것도 인간의 도덕적 가치판단을 가르친다는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도그마만을 되풀이 다짐하면서 그 익숙한 도그마로 모든 것을 재려고 해서야 어찌 진실을 찾겠는가?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모든 사물은 그 내면적 그리고 외부적 모순과 갈등으로 끊임없이 진보 발전해가고 있는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거나 과거의 도그마에나 몰두하고 있다면 그만큼 역사의 퇴보자로 머무를 뿐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수가 발견되거나 그들의 앎이 퇴보된 것을 알게  되면 즉시 그들의 생각, 이론, 그리고 계획을 과감하게 고쳐나가야 한다.

 

 

진리(신앙)와 이념과의 관계

 

 

자신들이 어쩌다 일정한 장소와 문화 속에 태어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된 부분적 진리만을 다짐하며 절대화시키는 문자주의자들과 절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앎은 그 발전 단계에서 아무리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겨지더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상대적 진리>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상대적 진리>를 편의상 <이념>이라고 부르자.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상대적 진리인 <이념>을 통하여 <진리>, 혹은 종교적 용어로는 <신앙>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이다.우리가 어떤 진리라고 받아들인 하나님의 개념이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의 실제직인 삶의 문제들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존재한다. 왜냐면 인간은 이미 진리라고 인정된 어떤 가치표준을 그대로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연령과 환경, 문화의 차이 때문에 똑같은 진리라도 모두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셰익스피어 작품이라도 초등학교때 읽었을 때, 중학교때 읽었을 때, 고등학교때 읽었을 때, 대학교때 읽었을 때, 그리고 사회생활을 겪으며 장년기에 읽었을 때, 그리고 노년기에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며 읽었을 때 그 의미가 각각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같이 <진리> 혹은 <신앙>과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을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필요한데 이것을 편의상 상대적 <진리>, 즉 이념(이데올로기)이라고 부르자.

 

가장 알기 쉽게 ‘나무’라는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나 생각해보자. 우선 우리는 우리가 지닌 오관을 통하여 밤나무, 소나무, 도토리나무,사철나무, 향나무, 대나무 등을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소리를 듣고 여러 나무의 각각의 특성을 파악한다. 각 나무는 각 나무대로의 독특한 모양과 냄새와 특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모든 나무가 다 소나무와 같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나무는 소나무 같은 속성을 지닌 것이 사실이나 소나무가 전체 나무의 속성을 다 나타내지는 않는다. 어느 누가 소나무만이 나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부분을 보고 전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소나무, 밤나무, 참나무, 등 여러 나무의 각자 속성을 아는 것을 나무에 대한 상대적 진리, 즉 이념이라면 여러 나무의 여러 속성, 즉 이념들을 종합하여 그 전체를 <나무>라고 정의하는 것을 <진리> 혹은 <신앙>이라고 부르자.

 

이처럼 참된 앎의 첫 단계에서는 감각적 지각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사실들을 수집하는 단계이고, 둘째 단계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수집한 사실들을 연결하여 사물 전체를 파악하여 일반적 개념을 창출해내는 논리적 앎의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더욱 높은 앎의 단계인 응용, 즉 실천적 단계이다. 즉 나무가 사람인 나의 요구와 이해관계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무를 잘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지으려면 어떤 나무가 적당한가. 어떤 나무가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약을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 고욤나무를 감나무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붙여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을 아는 앎의 단계가 바로 실천적 단계이다. 이 실천적 단계의 앎을 통하여 나무에 관해 피상적으로 알던 낮은 단계에서 더욱 본질적인 문제들을 파악하는 높은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같은 실천적 단계의 앎을 통하여 나무라는 개념의 내용은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이솝우화에 나오는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를 예로 들어 참된 앎의 삼단계를 더 자세히 다루어보자. 어느날 한 장님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기둥같다”고 결론은 내린다. 다른 또 하나의 장님은 옆구리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단정해버린다. 셋째 장님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뱀과 같다”고 주장한다. 넷째, 다섯째의 장님들도 각자 만져본 부분이 ooo와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우화에 나오는 장님들같이 사람은 모두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각자 장님들이 코끼리의 일부분만 만져보고 코끼리의 속성에 대해 정의한 것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이 부분적 앎을 상대적 앎, 즉 이념(이데올로기)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각자 장님들이 자기가 감각적으로 만져보고 얻은 앎은 코끼리의 <전체 이미지>는 아니다. 이 코끼리의 전체의 이미지를 <진리> 혹은 <신앙>이라 부르자. 우리가 진리(신앙), 즉 코끼리의 전체 이미지를 알아가는 방법은 장님들의 각자 주장을 종합하여 전체의 영상을  알아가는 길밖에 없다. 셋째 단계는 실천적 단계로써 코끼리의 전체 영상을 알기 위하여 각 장님들로 하여금 코끼리의 여러 부분을 직접 만져보게 하여 코끼리의 여러 속성을 더 알아보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장님들은 코끼리의 전체 영상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회 정치적 현실 속에서의 참된 앎의 삼 단계

