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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79] 우리는 똥을 먹고 살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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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6-03-04 12:1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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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79] 제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수 없다

동일방직 창업 악덕 사장 서정익과 그의 아들 서민석

유신독재 정권 악덕 대통령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

 

유태영(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1978년2월 21일에 <동일방직>의 여자 노동자들에게 <똥물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으로 부터 38년 전에 2월 21일에 발생했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이 바로2016년 2월21일이다.

 

그 때 당시 <동일 방직> 노동자 수는 1300명이며 그 중에 여자 노동자는 1200명이었다. 회사에 노조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소수의 남자 100명의 노동자들이 조직한 <어용노조>가 있을 뿐이었다.

 

1200명 여자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는 비참하고 최악의 노동조건이었다. 하지만 여자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을 노조결성은 원천적으로 봉쇄를 당하고 있었다.

 

1.<동일방직> 1200명 여자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는 어떠했나?

 

섭씨40도가 되는 찜통 현장에서 숨통을 틀어막는 습기와 뽀얀 솜먼지가 가득한 일터에서 콧등까지 솜먼지를 뒤집어 쓴 여자 노동자들은 아무 말 못하고 기계에 매달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노동을 매일 하루 종일 해야만 했다.

 

밤12시가 될 때까지 노동이 계속되는 것이 예사 이었으며 눈꺼풀이 돌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부족한 잠을 참아야만 했다.

 

여성노동자들은 대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으로 한창 생기가 넘치는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피로와 먼지와 태양빛의 부족으로 황색 얼굴로 시들고 있었다.

 

피곤과 졸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직업병으로 인한 발가락의 무좀이었다. 가려움 때문에 할 수 없이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시멘트 바닥을 부비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발가락 피부가 벗겨져 피가 시멘트 바닥에 묻어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약을 제공해주지 않었다.

 

나이 어린 10대와 20대 초반의 농촌의 여자들이 박정희 정권으로 인하여 발생한 농촌의 가난을 벗어나려고 무조건 상경하여 찾아 간곳이 바로 <동일방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동일방직 창업자 <서정익 사장>은 한국의 현대화 경제 정책에 일심동체가 되여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동일방직>을 무조건으로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희망찬 한국의 산업발전을 주장하는 박정희 정권과 유명한 <서정익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동일방직>의 1200명 여성 노동자들이 무지막지한 학대를 당하고 있었는데도 그때 이러한 험악한 공장이 있었던 사실을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지난밤 야간작업으로 인하여 여성 노동자들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졸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남자 조장의 호루라기 소라가 들여온다. 니들 뭐하는 거야? 빨리 가서 밥 먹고 와. 정해진 전심 식사시간은 30분이지만 20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모독적인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온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급성장하는 경제발전을 위하여는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정도는 무시하는 것이 불가피한 당연지사로 여기면서 정치를 하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동일방직은 이러한 상황하에서 서정익 사장이 1955년에 창업한 회사가 1973년경에 이르러서는 계열사가 11개로 확장됐으며 총수출이 1년에 5백만달러를 달성하여 국내 최고의 기업체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동일방직의 창업자인 서정익 사장이 1973년에 사망하였다. 창업자인 서정익 사장의 사망후에 창업자의 아들인 서민석이 동일방직의 제2대 사장이 됐다.

 

박정희가 1961년에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18년>간 악덕통치를 하다가 1979년에 사망한 것 처럼 이와 똑같이 서정익도 1955년에 동일방직 창업하여<18년>간 악덕사장으로 회사를 운영하다가 1973년에 사망했다.

 

<18년간 악덕>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박정희와 서정익이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사망한 후에 군부통치가 그의 딸 박근혜로 연결됨으로 인하여 더욱 더 혹독한 정치가 계속된 것처럼 서정익 사장이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서민석이 동일방직의 후계자가 되여 막대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욱 더 비참한 학대를 했다.

 

동일방직의 후계자로 서민석 사장이 새로 취임한 후부터 여성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덕행태가 더욱 더 악화되어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의식에 대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카톨릭노동청년회와 기독교 인천산업선교회 둥의 협력을 받아 처음에는 소그룹운동을 소극적으로 여성 노조결성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소그룹으로 시작된 여성 노조운동이1975에 이르러서 새로운 집행부가 결성되고 절대 다수의 지지로 <이영숙 집행부장>을 선출했다. 동일방직이 1955년에 창설됐는데 창설 후 20년만인 1975년 에 비로소 처음 있는 여성 근로자 운동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직과 조직의 지부장을 처음 선출했던 것이었다.

