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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미국> 6. 친미를 위해 독재에 눈감은 미국의 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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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동기 작성일15-09-15 21:1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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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미국> 6. 친미를 위해 독재에 눈감은 미국의 위선

 

 

글쓴이 : 곽동기 

 

 

미국은 스스로를 “세계의 경찰”이라 칭하며 그들의 대외정책을 정당화합니다. 1947년 미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보안법(National Security Act)에 서명하고 중앙정보국 (CIA : Central Intelligence Agency)를 창설해 음성적인 대외정책개입을 전면화하였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CIA의 공작은 미국의 세계패권을 지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미국은 해외 곳곳에 친미정권을 세우는 공작을 자행하였고 해외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친미인사들의 독재행각에 눈감았습니다.

 

그리하여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인민을 위하고 인민에 의거한다고 주장하던 사회주의 성향의 정권들은 미국식 자유주의와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같이 독재정권으로 규정당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를 징벌한다며 독재의 철퇴를 휘두른 친미정권들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한 일부 과오는 있지만, 미국의 후원을 업어 나라를 발전시킨 공이 더 크다는 해괴한 논리로 집권을 정당화하려는 역설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친미독재자들이 활개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패권전략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정말로 많고 많은 친미독재자를 육성하고 이들을 침투시켜 미국 주도의 세계패권을 구축하였습니다. 

 

 

 

 

도미니카의 살인자 트루히요

 

중남미 일대에서 악명을 떨친 독재자로 손꼽히는 인물 가운데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31년간 군림한 라파엘 트루히요(1891-1961)가 있습니다. 트루히요는 1930년부터 1961년에 암살 당할 때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을 최악의 폭정으로 유린했습니다.

 

미국은 1904년, 먼로 독트린에 따라 도미니카에서 유럽 채권단을 배제하고 미국의 절대적 지배력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1916년,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도미니카를 점령해 내정 간섭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젊은 시절부터 미국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미국 해병대의 훈련을 받은 육군사령관 트루히요는 1930년,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도미니카의 권력을 탈취하였습니다.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에 독재정권을 구축하였으며 미국의 후원 아래 도미니카 민중들을 제멋대로 억압하였습니다. 

 

트루히요는 193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미니카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자신의 정당인 도미니카당을 도미니카 공화국 유일의 합법 정당으로 삼고 모든 공무원들로부터 급여의 10%를 도미니카당에 기증하도록 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마련했습니다.

 

1930년 대통령에 당선된 트루히요는 반체제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전면적인 테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트루히요 본인이 참여하기도 했던 폭력 조직인 "42단"을 이끄는 파울 리노는 악명 높은 "죽음의 차"에 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을 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트루히요는 보다 철저한 독재를 위해 군정보부 SIM(Servicio de Inteligencia Militar)를 만들어 정보 수집은 물론 도미니카의 개혁 인사들과 트루히요의 경쟁 정치인들을 투옥하고 고문해 살해하였습니다. 트루히요는 군정보부로 언론을 통제하였고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였습니다. 마치도 한국 중앙정보부의 근원을 보는 듯 합니다.

 

 

 

 

일례로 트루히요는 미 콜롬비아 대학의 헤수스 갈린데스(Jesús Galíndez)교수가 1953년, 트루히요를 비판하는 <트루히요의 치세>라는 책을 출판하자 갈린데스를 미국 뉴욕에서 비행기로 납치해 도미니카로 끌고 와 처형하였습니다. 

 

트루히요와 그의 가족들은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대규모 가축 농장과 토지를 취득했으며 고기와 우유, 소금, 설탕, 담배, 목재사업도 독점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대통령이 삼성재벌총수를 겸임한 꼴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반공주의 정책을 펴는 트루히요와 협력하였습니다. 사실 트루히요는 1941년 12월 11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손잡고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전후에는 미국을 따라 유엔의 창립국이 되었습니다.

 

그는 친미정책으로 중남미의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들과 마찰을 일으켰습니다. 트루히요는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니카라과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등의 독재자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는 통치 말기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던 1961년 5월 30일, 고향 산크리스토발의 농장을 달리던 도중 무장괴한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암살당했습니다.