 

그다음으로 우리 코리안들이 익숙한 이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 속에서 참된 앎의 삼단계를 설명해보자. 더 범위를 좁혀1980년 5월에 발생한 광주항쟁을 통해 <참된 앎>이란 무엇인가 알아보자.

 

첫째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광주항쟁이 왜 발생했느냐이다. 이 질문에서 참된 앎의 첫 단계와 둘째 단계가 다루어져야 한다. 즉 여러 가지 역사적인 사실, 경험적 사실, 등을 종합하여 광주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반적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셋째 단계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하는 구체적인 실천단계, 즉 가치판단의 단계를 다룰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전라도는 코리아에서 버림받은 땅으로 철저하게 수탈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가장 힘든 직업인 옹기 굽는 일, 백정, 대장장이 등등의 일을 전라도민들이 맡았다고 하며 조정에서 죄인들을 귀양보낸 곳도 전라도였다고 한다.  1960년 대에 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할 때도 철저하게 전라도 지방은 소외되었다. 더구나 군대 요직에서 전라도 장성들은 배제됐으며 전라도 정치인들도 차별대우를 받았다.이러한 사실들은 직접 전라도민이 체험적으로 느끼어온 경험적 사실들이었다.

 

전라도민들은 이제 둘째 단계의 앎에 도달하게 된다. 즉 역사적 사실들과 실제적인 경험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현실을 전체로 보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이남의 독재정부는 정치철학인 “분리하여 통치한다”는 원리를 적용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를 고의로 분리해 통치해왔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경상도 출신 박정희가 죽자 다시 경상도 출신인 군인 전두환이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전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전남 목포 출신 김대중 전대통령을 좌익으로 몰아 감옥에 가두게 되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전라도민들이 철저하게 억압과 착취를 당해온 것은 고의적인 분리정책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은 전라도민들에게 이제 남은 것은 제삼 단계인 행동하는 실천적 단계였다. 고의적인 농업정책으로 농촌은 황폐해졌고 농촌을 버리고 도시의 공장과 유곽 지대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던 전라도민들이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타개책이 10. 26 이후 민중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철저히 봉쇄되자 전라도민들은 봉기한 것이다. 이것이 광주민중항쟁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들은 이 봉기 과정에서 두 가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이남의 민중운동사에 크게 이바지한 점이었다. 첫째는 이남 군대의 본질을 여실히 파악한 점이었다. 이남 군대는 국민의 안보를 지켜주는 군대가 아니라 국민을 처참하게 도살하는 살인군대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이남 군대의 본질을 깨닫자 이남 군대를 살인군대로 만든 자들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더욱 더 큰 문제, 즉 광주항쟁의 배후세력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들 광주시민은 마침내 “광주학살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고 절규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이남 군대가 어찌하여 같은 분단 처지에 있는 월남에 가서 월남 양민들을 처참하게 살해하는 짓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잔인한 군대가 결국 동족마저 살해하게 됐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선량한 큰 형님으로 알았던 미국이 살인자임을 깨닫고 광주시민들은 아연질색한 것이다. 마침내 미국의 거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정책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가치판단의 단계인 실천적 앎의 단계에서만이 사물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실천을 통하여서만이 사실들을 보다 근본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문제의 핵심을 올바로 파악하여 올바른 일반적 개념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천적 단계인 가치판단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사실레벨과 개념레벨의 앎은 피상성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변혁적 상황 속에서 지도자들은 정확한 정보와 개념을 종합하여 실천 행동을 지시해야만 변혁운동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피상적인 사실레벨과 개념레벨의 앎에만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결단하고 행동하는 가치판단의 단계, 즉 실천적 단계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광주항쟁이라는 실천적 단계를 통하여 코리안들은 이제 보다 본질적인 이남의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적인 현실들을 더 잘 깨닫게 되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그렇게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도 왜 좌익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됐는가? 도대체 반공이란 무엇이며 누가 만든 법인가? 전 국민들이 원하는 통일은 누가 막고 분단을 고착시키고 있으며 심지어 전라도 경상도마저 갈라놓고 있는가? 누가 농업경제를 파괴하고 수출주도형의 경제를 끌고 가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고 있는가? 누가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파괴하고 있는가? 외래 종교들이란 과연 이남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등등의 더욱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처럼 실천적 단계의 앎은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게 하고 새로운 실천적 이론을 창출하게 한다.

