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제3세계의 눈으로 서구열강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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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3-01-21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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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들의 역할
흑인노예들이 참전하는 것은 자유를 얻는 절호의 방법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백인 식민정책의 모순
흑인노예들이 참전하는 것은 자유를 얻는 절호의 방법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백인 식민정책의 모순
유태영 박사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1400년대에 시작한 흑인노예무역이 170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노예의 수가 너무 급증하여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비율이 너무 높은 것은 농업생산량에는 큰 이득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미국 식민지에서 흑인노예의 수의 비율이 과다해지면서 자연히 백인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위협이 되고 있었다.
1775년에 있어서 버지니아와 조지아 등지에서 총인구 3만3천명 가운데 절반 가량인 1만5천명이 흑인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 수가 가장 적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백인인구 7만명에 흑인노예의 수가 2만5천명 정도이었다.
미국의 북부지방에서는 흑인노예들이 농업이 아니라 공장 숙련공으로 일을 했다. 그런데 흑인노예들이 여러가지 수공업 기술에 숙달하여 유능한 기술자들이 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지방에서는 고기잡이, 고래잡이에 선원으로 활약하여 탁월한 공로를 세움으로써 흑인노예들이 백인들과 경쟁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을 하자면 미국의 남부나 북부에 있어서 공통적인 문제는 흑인노예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서 흑인노예들의 영향력이 급증하는 데 대하여 백인들의 마음 속에 은근한 염려가 점점 쌓이게 됐다는 것이다.
백인들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규정하고 있었다.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을 오히려 문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왕실 총독부는 이와 같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노예무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국왕실이 거절한 이유는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때문이었다.
위에 기술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미국땅에서 흑인노예무역이 400년 동안이나 벌어졌던 방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빙산의 일각”을 기록한 것 뿐이다. 지면상 제약으로 그 방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1. 미국 독립전쟁(1775-1783)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방법이었다. 1775년에 <미국식민지 현지군대>와 <영국본국에 속하는 영국군> 사이에 전개된 전쟁을 <미국독립전쟁>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이 백인들끼리 싸우는 독립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자유인이 되는 길을 삼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미국백인들이 흑인노예군에게 무기휴대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전쟁이 오래 계속되고 백인의 인력부족이 심각해짐으로써 미국은 흑인노예들을 군에 입대시켜 어쩔 수 없이 흑인들에게 무기를 주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미국백인군부의 일부에서는 <흑인노예들에게 무기를 주는 것은 노예들이 도주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며 강하게 반대를 주장함으로써 군부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1776년에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인노예들의 군복무를 금지하는 법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독립전쟁이 3년이상 계속되면서 문제는 복잡해졌다. 영국군이 미국의 흑인노예를 돈을 주고 사들임으로써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서 흑인노예 3,000명을 1인당 $1,000에 사들였다. 흑인노예들이 전쟁 중에 성실히 복무하기만 하면 <$50와 자유>를 준다고 농장주들은 흑인노예들에게 약속을 하고 영국군에게 팔아 넘겼다. 남부 대농장주들은 흑인 1명에게서 $950의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한편 영국왕실은 영국군에 참전한 모든 흑인노예들은 자유인이 된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이 약속에 의하여 수만명의 흑인노예들이 영국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영국 왕실의 던모어 경이 축출됨으로 인하여 영국의 약속은 쓸모가 없이 되고 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3년에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은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14,000 명의 흑인노예들을 카나다 노바스코샤, 서인도 제도 그리고 아프리카 등 여러 곳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로 끌고 갔다.
독립전쟁이 8년 동안이나 계속됨으로써 미국독립군은 흑인노예들을 입대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 했다. 그리하여 1778년부터 흑인노예들은 새롭게 휘날리는<성조기> 아래서 미국독립전쟁에 정정당당하게 참전하여 미국을 위해 싸웠다.
어쨌든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들의 사기는 높았다. 노예노동자였던 사람들이 비록 힘들고 위험한 군복무이기는 했지만 군복무 후에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흑인노예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있게 될 보상금과 토지에 대한 기대로 고무되어 참전하고 있었다. 8년 동안 계속된 영국과 미국이 싸운 독립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독립선언문>을 대륙회의가 1776년 7월 4일에 승인함에 따라 아메리카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 창건됐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 후에 버지니아 주지사 (1779-1781)와 미국의 제3대 대통령 (1801-1809)이 됐다.