 

 

이집트를 철권통치한 무바라크

 

 

친미독재자는 중동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이스라엘과의 중동전쟁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던 이집트는 1981년 호스니 무바라크(1928-) 대통령에 의해 군부독재의 터널을 경험합니다.

 

이집트 공군 출신인 무바라크는 젊은 시절 나세르 대통령에게 인정받아 1969년에 공군대장으로 승진하고 공군 참모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73년, 이스라엘과의 욤 키푸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얻은 인기로 부통령에 올랐다가, 1981년 사다트가 암살당하자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무바라크는 1982년에 국민민주당 총재가 된 이후, 약 30년간 이집트를 철권 통치하였습니다. 무바라크는 먼저 친미, 친이스라엘 노선을 전면화하였습니다. 소련이 붕괴하자 무바라크의 친미 노선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무바라크는 심지어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 영국과 함께 다국적군에 참여해 이라크를 공격하며 중동국가들의 비난을 한 몸에 샀습니다. 무바라크는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강도높게 비난하며 이집트에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적극적으로 단속, 야권탄압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무바라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을 재촉하면서,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측을 압박하였다고 합니다.

 

미국은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과 싸우던 이집트를 친미국가로 길들이는데 원조를 활용하였습니다. 미국의 대이집트 원조는 최근까지도 지속되었는데, 2013년에 책정된 미국의 이집트 원조 예산은 총 14억8000만 달러(약 1조6500억원) 규모로, 그 중 13억 달러가 군사부문에 몰려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이집트 원조가 본격화된 것은 1979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국교가 수립된 이후입니다.

 

미국의 원조는 무바라크를 후원하던 원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2년 2월 27일 <러시아 소리방송>에 따르면, 미국은 이집트 무바라크가 사임한 후 이집트에 대한 원조를 1/3으로 줄인다고 발표했다고 합니다. 미국이 무바라크를 얼마나 유용하게 여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장기집권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한국 외대 서정민 교수는 2011년 1월, <CBS 라디오> 방송에서 이집트는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만 유권자 등록을 해 주므로 대통령 선거에서 99%의 지지율이 나온다고 하며 심지어 투표도 경찰서에서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무바라크는 자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체포할 때에는 그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가족들을 구금해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무바라크에 반대하면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고, 무바라크에 충성하는 이들만 투표를 하기 때문에 무바라크는 30년간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무바라크도 결국 민중봉기로 감옥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2007년 미국발 경제위기 이후, 중동지방의 식량난으로부터 촉발된 2011년의 중동민중봉기가 이집트를 강타하였습니다. 무바라크는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850여명의 이집트 민중을 학살하였지만 민중의 거센 투쟁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오바마행정부의 이집트 특사 와이즈너는 유럽 외교관들에게 “무바라크가 권력을 유지하는 게 핵심적(crucial)”이라면서 무바라크를 대놓고 후원하였지만 분노한 이집트 민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인 2013년, 이집트 군부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민중봉기 끝에 집권한 야권성향의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축출했습니다. 이는 마치 4.19 혁명 이후 5.16 쿠데타를 보는 듯 합니다. 쿠데타에 반발하는 이집트 민중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부는 무려 1300여명의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을 감옥에 투옥하고 독재자 무바라크를 석방했습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 때에도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부대변인은 이집트에 대한 연간 13억달러의 군사원조를 중단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답을 회피하였으며 현 사태를 쿠데타로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고 역시 답변을 회피했다고 합니다.

 

 

아옌데 민주정권을 교살한 칠레 피노체트

 

 