 

그러나 참된 앎의 높은 단계인 결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가치레밸, 즉 실천적 단계에 도달하려면 어느 시인이 고백했듯이 “삶과 죽음을 꿰뚫는 인간의 내적, 영적 쇄신”이 필요하다. 고문, 투옥 그리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독재정권과 외세의 악마적 힘에 항거하며 투쟁하고 있는 이남의 노동자, 농민, 학생들에게는 ‘’내적, 영적 쇄신’의 경지가 요청된다. 우리 주위에서 소위 지성인이란 사람들이 많은 객관적 사실들과 개념들을 암기하고 있으나 조금도 자신들의 이익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낮은 단계의 앎의 레벨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관찰자들을 가리켜 철학자 키엘케골은 가장 밑바닥 레벨인 미적 단계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평한다. 이러한 객관적인 냉정한 진리를 탐구하는 사색적 사상가들은 모든 것을 논리적인 조직 속에서 생각하는데 제삼의 단계인 결단하고 행동하는 실천적 앎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러한 논리적 구조 속에는 진정한 생성과정도, 자유도, 신기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키엘케골의 주장이다. 실천적 지식을 도외시하는 냉정하고 메마른 사색가들에게는 열정, 고난, 의지, 결단, 시도, 투쟁, 그리고 흥미, 등이 상실되어 있다는 것이다. 키엘케골은 이러한 메마른 사색가들보다 무식하지만 악을 보고 참을 수 없어 열정을 가지고 사회참여하는 종교적 결단을 가진 자들을 보다 높은 단계인 종교A단계에 두고 있다.

 

니체 같은 철인도 이와 같은 메마르고, 냉담하고 열정도 없는 두뇌뿐인 합리적 사색가들을 낮게 평가하고 그의 저서 [저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다음과 같이 진리의 척도를 말하고 있다.

“한 인간의 정신이 얼마만큼의 진리를 견디어내며, 얼마만큼의 진리를 감히 시도해볼 수 있을까?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나의 진정한 가치의 척도로 돼가고 있다. 인간의 과실은 몽매 무지가 아니라 바로 비겁함이다. 인간 지식의 모든 성취와 진보는 용기와 자신의 단련과 자신과의 명확한 관계로 말미암아 이룩되었다”

니체가 결코 앎의 사실레벨과 개념레벨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앎의 완숙된 단계인 진리를 실천하는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용기 그리고 단련이 필요한 것을 역설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추상적이고 조직적인 구조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이며 공포와 고난을 넘어서서 진리를 실현하는 용기라고 믿었다. 따라서 니체가 높이 평가한 인간은 바로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공포와 고난을 넘어서서 생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극복자>(overman)였다. 니체가 강조한 것은 초자연적 존재(superman)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와 실존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면서도 기독교의 십자가 진리와 실존적 철인들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참된 앎의 완숙한 단계인 실천적 단계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성서의 새로운 해석학(새로운 종교개혁운동)

