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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 7,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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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18 19:5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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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제3회) 7-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제4회) 8-61

 

 

 

 

4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

 

 

요영구회의 장소

 

 

나에게 오중화를 소개한것이 김준, 채수항인것처럼 김일환을 소개해준것도 길림, 룡정바닥을 쌍둥이같이 붙어다니던 김준, 채수항이네 패거리들이였다.

 <축구를 해서 황소를 탄 사람.>

김일환에 대한 채수항의 소개는 언제나 이런 말로 시작되군 하였다. 명월구회의 참가자들에게 김일환을 소개할 때에도 그는 이 광고부터 휘둘렀다. 이름난 운동선수인 채수항은 사람들을 평가하는데서 그가 축구를 얼마만큼 잘하는가 하는것을 기준으로 곧잘 삼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재미나는 기준이였다.

채수항의 소개로 하여 김일환은 어쨌든 동만지방의 많은 혁명가들속에서 재능있는 운동선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김일환은 로숙하고 경험많은 정치일군이였다. 그는 오중화와 마찬가지로 간도지방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본보기로 내세울수 있는 가정혁명화의 선구자이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모두가 이름있는 혁명가들이였고 혁명을 하다가 순국한 열렬한 애국자들이였다.

김일환의 어머니 오옥경은 혁명가들의 시중을 위해 일생을 바친 오랜 공산당원이였고 안해 리계순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혁명가의 지조를 지켜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진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딸이였다. 동생 김동산은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적의 <토벌>에 희생되였다. 화룡유격대의 김정식이란 사람도 김일환의 4촌이다. 김일환의 처가편 사람들도 혁명에 한생을 바쳤다. 처남 리지춘은 일찍이 길림시절에 우리를 찾아와서 투쟁방향을 받아가지고 간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김일환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씨알이 박힌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공부를 착실하게 한 듬직한 지식분자였다.

화룡에서 김일환과 함께 지하활동을 다년간 해온 김일과 박영순은 그가 사업작풍이 좋고 사업방법이 로숙하며 군중성이 좋다는데 대해서 자주 회상하였다. 김일, 박영순은 다 그의 영향밑에서 당일군으로 자라난 사람들이였다. 그가 구국군공작에 종종 파견된것은 이런 우점때문이였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화룡지방의 구국군들은 누구나 김일환을 존경하고 우대하였다.

한번은 안도에서 리도선부대가 구국군을 <토벌>하느라고 처창즈에 갑작스레 쓸어든적이 있다. 정안군놈들은 구국군을 찾느라고 마을을 발칵 뒤지였다. 그러다가 김일환이네 집에서 삐라뭉테기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김일환의 어머니가 다른 지방조직에 전해주기로 되여있는 중요한 삐라뭉테기였다.

리도선은 공산당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김일환이네 일가족을 모두 붙잡아놓고 심문을 시작하였다. 낯모를 사람이 맡기고 간 삐라라고 김일환의 어머니가 그럴듯하게 둘러대기는 하였으나 적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리도선의 눈은 온통 살기로 무섭게 번뜩거리였다. 김일환일가의 운명에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는 바로 그 순간에 이웃에 사는 지주가 그들은 공산당이 아니고 알짜 농사군이라는것을 온갖 감언리설을 다하여 보증해나섬으로써 리도선을 설득시켰다. 이것도 역시 평시에 김일환이 그 지주와의 사업을 잘한 덕이였다.

김일환의 특징가운데서 가장 중요한것은 불의에 대한 비타협성과 드팀없는 혁명적원칙성이였다. 이러한 성격적특질로 하여 그는 후날 <민생단>루명을 쓰고 박해를 받게 되였고 종당에는 좌경분자들의 손에 의하여 희생되였다.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권력앞에 아부하지 않고 남의 장단에 춤을 추지 않으면서 제 정신을 가지고 원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였다. 원칙이 있는곳에서는 부정이 판을 칠수 없고 도깨비나 잡귀신 같은것들이 제멋대로 발을 붙일수 없기때문이다.

