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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 5,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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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17 18: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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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제1회) 5-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제2회) 6-61

 

 

 

 

4권 제10장 2. 다홍왜에서의 론쟁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동만당지도부 인물들사이의 론쟁이 다홍왜회의에서 비로소 시작되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고찰이라고 볼수 없다. 그 론쟁의 시초는 벌써 1932년 10월에 있었다. 북만진출을 개시한 우리 부대가 왕청지방에 와서 얼마동안 머물러있을 때였다.

나는 그때 왕청체류일정의 첫 순서로 1구(요영구)당사업을 지도하였는데 그 과정에 현당과 구당의 일부 일군들이 반<민생단>투쟁을 혁명적원칙과 배치되게 극좌적인 방법으로 망탕 진행하고있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느날 아침 1구당 조직부장 리웅걸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던 나는 구당사무실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건 무슨 소립니까?>

리웅걸은 웬일인지 난처한 기색을 보이였다.

 <현당사람들이 리종진이란 사람을 잡아다놓고 문초를 하는 소립니다.>

 <왜요? <민생단>협의자입니까?>

 <그런가 봅니다. 본인은 사흘째 아니라고 뻗대는데 간부들은 자꾸 죄상을 내놓으라고 달구치지요. 저 소리만 들으면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습니다. 빨리 지나쳐버립시다.>

 <그를 <민생단>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적구공작을 나갔다가 며칠 늦어서 유격구로 돌아온게 문제가 되였지요.>

 <아니, 그런것도 리유로 된단 말이요?>

 <대장동무, 말을 삼가시우. 여기서는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민생단>으로 몰릴수 있습니다. <민생단>바람에 살기가 여간 어렵게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리웅걸의 만류를 물리치고 구당사무실로 향하였다.

현당에서 온 사람은 1구의 적위대원들과 함께 그냥 리종진을 무섭게 문초하고있었다. 현당의 간부는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낯선 손님에게 왕청사람들이 계급투쟁을 얼마나 본때있게하는지 한번 구경하라고나 하는듯이 기광을 부리며 리종진을 두드려팼다.

리종진은 중국인지주집에서 10년이상이나 머슴살이를 해온 고농이였다. 적의 <토벌>에 안해를 잃고 어린 두 자식은 혁명을 하기 위하여 남들에게 주었다. 유격구에 들어와서는 1구소속의 지부 당서기로 공작하였는데 군중들의 신망이 높았다. 이런 사람이 리적단체에 가담하여 반혁명을 할 리유가 없지 않는가. 그래 공작날자가 지연되였다고 하여 사업상의 불찰을 <민생단>근거로 삼는것이 정당하겠는가.

나는 심문을 중단시키고 현당과 구당의 간부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주었다.

 <동무들, 내가 료해한데 의하면 리종진동무는 <민생단>으로 취급할 근거가 없다. 똑똑한 근거도 없이 자그마한 공작상 오유를 가지고 아무 사람한테나 망탕 몽둥이질을 해서는 안된다. 반<민생단>투쟁은 과학적근거를 가지고 심중하게 해야한다.>

심문은 일단 중지되였으나 현당사람들은 내가 요영구를 떠나 마촌으로 간 다음 리종진을 끝내 학살하였다.

그대신 안도에서 온 김일성대장이 요영구 구당사무실에 나타나 현당에서 내려간 모모한 간부들의 <민생단>심문을 정지시키고 그들을 탄핵했다는 소문이 왕청현당과 동만특위 간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 소문은 왕청지경을 넘어 연길, 화룡, 훈춘 지방에도 퍼져갔다. <그 사람이 무슨 화를 입으려구 그런 참견을 했을가. 물불을 모르는구만.>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왕청맛을 잘 몰라서 그래. 김대장이야 안도사람이 아닌가.>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쨌든 담은 큰 사람이야.>하고 조심스럽게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1구당 사무실에서 보여준 언행은 사실상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좌경분자들사이의 론쟁의 발단으로 되였다.

이 론쟁은 1933년에 들어서면서 더 심화되였다. 1933년은 동만지방의 유격구들에서 <민생단>과 관련된 숙청사업이 제일 소란스럽게 벌어지던 해였다. <민생단>혐의를 뒤집어쓴 조선족출신의 적지 않은 군정간부들과 혁명가들이 바로 이해에 죽거나 도주하였다.

나도 역시 <민생단>올가미에 걸려들번 하였다. <숙반>사업을 극좌의 흔들레판으로 끌고가던 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나를 <민생단>과 련결시키려고 검질기게 애를 썼다.

