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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MP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8장 5. 마촌작전 36,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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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02 19:3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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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3 권 제8장 5. 마촌작전 (제4회) 36-65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 3 권 제8장 5. 마촌작전 (제5회) 37-65

 

 

 

 

3 권 제8장 5. 마촌작전 2부

 

 

 

 

적들은 1933년 11월 17일에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3개 방향에서 소왕청유격구를 포위공격해왔다. 성난 이리떼처럼 눈에 살기가 잔뜩 어린 <야마도>의 후예들은 생나무라도 물어뜯을 험악한 기세로 유격구에 달려들었다. 그 오만하고 도도한 기세란 실로 왕청땅을 열다섯번쯤 탕치고도 남을만한것이였다.

대<토벌>은 엄혹한 동기조건에서 파상식으로 지독스럽게 감행되였다. 적의 비행대들은 군정지도기관들이 자리잡고있던 마촌과 리수구를 연거퍼 폭격하였다. 전술도 이만저만 악착스러워지지 않았다. 적들은 유격구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토벌>로부터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점령지역안의 모든 생명체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일체 부동산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불사르는 지독한 전술이였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와 인민은 일심동체가 되여 유격근거지를 영웅적으로 사수하였다.

적아의 공방전이 가장 치렬하게 벌어진곳은 유격구의 관문인 뾰족산과 마반산 쑥밭골초소였다.

뾰족산과 마반산을 지키던 3중대와 반일자위대는 적을 20메터 안팎의 근거리에까지 접근시킨 다음 불의적인 집중사격과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족족 모조리 소멸하였다. 적들은 파도식으로 악착스럽게 달려들었으나 유격구의 전초진지를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하였다. 마반산계선의 방위자들은 높은 속도의 기동력으로 유격구를 우회공격하는 적기병들을 대왕청하 굽인돌이에서 통쾌하게 섬멸하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련속 투입되자 우리는 전면적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이것은 여러가지 전투형식으로 적의 병력을 끊임없이 소멸하고 주동에 서서 교전상대를 싸움에 부단히 끌어들임으로써 적에게 일분일초의 안정도 허용하지 않는 특이하고 자유분방한 전법이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전투형식을 제때에 택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인 방어전술에만 매여달렸더라면 유격대는 수적우세와 전투기술기재의 우세를 믿고 거마리처럼 악착스럽게 달라붙는 적의 공격앞에서 지리 멸렬되였을것이다.

우리가 제시한 새로운 전술적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종심깊이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법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게 때리였다.

불무지작탄전이라는것은 코흘리는 아이들도 할수 있는것이였는데 그 효률이 100프로였다. 우리는 진지를 옮길 때마다 다음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들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우리의 방어진을 차지하기 바쁘게 불무지앞에 모여들어 언몸을 녹이군하였다. 그럴 때마다 작탄이 폭발하여 적들을 요정냈다. 오백룡의 넷째동생 오룡석도 자위대에 망라된 녀자들과 함께 뾰족산 중앙보초소에서 이런 방법으로 적들을 살상하였다.

우리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속에 들여보내여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 같은데 총을 서너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군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루밤사이에도 세번, 네번, 지어는 다섯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우리의 련속적인 기습에 겁을 먹은 적들속에서는 전쟁정신병자까지 발생하였다.

어떤 적병들은 유격대원들이 뿌린 <일본병사들에게 격함!>, <위만군병사들에게 격함!>과 같은 선전문을 보고 우리측으로 투항해오기도 하였다.

포수들도 화승대를 들고 전장에 달려나왔다. 나이많은 령감들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사격술은 대단하였다. 적장교들만 골라가며 쏘아눕히는 그 탄복할만한 솜씨는 현대저격수들의 솜씨와도 견줄수 있었다.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연방 전호로 들락날락하였다. 열살안팎의 아이들도 싸움터에 찾아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마촌작전과정에 이채를 띤것은 돌벼락작전이였다. 유격구의 군대와 인민은 뾰족산과 같은 전초진지들에 돌무지들을 마련하였다가 <토벌대>가 달려들 때마다 무리죽음을 안기군 하였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놓는 벼락치는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저지시키는데서는 이 돌벼락작전이 매우 큰 은을 내였다.

마촌작전이 낳은 영웅들가운데는 <13련발>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격대원도 있었다.

