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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제10장 1. 사나운 회오리 3,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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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16 19:4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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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1. 사나운 회오리(제3회) 3-61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4 권 제10장 1. 사나운 회오리(제4회) 4-61

 

 

 

 

4권 제10장 1. 사나운 회오리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

우리 대원들은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성전에서 모진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믿음직한 혁명투사로 자라났다.

 

 

 

일본의 음험한 모략가들이 공산당과 항일유격대를 상대로 한 사상모략공작의 기본바탕으로 삼은 정치적요점은 동만항일유격대의 조직구성과 지휘체계에서의 특수성이였다. 그들은 인민혁명군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공동의 무장력이라는 점을 하나의 본질적인 약점으로 간주하였다. 일제의 모략가들은 제나름으로 중국인간부들은 조선인당원들을 신용하지 않고 부단히 감시하고있기때문에 조선인당원들과 대립되여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이 특수성을 리용하여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하였다. 조선사람이 만주에서 피를 흘리는것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해방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기를 쓰고 싸우는가, 왜 력량상 우세한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에게 매워 무의미한 싸움에서 피를 흘리는가, 빨리 각성하라, 투항귀순의 길은 열려있다, …이러한 사상을 열심히 주입시키는것을 《민생단》사상모략공작의 주요한 선전요령으로 삼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민생단》이 해체된후 특무들과 주구들을 발동시켜 유격구들에 《민생단》원들이 수없이 침투된것처럼 소문을 내돌리면서 견실한 간부들과 혁명가들을 모해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경원시하게 하였다.적들자신도 《간도공산당파괴경험》이라는 비밀문건에서 처음에 《민생단》을 10명씩 조직하여 유격대안에 들여보냈으나 다 붙잡혀 죽게 되여 더는 침투시킬수 없었기때문에 조선사람과 중국사람, 로동자와 농민, 상부와 하부간에 호상 믿지 못하게 하고 서로 리간시키는 전술을 써서 공산주의자들끼리 싸우게 하였다고 실토하였다.

혁명대렬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는 교란작전에서 일본의 모략가들이 발휘한 솜씨는 실로 놀랄만한것이였다. 그 술책가운데는 이런 수법도 있었다. 가령 동만특위에서 어떤 간부가 지방에 순시를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이 오가는 길에다 이전에 지도사업차로 그 지방을 왕래하던 현급간부나 구급간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떨어뜨리였다.

그러면 특위 순시원이 그 편지의 수신인들을 어떤 인간들로 보겠는가.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의 길을 걷게 된 다른 하나의 리유는 만주성위나 동만특위, 각급 현당과 구당조직의 책임적위치를 차지하고있던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야망에 있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이 공산주의대렬안에서 지도적지위를 독차지하고 상승일로의 길로 전진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혁명투쟁을 자기들의 정치적야망을 실현하는데 종속시키려고 하였다면 파벌근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지지와 묵인속에서 종파적목적달성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대오로부터 사정없이 제거하고 자파세력을 확대하는데 이 투쟁을 악용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차지하고있는 방석을 가로타고 앉을 구실을 마련해준것이 바로 《민생단》이였다. 너는 《민생단》이니 자리를 내놓아야겠다거나 죽어야겠다고 선언하면 다였다. 이런 판결에는 상소가 있을수 없었으며 또 상소를 했대야 통하지도 않았다.

일제가 류포시킨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싶어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적이며 출세주의적인 욕구에 불을 붙여주는 인화물질과 같은것이였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실적은 유격구의 혁명력량을 모조리 교살해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리득을 가져다주었다.

결국은 적아가 합세하여 유격구를 마구 짓뭉개놓은셈이다. 이런 기괴한 결탁은 세계의 어느 혁명전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반《민생단》투쟁이 이처럼 파쑈국가의 군법이나 중세기의 종교형벌조차 무색케 할 정도로 황당하고 가혹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진행되게 된것은 일제의 간악한 모략과 그에 속아넘어간 동만특위의 일부 사람들의 정치사상적암둔성과 그들이 추구한 목적의 비렬성에 기인한것이였다.

그 당시 그들이 《민생단》이라고 보는 표징에는 제한이 없었는데 그것을 형태별로 분류해놓으면 실로 수백가지나 되였다.