 

1976년 2월에는 여성노조의 대의원 선거가 진행됐으며 7월25일에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1200명 여성 노동자들이 그동안 20년 동안 걸어온 고난의 길이 얼마나 험악했는지를 회고하는 상징적인 대회의 개최를 계획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1976넌 7월 25일에 계획했던 동일방직 여성노조의 활기찬 꿈은 산산조각으로 분쇄되고 말았다.

 

동일방직의 여성 <대의원 대회>는 악덕 사장인 제2세 서민석 사장과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 중앙정부와의 합동작전으로 지휘체제를 구성하여 비참한 행패를 부림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대의원 대회>는 비참한 사건으로 끝나고 말었다.

 

2. 중앙정보부가 일으킨 <알몸시위>와 <똥물 세례>

 

동일방직은 인천 바닷가 만석동에 위치하여 창업 20년의 역사를 과시하면서 국내 5위의 대규모의 회사로 비약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 누구의 힘으로 동일방직이 20년만에 국내 5위 대규모 회사로 발전했던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아버지 서정익 사장과 제2세 아들 서민석 사장이 대를 이어 가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과 연결고리를 맺고 20년 동안 1200명의 여성 노무자들을 야만적으로 학대하고 극심한 폭력으로 노동력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저임금, 무보험, 무퇴직금, 초과노동시간, 불법적 해고, 근본적 여성학대 퐁토 그리고 여성 노조 창립 원천봉쇄 등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20년 동안의 수난의 역사의 덕분이 바로 동일방직의 비약적인 발전의 역사이었다.

 

어쨌든 1976넌 7월 23-25일은 동일방직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어서 여성들의 <노조창설역사>에 있어서 특기할만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유와 원인과 과정은 첫째, 동일방직의 어용 간부들의 행패 둘째, 인천 지역의 경찰들의 폭행 셋째,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가담하고 조정함으로써 발생한 3자의 합동작전으로 전개됐다.

 

경찰들은 여성 대의원회 집행부장 이영숙과 총무 두 사람을 미리 체포했으며 여성 대의원회의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워천봉쇠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경찰은 정문을 봉쇄하고 음식물 공급과 수돗물과 전기를 차단하고 여성 화장실까지 못을 박아 놓았다.

 

이러한 경찰의 부당하고 가혹한 처사에 대항하여 800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보다 굳게 단결하여 농성의 대열을 조성하고 흩어지지 않고 3일간 농성을 계속했다.

 

이와같은 여성 노동자들이 항의하는 농성은 동일방직의 20년 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놀라운 변혁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3일째 되는 1976년 7월 25일은 바로 경찰과 중앙정보부가 무섭고 가혹한 행동을 개시하는 D Day이었다.

 

곤봉과 총칼로 무장한 중앙정보원들과 경찰들이 시퍼런 군경버스를 행진하여 동일방직 회사 안으로 진입해 들어 왔다. 드디어 동일방직은 순간적으로 전투장으로 급변했다.

 

시퍼런 군경버스와 총칼로 무장한 경찰들이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을 목격한 여성 노동자들은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공포와 겁에 질려 엉엉 울움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시퍼런 군경버스를 처음 보는 시골출신 여성들은 깜작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급박한 위기위식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에 그 누군가의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벗고 있는 여자의 몸에는 경찰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다.>

 

<벗고 있는 여자의 몸에는 손을 못 댄다.>라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이야기이며 다급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비명의 소리일 뿐 아무 효력이 없었다.

 

위기의식에 급박해진 여성 노동자들은 앞을 다투어 용감하게 <팬티와 브라자>만을 남겨 놓은 채 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생사를 초월한 부끄러움울 개의치 않는 여성 노동자들의 돌발적인 반나체 알몸항의 시위의 돌발적 행동이었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초월한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은 반나체로 서로 팔장을 끼고 똘똘 뭉치고 폭발적인 항의의 데모를 계속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돌발적인 상황으로 곤경에 처한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우선 설득작전으로 <대의원의 주동자들만 내놓으라, 그리하면 전원 모두를 용서하겠다.>라고 큰 소리로 제의를 했다.

 

<우리는 주동자가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이다. 무릅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 여성 노동자 800명의 결의는 단호했다.