김일환이네가 살던 마을에는 리억만이라는 당조직책임자가 있었다. 그는 혁명대렬내에 우연히 끼여들어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아편중독자였다. 김일환은 리억만이 직권을 리용하여 숱한 녀자들과 치정관계를 맺고있는데 대하여 동지적으로 충고해주고 약담배를 끊을것을 권고하였다. 리억만이 만일 리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비판을 고맙게 받아들였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부에 있는 좌경분자들을 사촉하여 김일환에게 <민생단>모자를 씌우고 현당서기의 자리에서 내쫓는 방법으로 비판에 대한 복수를 하였다.

김일환은 현당서기직에서 철직을 당한 다음에도 일을 충실하게 하였다. 좌경분자들은 그를 검열하기 위하여 개인자본가가 경영하는 탄광에 로동자공작을 보냈다.

김일환은 자기를 검열하는 기간에 좌경분자들한테서 당하는 고통과 결별하고 가족들과 함께 적구로 내려갈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민생단>혐의를 벗지 못한채 유격구인민들앞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대오를 버리고 달아난 도주자라는 치욕을 걸머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체포되여 죽을것이요.

나는 일본놈의 주구단체인 <민생단>이 될수도 없고 또 <민생단>이 되려고 생각하여 본적도 없소. 그러나 나는 혁명가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다가 이곳에서 <민생단>으로 몰려 죽는것이 오히려 타당할것이라고 생각하오. 만약 내가 살기를 원하여 적에게 투항하여 변절한다면 혁명에 더 큰 손실을 줄수 있기때문이요.

이렇게 되면 혁명을 배반한 나의 죄악은 천추만대에 씻을수 없게 될것이요.

마지막으로 나의 부탁은 온 가족이 우리 나라가 해방되고 독립되는 날까지 굴하지 말고 싸워달라는 그것뿐이요.>

이것은 김일환이 자기의 최후가 멀지 않았다는것을 예감하였을 때 어머니와 안해에게 한 말이다.

1934년 11월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마침내 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리억만의 악에 받친 론고는 온통 허위와 날조로 가득차있었다.

 <이자는 반동치고도 아주 지독한 반동이다. 오랫동안 심문했으나 한마디도 불지 않았다. 속에 구렝이가 있는지 독사가 있는지 알수가 없다. 이런놈들을 그냥 살려두면 우리 혁명이 10년안팎에 넝마쪼각처럼 거덜날수 있다. 살려야겠는가, 죽여야겠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는 청중은 한사람도 없었다.

저런 사람들을 다 죽이고 앞으로 어떻게 공산혁명을 하겠는가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있어도 정면에서 그의 무죄를 부르짖는 정의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처창즈사람들은 권력자들의 처사가 부당하다는것을 알면서도 속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일환의 무죄를 주장하면 그들자신도 <민생단>으로 되기때문이다.

좌경분자들은 화룡유격대창건자의 한사람인 김일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두고보아라, 누가 진짜<민생단>이고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

력사는 반드시 흑백을 갈라줄것이다.>

사형판결을 받은 김일환은 형리들을 쏘아보며 웨치였다.

그 말을 들은 손장상부대의 구국군대원들이 여기저기에서 총을 들고 뛰쳐일어나 분격을 터뜨리였다. 김일환이를 왜 죽이는가? 그분은 우리의 선생이고 은인이다. 저런 혁명가가 <민생단>이라면 도대체 <민생단>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가. 김일환은 우리가 보증한다. 총살형을 취소하지 않으면 너희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 ...

좌경분자들은 구국군의 압력에 못이겨 사형언도를 취소하고 김일환을 석방하였으나 그날밤중으로 그를 학살하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묻고싶다. 그래 당신들은 정말로 김일환을 <민생단>이라고 생각하였는가? <민생단>이 아닌줄 알면서도 딴 목적을 가지고 의식적으로 총살하지 않았는가? 김일환과 같은 사람들이 <민생단>이라면 이 간도땅에서 <민생단>이 아닌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조아범을 응시하며 목갈린 소리로 이런 주장을 피력했다. 그리고는 어성을 낮추어 연설을 계속하였다.