유격대의 식사를 보장해주는 작식대원이 밥을 설군것도 《민생단》으로 몰릴수 있는 리유가 되였다. 밥에 돌이 섞이거나 물에 밥을 말아먹어도 그것은 곧 《유격구의 인민들을 병들게 하려 한 증거》로 되고 《 〈민생단〉의 작용》이라는 어마어마한 감투를 쓰는 조건으로 되였다.

설사를 하면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민생단》, 한숨을 쉬면 혁명의식을 마비시킨다고 《민생단》, 오발을 하면 적들에게 유격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라고 《민생단》, 고향이 그립다는 말을 하면 민족주의를 고취한다고 《민생단》, 일을 잘하면 정체를 숨기려는 수작이라고 《민생단》…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였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민생단》으로 걸려들지 않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이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굴러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붙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였다. 이것은 죽음 그자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리였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 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리였다.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의 수렁창으로 끌고가는데서는 이처럼 화룡현이 제일 과도하고 혹심하였다. 그것은 이 지방에서 당조직의 지도적직책을 차지하고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치적목적을 실현하는 방향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제멋대로 롱락하였기때문이였다.

《숙반》의 화살은 혁명실천에서 모범적이고 군중의 신망이 높은 사람들, 아첨과 굴종을 모르고 불의와의 타협을 모르는 견실한 사람들에게로 집중되였다.

조선인간부들중에서 반《민생단》투쟁을 제일 극좌적으로 벌린 인물은 김성도였다. 동만특위가 왕청에 자리잡고있을 때 거기서 김성도는 부화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처를 끼고 다니면서 특위, 현위의 간부들과 함께 술놀이와 화투놀이를 자주 하였다. 안해가 신녀성행세를 하며 살림살이를 게을리하였으므로 그의 집안 일은 다 아동단원들이 도맡아해주다싶이 하였다. 김성도는 아편꽃이 곱다고 하면서 인민들을 동원시켜 아편을 심게 하고 그 진을 받아 자기한테 바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줄곧 《청렴정치》를 념불처럼 뇌이였다.

이처럼 뒤생활이 게접지레한 김성도가 진실한 혁명가들을 《민생단》으로 걸어제낀것은 언어도단이였다. 심지어 그는 아동단원들에게까지 《민생단》에 들었다는 자백서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정치공작에서 많은 공로를 세운 룡정 동흥촌아지트책임자 김근수도 좌경분자들의 마수에 걸려들어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나는 〈민생단〉이 아니다. 정 의심스러우면 나의 두발목을 자르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 두다리를 자르면 도망치지 못할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나를 죽이지 않고 두다리만 자른다면 손으로 노전을 결어서라도 혁명에 이바지하겠다. 혁명을 더하지 못하고 죽는것이 원통하다.》

이것은 사형장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였다.

그러나 《숙반》지도부는 도리여 《저걸 보라. 저놈이 죽으면서도 〈민생단〉작용을 한다.》고 하면서 끝내 그를 몽둥이로 쳐죽이였다.

《숙반》의 철퇴는 당조직과 대중단체의 범위를 벗어나 유격대의 머리우에까지 떨어졌다.

《호미긁개》라는 토색적인 별명을 가지고 유격대에서 모범전투원으로 활동하던 양태옥도 《민생단》모자를 쓰고 군중심판을 받았다.

《죄명》은 고의로 총의 격발기를 못쓰게 만들었다는것이였다.

양태옥에게 《호미긁개》라는 별명이 붙은것은 그가 자기네 조직책임자와 함께 삼포동음식점에 내려가 집사대원들한테서 무기를 탈취한 다음부터였다. 그때 두놈의 집사대원은 음식점안에 들어가 아편을 피웠고 한놈은 문전에서 보초를 서고있었다. 양태옥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그 보초와 격투를 하였다. 그런데 힘으로써는 그놈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양태옥은 허리에 차고 간 호미로 집사대원의 면상을 긁어놓았다. 집사대원이 얼굴을 싸쥐고 너부러진사이에 총을 걷어메고 삼포동산등으로 숨이 가쁘게 치달아 올랐다. 그는 비탈을 톺아오르면서도 총을 쏘아보고싶은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날수 없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기대하는 《꽝》소리는 나지 않았다. 안전장치가 되여있었던것이다. 양태옥은 호미로 격발기를 쳐서 안전장치를 떨구었다. 하지만 호미등에 얻어맞은 격발기의 상처로 하여 그는 후날 유격대에서 제거되여 적구로 추방당할 운명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좌경분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벙거지를 씌우고 극형에 처했거나 유격구밖으로 추방한 사람들은 대체로 《호미긁개》와 같이 목숨을 아낄줄 모르는 용감하고 쟁쟁한 투사들이였다. 이런 투사들이 《민생단》노릇을 하려고 가짜권총이나 호미를 가지고 백주에 무장경관들의 수중에서 총을 탈취해내는 그런 모험을 했겠는가. 그래 심판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인간들에게는 그런 열혈투사들이 《민생단》이라는데 들어갈 리유도 없고 반혁명에 가담할 필요조차 없다는것을 판별할만한 지능도 없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판단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혁명에 참가한 사람치고 그런 정도의 판단력조차 못가진 천치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안도투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창즈에서만도 수백명의 조선사람들이 《민생단》바람으로 학살되였다고 한다.