그들이 내두르는 <증거>라는것은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 황당무계한것이였다. 그 <증거>가운데는 도문지주랍치사건이라는것도 있었다.

그 당시 류수하자지방에 상주하고있던 100여명의 반일부대들은 군복을 해결하지 못하여 우리에게 방조를 요청해왔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구국군이 경제모연공작에 써먹으려고 잡았다가 놓친 지주를 데려다가 잘 설복하여 그의 도움으로 500벌의 옷을 만들수 있는 군복천과 면화를 해결하였는데 이것을 도무지주랍치사건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때 그 천과 솜으로 왕청지방 반일부대장병들에게 옷을 다 해입히였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엄동설한에 군복조차 해입히지 못하면 반일부대장병들이 적들에게 귀순하거나 투항해갈 우려가 많았다. 구국군과 같은 우군의 협력이 없이 혁명군의 힘만으로 고군독전해서는 유격구를 유지해나가기가 곤난하였다.

리용국의 후임으로 왕청현당 서기의 자리에 등용된 김권일은 동만특위의 몇몇 간부들과 함께 유격대가 지주를 리용하여 구국군의 동기군복을 해결한것은 우경투항주의적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군대를 맡고있는 김일성은 <민생단>의 작용을 방임하고 조장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내 이름까지 걸고들며 그 무슨 책임을 운운할것은 사실 동만땅에서 발언권이 있는 조선족출신 간부들을 마지막 한사람까지 다 제거해버리려는 속심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그들은 지어 김일성이 반<민생단>투쟁을 잘 안하기 때문에 왕청유격대안에 <민생단>이 많이 들어와있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하면서 어떻게 해서나 나를 <숙반>의 심판대우에 올려세우려고 애썼다.

이렇게 되여 나와 그들사이에 정면충돌이 생기였다.

나는 지주를 통하여 구국군의 옷을 해결한것이 우경으로 될수 없고 더구나 <민생단>의 작용으로 될수 없다는 것을 력설한 다음 반<민생단>투쟁에 대한 나의 견해도 서슴지 않고 공개하였다.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이 곧 간첩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되는것만큼 그것은 누구든지 외면할 권리가 없다, 나도 우리 내부에 <민생단>이 침습하는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민생단>을 숙청한다고 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생사람을 잡는데 대해서는 수수방관할수 없다, 죄도 없는 자기편 사람들을 망탕 잡아죽이는것이야말로 혁명을 파괴하는 리적행위인데 우리가 어찌 그런 행위를 보면서도 함구무언할수 있겠는가, 보라, 당신들이 <민생단>이라는 꼬리표를 달아놓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 유격구에서 우리와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쟁쟁한 싸움군들이 아닌가, 그런 싸움군들이 무엇 때문에 혁명을 반대하는 <민생단>이 되겠는가, 당신들이 하는 말은 리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좌경분자들은 내 말을 듣자 노발대발하면서 <동무는 그럼 반<민생단>투쟁로선을 반대하는가?>고 큰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혁명에 충실한 자기편 사람들을 죽이는것이 당신들이 추구하는 반<민생단>투쟁로선이라면 나는 그런 로선을 지지할수 없다. <민생단>을 잡아내려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똑똑히 잡아낼것이지 하필 왜 이 산속에서 배를 곯으며 혁명을 하느라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제껴버리는가. 이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나의 론박이였다.

내가 날을 세워가지고 문제를 첨예하게 끌고가자 동만특위의 좌경분자들은 <김일성이 <민생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였다.

나는 <부족하면 좋다.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을 내가 직접 만나보겠다. 수감자들의 진술을 듣고싶은 생각이 있거든 당신들도 립회하라.>고 하였다.

리수구골안의 <민생단>감옥에 갇혀있던 수감자들중에는 장포리(본명 장룡산)라고 부르는 중대장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왕청지방의 명포수였다.

장룡산은 아버지를 따라 사냥터에 자주 다니면서 총쏘는 솜씨를 익히였는데 밀가루반죽을 해놓고 밖에 나가서 단꺼번에 8마리의 노루를 잡아다가 수제비국을 해먹을 정도로 사격술이 높은 사람이였다. 그가 소왕청방위전에서 혼자 쏘아잡은 적만해도 아마 100명은 넘을것이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랭해온 지휘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이런 인물이 하루아침사이에 <민생단>벙거지를 쓰고 짐승 우리나 다름없는 감옥에 갇혀있었으니 그것을 보내 내 심정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장포리, 똑똑히 대답해보라. 너 절말 <민생단>인가?>

나는 <민생단>감옥에 가자 장룡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장룡산은 별로 머밋거리는 기색도 없이 <<민생단>입니다.>하고 얼른 시인해버리였다.