 

위에 말한 참된 앎의 삼 단계를 이용하여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연구해보자. 이 작업을 위해서 이미 <서론>에서 다룬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코운(James Cone)의 [흑인해방신학]을 다시 다루려 한다. 코운은 참된 앎의 첫 레벨인 감각적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흑인들의 경험적 사실들에서부터 신학을 시작하고 있다. 성서의 말에서나 어떤 서구 신학자들의 신학적 이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이 현실적으로 매일 체험하고 있는 억압과 착취의 실제적 사실들에서 출발한다. 서론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단지 얼굴이 검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공동체의 실존적 상황에서 흑인들에게 유일한 진리란 그들이 그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정의 내리는 <해방의 진리 그 자체>뿐이라는 것이다. 흑인들은 억압자 백인들이 정의해놓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르냐 하는 일체의 추상적인 도덕적 규범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흑인들이 그들의 해방투쟁 과정에서 따라야 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안내하는 안내자는 흑인해방운동에 <무조건 헌신하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근본정신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구약성서에 나오는 무수한 예언자들이 그랬고 신약의 예수도 그러했다는 주장이다. 예수의 신학적 방법은 바리새인들의 신학적 방법과는 달리 무조건 인간해방운동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론과 율법서의 내용을 먼저 내세웠지만, 예수는 안식일 법과 율법을 고의로 어겨가면서도 병자를 고쳤고, 배고플 때 밀밭에서 보리이삭을 비벼 먹었으며 앉은뱅이도 일으켰다.

 

둘째 단계에서 코운은 실제적인 흑인들의 경험적 사실들을 토대로 더욱 보편적인 논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흑인 신학자들은 모두 백인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미국의 백인신학은 흑인해방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남의 초기 신학자들도 유럽이나 미국의 백인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백인신학이란 인디언의 집단살해와 흑인노예화를 정당화시켜준 신학이었다고 코운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인신학은 출발부터 구체적인 인간의 현실문제에서 구체적인 인간 죄악을 다루지 않고 <보편적 인간>과 관련지어 추상적으로 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신학에선, 죄란 <이론적 생각>이지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란 것이다. 백인신학은 사회악은 다루지 않고 개인에게 집중시켜 개인의 죄만 강조하여 결국 문제를 전체로 보지 못하게 하고, 고립시켜 문제들을 개별적으로만 보게 한다고 코운은 결론 내린다. 코운은 단지 색깔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곳에서는 <색깔이 없는 신>은 흑인신학에서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흑인들이 단지 피부가 검다고 천대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흑인들을 구할 메시아는 흑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가 이미 처음부터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로마의 신민인 천민들에게 편들어 그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것처럼 편견을 그의 신학적 출발로 삼고 있다.

 

그다음으로 코운은 참된 앎의 셋째 단계인 무조건 흑인해방운동에 헌신하는 실천적 단계를 설명한다. 우선 신학에서 흑인억압에 이용되는 <이념적 기구>를 뿌리 뽑아야 하며 경험적 사실에 기초를 두지 않는 추상적인 보편주의와 영적주의를 지향하는 <관념신학>을 제거시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제기하는 무수한 신학적 문제에 대해 답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억압자들의 신학에서 해방함과 동시에 억압민들의 실제적인 경제적인 착취문제, 그들의 역사, 그리고 흑인문화, 등을 더 중시하고 그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흑인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그들 자신의 신학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백인신학에 비해 아무리 유치하더라도.

 

이러한 참된 앎의 세 단계를 통하여 억압민들은 성서의 사건들이 억압민들의 해방운동에 새로운 의미로 재생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메시아의 활동이 단지 1세기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지금 해방운동 한가운데서 투쟁하는 분들에게 부활하는 것을 깨댣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성서해석은 억압민들의 해방운동에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억압민들을 해방하는 종교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어떤 민주주의를 말하는가?