 <동무들, 이제 더는 인간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지 말라.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고 동지들을 동지답게 대하며 민중을 민중답게 대하라. 우리는 인간애와 동지애, 민중애의 무기를 가지고 이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하기 위해 일어난 투사들이 아닌가. 이 사랑의 무기가 없다면 우리가 부르죠아지들이나 마적들과 다른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이상 <숙반>의 이름을 걸고 사람들을 우롱한다면 인민이 영원히 우리를 외면할것이며 후대들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 억울하게 희생된 수천명 렬사들의 죽음을 보상하는 길은 오직 우리가 이 무의미한 살륙을 중단하고 사랑과 믿음과 단합의 정치로 모든 힘을 항일로 집중시키는것이다. 적들이 던진 <민생단>의 미끼를 뱉아버리고 우리의 대오에서 종파주의, 배타주의, 모험주의가 발붙일 틈을 주지 말라. 이것만이 지난 몇해동안 <민생단>으로 생긴 상처를 가시고 민중을 구원하고 혁명을 구원하며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뉴대를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길을 열어줄것이다. 우리 두 나라 혁명가들의 진정한 화합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호상리해, 계급적믿음에 기초해야 하며 형제적우애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 할것은 공동투쟁에서 패권을 추구하는것이다. 어느 일방이 리기를 추구하거나 그 리기를 위해 상대방을 희생시킨다면 그러한 합작은 공고한것으로 될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화합은 믿음과 사랑을 원동력으로 할 때 영원히 불패의것으로 될것이다.>

다홍왜회의에서는 간부문제에 대한 론쟁도 치렬하게 벌어졌다. 이 론쟁의 발단으로 된것은 특위지도부를 차지하고있는 일부 사람들이 소수민족은 간부로 될수 없고 다수민족만이 간부로 될수 있으며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하는것은 부당하고 불합리하다는 주장을 내놓은데 있었다. 그들은 조선사람은 소수민족이기때문에 다수민족을 지도할수 없으며 더욱이 조선혁명가들은 종파적습성과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쉽기 때문에 간부로 될수 없다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만주성당이 동만당지도부의 간부 선발과 배치에서 종래의 조선인중심주의로부터 중국인중심주의로 전환할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하였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지령의 요점은 지난날 조선사람들이 민족운동에서도 실패하고 공산주의운동에서도 실패하고 또 동요하거나 반동화되기 쉬운데다가 언어풍속이 다른것으로 하여 <소수민족의 혁명기초>가 공고하지 못하고 <소수민족의 령도에 의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의 성공이 불가능>하므로 <동만에 있어서 조선인의 기초를 중국인의 기초로 전환>시켜야 한다는것이였다.

이 지령의 요구에 의하면 동만특위서기이하 주요간부들은 모두 만주성위에서 임명하며 조선사람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민혁명군 중대장급이상의 지휘관으로 될수록 등용시키지 말라는것이였다.

그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이 지령이 중국공산당 중앙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지령이 하달된 때는 중국당중앙의 지도핵심들이 장개석군의 포위를 돌파하고 2만5천리장정을 하고있을 때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내전의 진통속에서 혁명전쟁의 중하를 걸머지고 간고분투의 길을 걷고있던 중국당중앙은 자기 조국의 동북변방에서 벌어지고있던 사변들에 주의를 돌릴수가 없었다.

만주성당의 조치들가운데는 왕명과 강생이 주관하고있던 국제당 동양부의 지령을 그대로 받아들였거나 그 지령에 준하여 만들어낸것들이 적지 않았다. 만주성당의 소재지인 할빈에서 국제당 동양부기관들이 자리잡고있었던 이르꾸쯔크나 울라지보스또크나 하바롭스크로 가는것은 정강산이나 연안으로 가는것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할수 없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은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놓았다. 그러한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의 간부선발배치원책에도 맞지 않고 그 당시 동만의 간부구성실태에도 맞지 않는 부당한 론조였다.

나는 또 론쟁에 뛰여들지 않을수 없었다.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승리하는 그날까지 함께 싸워야 할 숭고한 임무를 지니고있는것만큼 조중인민의 전투적단결과 반일공동투쟁을 강화하는데 부합되게 간부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맑스-레닌주의적인 립장에서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능력을 위주로 하여 간부를 선발배치하는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당신들도 인정하다싶이 조선사람들은 동만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들이다. 동만지방에서 간부들과 당원들의 구성을 보아도 압도적다수는 조선사람들이 차지하고있다. 이런 현실을 보지 않고 공동투쟁을 몇해동안 해오다가 소수민족에 대한 다수민족의 지도이니, 다수민족간부에 의한 소수민족간부의 교체니 하는 주장들을 새삼스럽게 들고 나오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우리는 민족주의적인 견지에서 조선민족우월론을 제창하자는것도 아니고 다른 민족의 렬등론을 떠들자는것도 아니다. 그러나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는 사람들을 다수민족출신이라고 하여 덮어놓고 등용시키는 경향은 반드시 시정퇴치되여야한다.