미국독립전쟁의 승리는 흑인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붙잡아두는 부도덕성에 대하여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단체들은 교파들간에 경쟁적으로 흑인노예제도에 대한 비판과 시정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기독교는 정치적 변화에 대하여 선구자적 역할을 앞서서 담당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미국의 기독교는 다만 정치적 변화가 크게 발생한 후에 비로소 후속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흑인노예제도의 폐지와 자유부여에 대한 논쟁은 <미사여구>로 장식되고 있을 뿐 실제로 노예제도가 종식되지는 않았으며 험난한 갈 길이 여전히 멀고도 멀었다. 특히 미국은 주정부들이 제각기 법률을 제정하여 흑인노예문제를 취급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통일된 법으로 흑인노예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득한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새로 독립된 미합중국에는 <대륙회의>와 각 주에 <주의회>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으로써 흑인노예에 대한 문제는 혼선을 이루고 있었다. <주의회>들이 이해타산에 얽매여 <대륙회의>의 결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주의회>가 건의하는 노예자유에 대한 결정을 <대륙회의>가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흑인노예에 대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주정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적 <주정부>들은 흑인노예제도를 끝까지 주장하여 극한대립을 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미국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도마스 제퍼슨은 노예제도를 1800년 이후부터 완전히 금지하는 법령을 <대륙회의>의 법으로 1784년에 선포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7개주 중에서 6개 주가 반대했다.
1787년에 보다 더 보수적인 대표자들 55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미국헌법>을 입안했는데 이 법안은 간접적으로 노예제도가 그대로 계속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55명중 대다수가 법률가들이었는데 그들은 대지주, 노예무역업자, 제조업자, 해양업자 그리고 이자놀이업자들로서 이권에 종사하는 기업주들이었다. 이들이 제정한 <미국헌법>에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10년에 비교적 개방주의적인 미국북부에 3만명의 흑인노예가 여전히 있었다. 1840년 까지도 1,000명 이상의 흑인노예가 북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에는 쌀과 면화 농장이 확대되면서 오히려 흑인노예제도가 더 확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백인들의 정치가 이렇게 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독립전쟁의 승리 후에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의 활약과 정치적 투쟁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흑인지도자들은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에 의거하여 <대륙회의>와 각 주 <주의회>들을 상대로 노예제도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흑인민권운동은 노포크에서, 내시빌에서, 뉴욕에서, 매사추세츠에서 그리고 동서남북 미국의 전역에서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자로 활약한 흑인은 독학으로 유명한 설계자가 되어 워싱턴시의 설계자로 임명된 흑인 벤저민 배니커(Benjamin Banneker)였다. 그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친히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오랫동안 짐승처럼 살아왔다는 것은 당신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입증됐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확인하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간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조금도 치우침도 없이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재능을 부여하신 데 대하여 저와 의견을 같이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히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시기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은 그때 당시의 아메리카의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지도자 벤저민 배니커의 호소를 묵살했다. 그때 당시의 사회구조, 막대한 면화공장주들의 힘, 역사 깊은 흑인노예무역제도, 남북의 아메리카의 엘리트들의 정치의식 그리고 서구문화의 전통 등에 대하여… 토머스 제퍼슨은 자기의 힘으로는 역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흑인 지도자 배니커의 호소 편지에 대하여 끝까지 무응답으로 침묵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독립선언문의 작성자였으며 버지니아주의 주지사와 제3대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6년 7월 4일에 그가 죽을 때까지 끝내 흑인노예 200명의 소유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어록을 남겨 놓았다.
《종교의 사제들은 마녀가 빛을 두려워 하듯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종교에 치명적 영향을 줄 과학적인 선구자들의 도래에 대해 사제들은 눈을 찡그리고 있다.》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서로 대립되어 있다. 긍정적인 평가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영국과의 전쟁을 하나님이 허락한 정의로운, 혁명적인 전쟁이라고 정당화한 공로자이다. 그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에도 이러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혁명적인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어떠한가?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식민지백인들의 꿈인 기득권적 이상주의와 계급사회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제퍼슨은 흑인노예여성으로서 28살 연하인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에게서 사생아를 출산케 했는데 제퍼슨이 죽은 후 DNA 검사를 통하여 그 사실이 판명됐다. 그 외에도 토머스 제퍼슨은 많은 여성들과의 염문을 일으켜 “대통령의 여성들”이라는 비판적인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며 이를 침해하는 데 대하여 분노를 느낀다.》라고 역설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토머스 제퍼슨은 200여 명의 흑인노예를 그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던 대농장주였다. 그는 또 흑인노예들에게 강제로 백인의 미국문화를 주입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큰 마찰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토머스 제퍼슨은 유명한 정치지도자로서 미국이 앞으로 노예제도의 문제로 인하여 참혹한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적 발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론으로 말을 하자면 미국의 독립전쟁에 있어서 흑인노예들은 전쟁에 참가하여 피 흘리는 가운데 자유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흑인노예들의 신분에는 근본적으로 하등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미국독립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1783년 7월 4일에 미국의 독립이 선포된 후에 미국의 면화재배는 10년 동안 8배나 증가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독립 후에도 흑인노예들의 강제노동은 여전히 계속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면화 뿐만 아니라 담배, 설탕, 쌀 등 주요 생산이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흑인노예무역은 감소가 아니라 오히려 아프리카로부터 더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
1783년에 미국이 독립을 선포한 후부터 1820년대까지 30여년 동안 미국에서 여전히 계속된 흑인노예매매는 연평균 7천9백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북쪽에서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결의를 하면 미국의 남쪽에서는 노예무역재개를 결의하여 흑인노예무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흑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인정하고 노예를 자연스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자들도 노예제도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또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도망한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쪽의 성직자들은 흑인노예들의 자유, 해방은 하늘나라 예루살렘에서나 성취될 수 있는 신앙의 문제이지 현실의 정치적 문제가 절대로 아니라고 설교하고 있었다.