 <그럼 <민생단>노릇을 하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새끼들은 수태 쏴죽였는가?>

장룡산의 진술을 들어보려고 감옥까지 따라온 좌경분자들은 모두 댕댕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장룡산을 조리있게 타일렀다.

 <이것 보라. 장포리, <민생단>이라는거야 일본놈들을 옹호하는것이고 또 일본놈들이 만들어낸 반동조직인데 네가 <민생단>이라면 그놈들을 100명이상이나 쏘아잡았다는게 이상하지 않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이야 바른대로 해야 할게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보라.>

장룡산은 그제서야 내 손을 붙들고 오열을 터뜨리면서 목이 꺽꺽 메이는 하소연을 하였다.

 <대장동무, 나야 무슨 까닭으로 <민생단>이 되겠소. 아니라고 대답해도 들어주지 않고 자꾸 두드려패니 다른 수가 없어 <민생단>이라구 했소. 대장 얼굴에 먹칠을 해서 죄송스럽소.>

 <내 얼굴에 흙칠을 하건 먹칠을 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네가 주리를 트는 폭군들앞에서는 <민생단>이라고 대답하고 내앞에서는 아니라고 하는 주대없는 인간이라는데 있다. 나에게는 한입으로 두가지 말을 하는 겁쟁이가 필요없다.>

내가 얼마나 노기등등해서 <감옥>문을 나섰던지 좌경분자들은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였다.

그날 나는 동장영을 만나서 한바탕 항의를 들이댔다.

 <내 보기에는 당신들의 사업에 문제가 있다. 반<민생단>투쟁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함부로 잡아가둘수 있는가? 반<민생단>투쟁은 민주주의적으로 해야 한다. 상층에 있는 몇몇 권력자들의 독단이 아니라 대중의 토의를 거쳐 적아를 정확히 식별해내야 한다. 고문과 위협의 방법으로 없는 <민생단>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지금 이 왕청에서 장포리를 <민생단>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당신들밖에 없다. 장포리는 내가 목숨을 걸고 보증하니 당장 석방하는것이 좋겠다.>

나는 좌경분자들에게 유격대안에 있는 <민생단>은 정치부의 승인이 없이 마음대로 다치지 못한다고 선포한 다음 부대에 돌아와 장룡산을 <숙반>지휘부에 제멋대로 넘겨준 지휘관을 처벌하였다.

그날 동만특위에서는 나의 요구대로 장룡산을 석방하였다.

장포리는 그후 녕안현 주지툰이라는곳에 파견되여 식량공작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잘 싸웠다.

세상에 널리 소개된 박창길사건도 하나의 시련이라면 시련이였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허라는곳에 주둔해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우리는 도문부근에서부터 끌고온 민회소를 잡아 군인들과 마을사람들에게 먹인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고기를 먹고 많은 사람들이 설사에 걸려 고생하였다.

전우들은 내 숙소에 우르르 쓸어와서 <민생단>이 우물에다 독약을 쳐서 전부 중독되였는데 무리죽음이 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야단법석을 하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중대는 전멸될수 있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중대를 전부 뒤산에 데리고 올라가 있을수 있는 적의 래습에 대처하여 만단의 전투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아무리 시간이 경과하여도 내자신은 전혀 배가 아파나지 않는것이였다. 응당 있게 되리라고 예측했던 적의 출동도 없었다.

나는 중대장과 정치지도원, 공청서기, 청년간사를 비롯한 중대의 지휘관들을 한자리에 모두 불러다놓고 동무들도 <민생단>이 정말로 우물에 독약을 쳤다고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지휘관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일제히 <예, 그런것같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나는 소고기국을 어제저녁에도 먹고 오늘새벽에도 먹었는데 배가 아프지 않소. 다른 사람들이 아프면 내 배나 중대장의 배도 아프겠는데 아프지 않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겠소?>

 <지휘관들이 먹는 국은 깨끗하기 때문에 그럴수 있습니다.>

중대장이 하는 말이였다.

 <그건 리치에 맞지 않소. 한가마국을 먹은 이상 지휘관들의것이라고 해서 약독이 미치지 못한다는 법이야 없지 않소.>

얼마후 마을을 순찰하던 소대장이 우물에 독약을 친<민생단>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키가 장총기장만큼 되는 아이를 나한테로 데려왔다. 그 아이가 바로 문제의 박창길이였다. 소대장이 하는 말이 그가 마을사람들앞에서 자기 죄를 솔직히 인정했다는것이였다.