국적이나 소속, 인구의 다수가 간부선발의 기준으로 되여서는 안될것이다. 소수민족이건 다수민족이건 간부의 표징을 갖추었으면 간부로 되는것이고 갖추지 못했으면 간부로 되지못하는것이다.>

그러자 누군가가 조선혁명가들이 지난날 대부분 민족주의 운동이나 종파에 관계하였던 사람들이여서 간부로 될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 주장을 즉석에서 일축해버리였다.

 <동만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혁명가들의 절대다수는 그 어떤 종파에도 관계하지 않은 참신한 새 세대들이다. 우리가 일심전력으로 키워낸 기본계급출신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혁명군의 주력을 이루고있다는것은 당신들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다. 이 젊은 세대는 당, 정부, 대중단체에서도 간부로 활약하고있다. 지난날 민족주의운동에 참가했거나 파벌에 속하였던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다 혁명적으로 개조되였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전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또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반격을 하였다. 그 사람은 <민생단>의 아버지는 종파이고 종파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이며 민족주의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라는 괴이한 주장으로 회의장안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 주장을 거꾸로 해석하면 지난날 민족운동에 참가했거나 파벌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부양을 받는 아들로 된다. 이것은 아무런 리론적타당성도 없는 궤변으로서 교양개조된 파벌경력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고있는 조선공산주의운동대렬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다.

나는 그 궤변에 타격을 가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사상이란 고정불변한것이 아니다. 과거에 민족주의사상을 가지고있던 사람들도 꾸준한 개조과정을 통하여 공산주의자로 될수 있다. 과거경력중에 민족운동에 참가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그런 사람을 종파의 아버지라거나 일본제국주의의 아들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 아닌가.

원래 민족주의의 리념적기초는 애국애족이라고 할수 있는것만큼 그것을 반동시하는것은 곧 애국주의를 반동시하는것으로 된다. 민족주의라고 하여 덮어놓고 이단시하지 말라. 민족주의가 부르죠아지의 사상적도구로 리용되지 않는 이상 그것을 무턱대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가 력사의 반동으로 되는것은 다만 온 민족이 아니라 부르죠아지만의 리해관계를 대변할 때뿐이다.

만일 그 누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창시한 손문선생을 제국주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당신들은 그런 망발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민족주의를 반대한다는 그 자체가 심한 민족적편견이다.

조선의 종파분자들과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적진영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소수라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파쟁이 마치 조선민족이 가지고있는 선천적인 기질인것처럼 여기며 조선공산주의자라면 의례히 종파와 무슨 관련이 있는듯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이것 역시 천부당만 부당한 소리이다.

털어놓고 말해서 종파는 조선공산주의대렬내에만 있은것이 아니다. 종파는 독일과 쏘련에도 있었고 중국에도 있으며 일본에도 있고 국제당에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조선사람들만이 종파적습성을 기질적으로 소유한 민족으로 인정되여야 하며 조선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이 왜 종파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져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지금 조선민족은 과거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서 실패한 소수민족으로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 성공이 불가능하다느니, 혁명투쟁에서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쉬운 민족이라느니 하면서 간부로 쓸수 없다는 론거를 들고 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인간부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꾸며낸 허황한 론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배타주의적립장으로부터 출발하여 당신들은 이미 동만의 군정관계간부들중에서 당신들과 함께 여러해동안 한 전호에서 충실하게 싸워온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수십수백명 제거하거나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수많은 지도핵심들이 소수민족이라는 리유로 자기 자리를 내놓았는데 아직도 더 제거해야겠는가.

당신들이 만일 지금과 같이 조선사람들을 배척하고 학대하는 길로 집요하게 나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곁방살이를 더는 하지 않을것이다.>

나의 폭탄 같은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쳐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목구멍으로 침을 넘기는 소리가 들릴만큼 회의장의 긴장도는 팽팽하였다.

