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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미국> 4. 20세기 전쟁을 주도한 미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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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동기 작성일15-07-11 12: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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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미국> 4. 20세기 전쟁을 주도한 미국 1

 

 

2015년 7월 9일글쓴이 : 곽동기 상임연구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약 세계패권을 거머쥐었습니다. 미국은 1944년에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출범시켜 달러경제패권을 구축하였고, 1945년 8월에는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려 핵무기를 시위하였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자 눈물을 머금고 나가사키에 한 개의 원자탄을 더 떨어뜨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과연 그러했을까요?

 

미국은 처음부터 두 가지의 원자탄을 개발했습니다.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리틀보이는 우라늄 농축방식을 통한 원자탄입니다. 여기에는 기폭장치도 포신형을 이용해 임계질량 이하의 우라늄을 따로 나누어 넣고 기폭 시에 합쳐져서 핵폭발이 일어나도록 하였습니다.

 

반면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팻맨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탄이었습니다. 팻맨은 내폭형 기폭장치를 이용했습니다. 내폭형은 처음에는 플루토늄 밀도를 낮게 두었다가 기폭장치가 폭발할 때 플루토늄을 고밀도로 압축해 임계질량을 넘겨 핵폭발을 일으키는 방식입니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뜨리고, 두 가지 방식의 원자탄이 모두 효과적이라는 점을 확인하며 사실상 핵독점에 들어갑니다. 원자탄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군사패권과 달러로 대변되는 미국의 경제패권은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전쟁으로 성장한 미국의 전쟁관행은 세계패권을 얻은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6.25 전쟁을 주도하며 군산복합체를 완성하였고 베트남전에 뛰어들면서는 전쟁에 심취해 자기나라 경제를 망치기에 이릅니다. 전쟁으로 일어선 자, 전쟁으로 비틀거렸던 것입니다. 소련이 붕괴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패권을 훨씬 일찍 무너졌을 지도 모릅니다. 

 

 

 

 

1) 공산당을 주적으로 삼은 6.25 전쟁

 

2차 대전이 종식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은 또 한 번의 전면전을 주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6.25 전쟁입니다. 미국은 6.25 전쟁에 시중일관 주도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아예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넘겼으니, 사실상 6.25 전쟁은 유엔군의 모자를 쓴 미국과 북-중 연합군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953년 휴전협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배제되었습니다.

 

2차 대전에서 나치독일과 파쇼일본이 몰락하며 미국은 주적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새로운 적으로 공산주의를 삼게 되는데, 6.25 전쟁을 계기로 자본주의 진영에 반공이념을 확립하였습니다.

 

1940년대 후반의 정서에서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은 소련을 두고 “나치 히틀러를 물리친 우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미 행정부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지향하는 소련을 경계하였지만 소련을 “미국의 주적”으로 선포할 뚜렷한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50년 2월 9일, 미국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이었던 조지프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공화당 부녀자 당원 집회에서 일련의 반공주의 연설을 하였습니다. 연설에서 매카시는 미국사회의 각 분야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이 297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매카시는 의회에서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를 이끌었는데 여기서는 1년 만에 무려 214명의 증인을 소환해 공개청문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산주의의 증거는 어디에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문회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4만 명이 넘는 미군장병이 죽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공산주의가 주적이라는 냉전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950년 9월 23일에는 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이 제정되었습니다. 미국은 외국군대 철수를 언급한 정전협정을 마음대로 농락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키며 냉전체제를 완성한 것입니다.

 

미국은 6,25 전쟁에서 유엔군의 모자를 쓰고 16개국의 군대를 차출해 전쟁을 치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 자본주의 진영의 16개국들도 6.25 전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국을 우방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54년, 매카시 의원은 용도폐기되어 물러났지만 냉전체제는 이때로부터 세계적 차원에서 굳어졌습니다. 냉전은 소련붕괴까지 지속되었습니다.

 

2) 6.25 전쟁에서 태어난 군산복합체

 

미국은 1949년에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시켰다고 하지만 대한해협 건너 도쿄의 태평양사령부에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쓰다 남은 막대한 전쟁물자가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미군은 언제든 출동준비 태세가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미군은 6.25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은 총 178만 9000명이 6.25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1950년 여름, 낙동강 방어전투 당시에 유엔군은 이미 11만 6725명으로 11만 5147명의 국군과 합치면 9만 7850명이었던 북한군을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미국은 6.25 전쟁의 전 기간, 북한지역에 막대한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투하된 포탄의 총량보다 훨씬 많은 포탄이 비좁은 북한지역에 집중적으로 투하되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침체기에 들어서던 미국의 군수산업은 6.25 전쟁을 계기로 다시 활기를 띠었습니다. 

 

 

 

 

미군의 폭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미군 공군들은 폭격할 대상을 찾지 못해 귀환하는 상황도 발생하였습니다. 북한은 6.25 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시에는 건물의 형태를 갖춘 건물이 단 두 채만 있었다고 합니다. 항구도시였던 원산은 함포사격까지 동반되어 피해가 더욱 심했는데, 휴전이 체결되기 2분 전까지, 그러니까 1953년 7월 27일 오후 9시 58분까지 폭격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6.25 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와 산업부문은 완전히 하나의 몸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와 산업의 상부상조는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라고 불렸습니다.

 

아이젠하워는 1961년 1월 17일, 퇴임연설에서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가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사태를 경계해야 한다. 부적절한 권력이 재앙적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지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속할 것이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국은 결국 전쟁을 떠나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3) 한반도를 잿더미로 유린한 미국

 

미국의 6.25 전쟁 목표는 북한정권을 붕괴시켜 압록강까지 진출해 중국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압록강 진출을 낙관하였습니다. 맥아더사령관은 미군이 후퇴하며 대전전투에선 미 사단장이 북한군에 포로로 잡혔는데도 1950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고 장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습니다.