 

하지만 경찰과 중앙정보부는 동일방직의 어용 직원들이 손가락질로 지적한 여성노동자들 중에서 간부역할을 하고 있는 72명을 버스에 태워 체포연행을 했다.

 

수백명 여성 노동자들이 버스를 뒤쫓아 가며 울부짖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800명 여성 노동자들의 함성과 울부짖음이 사라져 없어진 광장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찢어진 작업복들과 운동화, 작업모와 머리핀들이 혼란스럽게 널려져 있었다.

 

그러면 동일방직의 <똥물세례 >사건은 또 무엇인가?

 

1976년 7월 25일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의 <알몸시위>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의 철두철미한 원천봉쇄로 인하여 언론에 일절 보도되지 못했다.

 

하지만 8개월 후인 1977년 3월에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의 악덕 사장과 박정희 정권의 불의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투쟁으로 항거하면서 노조결성을 위하여 집행부를 또다시 조직하는데 성공하여 지부장으로 이총각을 선출했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의 결사적 재기운동에 대하여 가톨릭교회 노동청년회와 기독교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후원을 받아 인권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런데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과 인권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는데 대하여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빨갱이-공산주의>로 몰아가면서 <이념문제>로 사건을 확대하고 둔갑시키면서 극심한 탄압이 그칠줄 모르고 1977-78년으로 게속되고 있었다.

 

1978년 2월21일에는 동일방직 여성 노조의 대의원 선거를 위하여 새벽부터 집행부 위원들이 투표함과 투표용지를 준비해 놓고 야간조 여성 노동자들이 퇴근하기를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바로 1978넌 2월21일 새벽 6시이었다. 갑자기 중앙정보부가 지휘하는 괴한들 5-6명이 나타나 큰 소리로 <이 빨갱이 년들아>라고 욕설을 퍼붓더니. 방화수통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 방화수통에는 방금 화장실에서 퍼온 <똥과 똥물>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손에 고무장갑을 낀 5-6명의 괴한들은 <똥>을 퍼서 닥치는 대로 여성들의 얼굴에 바를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젖가슴에 까지 넣고 입에도 <똥>을 밀어 넣고 있었다. 나중에는 괴한들 5-6명뿐만 아니라 동일방직 회사의 사주를 받아 여성노조 창립을 반대하는 남자들까지 합세했다.

 

<저 년들에게 똥을 먹여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러한 <똥소동>의 과정에서 5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똥세례> 광란의 현장에는 정사복 경찰들이 수 없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구경꾼 모양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려한 <똥물세례>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동일방직은 여성 노동자 124명들을 <사무실 점고죄>라는 죄명을 뒤집어 쒸워서 해고하였다.

 

<똥물세례> 사건을 일으킨 근본 목적은 여성 노조 창설은 원천봉쇄를 하기위한 최후의 수단과 방법이었다. <똥물세례>시건 발생 후에 해고를 당한 124명들은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빈곤의 23년의 세월이 흘러간 2001년에 이르러서 놀랍게도 중앙정보부의 전직노사문제 담당자였던 자의 양심선언으로 124 명들에 대한 해고는 박정희 정권의 비밀로 꾸며진 불법적 해고였다고 밝혀졌다.

 

그리하여 2011년에 124명에게 일인당 2천만 원의 배상금을 판결했다. 하지만 3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20대 처녀들이 50대 중년이 되였으며 고생 끝에 세상을 뜬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3. 개발독재 <알몸시위-똥물세례>사건의 현대적 의미

 

38년 전 1976-78년에 박정희 개발독재 정권이 저질은 <알몸시위- 똥물세례> 사건은 그것이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일이 결코 아니라 현재에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이른바 <선진독재 정권>하에서도 역시 여전히 연관성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박근혜는 그때 당시 청와대의 <안방주인- First Lady>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동일방직과 청와대>와의 연결고리 사이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박근혜가 직접 관련됐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불이익은 실질적으로 박정희 때나 지금 박근혜의 때에 있어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비극적인 시건들이다.

 

박근혜는 전두환-노태우로 연결되는 정치자금 6억원 수수와 성북동 주택 취득 그리고 칼기사건 등 박근혜의 정체는 감출 수 없는 의혹으로 존속되고 있다.

 

1979년에 10. 26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짐으로 잠시 동안 노동자들의 복지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포고령이 발표됐으며 노태우 정권으로 이여지면서 노동운동이 또 다시 원천봉쇄 되고 있었다.