 

다음으로, 참된 앎의 삼 단계를 이용하여 논란이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자.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어떠한 정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에서도 아니며 서구의 어떤 민주제도를 모방하여 정의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코리안들이 직접 코리아의 구체적인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인 상황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감각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아침에 별을 보고 논밭에 나가 별을 보고 들어오는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배고픔을 느낄 때 그에게 절실한 민주사회란 <열심히 농사지으면 배가 부른 사회>일 것이다.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공장에서 일하지만 전세방 값도 못 내 절절매며 겨우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살아가는 노동자에게는 <배불리 먹고 잠잘 수 있는 집 한 칸을 허용해주는 사회>가 바로 민주사회일 것이다. 아르바이트하여 겨우 학교수업료를 내가며 없는 시간을 짜내어 공부하는 고학생에게는 <돈 없이도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일 것이다. 자기가 배운 지식을 마음껏 가르치는 것이 거절되고,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없는 선생들, 교수들, 작가들, 언론인들에게는 <마음대로 쓰고, 가르치고, 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가 민주사회일 것이다. 유신시대에 한 대학교수가 긴급조치로 끌려들어가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중에 그에게 판사가 묻기를 “당신이 정의하는 민주사회란 어떤 것이요?” 했단다. 그때 고상한 말로 강단에서 줄줄 민주주의에 대해 정의내리던 이 교수가 즉시 대답하기를, “내가 바라는 민주사회란 인간에게 고문하지 않는 사회요.”라고 했단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것일수록 길고 장황한 말이 필요 없다. 누구나 다 같이 열심히 노동하여 일한 능력대로 골고루 나누어 먹는 사회가 바로 민주사회이다. 그렇게 복잡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현장에서 절실하게 배고프고 춥고 천대받고 고문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좋은 말도 그들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는 가운데 그들이 세워야 할 민주사회가 어떤 것인지를 다 알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감각적 앎으로 얻은 경험적 사실에 토대를 둔 앎이다.

 

이와 같은 경험적 사실들을 토대로 코리안들은 보다 문제를 전체로 보는 논리적 앎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배고프고, 춥고, 못 배우고, 학대받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운명 탓이 아니라 그들을 그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빠뜨리게 하는 고의적인 독재정치제도 때문이라는 것을 이성에 의한 합리적 사고로 알게 된다. 입법, 사법, 행정부로 형식적으로는 삼권이 분리되어 있지만, 이남의 역대 독재정권은 결국 일인독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남 군대는 통수권이 없다는 것, 국군을 통솔하는 것은 미군이라는 것, 결국 역대의 독재정권을 지원해온 것은 미국이라는 더 큰 문제를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합리적 지식에 도달하고 나서 단지 그 단계에서 중단해버리면 이남은 언제나 식민지 상태의 독재정치를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이남에서 미 제국주의는 남과 북,동과 서를 갈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까지 적으로 알았던 북이 적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형님으로 알았던 외세가 바로 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자기들의 이익만 취하는 외세를 말로만 “나가라! 나가라!” 외쳐댄다고 해서 외세가 나갈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세계 각처에서 보아왔다.

 