 <13련발>은 왕청지방에서 모험청년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였다. 그가 모험가로 소문나기 시작한것은 공청조직의 위임을 받고 두만강변의 어느 세무서에 가서 무기를 탈취해온 때부터였다. 그는 세무서에 가서도 나으리들 안녕하십니까, 나는 조선청년이올시다, 공청원이올시다 하고 자기 소개를 한 다음 권총을 빼들고 여유작작하게 벽에 걸려있는 보총을 세자루나 로획하였다. 그런 다음 전화로 경찰관주재소를 호출하여 네놈들은 무엇들 하고있는거야, 지금 여기에 공산당이 나타났다. 빨리빨리 총동원해서 오라고 호통질했다. 경찰관주재소에서는 사건현장에 기마경찰대를 급파하였다. <13련발>은 하마터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번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이와 비슷한 모험을 자주 되풀이하였다. 공청조직이 그에게 어떤 비판을 했으리라는것은 여기에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이 <13련발>이 쑥밭골초소에서 항일혁명사의 한페지를 당당하게 차지할만한 위훈을 세웠다. 쑥밭골에는 10여명으로 구성된 방차대가 상시적으로 주둔하고있었다. 그 방차대의 책임자가 바로 <13련발>이였다. 그는 소대장 겸 이 대에 조직되여있는 공청소조의 책임자였다.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으로 이루어진 <토벌대>의 대집단은 밤중에 은밀히 쑥밭골을 포위하고 초소에 달려들었다. 방차대는 새벽부터 치렬한 싸움을 벌리였다. 그들은 귀틀집초소의 일각이 불타서 무너질 때까지 일곱차례나 되는 적의 돌격을 물리쳤다. <13련발>은 탄우속에서 공청소조회의를 열고 이렇게 호소하였다.

 <동무들, 우리의 뒤에는 유격근거지가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 만일 여기서 한치라도 뒤로 물러선다면 우리는 조선청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있을 자격이 없다. 몸이 열백번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사적으로 초소를 지키자!>

적개심에 불타는 방차대원들은 총창을 꼬나들고 적들의 무리속에 뛰여들어 백병전을 벌리려고 하였다. <13련발>도 그런 충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날 개인영웅주의, 모험주의의 병집 때문에 사람들의 말밥에 올랐던 이 용감무쌍한 싸움군은 이처럼 혈전속에서 자기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줄 아는 세련된 지휘관으로 성장하였던것이다.

우리가 응원부대를 이끌고 쑥밭골에 달려갔을 때 그는 열세발의 총탄을 맞고 초소에 쓰러져있었다. <13련발>이란 별명은 여기에서 유래된것이였다. 방차대성원들중에는 일곱군데, 세군데, 두군데의 부상을 당한 전투원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도 <7련발>, <3련발>, <2련발>이란 별명이 붙었다.

왕청사람들은 그를 이름대신 <13련발>이라고 불렀다. 나도 역시 그렇게 불렀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본명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아득히 사라져갔다.

그의 본명은 밝히지 못하는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본명보다도 항일전쟁이 만들어낸 <13련발>이라는 별명이 독자들에게 더 좋은 여운을 안기게 될것이라는데서 나는 위안을 얻는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치렬해졌다. 일본군의 포화에 재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군사인원과 비군사인원, 어른들과 아이들, 남자들과 녀자들을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죽이였다. 동기 <토벌>은 소왕청에서 수백명의 희생을 내였다.

우리가 십리평 다섯째섬 목재막앞에서 부대를 데리고 전투를 하고있을 때 피난민옷차림을 하고 보초소를 통과한 일본군은 마촌에서 대왕청으로 이동하는 인민들의 뒤에 달려들어 기관총을 퍼부어댔다. 이 습격에서만도 우리는 수십명의 군중을 잃었다. 밤중에 두천평마을을 포위한 적들은 기관총집중사격으로 잠든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였다. 유격구에서 연극대본을 잘 쓰던 구청년단서기 백일통이네 가족도 모두 죽었다. 그 해 <토벌>에 소왕청의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유격구형편이 최악의 상태에 달했을 때 리수구골안에는 1,500여명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어있었다. 그 피난민들을 대왕청으로 빼돌리느라고 유격대원들은 그때 참으로 형언할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 어떤 때는 대왕청으로 흐르던 피난민의 행렬이 적의 불의습격에 두 토막으로 동강나 서로 종적을 찾느라고 온종일 산판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하루종일 팔에 애기들을 안고 혁명군중을 엄호하였다. 다른 유격대원들도 싸움을 하면서 로약자들을 부축해주었다. 지금 우리 군대와 인민사이에 흐르는 군민일치의 시발점이라고 할수 있는 눈물겨운 화폭이 이렇게 엮어졌다. 그 화폭을 이룬 한점 한점이 다 피였고 눈물이였다.

피난민들을 데리고 리수구에서 십리평으로 가던 그날의 정경을 회고하면 지금도 목에서 겨불내가 나는것 같다.