그때 만일 누가 내 말을 반박했거나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조금이라도 하였더라면 론쟁은 수습할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였을것이다. 다행히도 간부문제에 대한 토의는 그이상의 격론을 빚어내지 않았다.

회의가 심화됨에 따라 나와 좌경분자들사이의 론전은 더 치렬해졌다. 회의장에 조선인간부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침묵만 지키였다.

그러나 그들도 내심으로는 나의 립장을 지지하였다. 좌경의 대리인역을 수행하면서 가슴 아픈 흔적을 적지 않게 남긴 송일이조차도 나를 찾아와 누구도 못하는 일을 혼자서 해제꼈다고 하면서 나를 격려해주었다. 위증민과 왕윤성도 공식적으로는 자기들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나의 주장에 리해를 표시하였다. 특히 위증민의 리성적판단과 공정한 태도는 나에게 적지 않은 도움으로 되였다.

하루 세끼씩 콩죽을 먹으면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론쟁을 하다나니 나는 뼈만 남은 몸이 되였다. 하루종일 회의를 하고 밤늦게 숙소에 돌아와 앓다가도 아침이 되면 또 론쟁마당에 나가야 하였다. 단독으로 여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나에게 결석이라는것은 있을수 없었고 기권이라는것도 있을수 없었다. 나는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간도의 조선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의 운명을 위해서 싫건좋건 론쟁마당에 뛰여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회의에서 토의된 또 하나의 론쟁거리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추켜들고있는 민족해방의 구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다시말하여 중국땅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의 구호를 들고 싸우는것이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 부합되는가 부합되지 않는가, 그 구호가 <민생단>이 표방했던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반동적구호와 본질상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하는것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우고있는 민족해방의 구호가 <민생단>에서 만들어낸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와 같으며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에도 모순된다고 하였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있는 간부가 한두사람이 아니였다. 이것은 우리의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위험한 견해였다. 만일 이 견해대로 한다면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서 그들의 시중군이나 국제군의 한 구분대의 사명만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조선혁명을 한갖 다른 큰 나라 혁명의 부속물로밖에 보지 않는 이런 견해를 용인할수 없었다.

 <<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의 구호는 일제가 조중인민을 리간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의 대렬을 내부로부터 분렬시켜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목적으로 <민생단>에 쥐여준 구호이다. 그것이 간도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민족해방의 구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는것은 론의할 여지조차 없다.

우리가 내세운 민족해방의 구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전복하고 조국을 광복하며 우리 인민이 착취없고 압박없는 자주적인 새 사회에서 참다운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목적으로부터 내놓은 구호이다.

그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한다고 하여 자기 조국을 해방하고 자기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워야 할 신성한 권리마저 포기해야 하는가. 우리가 자기 나라 혁명을 하지 않고 남의 나라의 혁명만 할바에야 무엇 때문에 이 만주땅에 주저앉아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면서 여러해동안 조선의 민중을 결속시키고 훈련시키겠는가. 일부사람들은 중국혁명이 승리하면 조선혁명도 저절로 승리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허황한 소리이다. 매개 나라 혁명에는 자체의 로정이 있고 시간표가 있다. 자체의 력량이 준비되지 못하면 이웃나라의 혁명이 승리한다고 해도 그 승리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질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남들이 자기 나라 혁명을 도와주는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에 대한 주인다운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국제당의 1국1당제원칙을 내걸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민족해방의 구호를 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다른 나라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자기 나라 혁명에서 손을 떼게 하려는 견해라고밖에 달리 말할수가 없다.

프랑스에 가서 활동한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게 그 나라의 공산당원들이 중국혁명의 구호를 들지 말라고 했다면 그것을 감수할수 있었겠는가.

공산주의자들은 그 어디에 가서 활동하건 자기 나라 혁명의 구호를 들고 싸워야 하며 그것으로 그 나라 혁명도 도와주고 세계혁명에도 이바지해야 한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것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고 대신할수도 없는 자주적권리이며 신성한 의무이다.>

다홍왜회의에서 시작된 론쟁은 그해 3월에 열린 요영구회의에 와서도 계속되였다. 회의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며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도 의견상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게 되였다.