9월 11일은 미국인들에게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11 테러로 유명하지만, 칠레인들에게는 냉혈한 독재자인 피노체트가 군부쿠데타를 벌여 아옌데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원래 칠레는 사회복지정책으로 주목받던 나라였습니다. 1970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광범위한 칠레민중들을 위한 사회복지정책을 내세워 대선에서 36.62%로 당선되어 남미 최초의 사회주의 계열정당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이라는 정책을 내세워 칠레의 구리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고, 80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국유화해 칠레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후생을 증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칠레 구리광산에서 자원을 캐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미국자본은 아옌데 정권의 민주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칠레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는 1973년 9월 11일, 칠레 군 지휘관 다수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산티아고의 대통령 관저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전두환 신군부의 하나회를 보는 듯 합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으로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전하며 AK-47 소총으로 직접 쿠데타 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1998년 공개된 미 CIA 기밀문서들은 미국이 아옌데 정권 초기부터 쿠데타까지 수많은 공작을 주도하며 피노체트 군에게 무기 등을 지원한 사실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아옌데의 민주개혁을 무효화하고 칠레에 독재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피노체트는 미국의 배경을 업고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인사들, 아옌데 정부의 공직자들을 강도높게 탄압하였습니다. 피노체트는 쿠데타가 성공하자마자 아옌데가 국영화한 기업과 광산을 민영화하고 자본의 규제를 철폐하였습니다.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피노체트도 대통령 직속 비밀경찰인 '국가정보국(DINA)'을 창설하여, 해외망명인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에게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이는가 하면 여성을 강간하고 신체를 불로 지지는 고문을 가하며 칠레 민주주의의 싹을 잘랐다고 합니다. 심지어 피노체트는 쿠데타 직후 칠레 수도 산티아고 축구장에 약 5000여명의 진보인사들, 저항하는 시민들을 가두어 놓고 그들을 모두 사살하는 광기를 부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두환 신군부의 5월 광주학살도 피노체트의 광기를 보고 배운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칠레 정부의 과거사조사결과에 따르면 피노체트에 의해 17년간 약 3197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학살당하고, 1197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수만명이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칠레민중들은 피노체트 정권에 맞섰습니다. 봉기한 민중들은 모진 탄압 속에서도 피노체트 낙선운동을 벌여 1986년 레이건 정부 당시, 미국은 피노체트의 미국 망명을 검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4.19 혁명의 불길에서 이승만을 하와이로 피신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피노체트는 1988년 대통령 집권 연장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와 이듬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패배하여 1990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아옌데 민주정권을 쿠데타로 교살한 피노체트는 미국을 등에 업고 4.19 혁명을 5.16 쿠데타로 무산시킨 박정희와 비교되곤 합니다. 그러나 산티아고에서 수천의 시민을 학살한 그가 결국에는 민중의 투쟁에 의해 쫓겨났다는 점에서는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집권했다가 87년 6월 항쟁의 철퇴를 맞고 물러나야했던 전두환 신군부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디니스타에 무너진 니카라과 소모사

 

 

미국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간섭에 반대한다는 먼로선언 이후 도미니카 뿐 아니라 니카라과, 파나마 등 중남미의 여러 국가들에 정치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이 지역에 친미정권을 이식하고 이들을 후원하였습니다.

 

니카라과에는 소모사 정권이 독재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1937년,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를 촉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국왕이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를 대통령으로 추대했지만 그는 이름만 대통령으로 바꾼 채 연임하면서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계속 행사했습니다. 여느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그의 대통령 행세도 그야말로 무늬만 공화정이었던 셈입니다.

 

그의 아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1925-1980)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수료하였으며 미국 출신의 호프 포르토카레로와 결혼해 군 고위직에 오른 전형적인 친미독재자였습니다. 1956년, 그의 형 루이스 소모사가 국왕에 오르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는 정부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측근들을 고위직에 앉히고 정적들을 제거했습니다. 1967년에 루이스 소모사가 사망하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는 자신이 국왕으로서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1972년 5월 임기가 끝났지만 그는 다시 소모사 가문의 측근들인 자유국민당의 군사위원회에 국왕직을 맡기고, 그는 방위군 대장으로 다시 취임하여 실질적인 국가 원수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소모사 정권의 마지막 독재자였습니다.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패권을 유지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미국이 1961년에 쿠바 피그만을 침공할 당시에도 니카라과는 미국에 작전기지를 제공했습니다. 소모사 정권의 친미노선이 매우 흡족하였던 미국은 소모사 정권 내내 이어진 폭정과 인권유린에 눈을 감고 소모사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소모사 독재에 반대하는 산디니스타 운동이 전 니카라과를 뒤흔들자, 미국도 소모사를 버렸습니다. 2005년 7월 9일, <동아일보>는 산티니스타가 진격해와서 소모사 독재정권의 최후가 다가오던 1979년의 회담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오.”(소모사) 
“이미 때는 늦었소.”(페출로 주 니카라과 미국대사) 
“너무한 것 아니오. 그동안 내가 미국한테 해준 게 얼만데….”(소모사) 
“대신 안전하게 국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겠소.”(페출로 주 니카라과 미국대사)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정당이었습니다. 그들은 1930년대, 니카라과를 침공한 미군에 맞서 싸운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산디니스타로 명명했습니다. 그들은 소모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으며 1979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를 축출하여 소모사 정권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혁명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소모사의 미국 망명도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소모사는 파라과이로 망명했지만 1980년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 근처에서 산디니스타 기습부대 단원들에게 사살당해 니카라과의 소모사 독재정권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미국은 소모사 정권을 이용하다가 소모사가 위기에 처하자 관계를 단절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를 반대하는 콘트라 우익반군을 육성하였습니다. 미 CIA는 1981년 11월, 콘트라 반군 훈련에 1900만 달러를 사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미국은 나중에는 콘트라 반군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교단절상태인 이란에 불법적으로 무기를 팔다가 들통나 커다란 정치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1986년에 터진 ‘이란 콘트라 게이트’라고 합니다. 미국은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를 이용한 것도 모자라 반군의 테러를 국가차원에서 후원한 것입니다.