남쪽의 기독교는 흑인노예들을 기독교화시킴과 동시에 《백인 신수설》을 주입시키면서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켰다.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부터 180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흑인노예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면서 흑인노예들은 백인들의 재산목록에 기록되고 있었다.
흑인의 결혼은 백인주인에게 재산의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법적으로 결혼등록이 허락되지 않았다. 흑인들에게는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도주하다 붙잡힌 흑인들에게는 이마에 각인을 새겨 누구나 쳐다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부활주일 등 종교적 축제일에는 흑인들에게 특별대우와 선물을 주면서 종교심을 주입시키고 있었다.
1800-1860년에 “비노예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백인노예주들이 제아무리 흑인노예제도를 영속시키려 했지만 시대적인 변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많은 흑인노예들이 생명을 내대고 백인주인으로 부터 도망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망한 노예들이 낮에는 낙엽으로 몸을 가리고 잠을 자고 밤에는 도보로 북쪽을 향하여 전진했다.
남쪽에서 켄터키주를 경유하여 오하이오주로 통하는 행로를 《지하철도》라는 암호로 흑인들끼리 통했다. 《지하철도》는 백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하지만 《흑인철도》는 흑인들에게는 무장봉기 같은 결사적인 흑인노예들의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욕망을 일으켰으며 노예로서 백인들에게 더 이상 굴복할 수 없다고 위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고 있었다. 버지니아를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는데 1800년 여름에 약 1,000명의 흑인들이 망치와 칼, 총 등으로 무장하고 리치먼드를 향하여 행진했다.
어쨌든 1800년대에 들어서서 60여년 동안에 미국의 남쪽과 북쪽에는 비노예흑인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시작하기 전인 1860년경에 이른바 “비노예흑인”의 수는 약 50만명이었다. 이들이 물론 완전한 자유인은 아직도 아니었는데 그들의 신분은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비노예흑인들은 항상 증명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며 번호가 매겨저 있으며 이 증명서는 주기적으로 변경된다. 또 어떤 사고나 범죄로 증명서가 취소되기도 한다.
물론 “비노예흑인”들은 총기를 소유할 수 없다. 비노예흑인은 교회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으나 그외의 모든 집회에 참석할 수 없다. 비노예흑인들에게 부과된 제한과 금지사항들이 허다한데 지면상 제한으로 이것으로 끝친다.
2. 미국 남북전쟁(1861-1865)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미국의 남북전쟁은 거의 400년만에 이르는 노예의 해방을 목표로하는 위대한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남북전쟁 발발의 이유와 원인은 다양했지만 근본성격은 말할 것도 없이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62만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고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 인명피해가 발생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1860년에 링컨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됐다.그 직후인 1861년 4월 12일에 남부의 11개주가 연방정부에서 탈퇴하여 북쪽의 5개주에 대항하여 싸운 미국의 내전을 “미국남북전쟁” 이라고 부른다.
1783년에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부터 1861년에 남북전쟁을 시작하기까지 78년 동안의 미국의 문제는 “흑인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사분오열되어 극한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의 기독교도 흑인노예들의 참전과 해방 문제에 대하여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등 주요 교파들이 서로 대립되고 분열되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문제도 역시 미국독립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찬반양론으로 대립되고 있었다. 북쪽의 극렬적인 노예페지론자들은 연방정부의 무기고를 약탈하여 무기를 들고 참전하기도 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른 찬송가,“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유명해진 좐 브라운(John Brown)은 흑인노예들을 무장시켜 대중봉기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정부군에 진압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결국에는 흑인노예들이 군대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전쟁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법규를 대통령이 승인하게 됐다. 그리하여 지원병으로 입대한 흑인노예들의 어머니, 아내, 자식들에게 자유인이 되는 특권이 부여됐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시종 북부군의 우세로 4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최종 승리의 날이 불과 2개월도 되기 전인 1865년 4월 14일에 남쪽의 흑인노예주의 지지론자인 존 부스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런데 1865년 5월 4일에 남부군의 주력부대가 북부의 셔먼 장군에게 항복했으며 또 남부연합의 대통령이 1865년 5월 10일에 체포됐다. 남부대통령이 체포됨에 따라 모든 남부의 군지휘관들은 줄줄이 항복을 했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1865년 5월 10일까지 4년 동안 벌어졌으며 결국 남군의 패전으로 미국전역에서 흑인노예제도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승리를 바로 한 달을 앞두고 죽은 것은 미국의 흑인노예들에게 큰 춛격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1863년 11월 19일에 그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역설했다. 남북전쟁의 승리는 모든 인간의 자유의 기반을 확장하는 연방정부의 재건을 위한 위대한 진리의 터득이라고 밝혔다.