동네에서는 범인을 잡아냈다고 술렁술렁 끓었다. 그놈이 몹쓸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고 창길의 어머니를 때려죽일 녀자라고 쌍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창길이는 중인지주네 집에서 돼지몰이를 하며 고생스럽게 자라난 애였다. 그의 형들가운데는 유격대에서 중대후방책임자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지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아이가 유격대의 한 개 중대력량을 전멸시킬수 있는 해독행위를 했다는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나는 창길이와 몇시간동안 담화를 하였다. 창길이는 내앞에서도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울면서 그것을 부정하였다. 그가 처음에 마을사람들앞에서 자기<죄>를 시인한 것은 자기에게 독약을 쳤다는 험턱을 억지로 들씌우는 마을아낙네들에 대한 반발이였다.

우리는 중대를 데리고 지체없이 산에서 내려와 군중대회를 열고 박창길의 무죄를 선포하였다.

 <이 애는 약을 치지 않았다. 그러면 누가 약을 쳤는가? 여러분들가운데는 약을 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약을 먹은 사람도 없다. 있다면 설사를 만나서 하루이틀 고생한 사람들이 있을뿐이다. 배앓이를 한것은 오래간만에 소고기를 너무 많이 먹은탓이다. 그러니 여기에 <민생단>문제라는것은 있지도 않거니와 있을수도 없다. 나는 오늘 이자리에서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몰아주던 창길이를 유격대에 받아들인다는것을 선포한다.>

마을아낙네들은 나의 연설을 듣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박창길이를 <민생단>으로 몰아주던 녀자들까지도 다 흐느껴울었다.

좌경분자들은 박창길사건도 역시 우경적립장에서 처리하였다고 하면서 문제시하였다.

박창길은 그 후 유격대에 입대하여 소왕청방위전투에서 영용하게 싸웠다.

이처럼 나는 좌경분자들의 포위속에서 몇가지의 큰 모험을 하였다. <민생단>감옥에서 장포리와 량성룡을 빼내온것이 하나의 모험이였다면 다른 하나의 모험은 박창길의 무죄를 선포하고 그를 유격대에 받아들인것이였다.

권력에 환장한 천박하고 암둔한 인간들이 색안경너머로 만사람의 진가를 가늠해보며 검사나 판사나 형리의 행세를 하고 있을 때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동지를 동지로 대하며 인민을 인민으로 섬기는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를 펼쳐나간다는것은 털어놓고 말해서 당시로서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였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 했던 투쟁이였다.

만사를 <민생단>의 작간으로 보는 불신의 감시경밑에서 자기를 건져낼수 있는 최대의 보신책은 사실 아무 일에도 참견하지 않으며 보고서도 못본척하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른것을 보고서도 그르다고 말할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살아도 죽은 목숨과 같고 구태여 살 필요조차 없는 생명없는 생명이라는 제나름의 배짱을 가지고 우리가 불의라고 보는 모든것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다. 일신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면 그것이 무슨 혁명가이겠는가. 나는 <숙반>의 회오리가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며 우리가 한몸을 내대고 투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밀어제낄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민생단>아닌 <민생단>을 숙청하는데서 권력의 진미를 느낀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심지어 동만유격구내에 꾸려진 당과 유격대의 조직체계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동만당의 <민생단>체계와 인민혁명군의 <민생단>체계라는것까지 고안해내고 그것을 공포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좌경분자들은 우리에게 유격대내에도 <민생단>이 많이 침투되였다는 인상을 주고 반<민생단>투쟁에서 더는 제동을 걸지못하도록 나와 내 수하의 대원들사이에도 쐐기를 박으려고 획책하였다.

어느날 모간부가 우리 부대에 찾아와 동만당 조직부장이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주었다. 편지를 뜯어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디서 입수한 자료인지는 알수 없었으나 조직부장은 한봉선이라는 대원이 <민생단>을 크게 해가지고 나까지 죽이려 하였는데 죄상으로 보아 마땅히 체포하여야 할 대상이니 당장 잡아내야겠다고 하였다.

한봉선의 <죄상>은 엄청난것이였으나 편지를 읽어보니 어째서인지 거기에 씌여진 사연들에 믿음이 잘 가지 않았다. 우선 그가 <민생단>책동을 크게 벌린다는 사실이 몹시 허황해보이였다. 지금껏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을 잘해온 한봉선이 무슨 망녕이 들어 <만생단>에 가담한단 말인가.