피난민들가운데는 <토벌>을 겪느라고 20일동안이나 낟알구경을 하지 못하고 콩깍대기와 무우시래기 같은것으로 끼니를 이어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십리평에 가서도 쌀이 없어 소가죽을 삶아먹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의 해를 쳐다볼 힘도 없던 그 기아의 해들에 유격구인민들이 먹던 <음식>을 후대들앞에 전시한다면 그들은 선렬들이 체험한 그 인간이하의 주림앞에서 눈물을 금치못할것이다.

김명숙(연길)은 유격구시절에 보리고개를 넘기지 못해 생때 같은 두 자식을 잃고 자기도 죽을번했다. 한주일 이상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는 자식이 굶어죽은것을 보고서도 밖에 내다가 묻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두막에 그냥 누워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이 없었던것이다. 이웃들이 와서 시신을 오두막에서 끌어냈지만 땅에 묻지 못하고 가랑잎만 덮어주었다. 그들도 김명숙이처럼 한주일씩 굶은 사람들이여서 땅에 구뎅이를 팔 힘이 없었던것이다.

해방된 조국땅에 돌아와 첫 쌀밥을 먹을 때 김명숙은 두자식을 앗아간 유격구시절의 보리고개를 회상하며 슬피 울었다.

처창즈유격근거지에는 어랑촌전투때 적의 기관총탄알을 여덟군데나 맞고 두개골이 빠개져서 뇌수가 드러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그 검질긴 생명 때문에 그는 <팔련발>이라는 별명을 벌었다. 총탄 여덟발을 맞고서도 살아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팔련발>도 동남차정부에서 일하다가 굶어죽었다. 그는 죽기전에 동지들을 향해 이런 절규를 하였다.

 <차라리 적의 탄알을 여덟알 맞았을 때 죽었더라면 영웅이라는 이름이라도 남겼을텐데 여기서 억울하게 굶어죽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적들은 유격구들을 총검으로 봉쇄하고 그 울타리속에서 인민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그때 참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그 시절에 당한 희생은 지금도 우리 민족의 심흔속에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일본지배층은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죄행을 두고 도덕적으로 심심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반성은 수치도 아니고 굴욕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리성적으로 재정돈하는 과정이며 완성에로 이끄는 과정이다. 눈을 감는다고 력사가 스스로 인멸되는 법은 없다. 일본이 구가하고있는 고도성장의 비단이부자리우에 조선민족의 피가 배여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일본도 이방인들의 철화에 생명을 잃고 사랑하는 누이와 딸들이 강점군들에게 정조를 강탈당하는 국난을 체험하지 않았던가.

적들은 만신창이 되여 허덕이면서도 검질기게 늘어붙어 장기전을 기도하였다. 인원도 무기도 식량도 공급받을데가 없는 우리를 장기전의 함정에 빠뜨려 얼어죽고 굶어죽게 하려는것이였다.

전국의 결정적인 전환만이 유격대와 유격구인민들을 구원할수 있었다. 유격구방위전과 함께 적들의 종심에서 강력한 교란작전을 벌리는것만이 유격구와 인민들을 보위하는 유일한 출로였다.

원래 나는 왕청에 온 초기부터 유격구사수에만 매달리는 방어일변도의 경향을 반대하였다. 다시말하여 적들의 력량이 분산되였을 때에는 우리가 힘을 합쳐 적들을 습격소멸하고 적들이 력량을 집결하여 우리한테로 쳐들어올 때에는 반대로 우리가 력량을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자는것이였다. 이러한 전법을 피실격허의 전법이라고도 말했다. 이렇게 활동해야 근거지도 고수하고 부대의 력량도 보존할수 있었다.

그러나 동만당과 현당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간부들은 적들이 집결해서 쳐들어올 때에는 무턱대고 우리가 집결해서 적을 방어해야 유격구도 지켜내고 인민들도 보호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가지 리론이 전술상 문제로 대치되여 나중에는 어느 주장이 진실로 맑스주의적인것이고 어느것이 비맑스주의적인것인가 하는 어마어마한 론난까지 빚어냈다.

그들이 우리의 리론을 비맑스주의적인것으로 해석하고 나아가서는 현실도피적이고 투항주의적인것으로 평가하므로 우리도 그때 날을 세워가지고 적구교란론의 정당성을 완강하게 고집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력량을 집결한다고 하여도 적을 감당할만한 힘은 못된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인민들을 사방에다 피난시키고 유격대도 일부만 남겨 여기저기서 뚱땅거리게 하자. 그러는 사이에 유격대의 나머지력량은 분산되여 적후방을 교란시키자. 가령 총을 멘 대원 10명이 적구로 나간다고 하자. 그 열사람이 30~40명의 총없는 청년들을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적의 약한 고리들을 자꾸 답새기면 총도 얻고 먹는 문제도 해결할수 있다.

