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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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순 작성일07-07-09 00: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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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 재미동포서부지역연합회 여성분과 위원장 특별기고
재미동포여성들로 구성된 ´평화를 사랑하는 여성들´(평사녀:회장 조명지 목사, 동부회장:이금순, 서부회장:김영순) 회원들이 최근 이북을 방문해 『통일나무심기』행사를 통해 과일나무와 일반나무 3천여 그루를 심고 돌아왔다. |
평사녀 회원들이 지난 4월 중순 평양을 방문해 시내에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지대(단군릉 근처)에 자리한 애국림 동산에서 <통일나무심기> 행사를 가졌다. |
평사녀 회원들이 <통일나무심기>행사를 통해 심어 놓은 나무들 |
북한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북한 동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들 중에 여성을 주제로 한 것들이 많다. 그중에도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는 남한에도 많이 알려진 노래이다. 일절은 가정의 꽃, 이절은 사회의 꽃, 삼절은 나라의 꽃으로 여성을 찬양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여성은 꽃이라네" 라는 가사를 보고 남한의 일부여성들이 북한은 아직도 여성을 하나의 장식품으로 보는가 하며 많은 비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북한의 실정과 그곳 사람들의 정서를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생각된다. 북한에서 여성을 꽃이라고 표현한 것은 생활을 아름답고 윤기나게 하는 것 외에도 열매를 맺어 종자를 생산하고 키우는 고귀한 창조의 근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안내한 여성안내원은 북한에서 전반적으로 여성은 가장 큰 창조자의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창조 중에 가장 숭고한 창조는 인간의 창조인데 이는 단지 출산의 의미보다 더 높은 의미로 이해됩니다. 모든 인간이 처음 만나는 것이 어머니이고 첫 스승이 또한 어머니가 아닙니까". 이 안내원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창조적인 역할을 강조하면서 한석봉의 어머니, 안중근의 어머니, 뉴톤의 어머니, 등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훌륭한 어머니들을 언급하였다. 이 여성은 "우리는 남편이 죽으면 밥술이 안 올라가고 자식이 죽으면 눈이 멀어진다고들 합니다"라고하며 자신들의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 북한은 이미 1946년에 남녀평등권 법을 제정하였고 매춘을 엄금하였다. 사범학교 출신인 이산가족 여성 한 분은 북한에서 중학교 정도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매춘>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 쓰여지지 않는 고어로 되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기생>이라는 말도 기껏 논개나 계월향 정도의 애국적인 기생의 이름 밖에는 아는 게 없다고 했다. 내가 책방에서 본 한 작은 조선어사전에는 정말로 <매춘>이란 단어가 없었다. 이 여성은자본주의 사회에서 문제 삼는 "여성의 상품화"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여성은 또한 "젊은이들은 칠거지악이 뭔지 모르지만우리는 질투를 유발하는 사회관계가 문제인 것으로 보고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씁니다." 라고 했다. 북한에서 사회활동으로서의 첫 여성조직은 김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여사의 <반일부녀회>를 들었고 1930년대부터 시작된 국방위원장의 어머니이신 김정숙여사의 무장투쟁을 들었다. 나라를 찾고 국가주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이 되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낡은 사상과 문화의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여성의 조직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청과 김일성주석의 가르침 속에서 이들의 여성조직은 조국광복을 위한 애국투쟁과 결부되어 활동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김정숙여사의 활동은 애국투쟁의 가장 높은 단계로 보는 무장투쟁에 망라되어 나라의 광복과 새 나라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인하여 북한에서는 이를 모든 여성의 역할모델로 삼고 있다. 해방 후에는 여성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조선민주여성동맹>이 창설되었고 이는 새 시대에 여성의 사회참여와 낡은 문화의 구속에서 자신들을 해방하는 운동에 앞장서 왔다고 한다. 여성들의 참신하고 열성적인 활동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은 "여성의 말을 안 듣는 건 병신이나 위선자 뿐" 이란 유행어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후 북한의 노동법은 이들의 활약에 걸맞게 동일한 노동에 한해서 동일한 보수를 지급하도록 명시하고 임산모와 다산모에게 유급휴가를 주고 노동시간을 일반인의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할 때 6-4시간으로 줄여주도록 하고 고열노동과 유해노동을 금하도록 법령으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이북의 산전 산후 휴가는 150일로 정해져 있다. 전국의 사범대학의 여성비율이 70%이고 농사간부와 교육간부는 법으로 여성들을 더 많이 기용하도록 정하고 있다고 한다. 전국의 농장관리책임자는 여성이 반 이상이라고 했다. 대학입학과 여성간부의 비율도 법으로 정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남편의 조카들 중에 황해도에서 리관리위원장(리단위의 집단농장의 책임자)을 하는 분이 있다. 그 조카여성은 전국의 관리위원장의 절반이상이 여성이라고 했고 여성들이 농사와 교육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다.