우리는 두 회의의 론점에서 핵으로 되여있는 몇가지 문제들을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하고 그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하여 위증민과 공청동만특위 간부인 윤병도를 모스크바에 보내였다.

 <민생단>문제로 하여 파생된 간도지방의 혼란은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것이였다.

좌경분자들은 무분별한 <숙반>운동으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힘들게 축성해놓은 혁명의 기초를 거의나 허물어버리였다. 그러면 그들이 죄다 <민생단>이였단말인가. 아니다. 적들의 문건에는 <민생단>이 겨우 7~8명이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7~8명을 색출해내려고 <숙반>운동은 2,000여명의 자기편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한것이다. 이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력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희세의 비극으로서 우매와 무지와 몰상식의 극치였다.

조선과 해외 각지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간도지방에 모여들었던 끌끌한 사람들이 2~3년사이에 <숙반>의 총끝에서 다 녹아났다. 그 불우한 수난자들가운데는 별의별 인재들이 다 있었다. 무슨 재간둥이인들 없었겠는가. <숙반>의 미친바람은 우리의 항일혁명만이 만들어낼수 있었던 민족의 자랑스러운 총아들을 사정없이 쓸어갔다.

 <민생단>의 여파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전장에서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의 수를 릉가한다면 아마 후대들은 잘 믿지 않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항일전쟁의 력사는 무수한 적과의 교전을 기록하고있지만 한 전투에서 20~30명의 전사자를 낸 실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동만의 유격구들에서는 20~30명의 혁명가들이 <민생단>이라는 죄명을 쓰고 무리죽음을 당한 날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의 령전에 묘비조차 세우지 못하였다. 두손을 합장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무리 정중하게 명복을 빈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은 지하에 가서도 살인자들을 저주하였을것이다.

 <민생단>이 해체된 간도땅에 <민생단>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처형이 두려워서 유격구를 탈출한 사람들가운데도 <민생단>은 없었다.

주진이 <민생단>이였는가? 아니다.

박길이 <민생단>이였는가? 아니다. 박길은 독립군운동으로부터 항일구국의 성전에 뛰여든 사람이였다. 그는 일찍이 연해주지방에 가서 공산주의사상으로 자신의 리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성전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지고있던 간도땅에 달려나와 지하정치공작도 하고 무장투쟁도 하였다. 그는 우리가 비밀유격대라고 명명했던 소규모유격대시절에 벌써 대중의 신망을 받는 정치지도원으로 되였으며 반일인민유격대가 정식으로 창건된후에는 연길대대에서 대대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연길지방에서 혁명을 개척한 선구자였던 박길은 대중의 심장에 불을 지필줄 아는 유능한 정치활동가, 선동가였고 뛰여난 군사지휘관이였다.

그의 일가는 5~6명이나 되는 항일혁명렬사들을 배출한 애국적가정이였다. 박길의 아버지 박증원(별명 호랑이)은 혁명군을 원호하는데서 특출한 모범을 보인 훌륭한 농민이였다. 그는 원래 소작살이를 할 때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였는데 품삯대신 받은 새끼소를 엄지소로 키워 그것을 원호기금으로 바치면서까지 유격대를 성심성의로 후원하였다.

이런 가정적배경을 가지고있는 박길은 <민생단>으로 모는 것은 문자그대로 어불성설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경분자들은 박길이 이전날 독립군이였다는것과 그의 누이가 강제에 못이겨 순사의 첩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나온 녀자라는것을 문제시하던 끝에 학살하였다.

김명균이 <민생단>이였는가? 아니다. 김명균은 왕청유격대창건자의 한사람이다. 현당군사책인 그가 무엇이 탐나서 <민생단>에 들었겠는가. 적들이 작성한 공판문건은 그가 <민생단>감옥에 구금되기전까지 일본인을 사살한 사건이 20여건, 일만관헌을 습격한 사건이 20여건, 무기를 탈취한 사건이 8건이라고 밝히고있다. 그가 만일 <민생단>이라면 이런 공적을 세울수 있겠는가? 유격구를 탈출한 다음에도 훈도가 되여 아이들의 넋속에 민족정기를 부어넣을수 있겠는가? 적들에게서 총살형을 당할수 있겠는가?