동만당과의 련계가 깊었고 간도의 실정에 무척 밝은 주보중도 자기의 회상록에서 《민생단》에 걸려 죽은 사람의 수가 2,000명이나 된다고 증언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을 진두에서 지휘한 사람들은 《숙반》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로서는 감히 자행할수 없는 악착스러운 방법으로 당조직과 대중단체 성원은 물론, 아동단열성자에 이르는 모든 《민생단》혐의자들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가하였다.

《숙반》운동의 앞장에 섰던 김성도, 송일,김권일 자신들도 나중에는 《민생단》이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당하였다. 송일과 김권일은 다 좋은 사람들이였으나 주체를 세우지 못하고 상급에 맹종맹동하다나니 본의 아닌 과오를 범하였다. 나는 그들이 사형장에서 우리의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그 두사람은 나와 중요한 로선상 문제를 가지고 론쟁도 자주 하였다. 그들이 사형장에서나마 리성으로 돌아와 랭철하게 자기자신들을 돌이켜본것만은 틀림없는것 같다.

박현숙이라면 왕청치고도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일류급의 신녀성이였다. 눈이 별같이 반짝반짝한다고 하여 소왕청사람들은 그를 《새별눈》이라고 불렀다. 예능에 조예가 깊은 그는 왕청에서 한동안 아동국장으로 사업하였다. 나이는 그닥 많지 않았지만 지하공작경험이 비교적 풍부한 녀자였다. 그의 시아버지 최창원(최노톨)은 현반제동맹책임자였다.

박현숙이 아직 최형준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때 그의 지도를 받고있던 무단천의 아동단원들은 두사람사이를 오가면서 통신련락을 부지런히 하였다. 박현숙이 돈을 주면 아동단원들은 상점으로 돌아다니며 유격대에 보낼 물품들을 구입하였다. 이 물품들은 《새별눈》의 손을 거쳐 비밀유격대와 별동대의 조직을 서두르고있는 투사들에게로 전달되였다.

박현숙의 일거일동을 은밀히 주시하고있던 적들은 그에게 체포령을 내리였다. 그날 《새별눈》은 결혼식을 축하해주려고 어떤 동료의 집에 가있었는데 경찰들이 그 집에까지 따라와서 박현숙을 내놓으라고 행패질을 하였다. 자기때문에 집주인이 봉변을 당하게 되자 천정에 숨어있던 박현숙은 더 참아내지 못하고 《나 여기 있다.》고 하면서 경관들앞에 뻐젓이 나타났다. 그는 감옥에 끌려가 살점이 뭉청뭉청 떨어져나가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면회를 오면 떡함지에 혁명가요를 써서 내보내주는 식으로 오히려 감옥밖의 인민들과 동지들을 고무해주었다. 그후 경찰은 그를 석방하였다.

박현숙이 최형준과 결혼잔치를 하는 날에는 공산당녀자가 시집을 어떻게 가는지 보자고 하면서 백초구경찰들이 무슨 낌새라도 맡으려고 3명이나 끼여들어 술을 얻어마시고 신부에게 노래까지 청하였다. 《새별눈》은 그 요청을 받고 혁명가요를 냅다 불렀다. 취중에 신부의 노래를 들은 경찰들은 그것이 혁명을 선동하는 노래인줄도 모르고 공산당녀자가 대단한 명창이라고 하면서 재청까지 요구하였다.