 

 

산디니스타 잡으러 키운 파나마 노리에가

 

 

1979년, 니카라과 친미정권을 무너뜨린 산디니스타는 미국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미국은 산디니스타를 붕괴시키기 위해 니카라과의 콘트라 우익반군도 육성하였지만, 니카라과 주변국의 독재정권도 활용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이후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1938-)입니다. 

 

 

 

 

니카라과 콘트라 우익반군의 자금출처는 ‘콘트라 게이트’에서 밝혀졌듯 미국이었지만 또 다른 자금 출처는 바로 파나마의 노리에가였습니다. 그는 마약거래에 깊숙이 개입해 니카라과 우익반군을 지원했습니다.

 

마누엘 노리에가(1934-)도 젊은 시절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자란 미국통이었습니다. 그는 1967년 미군기지 포트 굴리크의 미군미주학교에서 첩보와 도청 훈련을 받았으며,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포트 브래그에서 심리전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 유학경력을 가지고 파나마로 돌아온 노리에가는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노리에가는 1970년대 파나마 토리헤스 정권에서 정보기관 책임자를 맡았다고 합니다. 친미정부의 정보기관 책임자는 당연히 CIA와 밀접히 연관됩니다. 노리에가 역시 당시 CIA 국장이었던 조지 H. 부시와 밀착관계를 형성하고,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에 대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조지 H. 부시는 이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걸프전을 일으켰으며 그의 아들 조지 W. 부시는 네오콘을 이끌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요? 때마침 1981년 파나마의 토리헤스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면서 노리에가는 파나마의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1968년에 중위였던 그는 1983년 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면서 파나마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 키워진 친미독재자는 미국에게 부담을 주면 곧바로 제거될 뿐입니다. 미국은 파나마의 친미노선이 더할나위없이 좋았지만 노리에가는 마약에 너무 깊숙이 손을 담근 마약상이었습니다. 미국은 군부출신의 노리에가를 대신할 문민출신의 친미정권을 모색하였습니다. 노리에가가 강력히 반발하자 1989년 12월 20일, 2만 6천명의 미군이 노리에가를 마약거래 혐의자로 체포해 법정에 세우겠다며 파나마를 전격 침공했습니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주재 바티칸 대사관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노리에가를 향해 24시간 시끄러운 록 음악을 틀어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압송하였습니다. 마약을 팔아 미국에 출성했던 친미군인은 제 손에 묻은 마약이 미국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자 일거에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적 살해, 마약밀매, 자금 세탁 등의 혐의로 미국, 프랑스의 감옥을 떠돌다가 2009년에는 징역 60년형을 선고받고 파나마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외 수많은 친미 독재자들

 

 

미국의 지정학적 요충지에서는 예외없이 친미독재가 성행하였습니다. 발칸반도 맨 아래에 위치한 그리스는 2차 대전 후 동유럽의 공산화 바람을 가까스로 막아낸 지탱점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사회주의 바람이 전 동유럽을 휩쓸던 당시에, 미국은 그리스 내전(1946-1949)을 지원해 그리스 공산화만은 막아냈습니다. 