그러면 리웅걸은? 그도 <민생단>이 아니다. 나는 리웅걸이란 사람을 잘 안다. 우리가 왕청땅에 처음으로 입성했던 1932년 10월 나를 마중하기 위해 군마 두필을 끌고 소복구로 맨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민생단>으로 몰려 죽을번했던 1구당 조직부장 리웅걸이다. 젊은 빨찌산대장을 위해 한꺼번에 군마를 두필이나 끌고 온 이 체통이 큰 사나이의 융숭한 대접에서 나는 그날 잊을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리웅걸은 화룡현에서 공청서기로 사업하다가 룡정과 서울에서 감옥생활도 해보고 리광이 지휘한 별동대에서 정치위원으로도 공작한 경력을 가지고있는 정치적감수성이 풍부하고 투쟁력사가 깊은 혁명가였다.

나는 리웅걸을 통하여 구당사업을 지도하였고 그 모범을 일반화하는 방법으로 왕청지방의 당사업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3년 여름에 리웅걸은 <민생단>의 혐의를 받고 좌경분자들에게 체포되였다가 <나에게는 <민생단>이 당치 않다!>는 글을 남기고 유격구를 탈출하여 국내에 나왔다. 부령지방에 활동거점을 잡은 그는 함북, 함남 일대에서 애국적인 청장년들을 결속하여 공산주의동맹을 뭇고 군용도로건설반대투쟁, 공출반대투쟁, 징용반대투쟁 등의 반일투쟁을 조직지도하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울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다. 징역 12년이 그에게 떨어진 판결이였다. 일본법관들이 그의 금새를 잘 알고있었던것 같다.

이런 사람이 과연 <민생단>으로 처형되였어야 하겠는가.

다홍왜에서의 론쟁의 의의는 바로 리웅걸과 같은 사람들의 경력에서 <민생단>감투를 벗겨준데 있다. 이 회의의 론쟁과 그후 국제당이 내린 결론으로 하여 처형된 사람들도 무죄로 판명되였다. 유체적생명은 회복될수 없었지만 정치적생명은 부활되였다. 이 회의의 다른 하나의 의의는 일제의 음험한 모략이 얼마나 간악하고 지독했는가 하는것과 그에 롱락된자들의 정치적 졸렬성을 고발함으로써 좌경분자들의 정치적쿠테타이에 자갈을 물리고 그 손발을 철저히 얽어맨데 있다. 그렇다. <숙반>의 좌경화는 곧 높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낮은 직권을 가진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소멸하기 위하여 공개적인 방법으로 단행한 정치적폭행이며 하향식쿠테타이다.

다홍왜회의를 분기점으로 하여 동만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사람들속에서 우리의 활동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내가 이 글에서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과거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추억하는것은 그런 비화를 빚어낸 장본인들을 구태여 만천하에 고발하자는것도 아니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계산하자는것도 아니다. 이 추억은 혁명대오를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려는 적들의 모략과 간계는 어제만이 아니라 오늘도 있고 래일도 있을것이며 민족배타주의와 좌경분자들의 정치적졸렬성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있다는것을 다시금 똑똑히 인식시킴으로써 후대들에게 조선혁명의 주체확립과 민족의 자주성과 관련된 교훈을 심어주자는데 있다.

나는 반<민생단>투쟁과 그 총화로서의 다홍왜회의과정을 통하여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것을 심장깊이 절감하였다.

인간의 첫째가는 속성이 자주성인것처럼 민족의 생존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원천도 자주성에 있다. 개별적인 인간들의 생활에 있어서나 민족을 이루는 대집단의 생활에 있어서나 그 운명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생존조건은 자주성이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가 항일혁명을 민족적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성전으로 묘사하는것은 자주권의 부활이야말로 조선인민이 수십년동안 절절히 품어온 일차적숙망이였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강령으로 내세운 지상의 과제였다는 사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민족해방투쟁의 총적목표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복종되여야 하였다. 우리는 사고와 실천에서 자주성에 대한 옹호를 생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환경에서나 맹호가 되고 우뢰가 되여야 하였다.