이 지구상 어느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미국에서 백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중요한 소속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정체성과 충섬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링컨 대통령의 최대의 정치철학이었다. 북부군의 남북전쟁 승리로 인하여 미국의 흑인노예들의 미국에 대한 신념이 강화된 것은 극히 다행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승리를 노예해방전의 승리라고 생각하며 흑인들은 자신의 애국심과 연결시켜 낙관적이었다. 자유는 흑인들의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부지런함과 정직함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를 주장하는 흑인단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정부 차원의 “해방사무국”이 창설되어 총 2,400만명의 해방된 흑인들에게 긴급 구호사업을 추진했다. 총 4,000개의 학교를 신설하여 노예출신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창기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인과 백인 사이의 상호신뢰는 성공보다 실패로 전향되고 있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해방사무국"의 역할을 반대하고 있었다.
남부백인들은 흑인들을 향하여 Mr. Mrs. 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부백인들의 주정부는 해방흑인들에 대한 “흑인단속법”을 창설하여 소멸한 흑인노예법을 대신하여 흑인들을 여전히 하인으로 취급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데도 남쪽 주정부들은 반대했다.
남쪽의 백인들이 흑인문제에 대하여 가장 반대하는 백인조직은 1865년에 테네시 주에서 창설된 KKK (ku klux Klan)단이었다. 이 단체는 주로 자신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흑인들을 붙잡아 채찍질하고 몰매를 가하는 등 폭력단체이며 흑인과 친하게 지내는 백인들에게도 폭행을 한다. 모든 법원의 판결은 백인들에게 유리하고 흑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이 1800-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됐다.
결론으로 짧게 표현하면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흑인노예제도가 사라졌다고 하는 낙관적인 위대한 미국에 대한 환상은 1865-1900년 동안에 《실망의 세월》로 급변하고 말았다. 1800년대가 끝나고 1900년대를 맞이하는 세월 속에서 미국의 흑인들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힘든 흑인들의 삶에 대한 역사의식은 지칠줄 모르고 어려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가 다시 도래하기 위하여 지칠줄 모르고 있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해악적인 것은 인종주의라고 하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고대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리스, 이집트의 인종주의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지난 400년 역사 동안에 미국의 인종주의 망령을 단순히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말이 막히고 만다. 타인종을 이처럼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길고 긴 미국의 인종주의는 사악한 죄악 중의 죄악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상에서 미국이 400년 동안 조직적으로 인종주의 속에서 사람을 학살한 역사는 오늘 미국의 시민이 된 한 사람 으로서 생각할수록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과학적으로 쓸모가 없고 인륜적으로 사악한 개념이며 정치적으로 몰락을 자초하는 악행이 될 뿐이다. 오늘날 제3세계를 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군사적 위협은 400년 동안 지속해 온 인종주의적 악행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늘의 미국의 침략적인 인종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제3세계 국가들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불순세력을 능히 짓부술 수 있는 자주권 수호의 전면적인 대결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북조선의 광명성 3호 2호기가 그 위력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면서 오늘도 지구 궤도를 변함없이 달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된다.
1400년대에 시작한 흑인노예무역이 1700년대에 들어서서 흑인노예의 수가 너무 급증하여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비율이 너무 높은 것은 농업생산량에는 큰 이득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미국 식민지에서 흑인노예의 수의 비율이 과다해지면서 자연히 백인들에게는 심리적으로 위협이 되고 있었다.
1775년에 있어서 버지니아와 조지아 등지에서 총인구 3만3천명 가운데 절반 가량인 1만5천명이 흑인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 수가 가장 적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백인인구 7만명에 흑인노예의 수가 2만5천명 정도이었다.