인격상으로 보더라도 그는 자기 상관을 모함하거나 살해하는것과 같은 악행을 할수 있는 포악한 성격의 사나이가 아니였다. 오히려 남들이 시샘을 하리만치 선량하고 례절이 밝은 미남자였다. 평상시 나와의 친분도 이만저만 두텁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준 상관을 해치려고 한다는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편지에 씌여진 사연들을 무턱대고 부정할수도 없었다. 조직부장이 아무려면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꾸며내겠는가. 내 심중은 이래저래 불쾌해졌다.

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간부에게 내가 직접 더 검열해보고 처리할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언제 일이 날지 모를 판인데...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하고 그 간부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내곁을 떠나가버리였다.

내 머리속에서는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한봉선이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했을가?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죽이자고 할가? 나를 해칠 건덕지가 없지 않는가. 그를 특위에 보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둬두었다가 정말로 후환이 생기면 야단이 아닌가.

며칠후 나는 한봉선을 지휘부로 불렀다.

한봉선은 여느때나 다름없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대장동지, 무슨 일로 저를 불렀습니까? 혹시 적구공작에 내보내자고 그러시는게 아닙니까?>

 <맞혔소. 오늘 당장 삼차구에 가서 밀정 한놈을 붙잡아와야겠소. 동문 참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구만.>

 <후각이고 뭐고가 있습니까. 지난밤 꿈에 도문구경을 좀 했는데 우리 중대 친구들이 해몽하기를 적구공작에 나갈 징조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 친구들이 해몽을 멋있게 해낸셈이지요.>

 <그럼 내가 호신용권총을 한자루 줄 테니 그걸 가지고 떠나도록 하오.>

 <총은 거치장스러워서 두고 가겠습니다. 입으로 구슬려서 데리고 올 테니 념려마십시오.>

 <그럼 총은 묻어두었다가 돌아올 때 가지고 오시오.>

한봉선은 내가 시킨대로 싸창 한자루를 중도에 묻어두고 삼차구시내에 들어가서 우리가 지명한 밀정을 만났다. 너 공산구역에 한번 들어가보지 않겠는가? 너의 신변안전은 내가 담보한다는 말로 그를 구슬려서 유격구에 데리고 들어왔다.

그 밀정을 내가 직접 심문하였다.

 <우린 네가 일본놈의 개라는것을 잘 안다. 그러나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 그대신 우리 일을 좀 해줘야겠다. 헌병대에 이름을 걸고 서약도 했으니 일본놈들이 시키는 일은 그냥 하면서 <토벌대>가 올 때에만 우리한테 미리 알려달라. 너에게 다른 임무는 주지 않겠다. 너 그것만 잘해주면 이다음에 혁명가로 인정해주겠다. 할수 있는가 없는가?>

밀정은 대장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하겠으니 혁명조직성원들이 자기를 죽이지 않도록 신변보호만 잘해달라고 애걸하였다.

나는 밀정이 돌아갈 때에도 한봉선을 불러 그를 삼차구까지 데려다주라고 하였다. 물론 한봉선은 그 임무도 훌륭히 집행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나는 동만특위의 간부들에게 말했다.

 <한봉선을 검열해보느라고 총을 주었는데 이 사람이 뛰지 않았다. 일본놈 개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개도 잡아왔다. 총과 탄알을 다 주었으니 나를 해치려면 얼마든지 해칠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짓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과연 <민생단>이겠는가?>

동만당의 간부들은 <민생단>도 그런 흉내는 낼수 있다, 그가 총을 가지고서도 도망치거나 당신을 해치지 않은것은 간부들의 신용을 얻어가지고 대렬에 더 깊이 침투하여 <민생단>작용을 큼직하게 해보자는것이다, 그러니 그를 믿을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한봉선에게 두번째 과업을 주었다. 도가선철길에 가서 폭발물을 묻고 오라고 하였다.

한봉선은 이번에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서슴지 않고 공작지로 떠나갔다. 동무는 모험심이 너무 강한 것이 탈이다, 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였더니 그는 잡히면 잡히고...까짓것, 그런건 꿈만합니다, 잡혀도 변절은 하지 않을 테니 나를 믿어주십시오, 기껏해서 총살을 당하는것밖에 더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한봉선을 돌격조에 망라시킨것은 그다음에 있은 일이였다. 우리는 그때 왕청주변의 어느 집단부락을 습격하였는데 그 전투가 아주 치렬하였다. 돌격조를 책임진 한봉선은 선두에서 포대를 들이치다가 불행하게도 한쪽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이 용감무쌍한 락천가는 <민생단>혐의에서 완전히 해방될수 있었다.