박현숙의 남편 최형준도 혁명에 충실한 사람이였다. 남부럽지 않게 가정생활도 하고 투쟁도 잘하였는데 그만 불행하게도 총에 맞아서 절름발이가 되였다. 그다음부터는 지방공작에서 종전과 같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타고 다닐 말이 있는가. 자동차가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절름거리면서 먼길을 왔다갔다하다나니 남보다 일을 축내지 못할것은 뻔하였다. 그런데 《숙반》지도부는 그에게 《소극분자》라는 간판을 붙이고 《민생단》으로 걸어 학대하고 감시하였다. 박현숙도 《민생단》의 안해라는 리유로 지도간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런 때에 그가 리혼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새별눈》을 타일렀다. 《민생단》문제는 일시적인것이고 어느때든지 해결될 문제이다, 최형준은 처음부터 지하공작을 잘하던 사람이고 유격구에 들어와서도 투쟁을 잘하던 동무가 아닌가, 그는 리론수준도 있는 혁명가이다, 그런데 왜 리혼하려고 하는가, 옳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후 우리는 박현숙을 쏘련으로 들여보내였다. 《새별눈》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반《민생단》열파로 초목마저 떨던 왕청시절을 어떤 심정으로 회상하겠는지 모르겠다.

유격구의 인민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다 동요하였다. 혁명이라는것이 그저 그렇더라, 걸핏하면 저희들끼리 서로 죽일내기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고 그저 그 모양이더라, 조선사람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간도땅에서 농토도 개척하고 혁명도 개척했는데 그 선구자들을 다 잡아죽이고 줴내깔리니 이게 도대체 무슨놈의 심보인가, 이거야 령도권을 잡기 위한 숙청이 아니고 무엇인가, 권력을 위해서 지난날의 의리나 인연마저 다 저버리고 자기편을 서슴없이 학살하는것이 혁명이라면 이따위 혁명은 해서 뭘해, 이런 도깨비놀음을 할바엔 차라리 처자권속을 거느리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든가 하다못해 산중에 들어가 중이 되여 목탁이라도 두드리며 돌아다니는게 낫지 않겠는가고 사람들은 쓴입을 다시며 생각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미친바람은 이처럼 사람들의 인생관과 혁명관에 녹이 쓸게 하였다.

무의식군중들은 자연히 혁명을 버리고 적구나 무인지경으로 도주하게 되였다. 혁명을 하려고 왔다가 혁명한테서 구박을 당하고 허공중에 뜬 신세가 되였으니 그들이 깃을 붙이고 살아갈곳은 과연 어데란 말인가. 혁명이란 살기 위해서 하는것이지 죽기 위해서 하는것은 아니다. 살아도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해서 하는것이 혁명이며 죽어도 정의를 위해 한몸을 아낌없이 바치다가 싸움터에서 값있게 죽어 영생을 얻는것이 혁명이다.

그런데 영생이 다 무엇인가. 혁명가들은 어제날까지 한가마밥을 먹던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도살당하였다.

그러기에 해방후 나는 반《민생단》투쟁때문에 적구로 내려가서 《귀순》한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선포하였다. 혁명을 하고싶어도 할수 없게 만드는 인간들한테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유격구를 결별한것이 어떻게 죄로 될수 있겠는가.

무지한 살륙으로 하여 왕청의 강들과 고동하의 물이 선혈로 걸어지고 간도의 어느 골짜기에서나 통곡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사충항도 간도땅을 결별하였다. 나는 가겠다, 여기서 이이상 더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살지 못하겠다, 공산당이 정치를 하는곳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수 있단 말인가, 동만당지도부가 공산당을 망신시킨다고 하면서 북만으로 가버리고말았다.

나는 반《민생단》투쟁의 엄중성을 간파하고 진상을 더 구체적으로 료해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그 당시 요영구인민들은 적들의 《토벌》이 심하였기때문에 수림속에 들어가 토굴집을 짓고 살았고 혁명군은 유격구어귀에 병실을 짓고 생활하면서 인민들을 보호하였다. 유격대병실에서 마을까지는 15리쯤 가야 하였다.

내가 전령병들을 데리고 마을에 올라가 로인들과 담화를 하고있을 때 홍혜성이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로인들과의 담화를 끝내자 그를 만나보았다.

《지휘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너무합니다. 이거야 어디 억울해서 견디겠습니까. 왕청땅에 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왔는데 이 마음고생만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겠습니다. 간도땅에서 이런 성화를 받으면서 혁명을 할바에는 차라리 국내에 나가서 지하투쟁이나 합시다. 여기서처럼 유격근거지 같은것은 창설하지 못해도 지하투쟁 같은것이야 얼마든지 할수 있지 않습니까. 필요한 공작비는 약방을 운영하는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보장해드리겠으니 조선으로 나갑시다.》

홍혜성은 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사래질로 그에게 음성을 낮추라고 신호하였다.