미국의 북부지방에서는 흑인노예들이 농업이 아니라 공장 숙련공으로 일을 했다. 그런데 흑인노예들이 여러가지 수공업 기술에 숙달하여 유능한 기술자들이 되고 있었다. 뉴잉글랜드지방에서는 고기잡이, 고래잡이에 선원으로 활약하여 탁월한 공로를 세움으로써 흑인노예들이 백인들과 경쟁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을 하자면 미국의 남부나 북부에 있어서 공통적인 문제는 흑인노예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서 흑인노예들의 영향력이 급증하는 데 대하여 백인들의 마음 속에 은근한 염려가 점점 쌓이게 됐다는 것이다.
백인들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규정하고 있었다.
ㄱ. 흑인노예들을 통제하여 백인 1인당 흑인노예의 수를 6인으로 조정하고 제한한다.
ㄴ. 흑인노예들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할 때가 아니면 3명 이상 흑인노예가 모이는 것을 금지한다.
ㄷ. 장례식 등 공동행사에도 12명 이상 참석할 수 없도록 철저히 규정한다.
ㄹ. 불량한 흑인들에게 술을 판매하는 백인들이 반드시 엄한 처벌을 받는다.
ㅁ. 흑인노예들에게 글을 읽고 쓰는 교육을 금지한다.
ㅂ. 1771-74년 매사추세츠 주정부는 영국정부에게 흑인노예 대미수출을 금지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백인노예주들은 흑인노예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을 오히려 문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왕실 총독부는 이와 같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노예무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영국왕실이 거절한 이유는 노예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익 때문이었다.
위에 기술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미국땅에서 흑인노예무역이 400년 동안이나 벌어졌던 방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하여 “빙산의 일각”을 기록한 것 뿐이다. 지면상 제약으로 그 방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1. 미국 독립전쟁(1775-1783)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흑인노예들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법은 미국의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방법이었다. 1775년에 <미국식민지 현지군대>와 <영국본국에 속하는 영국군> 사이에 전개된 전쟁을 <미국독립전쟁>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이 백인들끼리 싸우는 독립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자유인이 되는 길을 삼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미국백인들이 흑인노예군에게 무기휴대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전쟁이 오래 계속되고 백인의 인력부족이 심각해짐으로써 미국은 흑인노예들을 군에 입대시켜 어쩔 수 없이 흑인들에게 무기를 주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미국백인군부의 일부에서는 <흑인노예들에게 무기를 주는 것은 노예들이 도주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며 강하게 반대를 주장함으로써 군부내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1776년에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인노예들의 군복무를 금지하는 법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독립전쟁이 3년이상 계속되면서 문제는 복잡해졌다. 영국군이 미국의 흑인노예를 돈을 주고 사들임으로써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서 흑인노예 3,000명을 1인당 $1,000에 사들였다. 흑인노예들이 전쟁 중에 성실히 복무하기만 하면 <$50와 자유>를 준다고 농장주들은 흑인노예들에게 약속을 하고 영국군에게 팔아 넘겼다. 남부 대농장주들은 흑인 1명에게서 $950의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한편 영국왕실은 영국군에 참전한 모든 흑인노예들은 자유인이 된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이 약속에 의하여 수만명의 흑인노예들이 영국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영국 왕실의 던모어 경이 축출됨으로 인하여 영국의 약속은 쓸모가 없이 되고 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3년에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은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14,000 명의 흑인노예들을 카나다 노바스코샤, 서인도 제도 그리고 아프리카 등 여러 곳에 있는 영국의 식민지로 끌고 갔다.
독립전쟁이 8년 동안이나 계속됨으로써 미국독립군은 흑인노예들을 입대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 했다. 그리하여 1778년부터 흑인노예들은 새롭게 휘날리는<성조기> 아래서 미국독립전쟁에 정정당당하게 참전하여 미국을 위해 싸웠다.
어쨌든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들의 사기는 높았다. 노예노동자였던 사람들이 비록 힘들고 위험한 군복무이기는 했지만 군복무 후에는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흑인노예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있게 될 보상금과 토지에 대한 기대로 고무되어 참전하고 있었다. 8년 동안 계속된 영국과 미국이 싸운 독립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독립선언문>을 대륙회의가 1776년 7월 4일에 승인함에 따라 아메리카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이 창건됐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 후에 버지니아 주지사 (1779-1781)와 미국의 제3대 대통령 (1801-1809)이 됐다.
