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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4 7. 최후결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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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28 16:5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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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4 7. 최후결전의 날

  

   



7. 최후결전의 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전후에 쏘련을 방문하시였을 때였다. 크레믈리궁전에서 우리 수령님을 영접한 쏘련공산당의 책임일군은 그이께 자기 나라 간부들을 차례차례 소개해드리였다.


그 간부들속에는 당시의 쏘련국방상이였던 말리놉스끼원수도 있었다. 말리놉스끼는 자기 차례가 되자 웃는 얼굴로 《우리는 이미 구면이니 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원동에 계시던 시절에 우리는 벌써 하바롭스크에서 첫 상봉을 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옳습니다. 우리는 오랜 전우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와 뜨거운 악수를 나누시였다.


두 나라의 지도간부들은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김일성동지와 말리놉스끼의 인연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였는가. 하바롭스크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일본제국주의를 격멸하고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최후결전의 준비는 히틀러독일이 패망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였습니다.


1945년 2월 얄따에서는 쏘, 미, 영 3개국 수뇌자들이 모여 비밀회합을 하였습니다. 1945년 2월이면 쏘련군이 웽그리아의 수도 부다뻬슈뜨를 해방했을 때이며 베를린에 대한 총공격전을 준비하던 때입니다. 독일의 패망은 시간문제로 되고있었습니다.


쏘, 미, 영 수뇌자들이 얄따에서 론의한 중심의제의 하나는 독일패망후 쏘련의 대일참전문제였습니다. 회의에서 쏘련은 독일 패망이후 2~3개월이 지나 대일전쟁에 참가하기로 하였습니다.


얄따회담에서 쏘련의 대일참전문제가 확정된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동방피압박민족들과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고무로 되였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다그쳐나갔습니다.


쏘련군이 베를린해방작전을 시작한 때로부터 얼마쯤 지나서 원동전선군 사령부는 우리에게 독일의 패망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국제련합군에 망라되여있던 쏘련군장병들은 그날 온밤 자지 않고 축하연을 벌리였습니다. 후방창고에 있던 술이란 술은 아마 그때 다 마셔버렸던것 같습니다. 군의소의 알콜도 하루밤사이에 결딴났습니다. 쏘련사람들이 원래 술을 많이 마시였습니다. 쏘련사람, 조선사람, 중국사람의 구별이 따로없이 모두가 전승의 기쁨에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우리는 쏘련의 승리를 우리모두의 승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딸리아의 패망이 독일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패망이 조만간에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리라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습니다. 독일의 패전은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전주곡이라고도 볼수 있었습니다.


한때 그렇게도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던 파쑈세력은 동서방을 무대로 하여 무덤에로 가는 이어달리기를 하는셈이였습니다. 이제 그 계주봉을 일본이 받아쥘 참이였습니다.


우리도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고 조국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대독전승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은 후 련합군에 망라된 조선인지휘성원들은 한데 모여 조국해방과 관련된 작전문제를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였습니다. 정식으로 소집한 회의는 아니였지만 분위기가 아주 진지하고 엄숙했습니다. 모두가 격정에 넘쳐 일제격멸과 조국광복을 부르짖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로 쳐들어갈 기세였습니다.


론의의 초점은 자력독립과 전민항쟁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한다는 확고한 주체적립장을 튼튼히 견지해야 한다,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해방하자면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군사적위력을 백방으로 강화하고 국내의 항쟁조직들을 잘 준비시켜 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작전을 벌릴 때 그에 합세해서 전인민적인 항전을 벌려야 한다,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의 군사적련계를 강화하고 쏘련의 전반적대일작전과의 깊은 련관속에서 협동작전준비를 잘해나가야 한다는것이 그날 우리가 론의한 요점이였습니다.


그후 나는 쏘련과의 군사정치적협동문제를 두고 쏘련원동전선군 지휘부와 여러차례에 걸치는 협의를 하였습니다. 어떤 때에는 주보중이나 장수전과 함께 가기도 했고 어떤 때는 김책이나 최용건을 데리고 따로 가서 협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있을수 있는 일본의 침공에 대처하여 쏘련은 그동안 대일작전을 내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해왔습니다. 이런 준비는 독일패망 이전에도 했고 이후에도 하였습니다.