 

1993년에 김영삼 문민정부는 세계화라는 <빛 좋은 개살구>정권으로 노동정책은 제자리 거름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김영삼은 무노동무임금, 노조전입자임금지급 금지, 파업요건강화, 정리해고제 등 악법을 <날치기 통과> 수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 평민당 등 야당의 반대로 인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기간 동안에 측근자들에게 유명한 말을 남겨 놓았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같은 것들이 통치하는데 필요하제예? 김영삼과 이명박을 계승하는 박근혜 정부가 2016년 2월 24일에는 부끄럽고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집권 3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집권 3년을 맞이하는 2016년 2월 24일 이 날에 박근혜는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킬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로 통과가 지연되고 있었다. 야당이 반대하는 이유는 박근혜가 주장한는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이 권력을 남용하여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킬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야당이 반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주재하는 회의석상에서 <테러방지법>의 통과가 국회에서 지연되는데 대하여 불만을 소리 높이 터뜨리면서 꼴불견 소동을 연출했는데 <책상을 10여 차례 쿵쿵 내려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박근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의 딸인가를 스스로 폭로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이다.

 

박근혜의 망국적인 악덕정치 3년간의 행태를 다음과 파헤친다.

 

1). 가짜 대통령 박근혜는 대한민국을 침몰시키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방 문재인 후보에게 124만표(4%)차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18일에 조작한 51.6%를 개표방송사에 전송하는 수법으로 12월 19일의 선거결과를 통째로 중앙선관위 관악정보센터에서 바꿔치기를 감행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는 선관위 전산센터를 미리 (2011년5월 25일) 장악하여 모든 선거구에서 박근혜를 당선인으로 바뀌도록 공작을 한 것이 바로 중앙선관위 관악 정보센터이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는 <댓글대통령>이 됐으며 연제욱은 댓글사령관으로 활약하여 청와대국방비서관과 장군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 국군사이버사령부, 연제욱, 원세훈, 김무성 그리고 국정원 정치공작원 김하영 등 모두10여명을 박근혜 부정선거 음모에 직접 가담했다.

 

이들에 대하여 형사고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담당 검사는 3년이 되도록 오직 <종이방망이>로 대한민국의 법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댓글 대통령이 된 사건에 대하여 불리하면 침묵으로 묵살하고 치고 빠지는 수법을 사용한다. 반대로 유리한 경우에는 발언하여 <사법부의 판단을 믿고 기다리라>고 뻔뻔스러운 발언을 하고 있다.

 

박근혜가 제아무리 뻔뻔스럽게 진실을 회피해도 국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안처 등 국가기관들의 대선관련 개입사건들이 계속하여 줄줄이 사실들이 불거져 밝혀졌다. 이 때문에 정치권과 민심은 집권 3년에 박근혜에 대한 불신임이 깊은 것이다.

 

 

한국 언론들은 또 어떠한가? 종편방송들과 조중동을 비롯한 제도권 언론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으면서 한국 민중에게 허위 보도만을 하고 있다.

 

더욱 더 한심스러운 것은 가짜 대통령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 <새누리당>은 물론이지만 안철수의 둘러당인 <극민의 당>을 비롯하여 <더민주당>까지도 역시 가짜 대통령 박근혜를 묵인하고 보고만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정치권의 현실이다.

 

물론 이와같은 모든 한국의 정치적 과정속에서 박근혜를 이용하고 있는 배후세력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의 CIA 이며 미국의 손아귀안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단원고 학생 261명과 일반인 희생자들 모두 304명이 박근혜정권의 고의적인 버림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세월호의 실소유주는 구원파가 아니라 국정원이 세월호의 실소유자라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구원파는 오직 박근혜 정권에 의하여 꾸며진 연극의 주인공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그러면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 침몰로 인하여 304명이 사망한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 인하여 획득한 이득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박근혜의 잃어버린7시간은 도대체 왜 발생했나?

 

박근혜가 댓글대통령-가짜대통령이 되었다. 그럼으로 한국의 전체 국민의 유일한 근원적 관심은 <부정선거>를 파헤쳐서 진실을 밝히려는 국민적 요구가 총집중 되여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 국민의 공통된 의심과 진실을 밝히려는 국민적 요구가 2013년2월25일에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부터 매일매일 점점더 최고의 국민적 정의감이 촉발하고 있었다.