따라서 지식의 완숙한 단계인 실천적 단계로 넘어가서 이남에 민주주의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는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이남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 일이다. 이남 사회가 직면한 신식민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일체의 정적이고 추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반대한다. 우리는 세계제일의 강대국과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할 멀고도 어려운 과업이 놓여있다.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압제에 대한 끝없는 거부를 뜻한다. 민중이 원하지 않는 정치권력을 폐지할 권리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민중의 <혁명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최종적인 담보로 하여 존립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끝없는 외세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외세의 꼭두각시인 이남의 독재정권과 끊임없이 항거하는 가운데 쟁취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우리 코리안들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첫째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해야 할 민족자주의 문제를 우선으로 다루어야 한다. 외세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지 않고는 이남에서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둘째로 이남에서 민주주의가 서려면 반인류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무리를 과감히 청산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는 남북분단의 문제이다. 이남의 민주화 작업은 남북분단을 해결하고 민족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작업과 병행해야 한다. 분단상황에서 남쪽만의 민주화란 사실상 불가능하며 민중주도의 민주정권이 들어서게 되면 그 정권은 반드시 민족통일을 지향해야만 진정한 민주화가 가능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외세의 울타리 밑에 이남만의 최상의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더라도 그 정권이 단지 외세의 분단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분단을 고착화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게 되면 역시 그 민주정권은 결국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민중의 진정한 뜻을 대변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운동, 즉 민족자주화운동을 동시에 수행할 때만 가능하다. 단지 통일은 뒤로 미루고 순서에 다라 이남만의 민주화운동에 전력을 기울이자는 분들이 국내의 철저한 폐쇄적 반공정책, 반 이북정책을 고려하여 통일 운동하는 분들과 같이 손잡고 일 할 수 없다면 서로 이해할 문제지 적대시할 문제가 아니다. 이남의 외세와 독재정권이 분단을 이용하여 민중에게 독재를 강요하고 착취를 일삼으며 살인무기나 판매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통일운동은 이남 민중에게 문제의 핵심을 더욱 두렷하게 깨우쳐주며 민족의 적이 이북이 아니라 외세임을 자각시켜주어 투쟁목표를 분명하게 해준다. 이런 면에서 민주, 통일운동은 전후의 순서관계가 아니라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서로 병행해야 할 운동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란 우리 민족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남북 민중이 실제로 체험하는 경험레벨의 앎에서 출발하여 더 본질적인 민족의 문제인 외세의 식민지정책, 분단 고착화, 반민족, 반민주세력의 고의적인 육성, 고의적인 농촌경제의 파괴, 차관경제의 육성,반민족세력의 외화도피, 등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보다 전체적으로 깨닫게 되는 합리적 앎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일반이론과 개념들을 기계적으로 많이 암기하여 멋지게 민주주의를 정의했다고 해서 결코 조국의 민주화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앎의 셋째 단계인 실천적 단계의 앎이 필요하다. 즉 이남의 민주화는 투쟁하여 외세로부터 민족을 해방해야 하는 민족해방운동을 해야 하며,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세력을 몰아내고 민중의 참된 지도자를 뽑아 민족경제를 수립하고 민족 우위의 정권을 수립하여 민족분단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투쟁하여 쟁취하는 것이지 앉아서 추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 체제는 우리 민족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번영을 위해 독특한 자주적인 체제를 확립시켜야 한다. 우리 모두 민족의 분단 앞에 냉철하고 겸허하며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쪽을 무조건 반대함으로 생존하는 정치인들, 학자들, 종교인들…. 그들의 반쪽 인생이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부터 조금씩 고쳐가는 일이 민주화운동의 첫걸음이다. 북에 있는 자기 부모, 처, 자식, 친구를 적이라고 강조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이 비극 앞에서 어찌 언어의 유희로 민주주의를 정의하겠는가? 반쪽 인간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변해가는 운동이 바로 민주화운동이다. 

 

결론

 

지금까지 인간의 감각적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경험적 사실레벨의 앎과 그 사실레벨의 앎에서 출발하여 이성적으로 사실들을 서로 연결해 사물을 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개념레벨의 논리적 앎을 다루었고, 다음으로 앎의 완숙한 단계인 가치레벨인 실천적 지식을 다루면서 새로운 종교개혁에 필요한 새로운 성서해석학과 새로운 조국을 이루는 데 필요한 민주사회건설에 관해 설명했다. 우리가 모두 참된 지식의 단계인 용기와 열정과 모험이 필요한 실천적 단계의 지식을 가지고 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하여 마침내 통일된 조국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해야겠다. 투쟁하여 쟁취해야 한다는 선상에서 종교도, 자유도, 민주도, 통일도 역동적으로 정의내려져야 한다.

 

 

 관련기사

[신학의 해방, 서론] 신학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해석학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3-14 21:11:2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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