 

 

 

 

그리스는 미국과 영국의 후원 아래 왕정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러나 1964년, 그리스 왕국의 콘스탄티노스 2세의 즉위를 계기로 그리스 정계의 대립과 갈등이 커지자 극렬한 반공주의자였던 육군장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1919-1999)는 1967년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파파도풀로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주요 정치인들을 구속한 뒤 총무장관에 올랐습니다. 콘스탄티노스 2세의 역 투데타가 실패하자 파파도풀로스는 스스로 총리에 올라 독재정권을 구축하고 반공을 전면화하였습니다. 그도 역시 비밀경찰을 동원해 국민을 감시하고 언론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그는 파파도풀로스의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크로니소스 섬에 가두었으며 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해외로 추방하였다고 합니다.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비밀경찰의 장관이었던 심복 디미트리오스 요안니디스의 쿠데타로 실각되었습니다. "나는 조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냈다." 파파도풀로스가 입만 열면 내뱉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도 친미 쿠데타가 이어졌습니다. 과테말라의 야코로 아르벤스 구스만은 195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벤스가 미국기업 유나이티드 푸르츠 컴퍼니의 토지까지 재분배하자 미국은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부에 1590만 달러의 보상을 요구하는 한편 1953년 아르벤스 축출을 위해 비밀공작 비용으로 270만 달러를 풀었다고 합니다. 결국 1954년, 과테말라 군부의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과테말라의 야코로 아르벤스 구스만을 축출시켰다고 합니다. 도서 <국가이미지전쟁>에 따르면 아르마스는 맨 먼저 2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유나이티드 푸르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는 아르벤스의 개혁을 완전히 되돌렸으며 이 과정에서 기나긴 과테말라 내전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앙골라에서는 100억 배럴 이상 매장된 석유를 노린 외세의 개입이 재앙을 몰고 왔습니다. 앙골라에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오마이뉴스>의 2002년 7월 15일 기사 “내전 후유증 심각한 앙골라의 오늘”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을 통한 무기와 군사훈련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은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앙골라 완전독립민족연합(UNITA)의 반군활동을 지원했습니다. UNITA의 지도자인 조나스 사빔비(1934-2002)는 미국의 지원 아래 내전을 이어갔지만, 점령지역의 어린이들을 끌어내 남자아이들은 총알받이로 삼고 여자아이들은 성노리개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후원을 얻은 사빔비는 그러나 각종 사회개혁조치에 반대하고 인권을 유린하다보니 형세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의 중재안을 거부하며 반군활동을 계속하던 사빔비는 미국의 버림을 받고 2002년 2월에 15발의 기관총을 맞고 사망하게 됩니다.앙골라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인지는 몰라도 25년 이상 지속된 앙골라 내전은 5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전체 인구의 1/3인 45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지구상 인권의 최악불모지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자원의 보고인 아프리카 대륙은 2차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이후로는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금과 다이아몬드가 풍부한 아프리카에서는 콩고 내전(1998-2003),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이 이어졌고 종교분쟁과 부족, 인종 간 갈등은 르완다 내전(1990-1994), 수단내전(1983-2005)을 낳았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우방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미국이 앞마당으로 삼은 중남미에서 활발하였습니다. 1961년, 쿠바 망명군이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반공의 선봉에 섰던 엘살바도르의 두아르테(1925-1990)도 미국과의 관계없이 설명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미국은 1953년, 영국계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이란의 모사데그 정권을 축출하고 친미를 표방하는 팔레비 왕정을 복구시켰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1937-2006)도 미국의 지원 아래 잔뼈가 굵었던 인물입니다. 

 

 

 

 

패망한 월남 베트남의 응오딘지엠(1901-1963) 정권도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 허수아비 정권이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미국에서 돌아와 미국의 원조로 정권을 차지하고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한국을 이성의 불모지로 만든 이승만 정권도 미국 대외정책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4.19의 민주화 함성을 탱크와 군화발로 짓뭉개고 친미반공의 동토대로 만든 박정희 정권,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정권도 모두 미국의 조언과 도움이 있었기에 군부독재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후원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진 이들의 파쇼독재행각은 이명박 정권 5년의 반민주시책에서 확연히 검증되었으며 박근혜 정권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끝>

 

[출처: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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