 

박근혜는 이러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돌발적 엄청난 사건을 발생시켜 국민들의 여론을 들끓게 만들고 딴 곳으로 돌려놓아 <부정선거>와 <가짜대통령>의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전향시키는 출구를 찾으려한 것이다.

 

박근혜가 절실히 필요한 출구를 찾아낸 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킨 것이며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인하여 박근혜의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의혹은 일단 출구를 찾는데 성공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제도권 언론인 방송과 신문들이 일제히 24시간 몇달 동안 오직 세월호사건에만 집중 보도를 함으로 인하여 국민들의 관심은 그 누구도 <부정선거-가짜대통령> 문제는 지나간 옛이야기처럼 여기게 되고 말았다.

 

박근혜는 귀여운 자식을 잃은 부보들에게 슬퍼할 기회마저도 박탈하여 유가족들이 다양한 조직활동과 구조적인 단체들을 창설하여 온통 세월호사건에만 전적으로 매 달리게 했다. 그리하여 박근혜의 <부정선거-가짜대통령> 문제에 대하여 항의를 해야만 마땅한 국민적 시급한 과제를 오히려 제2차적 문제로 밀려나도록 교묘하게 정치적 수단을 활용한 것이다.

 

박근혜는 속임수의 명수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속임수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

 

3). 박근혜의 어머니 육영수가 1974년에 사망한 후에 박근혜는 청와대에서 안방주인의 행세 (First Leidy) 를 했다. 그런데 그때 박근혜의 나이는 22세이었으며 27세까지 5년 동안 죽은 어머니 육영수의 그림자노릇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불법적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그런데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저지른 모든 범죄행위의 근원은 최태민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테민은 누구인가? 최태민은 이름을 7번 바꾸고 이혼을 6번 했으며 7번째 부인에게서 출생한 것이 문제의 최순실-정윤희를 부부이다. 최태민은 유명한 전과자인데 횡령 14건, 사기 1건, 변호사법 위반 11건, 비리 12건. 여성추문12건 등 총체적으로 흉악한 범죄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태민이 불교 승려가 되였으며 천주교 영세를 받았으며 또 신학교 교육이 전혀 없는 사이비 자칭 목사가 된 사기꾼인데도 불구하고 박근혜를 접근했던 것이다.

 

최태민은 무슨 방법으로 박근혜와 접촉했나?

박근혜가 육영수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하여 슬픔에 빠져 있는 그 어려운 때에 어느날 박근혜의 눈을 번쩍 뜨게하는 이상한 편지 하나가 전달됐다고 한다. 수신인은 박근혜이고 발신인은 최태민이었으며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영혼이 현몽으로 나타나 나에게 지시하신 말을 전달한다. 육영수 여사가 죽은 이유와 목적은 오직 박근혜를 아버지 박정희의 대를 이어 큰일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그런데 나의 딸 박근혜는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슬프만 하고 있으니 이 소식을 박근혜에게 전달해 달라>

 

박근혜는 최태민으로 부터 어머니의 <현몽>에 대한 편지를 받고 너무 기쁘고 감동되어 최태민 목사를 1975년3월 6일에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복잡하고 사기성 관계는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대한구국선교단, 임진강 구국기도회, 구국봉사단, 새마을 운동봉사단> 등 다양한 조직과 단체들을 창설하여 최태민은 회장-총재가 되고 박근혜는 고문-명예총재로 추대하는 방법과 수단으로 최태민-박근혜는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 등 각 분야에서 미니청와대의 행세를 했다.

 

최태민은 이러한 기회를 악용하여 이권개입과 횡령사기 그리고 융자 알선 등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드렸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이용한 사기행각은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사건 후에야 끝났다.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불륜관계들에 대하여 주한미대사 버시바우의 증언에 의하면 <최태민은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있어서 박근혜의 몸과 마음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다>라고 분명히 증언했다. 본국에도 이렇게 보고를 한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최태민 불륜에 대한 증언들이 다양하고 퐁부하다. 김재규의 법정증언, 김계원 장군은 <그 놈이 그 년을 홀렸다>라고 했으며, 청와대에서 가정부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여성의 증언에는 최태민과 박근혜가 뒤엉킨 다음날 아침에는 침실에는 각종 피임기구들이 널려 있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고 회고를 했다.