나는 세차례의 검열을 통하여 그가 <민생단>이 아니고 혁명에 충실한 사람이라는것을 증명하였다. 그때 내가 한봉선을 검열해보지 않고 조직부장에게 보냈더라면 그는 영낙없이 반동분자의 감투를 쓰고 처단되였을것이다. 내가 좌경분자들의 령을 잠간 보류시키고 검열을 통하여 한봉선을 구원해준것은 사실 목숨까지도 왔다갔다할수 있는 아슬아슬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만일 그때 한봉선이 총을 가지고 어느 간부를 살해했거나 적구로 달아났더라면 나는 그를 신임한 책임에서 벗어날수 없었을것이다.

이것이 나의 세번째 모험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런 모험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개별적인군이 내던지는 한마디의 명령이나 한번의 손짓에 따라 수십수백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험악한 <계급투쟁>의 마당에서 혁명가의 랭철한 리성과 분별력은 고사하고 초보적인 인정이나 의미마저 저버린 목석 같은 인간들의 도전을 순간마다 당하면서도 내가 그 어떤 압력에도 굽어들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따라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처신할수 있는것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나의 경력과 유격대지휘관으로서의 전투성과와 리론적뒤받침의 덕이였다고 할수 있다.

간도에서 지도부를 차지하고있던 중국인간부들중 적지 않은 인물들이 또한 길림시절부터 우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사람들이여서 그들이 나만은 함부로 <민생단>으로 걸어제끼지 못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사나운 회오리가 동만의 유격구들을 한창 휩쓸고있을 때 나는 병석에서 일어나 다홍왜로 떠날 차비를 하였다.

수십일간이나 내처 앓던 몸이여서 회의에 참가할만한 기력은 없었으나 내가 요구한 회의이니 반드시 가야 하였다. 그런데 4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을 비롯한 군대내의 많은 동무들이 내가 다홍왜로 떠나는것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대장동지, 만주성당에서도 파견원이 오고 공청만주성위에서도 파견원이 왔다는데 어쩐지 심상치 않습니다. 진리가 아무리 대장동지편에 있다고 해도 어쨌든 대장동지는 혼자이고 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4중대 정치지도원이 나에게 넌지시 한 말이였다.

전령병인 오대성까지도 나의 다홍왜행에 대해 우려하였다. 다홍왜회의가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고 축복의 인사를 보내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나를 고무해주는 락천가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들이 나의 출발을 앞두고 그처럼 불안해한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1935년 2월이면 만주성당이 동만 각급 당부와 전체 당원들에게 전당을 볼쉐위크화하기 위하여 숙반공작과 좌우경을 반대하는 량조전선의 투쟁을 강하게 전개하여 당내에 침입한 반혁명분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파쟁주의, 민족주의, 사회개량주의를 청산구축할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한뒤였다. 이 지령이 하달된후 동만각급 당조직들에서는 반<민생단>투쟁이 더욱 극좌적으로 무자비하게 전개되였다.

 <민생단>문제와 관련된 나와 좌경분자들사이의 론쟁은 그때까지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진행되여왔다. 하지만 당과 군대, 공청의 주요간부들이 다 모이는 다홍왜회의에서는 론쟁이 공식적인 형태를 띠고 첨예하게 벌어질것이다. 좌경을 반대하는 세력이 나 하나라면 나를 반대하는 세력은 10이나 20명도 넘을수 있다. <민생단>문가제가 일정에 오르면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대체로 다 입을 봉하고 아닌보살을 하는것이 전례이니까. 그런즉 나는 좌경의 포위속에서 전체를 향해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것이다. 론쟁은 나를 단죄하는 성토장으로 되고 회의장은 나를 매장해버리는 재판장으로도 변할수 있다. <민생단>이라고 하면서 나를 정치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장해버리려는 극단한 시도도 있을 우려가 없지 않았다.

전우들은 바로 그 점을 제일 걱정하고있었다. 그들은 <숙반>을 주관하고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는 돌심장들인가를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전우들은 사색이 되여 다홍왜로 가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길을 떠났다.