미국독립전쟁의 승리는 흑인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 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붙잡아두는 부도덕성에 대하여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단체들은 교파들간에 경쟁적으로 흑인노예제도에 대한 비판과 시정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기독교는 정치적 변화에 대하여 선구자적 역할을 앞서서 담당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미국의 기독교는 다만 정치적 변화가 크게 발생한 후에 비로소 후속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흑인노예제도의 폐지와 자유부여에 대한 논쟁은 <미사여구>로 장식되고 있을 뿐 실제로 노예제도가 종식되지는 않았으며 험난한 갈 길이 여전히 멀고도 멀었다. 특히 미국은 주정부들이 제각기 법률을 제정하여 흑인노예문제를 취급하고 있었기에 미국의 통일된 법으로 흑인노예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득한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새로 독립된 미합중국에는 <대륙회의>와 각 주에 <주의회>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으로써 흑인노예에 대한 문제는 혼선을 이루고 있었다. <주의회>들이 이해타산에 얽매여 <대륙회의>의 결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주의회>가 건의하는 노예자유에 대한 결정을 <대륙회의>가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흑인노예에 대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주정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적 <주정부>들은 흑인노예제도를 끝까지 주장하여 극한대립을 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보면 미국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도마스 제퍼슨은 노예제도를 1800년 이후부터 완전히 금지하는 법령을 <대륙회의>의 법으로 1784년에 선포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7개주 중에서 6개 주가 반대했다.
1787년에 보다 더 보수적인 대표자들 55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미국헌법>을 입안했는데 이 법안은 간접적으로 노예제도가 그대로 계속할 것임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55명중 대다수가 법률가들이었는데 그들은 대지주, 노예무역업자, 제조업자, 해양업자 그리고 이자놀이업자들로서 이권에 종사하는 기업주들이었다. 이들이 제정한 <미국헌법>에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데 동의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810년에 비교적 개방주의적인 미국북부에 3만명의 흑인노예가 여전히 있었다. 1840년 까지도 1,000명 이상의 흑인노예가 북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에는 쌀과 면화 농장이 확대되면서 오히려 흑인노예제도가 더 확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백인들의 정치가 이렇게 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독립전쟁의 승리 후에 흑인민권운동 지도자들의 활약과 정치적 투쟁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흑인지도자들은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에 의거하여 <대륙회의>와 각 주 <주의회>들을 상대로 노예제도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흑인민권운동은 노포크에서, 내시빌에서, 뉴욕에서, 매사추세츠에서 그리고 동서남북 미국의 전역에서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자로 활약한 흑인은 독학으로 유명한 설계자가 되어 워싱턴시의 설계자로 임명된 흑인 벤저민 배니커(Benjamin Banneker)였다. 그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친히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오랫동안 짐승처럼 살아왔다는 것은 당신에게 너무나 확실하게 입증됐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확인하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간을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조금도 치우침도 없이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재능을 부여하신 데 대하여 저와 의견을 같이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히 편협한 사고방식을 버리시기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은 그때 당시의 아메리카의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지도자 벤저민 배니커의 호소를 묵살했다. 그때 당시의 사회구조, 막대한 면화공장주들의 힘, 역사 깊은 흑인노예무역제도, 남북의 아메리카의 엘리트들의 정치의식 그리고 서구문화의 전통 등에 대하여… 토머스 제퍼슨은 자기의 힘으로는 역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흑인 지도자 배니커의 호소 편지에 대하여 끝까지 무응답으로 침묵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독립선언문의 작성자였으며 버지니아주의 주지사와 제3대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6년 7월 4일에 그가 죽을 때까지 끝내 흑인노예 200명의 소유주로 남아 있었다. 그는 그의 유명한 어록을 남겨 놓았다.
《종교의 사제들은 마녀가 빛을 두려워 하듯 과학의 발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종교에 치명적 영향을 줄 과학적인 선구자들의 도래에 대해 사제들은 눈을 찡그리고 있다.》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서로 대립되어 있다. 긍정적인 평가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영국과의 전쟁을 하나님이 허락한 정의로운, 혁명적인 전쟁이라고 정당화한 공로자이다. 그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때에도 이러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혁명적인 정신을 강조한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토머스 제퍼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어떠한가?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식민지백인들의 꿈인 기득권적 이상주의와 계급사회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제퍼슨은 흑인노예여성으로서 28살 연하인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에게서 사생아를 출산케 했는데 제퍼슨이 죽은 후 DNA 검사를 통하여 그 사실이 판명됐다. 그 외에도 토머스 제퍼슨은 많은 여성들과의 염문을 일으켜 “대통령의 여성들”이라는 비판적인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사람은 신 앞에 평등하며 이를 침해하는 데 대하여 분노를 느낀다.》라고 역설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토머스 제퍼슨은 200여 명의 흑인노예를 그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던 대농장주였다. 그는 또 흑인노예들에게 강제로 백인의 미국문화를 주입시키는 과정에 있어서 큰 마찰을 일으키는 장본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토머스 제퍼슨은 유명한 정치지도자로서 미국이 앞으로 노예제도의 문제로 인하여 참혹한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적 발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론으로 말을 하자면 미국의 독립전쟁에 있어서 흑인노예들은 전쟁에 참가하여 피 흘리는 가운데 자유에 대한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흑인노예들의 신분에는 근본적으로 하등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미국독립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1783년 7월 4일에 미국의 독립이 선포된 후에 미국의 면화재배는 10년 동안 8배나 증가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독립 후에도 흑인노예들의 강제노동은 여전히 계속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면화 뿐만 아니라 담배, 설탕, 쌀 등 주요 생산이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흑인노예무역은 감소가 아니라 오히려 아프리카로부터 더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
1783년에 미국이 독립을 선포한 후부터 1820년대까지 30여년 동안 미국에서 여전히 계속된 흑인노예매매는 연평균 7천9백만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북쪽에서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결의를 하면 미국의 남쪽에서는 노예무역재개를 결의하여 흑인노예무역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흑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인정하고 노예를 자연스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쪽의 기독교인들은 주장하기를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자들도 노예제도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또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도망한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충고했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쪽의 성직자들은 흑인노예들의 자유, 해방은 하늘나라 예루살렘에서나 성취될 수 있는 신앙의 문제이지 현실의 정치적 문제가 절대로 아니라고 설교하고 있었다.