 

오죽했으면 박근혜가 2007년에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시에 두 가지 논쟁이 있었다. 박근혜는 박정희-육영수의 혼전에 출생한 딸이라는 논증과 둘째는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숨겨진 아들이 일본에 있다는 논쟁이 있었다. 박근혜는 DNA를 가져오라고 응수를 했던 것이다. 불 안 땐 굴뚝에서 연기날까?

 

1994년 최태민은 사망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최태민의 딸 최순실-정윤희 부부와의 관계는 독특하다. 박근혜가 2002년에 평양을 방문할 때 정윤희를 비서로 동행했다. 이것은 박근혜와 최태민 관계의 깊고 깊은 연결로 볼 수밖에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정윤희와의 다양하고 복잡하고 경이로운 불의한 관계들을 지면상의 제한으로 이것으로 그친다.

 

하지만 박근혜가 짊어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와 민족과 역사에 있어서 막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실에 대하여 절대로 어물어물 덮어두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박근혜의 범죄들은 성북동 주택을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 부터 증여받은 사건, 육영재단 비리사건, 경남대학을 탈취한 사건 그리고 저 유명한 정수정학회의 강제탈취사건 등을 밝혀야 하고 또 박근혜가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으로 1995년부터 2005년 까지지 10년 동안 저지른 태산같은 비리들도 밝혀지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오늘 박근혜 정권의 구석구석에는 정수장학회 출신들이 수천 명이 가득히 차고 넘치고 있으면서 박근혜의 호위병 역할들을 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정치인이 바로 김기춘 이다. 김기춘 전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세월호 사건을 은폐한 정수장학회 제1회 출신이다.

 

박근혜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하에서 오직 박정희의 딸이라는 기득권으로 오랜 세월 동안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1998년부터는 정치계에 자기 자신이 직접 진출하여 박정희의 딸 행세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박근혜는 2011년에 위기에 몰려있던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박정희 아버지의 5.16군사정권을 재평가하고 독재정치의 특이성을 되살리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012년에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박근혜는 5.16 군사 쿠데타를 <돌아가신 아버지가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하니 미국이 그 얼마나 박근혜를 좋아하고 안심하고 기뻐하면서 지원을 할 까?

 

4). 박근혜의 정치적 색체는 근원적으로 친일파이다.

 

2016년부터 초등학교 학생들이 배울 국정 사회과 교과서에는 <위안부> 용어와 사진이 완전히 삭제됐으며 오직 <전쟁터에 끌려간 여성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다.>라고 서술을 했을 뿐이다.

 

박근혜는 국정교과서에 대하여 사회적 논의를 거절하고 집필진과 집필기준조차 미공개를 하면서 친일적인 문제가 내포되어 있는 교과서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의 일본에 대한 사고방식은 한미-한일을 동등한 국제관계로 평가하고 그 이상은 이무 것도 없는 것이다. 박근혜의 사고방식은 그녀의 아바지 박정희의 친일 행각을 문제삼는 것은 오늘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종북세력과 반미주의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일본은 군국주의를 또 다시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국가안보라는 미명하에서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유훈처럼 여기면서 일본의 총리 아베 수상을 정치적 동반자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박근혜는 일본을 의지하면서 반북반통일 정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심지어 <독도는 우리 땅이다>라는 엄연한 민족적 주권마저도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깨여 있는 민중들은 박근혜를 주시하고 감시를 해야 하겠다.

 

5). 박근혜의 두 얼굴아래서 노동자들은 착취와 빈곤과 죽음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평화>를 위하여 <노동자의 평화>를 희생시키는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는 선거공약으로 그렇게도 풍성하게 약속한 모든 공약들을 분토처럼 포기하고 있다.

 

2013년 8월 28일에 박근혜는 10대 재벌 회장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대기업 총수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요청이 아니라 <강요와 지시>를 하는 목소리를 청취했다.

 

박근혜가 선거공약으로 노동자 대중들에게 약속한 공략들은 경제민주화와 비정규직 해결에 대한 선거 공약이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대기업 총수들 앞에서 선거공약은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오직 대기업 총수들이 요구하는 조건에 대하여서만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이 바로 2013년 8월28일인데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 등 10여명의 자택과 사무실 18곳에 대하여 압수수색을 했다. 동시에 박근혜의 부정선거를 문제 삼은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사건이 확대연결 되고 있었다.