 <동무들, 이 길은 죽든지 살든지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다. 내가 만일 다홍왜로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멸을 가져올뿐이다. 우리앞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명을 구원하고 조선혁명을 위기에서 건질수 있는 가장 심각한 기회가 왔다. 대결은 피할수 없고 흑백은 반드시 갈라져야 한다.>

나는 오대성과 다른 한면의 전령병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가 시작된지 이틀만에야 다홍왜에 도착하였다.

인민혁명군대원들의 엄한 경호조치가 실시되고있는 제8구농민위원회 사무소에서 만주성당 파견원 위증민이 왕윤성, 주수동, 조아범, 왕덕태, 왕중산을 비롯한 동만당단특위의 간부들과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이 너렁청한 사무소건물에서 바로 중국사람들이 동만당단특위련석대회라고 규정한 회의가 진행되고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회의를 다홍왜회의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 일부 력사가들이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라고도 하였는데 그것은 정확한 명명이라고 볼수 없다.

다홍왜회의는 약 10일가량 진행되였다. 회의도중 들락날락하는 사람들도 있어 출석자의 수자는 고르롭지 못하였다. 대부분은 중국사람들이였고 조선족출신으로는 나와 송일, 림수산, 조동욱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뿐이였다고 생각된다. 조동욱은 회의 전기간 중국말을 잘 모르는 조선족간부들을 위해 통역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나는 동만당 특위위원의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다.

다홍왜에서 회의가 소집되게 된 동기는 공청 만주성위 순시원의 자격으로 간도지방의 사업을 료해하러 내려왔던 종자운(쑈중)이 동만지방 조선사람들의 70%가 <민생단>이라는 허황하기 그지 없는 보고를 성당조직에 제출한것이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동만혁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만주성당이 대표를 동만에 급파하여 수습책을 강구하려고 한것은 응당한 일이였다. 론쟁은 낮에도 하고 밤에도 하였다.

론쟁이 열기를 띠기 시작한것은 종자운이 보고에서 동만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70%, 조선혁명가들의 80~90%가 <민생단>이거나 그 혐의자들이며 유격구가 <민생단>의 양성소라는 종래의 견해를 되풀이한 순간부터였다.

회의분위기는 종자운의 보고를 지지하는데로 기울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숙반공작위원회를 강화해야겠다는 발언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숙청은 혁명으로 대내의 반혁명을 포위섬멸하는 특수전이라는 미사려구를 늘어놓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민생단>이 뿌려놓은 씨종자들을 보다 철저히 무자비하게 뿌리채 뽑아내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몇마디 질문을 들이대였다.

동만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면 이 회의에 참석하고있는 나와 기타 조선동지들도 다 <민생단>으로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과 마주앉아 회의를 하는가? 우리가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지 않고 여기에 불러다놓고 정치를 상론하는가?

동무들이 찍어놓은 그 수자속에는 싸움터에서 전사한 혁명가들도 포함되는가? 만일 포함된다고 가정하면 그들이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바친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할수 있겠는가? 그러면 일본놈들이 자기편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것으로 되는데 그들이 모처럼 키워놓은 <민생단>원들을 그렇게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 회의장을 호위하고있는 1중대의 80~90%도 <민생단>으로 보는가?

이 질문으로 하여 술렁거리던 회의장안에서는 갑자기 우리 자신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는 차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집행석에 앉아있는 위중민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다 알다싶이 어떤 물질이든지 본래의 구성요소와 다른 요소가 80~90%이상을 차지하게 되면 그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이다.

동만에 사는 조선사람의 70%가 <민생단>이라는것은 로인들과 아녀자들을 제외한 조선족청장년들 전부가 <민생단>이라는 말과 같은데 그렇다면 동만에서는 <민생단>이 혁명을 하고있으며 <민생단>이 자기 상전을 반대하는 혈전을 벌리고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동만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데 이것 역시 리치에 맞지 않는 소리이다. 그들이 만일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3년동안이나 만성적인 봉쇄상태에 놓여있는 유격구들에서 엄동설한에 집도 없이 입을것도 입지 못하고 먹을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적들과 힘에 겨운 싸움을 하여왔겠는가.

조선혁명가들의 80~90%는 고사하고 그 십분의 일인 8~9%만 <민생단>이라고 하여도 우리는 이자리에서 마음놓고 회의를 할수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의장주변에서는 지금 조선사람들로 편성된 1중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우리들에 대한 경위임무를 수행하고있기때문이다. 이자리에는 몇해째 적들이 소멸하지 못해 애를 쓰는 동만지방의 이름난 혁명가들과 지도핵심들이 다 모여있다.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1중대성원들도 거의나<민생단>이겠는데 그들이 좋은 총기를 가지고있으면서도 우리를 습격하여 일망타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모두가 <민생단>이라는 생억지의 주창자들은 이 물음에도 역시 함구무언이였다.