 

6.25 전쟁에서 미국이 그린 그림은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에서 14일을 허비하는 바람에 북한군 주력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중국이 참전하면서 1.4 후퇴를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것으로 미군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기록하고 맥아더는 철직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6.25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될만한 사람은 누구든지 학살하였습니다. 38선 이남에서 약 20만명에서 30만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 전쟁 전의 빨치산 투쟁과정까지 합치면 민간인 학살자는 최대 100만명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은 북한출신 극우청년들을 앞세워 북한지역의 양만들을 무더기로 집단학살하였습니다. 강정구 교수님은 “한국전쟁과 양만학살”이란 논문에서 북한은 미국이 북한지역에서 17만 2000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고 주장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은 유엔군을 지휘하면서도 흉포한 양민살육에는 눈을 감았습니다. 6.25 전쟁의 양민학살은 전적으로 전쟁을 지휘한 미국의 책임입니다.

미국은 6.25 전쟁을 유리하게 돌려보려고 세균전도 자행하였습니다.

 

국제과학자협회의 조셉 니덤은 1952년에 북한을 둘러보고 니덤 보고서(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의 사실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여기에는 600여 쪽 분량의 세균전 의심 현장 사진, 세균전을 수행한 미군 포로들의 진술서, 세균 배포 경로 비행지도, 피해 의심지역 주민 인터뷰 등의 자료가 실려 있었습니다.

 

니덤 보고서에 따르면 1951년 겨울부터 북한 지역에는 세균전으로 의심되는 이상 현상들이 발견되었으며, 미군 비행기가 출현한 지역에서 난데없이 장티푸스와 페스트 등에 감염된 파리와 벼룩 등의 곤충이 수 만 마리씩 떼 지어 출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산악지방에서 콜레라 등에 감염된 어패류 등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곧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미군비행기가 출현해 곤충을 뿌리고 나니 한겨울에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여름철 전염병이 유행한 것입니다.

 

강정구 교수님의 논문 “한국전쟁과 양민학살”에 따르면, 6.25 전쟁으로 최소한 북한인구의 12-15%가 죽었고, 5000 여개의 학교, 260여 개의 극장과 영화관, 1000 여개소의 병원, 2800만㎡의 주택 등이 파괴되었고, 25만두의 소, 38만두의 돼지, 37만 정보의 농지가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은 8700 여동의 공장과 생산설비 등이 파괴되어 1949년에 비해 1953년은 전력공업은 26%, 연료공업은 11%, 야금공업은 10%, 화학공업은 23%로 감소되었으며, 철광석, 선철, 강철, 조동, 조연, 전동기, 변압기, 유산, 화학비료, 카바이드, 가성소다, 시멘트 등 생산시설들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이같은 파괴살육전에서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정권 붕괴에 끝내 실패했습니다. 6.25 전쟁은 미국의 전쟁수행목적이 실패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훗날 자서전에서 6.25 전쟁에 대해 “한국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상대와 잘못된 결과를 낳은 전쟁이었다.”라고 실토하였습니다.

 

4) 미군이 철수하자 함락당한 사이공

 

6.25 전쟁에서 쓴맛을 본 미국은 공산진영에 대한 냉전체제를 구축하고 장기적인 군사대결을 추구하였습니다.

 

미국은 동남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을 차단할 목적으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였습니다.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옌푸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군에 패배하면서 베트남 문제는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넘어왔습니다. 미국은 이미 1945년에 독립국가를 선언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무시하고 북위 17도 선을 기점으로 베트남을 분단시켜 1955년에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이는 1948년의 한반도와 상당히 흡사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정부가 1976년에 패망한 월남정권입니다.

 

미국은 1960년대 케네디 정부 때부터 베트남 문제에 꾸준히 개입하였습니다. 1960년에 900명이던 베트남 주둔 미군은 1963년 말에 1만 630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미국은 존슨정부 때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 되면 다른 나라도 공산화된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이 하노이 인근 통킹 만에서 작전 중인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 호를 향하여 어뢰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가했고 미군이 즉시 반격하여 어뢰정을 격침시켰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이후 조작임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통킹 만 사건>입니다. 실제로는 북베트남의 선제공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하며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연방의회는 <통킹 만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권용립 교수의 “미국외교의 역사”에 따르면 이는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무장 공격을 격퇴하고 추후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총사령관으로서 모든 조치를 취하려는 대통령의 결의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의 밀림은 고엽제로 말려죽이고, 베트남인들의 주거지는 네이팜탄으로 초토화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25 전쟁에 이어 베트남에서도 전쟁은 미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968년 1월 30일,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설을 맞아 테트 대공세를 펼쳤으며 이는 미국사회 내에서 커다란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사회의 반전여론은 과격한 시위와 소요사태를 낳았으며 대통령 경호실은 존슨 대통령의 경호를 우려할 지경이었습니다. 1968년 11월 대선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패배하고 닉슨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1973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베트남 철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975년, 사이공은 함락당하고 1976년 통일된 베트남이 세워졌습니다.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과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전쟁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미국은 전쟁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신생국가를 얕잡아봤지만, 이들 나라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강대함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군사패권과 달러패권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달러가치는 폭락해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세계는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습니다. 1970년대의 석유파동은 자본주의 경제를 더욱 휘청거리게 압박하였습니다.

 

1989년, 소련이 붕괴하여 미국의 일극 체제가 펼쳐지기 전까지, 미국은 내외의 군사경제적 위기가 이어졌습니다.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그렇게 폐막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끝

 

[출처: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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