 

결국 박근혜는 선거공약으로 노동자들에게 그렇게도 분명하게 강력히 약속하고 맹서한 <불법파견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라고 주장한 선거공약을 분토처럼 포기해 버리고 재벌들에게는 머리숙여 <회사에서 하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적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라고 선언을 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노동자들에게 허락한 권리는 오직 <저임금으로 열심히 일할 권리>만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박근혜 정권에 항의하는 많은 젊은 노동자들은 닥쳐오는 삶의 위기 앞에서 박근혜 정권을 종식시키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에 의하면 박근혜 정권의 2012 -2015년에 노조탄압과 정리해고로 인한 생활고에 비관하여 자살한 노동자들의 수가 20명을 넘어서고 있는데 자살의 위기에 처해 있는 불상한 노동자들의 수는 날마다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6). 박근혜 정권이 조작한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사건의 실상을 알아본다.

 

박근혜는 국정원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정보원게이트>라고 하는 불명예의 꼬리표가 거추장스럽다. 뿐만 아니라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가짜대통령을 규탄하는 민중의 촛불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은 이러한 곤란한 문제들을 원천봉쇄를 하기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진보당 해체와 이석기 의원에 대한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통하여 국회의원직을 박탈하고 구속기소하여 감옥에 수감하는 폭정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란음모자>라면 최소한 몸에 지니고 있는 권총이나 감추어 둔 무기들 그리고 경제적 자원으로 달러$의 축적 같은 것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을 이런 것들을 단 한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내람음모 시건은 막강한 군사력과 자원의 뒷받침이 있었으며 또 미국이 직접 관여하고 지원했기 때문에 성공한 내란음모 이였다. 하지만 박근혜가 주장하는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는 분단고착과 친미정권의 영구화를 위한 음모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이 조작한 진보당 해체와 이석기 의원에 대한 부당한 탄압은 마녀사냥을 동원한 한국판의 신매카시즘의 방법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7). 박근혜의 굴욕외교는 끝이 없으며 간 곳마다 사면초가이다.

 

박근혜는 <2013년 6월 15일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하여 5월5-7일에 워싱턴을 방문하여 오바마 대통령과 밥 한 끼 먹으면서 조공으로 2조원 대 아파치 헬기 무기구입비를 내놓으면서 <부정선거로 대통령된 것을 눈 감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박근혜에게 미국의 체면을 위하여 민주화를 실행하라고 권고했다.

 

박근혜는 중국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에게 <저를 초청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라고 머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하지만 중국은 박근혜의 뺨을 치는 냉대로 대접을 할 뿐이다. 왜냐하면 박근혜가 극성스럽게 미국에 요청하는 사드의 한국배치가 중국에게 치명적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박근혜가 국제적 틈바구니에 끼여서 불장난을 하는 악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는 일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여 친일굴종의 외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박근혜에게 <독도는 일본 땅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럼으로 박근혜는 진퇴양론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다.

 

박근혜가 당면하고 있는 진퇴양면으로 사면초가를 돌파할 수 있는 출구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민족끼리> 화해하고 단합하여 민족대단결을 쟁취함으로서만이 국제적인 굴욕을 물리치고 자주하는 단일 조선민족의 주권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을 뿐이다.

 

이 글을 끝맺으며,

 

이명박근혜 정권은 <비핵-개방3000>이라는 잠꼬대 정책으로 세월만 허비하고 있다. 아마도 박근혜는 선거용으로 잠시 이 잠꼬대 정책의 덕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또 다음에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통일대박론>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박근혜의 드레스댄에서의 발언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미국을 의지한 흡수통일의 망상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오늘 미국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는 한반도의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공염불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 무지의 반민족적 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사이에 북조선에서는 4번씩이나 핵실험을 성공하여 광명성3호기와 4호기를 성공적으로 발사함으로써 우주궤도에 진입성공을 쟁취 했다.

 

그런데 박근혜는 <세월호의 재난>보다 수백 수천 배 더 큰 재난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으면서 민족적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미국만 의지하고 조국의 분단 70년을 태평세월로 여기면서 안개속의 경제발전을 과시하고 있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의 정권은 이제라도 정신나간 사고방식을 깨끗이 버리고 청산하여 2016년 춘3월에 희망의 봄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미국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과 70년 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는 적대관계를 대화로 풀어 나가기를 간절히 이 봄에 원하고 있다. (3/1/16/ 유태영)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3-04 12:20:46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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