자주성이란 그 누가 만들어서 선사하는것도 아니며 시간의 루적과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지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백절불굴의 희생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하는 사람들만이 자주성을 찾을수 있으며 그것의 영원한 주인이 될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상에는 다른 민족의 자주권을 짓밟는 강도들이 너무나도 많기때문이다. 자기네가 자주성을 가지는것은 응당하다고 여기면서도 남들이 자주적으로 살려는데 대해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해하는 인간들도 수두룩하다. 자주성을 저들만이 점유할수 있는 독점물로 여기는것은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지배주의의 오만성이다.

자주성을 유린하는 세력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싸워온 투쟁대렬내부에 있은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력사의 변덕이였다. 이 변덕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각한 고민과 좌절을 겪었다. 우리는 좌절에서 돌격에로 이전하기 위하여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조선민족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적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과 맹호가 되여 싸웠다. 다홍왜회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주의 기발을 들고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견지하고 그 권리를 옹호고수하기 위하여 벌린 대사상전이였다.

만일 우리가 인정사정없는 좌경의 철권앞에서 질겁하였거나 희생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하였더라면 우리는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 좌경이 무한궤도밑에서 혁명을 구원하지 못하였을것이다. 혁명을 위기에서 구원한것은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강의한 희생정신과 공산주의적원칙성, 자기 위업의 정당성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종말을 떠들며 우리 공화국을 주체의 궤도에서 밀어던지려고 정치적심리전에 열을 올리고있는 오늘 자주성을 계속 옹호고수해나가는것은 여전히 우리 민족과 우리 공화국의 생사존망과 관련된 사활적요구로 나서고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도 역시 승리자가 될것이다.

나는 반<민생단>투쟁과정을 통하여 일상 생활에서나 혁명투쟁에서 모함과 모해가 얼마나 유해로운가 하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으며 종파를 하는 사람들과는 혁명을 같이할수 없다는 교훈을 심각하게 받아안았다. 모함, 모해, 파쟁의 해독성과 반동성을 리해하려면 리조 500년사만 돌이켜보아도 충분하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모자식사이, 형제사이에도 칼부림을 하는것이 바로 반동화된 인간들의 본성이며 종파의 악습이다.

해방후 적들은 일제가 적용했던 <민생단>의 수법을 리용하여 우리 내부를 와해시켜보려고 시도하였다. 한때 그들은 위조편지를 보내는 방법으로 백남운, 강영창, 최응석과 같이 당에 충실한 남조선출신 간부들을 모해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그 모해에 넘어가지 않은것은 유격구에서 겪은 반<민생단>투쟁경험의 덕이라고 할수 있다. 이 체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치안대가담자들과 그 관련자들에 대한 처리에서 좌경을 범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혁명의 리익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치안대가담자들과 그 련루자들의 정치적운명문제를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나는 새 사회안전부장이 임명될 때마다 매번 우경을 범해서도 안되지만 좌경을 경계하며 <민생단>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군한다.

좌경을 정치적 사기군들과 야심가들이 새형의 <민생단>소동을 창출해낼수 있는 온상이다. 이 온상의 주인들은 남들보다 10배나 20배쯤 더 높은 목소리로 당을 운운하고 혁명을 운운하고 충실성을 운운한다. 이러한 초혁명성이 지난날 유격구에서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을 제멋대로 롱락하던 좌경분자들의 소행과 무엇이 다른 점이 있는가.

우경이 공개적인 반혁명이라면 좌경은 은페된 반혁명이고 우경이 암이라면 좌경도 그에 못지 않은 독버섯이다. 우경과 좌경은 혁명이라는 하나의 거목우에 기생하면서도 서로 등을 돌려대고 동상이몽하는듯 하지만 실은 하나의 맥락으로 깊이 련결되여있다. 개인이 좌경을 하면 집단을 해칠수 있고 집권당이 좌경을 하면 인민을 잃어 혁명을 망칠수 있다는 진리를 명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고수할수 없다. 이것은 반<민생단>투쟁력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있는 교훈이며 좌경의 침해로 하여 막대한 출혈을 당한 일련의 나라들에서의 뼈아픈 체험이 전세계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초당적인 언행으로 가리워진 좌경을 반대하고 경계하며 그 침해로부터 사람들의 정치적운명을 보호해주는것은 정권을 잡은 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의 활동에서 한시도 놓치지 만고 틀어쥐고나가야 할 영원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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