남쪽의 기독교는 흑인노예들을 기독교화시킴과 동시에 《백인 신수설》을 주입시키면서다음과 같이 교육을 시켰다.
질문: 누가 흑인에게 주인을 보내주셨는가?
답: 하느님깨서 보내 주셨습니다.
질문: 네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누가 말씀하시는가?
답: 하느님이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부터 1800년대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흑인노예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면서 흑인노예들은 백인들의 재산목록에 기록되고 있었다.
흑인의 결혼은 백인주인에게 재산의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법적으로 결혼등록이 허락되지 않았다. 흑인들에게는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도주하다 붙잡힌 흑인들에게는 이마에 각인을 새겨 누구나 쳐다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부활주일 등 종교적 축제일에는 흑인들에게 특별대우와 선물을 주면서 종교심을 주입시키고 있었다.
1800-1860년에 “비노예시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백인노예주들이 제아무리 흑인노예제도를 영속시키려 했지만 시대적인 변혁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많은 흑인노예들이 생명을 내대고 백인주인으로 부터 도망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망한 노예들이 낮에는 낙엽으로 몸을 가리고 잠을 자고 밤에는 도보로 북쪽을 향하여 전진했다.
남쪽에서 켄터키주를 경유하여 오하이오주로 통하는 행로를 《지하철도》라는 암호로 흑인들끼리 통했다. 《지하철도》는 백인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하지만 《흑인철도》는 흑인들에게는 무장봉기 같은 결사적인 흑인노예들의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욕망을 일으켰으며 노예로서 백인들에게 더 이상 굴복할 수 없다고 위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고 있었다. 버지니아를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는데 1800년 여름에 약 1,000명의 흑인들이 망치와 칼, 총 등으로 무장하고 리치먼드를 향하여 행진했다.
어쨌든 1800년대에 들어서서 60여년 동안에 미국의 남쪽과 북쪽에는 비노예흑인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시작하기 전인 1860년경에 이른바 “비노예흑인”의 수는 약 50만명이었다. 이들이 물론 완전한 자유인은 아직도 아니었는데 그들의 신분은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첫째, 육군이나 해군에 군복무를 통해 획득한 비노예흑인의 신분
둘째, 도망의 방법으로 획득한 비노예흑인의 신분
셋째, 계약의 만료로 획득한 비노예흑인의 신분
네째, 백인과 흑인의 혼혈로 출생한 “몰라토”의 신분
비노예흑인들은 항상 증명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며 번호가 매겨저 있으며 이 증명서는 주기적으로 변경된다. 또 어떤 사고나 범죄로 증명서가 취소되기도 한다.
물론 “비노예흑인”들은 총기를 소유할 수 없다. 비노예흑인은 교회에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으나 그외의 모든 집회에 참석할 수 없다. 비노예흑인들에게 부과된 제한과 금지사항들이 허다한데 지면상 제한으로 이것으로 끝친다.
2. 미국 남북전쟁(1861-1865)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미국의 남북전쟁은 거의 400년만에 이르는 노예의 해방을 목표로하는 위대한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남북전쟁 발발의 이유와 원인은 다양했지만 근본성격은 말할 것도 없이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62만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고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 인명피해가 발생한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1860년에 링컨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됐다.그 직후인 1861년 4월 12일에 남부의 11개주가 연방정부에서 탈퇴하여 북쪽의 5개주에 대항하여 싸운 미국의 내전을 “미국남북전쟁” 이라고 부른다.
1783년에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부터 1861년에 남북전쟁을 시작하기까지 78년 동안의 미국의 문제는 “흑인노예해방” 문제를 놓고 사분오열되어 극한대립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의 기독교도 흑인노예들의 참전과 해방 문제에 대하여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등 주요 교파들이 서로 대립되고 분열되고 있었다.