여성들에 대한 북한 인민들의 자랑은 끝이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성에 대한 배려와 관심 또한 지대하게 보였다. 4월16일자 신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산후 후유증방지에 산꿀이 좋다하여 산원에 산꿀과 동해바다 미역을 보냈다는기사가 실려 있었다. 신문에 보도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움직임은 북한의 정책의 우선순위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척도로 된다.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전쟁위협으로 목을 조릴 때 위원장은 군부대 방문을 거의 매일 한 것으로 노동신문은 보도했었다. 국방위원장이 여성들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노동신문에 나온 것은 북한여성들에게 큰 자긍심을 주는 것이며 여성정책이 국가정책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위원장이 처음 방문한 곳이 신의주 화장품공장이었다고 했다. 국방위원장께 지배인이 자기공장의 화장품의 질이 좋아서 수출하여 돈도 벌고 있다고 보고했다. 국방위원장은 여기에서 고난의 행군시기에 누구보다 더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한 여성들을 위하여 질 좋은 화장품을 수출하지 말고 여성들에게 모두 우선적으로 공급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위원장의 두 번째 방문은 박천 견직공장이었는데 이는 이름 없는 산골공장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위원장이 공항에 갈 계획이 원래 없었다고 했다. 그때 북한동포들의 김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그가 민주화투쟁을 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미군철수도 원치 않고 통일도 원치 않는 듯한 태도였고 국가보안법도 폐지하려하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비추어졌지 때문이었다. 그래도 노구를 끌고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대통령인데 서먹하게 맞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국방위원장이 공항에 나왔다고 했다. 그때 연도에서 환영하던 여성들이 6월인데도 아직 비로도 겨울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그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 견직공장에 가서 우선적으로 비단을 인민들에게 공급하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이후 결혼 신부와 환갑여성들에게 비단옷을 보장하고 상점에서도 비단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년 만에 본 이번 방문에서 여성들이 입은 조선옷이 색깔, 천, 그리고 디자인에 있어서 더 화려하고 무척 다양한 것에 우리 방문객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선군시대에 와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최고로 높아졌고 위원장이 아무리 바빠도 현지지도의 길에 여성중대는 꼭 방문한다고 한다. 한번은 감나무중대를 찾았을 때 감이 열리면 꼭 오시라고 말한 여성의 얼굴이 추위에 튼 것을 보고 간부들을 나무랐다고 했다. 이후에 여성군인들에게 약 크림을 우선적으로 직송하는 제도가섰다고 했다. 위원장이 군부대를 방문하면 군인가족들은 의기가 충천하여 예술소조공연을 하며 경연대회도 열고 하는데 이런 경연대회의 경쟁력은 무척 높다고 했다. 군관에 대한 국가적인 기대와 사랑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군관과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내가 만난 북한사람들은 여성들 얘기만 나오면 그들의 역할과 일성과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조시간이 짧은 한반도의 북쪽 자강도에서 불가능하다고생각한 세벌농사(삼모작)을 처음 성공시킨 사람이 여성이고 녹음테이프와 영상을 영구보존하는 기술을 개발한 사람도 여성이다. 국제무대에서 상을 받아오는 여성의 수가 많아지자 남성의 꽃다발부대가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미국이 걸프전쟁을 일으키고 북한을 전쟁공포로 몰아갈 때 북은 자신의 방어력을 보이기 위하여 걸프전에서 미국이 쓴 무기보다 더 수준 높은 무기를 쏘아보였는데 이 포수가 또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북한에 임업을 일으켜야할 시대적 과업을 위하여 많은 청년들이 깊은 산골의 산판으로 이주를 했다고 했다. 그들의 애국심은 뜨거웠고 자연은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은 서먹하고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많은 처녀들이 "남자들 만 당사업을 하는가 우리도 간다"하며 그 곳에 가기를 지원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남녀가 모여들면 일에 지장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여성들이 오자 그 심심산판에 노래 소리 웃음소리로 흘러나오고 생산량도 훨씬 높아졌다고 했다. 그래서 "여성이 없는 사회는 기름 없는 기계와 같다"는 말들을 한다고 했다. 이런 자랑과 함께 정기풍교수는 법적으로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그 법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도시와 시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그 간격을 극복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지금껏 북한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통하여 북한 여성들이 어떻게 보람찬 생활을 하며 사회발전의 한 수레바퀴로서 어떻게 가정과 나라를 떠밀고 나가는가를 살펴보았다. 나는 북한 여성들을 만나면서 남한을 선진국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열심히 희생하며 노력해온 남한 여성들의 힘과 끈기를 생각해보았다. 이제 조국이 통일되어 한나라가 되면 남북의 여성들의 이러한 힘과 노력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후대는 전쟁을 걱정하지 않고 세계무대에서 인류의 지향점을 향하여 당당하게 세상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것은 나의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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