 <1중대는 원래 당신들이 <민생단>중대라고 선포했던 불우한 중대이다. 우리가 20일가량 중대에 직접 내려가서 료해해본데 의하면 중대전원을 <민생단>으로 볼 근거는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20일간의 지도검열과정을 통해 1중대는 모범중대로 되였고 여기서 7중대가 새롭게 태여나기까지 하였다. 실천투쟁을 통해 검열된 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동만유격구들에 사는 조선사람들이나 조선혁명가들의 대부분이 <민생단>이 아니라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로 되고있다.

보고에서는 유격구를 <민생단>의 양성소라고 하고 당, 단조직도 <민생단>조직이라고 하면서 리용국은 <민생단> 왕청현 당책임자, 김명균은 <민생단>왕청현 조직 및 군사책임자, 리상묵은 <민생단>동만당 조직책, 주진은 인민혁명군 1사 <민생단>책임자, 박춘은 인민혁명군 <민생단>참모장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동만당이나 왕청현당이나 인민혁명군 1사를 모두 <민생단>조직으로 보아도 되겠는가? 동만당간부들을 <민생단>의 조종자, 지도자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는가?>

청중은 이 물음에도 침묵으로 대답하였다.

성당 파견원으로서 이 투쟁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종합분석하고 평가할 사명을 걸머진 위증민 한사람만이 당, 단 조직자체를 <민생단>조직으로 보는것은 착오이며 부분과 전체는 반드시 구별해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발표하여 장내에 조성된 긴장도를 약간 늦구어놓았다.

나는 동만인민의 대부분을 <민생단>이라고 락인하는것은 조선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며 이 견해는 이번 회의에서 당장 시정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즉석에서 조아범의 반격을 받았다.

 <당신은 무턱대고 <민생단>이 없다고만 하는데 그것은 주관이다. 감옥들에는 지금 수백명의 <민생단>혐의자들이 갇혀있다. 그들이 자기 입으로 <민생단>에 들었다고 자백하고있고 자기 손으로 자백서까지 쓰고있는데 그 자백과 자백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래 당신은 이런 증거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자백이나 자백서라는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증거자료들이라는것이 대부분 고문장에서 강제적인 방법으로 받아낸것들이기때문이다. 나는 감옥에 가서 자백을 했다는 혐의자들을 수십명이나 만나보았는데 자기의 자백을 인정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당신들의 그 증거자료보다 사업과 생활을 통해 발휘된 그들의 충실성을 더 믿는다. 솔직히 말해보라. 당신들이 자백과 자백서를 어떻게 받아냈는지. ...당신들이 <민생단>이라고 몰아대는 혐의자들의 대다수는 <숙반>의 집행자들에 의해 가해지는 육체적고통에 견디지 못해 가짜자백을 한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지금 <민생단>아닌 <민생단>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조아범이 <부뚜이!>(<아니다!>)하고 소리쳤다.

그 <부뚜이!>라는 말에 나는 그만 신경이 한껏 팽팽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조아범이 감히 이자리에서 <아니다!>라는 말을 할수 있는가?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쾅 하고 내리쳤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은 지금 당신을 주시하고있다. 당신이 직권을 악용하여 사람잡이를 망탕 했기때문이다.

안도유격대 정치위원 김정룡이 누구한테 죽었는가? 화룡현 당 서기 김일환은 누구 손에 죽었는가? 오늘 이자리에서 솔직히 대답해보라. 길림시절의 조아범은 포악하지도 않았고 탐위욕도 없는 사람이였다. 김일환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분해서 울었다. 그 사람이야 당신의 혁명선배가 아닌가. 당신이 그를 구제하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

나는 김일환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달프게 조상한 전우의 한사람으로 그들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김일환은 우리가 동만지방을 개척할 때 처음으로 쟁취한 혁명가들중의 한사람으로서 오중화와 쌍벽을 이룬 인물이였다. 그와의 첫 상봉이 이루어진곳이 조아범이네 집이였던지 리청산이네 집이였던지 알쑹달쑹하다. 그러나 명원구회의때 그와 함께 밤을 밝혀가며 허심탄회하게 담화를 나누던 일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첫 담화가 아주 인상이 깊었다. 심한 년령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김일환은 그때 틀을 차리거나 거드름을 부리지 않고 동등한 자세로 나를 겸손하게 대해주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17 18:31:40 새 소식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