《혜성동무, 지금이 어떤 때인데 그런 소리를 탕탕 하오.》

《장군님을 믿고 하는 말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그런 말은 삼가하는것이 좋겠소.》

나는 홍혜성의 고백을 듣고 서글픈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홍혜성이마저 유격구를 떠나려고 결심하였다면 이 왕청땅에 남아서 혁명을 계속할 인물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암담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유격구를 열렬히 사랑해온 처녀였다. 유격구도 그에게 큰 애정을 부어주었다. 그는 대담한 지하공작원인 동시에 생기발랄하고 열정적인 아동들의 스승이였으며 면허증은 없으나 진단을 잘 내리고 치료를 잘하는 비전임의사이기도 하였다.

동만당지도부와 왕청현당의 간부들가운데는 그의 치료를 받고 3년묵은 옴병을 뗀 사람들도 있었다. 옴을 뗀 사람들은 누구나 홍혜성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간부들도 그를 재간둥이라고 칭찬하였다.

홍혜성은 자기야말로 유격구에 필요한 존재이며 더우기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그가 돌변하여 나에게 탈출을 호소한것이다. 처녀는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민생단》으로 처형될수 있었다. 그가 나를 믿고 자기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한것은 고마운 일이였다. 유격구의 공기가 얼마나 살벌했으면 그처럼 열정에 넘치고 투쟁욕으로 충만되였던 홍혜성이 탈출까지 결심하였겠는가. 동지들의 주검으로 뒤덮인 이 간도땅은 그에게 있어서 이전날 그렇게도 순정을 바쳐 사랑하던 별천지도, 보금자리도 아니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들일수 없었다.

《혜성동무, 그래서는 안되오. 나 하나가 죽고사는것은 문제가 아니요. 혁명이 망하는가, 흥하는가 하는 이 대목에 와서 고난을 참지 못하고 쉬운 길을 택한다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할수 있겠소. 고통스럽고 진절머리가 나더라도 여기서 〈민생단〉문제를 수습하고 투쟁을 계속해야 하오. 이것만이 혁명가가 갈 길이고 혁명을 구원하는 길이요.》

내가 이런 의사를 표시하자 홍혜성은 눈물을 씻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무도 막막해서 그런 말을 했으니 용서하십시오. 난 그 말을 하고싶어 북만에 가신 장군님을 그냥 기다렸습니다. 나뿐이 아니랍니다.

사람들은 〈민생단〉감옥에서도 대장동지를 찾았습니다. 김대장이 언제 돌아오는가, 김대장한테서 소식이 없는가, 김대장한테 동만의 소식을 전달할 방법은 없는가고 하면서 대장동지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북만원정대가 다 죽었다는 소문만 자꾸 나지 않겠습니까. 일본놈들도 그렇게 신문에 내구요.》

홍혜성은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가슴에 두손을 포개여 얹었다.

나는 그의 눈굽에 맺히는 피방울 같은 눈물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은 자책을 느끼였다.

홍혜성의 말은 나로 하여금 조선의 혁명가로서 자기에게 지워진 책임을 두고 심각한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혁명이 이 모양, 이 꼴대로 타살되고마는가, 아니면 부활하여 다시 일어서는가 하는 엄숙한 시점에서 만일 수천수만의 생령들을 위협하는 《숙반》의 무분별한 살인망동을 저지시키지 못한다면 나자신도 조선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으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반《민생단》투쟁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회의를 소집할것을 동만당지도부에 제기하였다. 만주성위의 순시원도 때를 같이하여 이러한 회의소집을 발기하였다.

며칠후 나는 한장의 통신문건을 받았다. 그것은 다홍왜에서 동만지방 군정간부들의 련석회의를 소집한다는 통지서였다.

출발을 앞두고 나는 작식대병실을 찾았다. 몇달째 《민생단》혐의를 받고 울적해한다는 홍인숙어머니를 만나 북만에서 마련해가지고 온 옷감을 선물하려는것이였다. 《민생단》혐의자에게 선물을 주면 대장도 《숙반》지휘부 사람들에게 걸려들수 있다고 전우들이 경고하였으나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하였다. 인도주의가 죄로 될수 있다니 그게 될말인가.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16 19:43:2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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