많은 동무들이 당시의 정황을 리성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고 다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일부 완고덩이들은 그것을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슨 활동년조를 뽐내면서 <젊은 사람들이 투쟁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것이 좋다. 적이 쳐들어올 때 군대가 유격구밖으로 나간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은 인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군대만 살고 보자는 사상이다.>라고 터무니없는 까박을 붙이였다.

유격근거지가 초토화되고 희생자와 전사자들이 속출하자 나는 동장영, 리상묵, 송일을 비롯한 특위와 현의 간부들을 만나 적후교란전을 벌릴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제는 모든것이 마지막계선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다가는 우리도 죽고 인민들도 다 죽고만다. 가면 어데로 가겠는가? 자꾸 쫓겨서 산으로만 들어가는데 수림속으로 그냥 들어가면 집도 없고 먹을것도 없다. 쫓기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인민들을 보호할수도 없다. 동무들이 유격대와 같이 적을 격퇴시킬수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막연한 일이다. 당장 오늘밤이라도 유격대를 서너패로 나누어 적구에 내보내야 한다. 적구에 나가서 후방근거지들을 몇군데만 답새기면 <토벌대>들이 반드시 소왕청에서 퇴각한다.>

동만의 다른 유격구들도 그무렵에는 소황청과 비슷한 고전을 겪고있었다. 훈춘사람들은 밀려서 금창과 화소포 쪽으로 갔고 왕우구사람들은 다홍왜와 삼도만 방면으로, 화룡현사람들은 처창즈방면으로 각각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간부들은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래서 나는 적구교란론을 재차 상정시키고 <군대는 내가 책임졌으니 내 결심대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다음 유격대원들을 모여놓고 말했다.

 <우리는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 누가 적구로 가겠는가? 갈 사람은 나를 따라서라. 많이 요구하지 않는다. 절반만 적구로 나가고 절반은 유격구에 남아 인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적구로 나갈 사람들은 나와 같이 오늘밤중으로 포위망을 뚫자. 포위망만 뚫으면 살길이 열린다. 적의 거점들과 지탱점들을 련이어 들부시면 소문이 난다. 소문을 내면서 여기에서도 치고 저기에서도 치면 후방이 녹아날가봐 산골안에 들어왔던 <토벌대>들이 달아난다.>

이렇게 되여 유격대는 두패로 갈라졌다. 한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십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패는 내가 데리고 적구로 나갔다. 1,500여명에 달하는 근거지인민들은 공청원들의 인솔하에 라자구로 소개하였다.

우리는 병중에 있는 동장영을 묘구방면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할데 대한 임무를 최금숙에게 주고 예비식량까지 다 모아서 그의 배낭속에 넣어주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상면이였다.

나는 그날 저녁으로 유격대의 한 개 편대를 데리고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우리가 예견했던대로 적후방은 오히려 텅 비여있었다. 우리가 도시주변의 첫 부락에 들렸을 때 그 마을사람들은 설준비를 하느라고 한창 음식을 만들고있었다. 그들은 유격근거지에서 일제의 <토벌>에 다 죽은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고 하면서 교즈와 기장떡과 같은 설음식으로 우리를 푸짐히 대접하였다. 그날밤 오백룡소대의 김생길이라는 대원은 교즈를 140개나 먹고 배가 아파 죽을번하였다.

그 다음날은 너무 피곤하여 보초를 세우고 하루종일 대원들을 재웠다. 몇달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혹한속에서 고생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잠을 늘어지게 자고나니 눈곱이 다 나오고 얼굴빛이 환해졌다.

우리는 다음날부터 적들을 답새기기 시작했다. 전술은 자그마한 <토벌>거점들에 대한 습격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에 비교적 큰<토벌>거점들에 대한 공격을 배합하는것이였다.

맨 처음으로 친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우리의 벼락 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지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올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 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산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사이의 철길을 끼고있는 주요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토벌대>로 변장한 우리는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의 조로 나누어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 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일전의 출반지점으로 퇴각하였다. 적들은 <암>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연 석달동안 유격구의 존립을 위협하던 동기<토벌>의 운명은 서산락일로 끝나고말았다.

편이상 마촌작전이라고 불렀던 소왕청근거지방위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그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임과 라이프찌 히공판, 쏘미외교관계수립으로 소란스럽던 세계의 일각에서 소문없이 생겨난 하나의 기적이였다. 소왕청유격구방위자들의 영웅적위훈과 고난으로 얼룩진 그들의 행적을 방불하게 그려낼수 없는것이 유감스럽다.