남북전쟁에 흑인노예들의 참전 문제도 역시 미국독립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찬반양론으로 대립되고 있었다. 북쪽의 극렬적인 노예페지론자들은 연방정부의 무기고를 약탈하여 무기를 들고 참전하기도 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른 찬송가,“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유명해진 좐 브라운(John Brown)은 흑인노예들을 무장시켜 대중봉기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정부군에 진압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결국에는 흑인노예들이 군대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전쟁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법규를 대통령이 승인하게 됐다. 그리하여 지원병으로 입대한 흑인노예들의 어머니, 아내, 자식들에게 자유인이 되는 특권이 부여됐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시종 북부군의 우세로 4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최종 승리의 날이 불과 2개월도 되기 전인 1865년 4월 14일에 남쪽의 흑인노예주의 지지론자인 존 부스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런데 1865년 5월 4일에 남부군의 주력부대가 북부의 셔먼 장군에게 항복했으며 또 남부연합의 대통령이 1865년 5월 10일에 체포됐다. 남부대통령이 체포됨에 따라 모든 남부의 군지휘관들은 줄줄이 항복을 했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1865년 5월 10일까지 4년 동안 벌어졌으며 결국 남군의 패전으로 미국전역에서 흑인노예제도가 폐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승리를 바로 한 달을 앞두고 죽은 것은 미국의 흑인노예들에게 큰 춛격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1863년 11월 19일에 그의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역설했다. 남북전쟁의 승리는 모든 인간의 자유의 기반을 확장하는 연방정부의 재건을 위한 위대한 진리의 터득이라고 밝혔다.
이 지구상 어느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미국에서 백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중요한 소속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정체성과 충섬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링컨 대통령의 최대의 정치철학이었다. 북부군의 남북전쟁 승리로 인하여 미국의 흑인노예들의 미국에 대한 신념이 강화된 것은 극히 다행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의 승리를 노예해방전의 승리라고 생각하며 흑인들은 자신의 애국심과 연결시켜 낙관적이었다. 자유는 흑인들의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부지런함과 정직함으로 이해하려는 노력를 주장하는 흑인단체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정부 차원의 “해방사무국”이 창설되어 총 2,400만명의 해방된 흑인들에게 긴급 구호사업을 추진했다. 총 4,000개의 학교를 신설하여 노예출신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창기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인과 백인 사이의 상호신뢰는 성공보다 실패로 전향되고 있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해방사무국"의 역할을 반대하고 있었다.
남부백인들은 흑인들을 향하여 Mr. Mrs. 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부백인들의 주정부는 해방흑인들에 대한 “흑인단속법”을 창설하여 소멸한 흑인노예법을 대신하여 흑인들을 여전히 하인으로 취급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흑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데도 남쪽 주정부들은 반대했다.
남쪽의 백인들이 흑인문제에 대하여 가장 반대하는 백인조직은 1865년에 테네시 주에서 창설된 KKK (ku klux Klan)단이었다. 이 단체는 주로 자신들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흑인들을 붙잡아 채찍질하고 몰매를 가하는 등 폭력단체이며 흑인과 친하게 지내는 백인들에게도 폭행을 한다. 모든 법원의 판결은 백인들에게 유리하고 흑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이 1800-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됐다.
결론으로 짧게 표현하면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흑인노예제도가 사라졌다고 하는 낙관적인 위대한 미국에 대한 환상은 1865-1900년 동안에 《실망의 세월》로 급변하고 말았다. 1800년대가 끝나고 1900년대를 맞이하는 세월 속에서 미국의 흑인들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힘든 흑인들의 삶에 대한 역사의식은 지칠줄 모르고 어려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가 다시 도래하기 위하여 지칠줄 모르고 있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해악적인 것은 인종주의라고 하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고대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그리스, 이집트의 인종주의는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지난 400년 역사 동안에 미국의 인종주의 망령을 단순히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말이 막히고 만다. 타인종을 이처럼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길고 긴 미국의 인종주의는 사악한 죄악 중의 죄악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상에서 미국이 400년 동안 조직적으로 인종주의 속에서 사람을 학살한 역사는 오늘 미국의 시민이 된 한 사람 으로서 생각할수록 안타까움과 분노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과학적으로 쓸모가 없고 인륜적으로 사악한 개념이며 정치적으로 몰락을 자초하는 악행이 될 뿐이다. 오늘날 제3세계를 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군사적 위협은 400년 동안 지속해 온 인종주의적 악행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늘의 미국의 침략적인 인종주의에 대처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제3세계 국가들이 자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불순세력을 능히 짓부술 수 있는 자주권 수호의 전면적인 대결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북조선의 광명성 3호 2호기가 그 위력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면서 오늘도 지구 궤도를 변함없이 달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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