우리는 이 승리를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었다. 수백명의 생명이 적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제일 애석한것은 최금숙과 동장영을 잃은것이다.

나를 친동생처럼 그렇게도 사랑해주고 돌봐주던 최금숙, 우리가 적구에서 돌아올 때 개선용사들을 향해 눈물을 뿌리며 달려오던 유격구인민들속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령병이 메고온 나의 배낭속에는 그에게 선물할 손거울이 있었다. 다른 부녀회원들에게 줄 전리품도 여러 마대가 되였다.

이 겨울에 우리 부녀회원들이 유격구를 지키기 위해 고생인들 얼마나 많이 하고 눈물인들 얼마나 많이 흘렸던가. 그들이 밥인들 얼마나 많이 짓고 풀뿌린들 얼마나 많이 캐였던가. 길안내를 강요하는 적들을 유격대가 없는 딴 방향으로 유인하여 골탕먹이고 총살당한 혜숙이와 영숙이! 지휘부가 자리잡은 벼랑턱으로 적들이 기여오를 때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연방 웨쳐대며 원쑤들을 자기에게로 유인한 최창범의 숙모!…

어찌 계월향이나 론개만 조선의 렬녀이고 애국자이겠는가.

하지만 나의 때늦은 정성은 최금숙의 손에까지 닿지 못하였다. 적들은 내가 일생에서 유일하게 누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단 한명밖에 없는 녀성,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죽지 말고 싸우자고 말하면 오히려 자기는 불로장생하는데 대장이 몸을 돌보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하던 녀성을 이렇게 앗아갔다.

동장영의 죽음도 나에게 있어서는 가슴아픈 손실이였다. 그는 나를 사랑해주고 나의 사상을 존중해주던 중국동지들가운데서도 가장 잊지 못할 전우의 한사람이였다.

나는 그와 함께 중요한 로선문제를 두고 론쟁도 많이 하였다. 고집이 좀 세여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그러한 견해상의 차이가 우리의 우정에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늘 조선사람들가운데서는 내가 제일 믿음이 간다고 하면서 무척 나를 위해주었다.

우리는 대두천전투후 요영구방향으로 철수했다가 마촌에 돌아와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를 총화하였다. 그때 마촌에서는 소개지에서 돌아온 인민들이 재더미우에 집을 일떠세우고있었다. 어떤 로인은 유격구에 들어온후 70번째로 집을 짓는다고 하였다. 살아도 유격구에서 살고 죽어도 유격구에서 죽겠다고 결심한 간도인민들의 생명력은 이처럼 억척스러운것이였다.

이런 인민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더라면 우리 유격대는 적의 대<토벌>을 격파하지 못하였을것이다. 마촌작전의 승리는 군민일치의 열매이며 인민항쟁의 결실인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곤난을 맞받아나가는 우리의 공격정신과 그에 기초한 우리식의 변화무쌍한 전법은 마촌작전의 승리를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였다.

마촌작전의 전과정은 혁명정권의 토양우에서 백절불굴하는 우리 민족의 의지와 기개를 안고 거목처럼 우뚝 솟아오른 유격구정신의 연소과정이였다. 이 정신은 비행기나 대포로써도 정복할수 없는 견인불발의 힘을 가지고 소왕청의 한치한치를 피로써 지켜낼수 있게 하였다.

마촌작전을 통하여 적들은 심대한 군사정치도덕적참패를 당하였다. 그대신 우리 혁명군의 군사적권위는 비할바없이 부각되였다. 우리는 이 작전을 통하여 유격전법의 골격이 될수 있는 새로운 전법들을 무수히 창조하였으며 장차 대부대활동에로 이행할수 있는 군사조직적, 전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항일유격대는 적의 어떤 침공도 격파할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게 되였다.

마촌작전은 소왕청을 고수함으로써 린접현의 유격구들에 가해진 위기를 해소하는데도 기여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조선혁명을 앙양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하였다. 1211고지를 사수한 영웅전사들의 방위정신을 바로 1930년대에 탄생한 유격구정신에 뿌리를 두고있다. 우리는 지금도 이 정신을 지니고 제국주의의 포위속에서 우리 식 사회주의를 빛내이며 일로매진하고있다.

항일전쟁의 포화속에서 탄생하고 련마된 유격구정신을 압도할 힘은 이 세상에 없다. 이 정신을 가지고있는 한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앞으로도 영원히 필승불패의 길을 걷게 될것이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02 19:34:3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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