쏘련지도부는 독일과 힘겨운 전쟁을 하고있던 주체32(1943)년경에 총참모부의 원동담당 부문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원동의 무력을 전시작전수행에 알맞게 개편하였다. 쓰딸린은 원동전선사령관과 집단군사령관들을 대독전쟁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장령들로 교체하였다.


원동전선사령관 아빠나쎈꼬가 모스크바남방의 워로네쥬전선 부사령관으로 파견되여가고 그 자리에 깔리닌전선 사령관이였던 뿌르까예브가 소환되여온것도 그런 조치의 일환이였다.


쓰딸린은 주체33(1944)년에 들어와 쏘련군이 쏘련경외의 동구라파땅에서 군사작전을 적극화하고있던 때에도 원동지역에 병력을 급속히 증파하여 그 군력을 최대한으로 늘여나갈데 대하여 명령하였다.


쏘련은 독일이 괴멸된 후에 대일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작전방향과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쏘련군대와의 련합을 전제로 하는 계획이였습니다.


쏘련의 고위지휘성원들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모든 부대들은 박두한 대일작전을 앞두고 종전보다 훈련강도를 몇배나 높이였습니다. 그때에 벌린 군사훈련은 국제련합군을 구성하고 있는 매개 민족부대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그 모든 민족부대들이 다가올 대일련합작전에서 보조를 잘 맞출수 있도록 하는데 큰 관심을 돌리였습니다.


련합작전이 은을 내자면 국제련합군에서 민족부대별로 되는 작전분담은 어떻게 하고 각 군종, 병종간의 전투적협동과 보조를 어떻게 맞추는가 하는것이 중요했습니다. 국제련합군의 군사훈련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응당한 힘을 넣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은 이와 함께 다년간의 항일전쟁에서 창조하고 련마해온 유격전법들을 완성하고 그것을 대규모정규작전에서 효과적으로 구사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서도 꾸준하게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훈련을 다같이 내밀면서도 조국해방작전에 절실히 필요한 정찰훈련, 공병훈련, 무전훈련과 항공륙전대훈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쏘련군대가 대독전쟁기간에 창조한 최신전쟁경험도 충분히 연구하고 익히였는데 그 수준이 대단했습니다.


국제련합군이 갓 조직되였을 때 훈련기지에 파견되여온 쏘련교관들은 대부분 지난날의 공민전쟁참가자들이였습니다. 그러나 대일작전을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그무렵에는 쏘독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교관으로 와있었습니다. 몇해동안 현대전에서 단련된 사람들이니 교육내용도 매우 참신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국내항쟁조직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조국에 공작원들을 수많이 파견하였습니다. 백두산밀영과 간백산에도 우리 공작원들이 나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거기에 틀고앉아 항쟁조직들을 지도하고있던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최후결전준비를 다그쳐나갔습니다.


나도 그무렵 국내에 나와서 당면한 대일작전과 관련하여 국내에 있는 부대들의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쏘련의 전반적대일작전준비와 우리의 작전계획을 일치시키기 위한 사업에 많은 시간을 바치였습니다.


쏘련은 1945년 여름에 와씰렙스끼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원동쏘련군총사령부를 조직하고 거기에 3개의 큰 전선군을 배속시켰습니다. 자바이깔전선군은 말리놉스끼가 담당했고 제1원동전선군은 메레쯔꼬브가 담당했으며 제2원동전선군은 본래 원동전선사령관이였던 뿌르까예브가 담당하였습니다.


제1원동전선군의 기본작전지역은 할빈이남의 중국동북 일부 지역과 조선이였고 제2원동전선군의 작전지역은 하바롭스크서쪽에 있는 동북지역이였습니다.


원래 국제련합군은 제2원동전선군에 배속되여 군사작전을 하게 되여있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주로 제1원동전선군과 련계를 가지였습니다. 원동쏘련군총사령부가 조직된 다음부터 나는 제1원동전선사령관 메레쯔꼬브, 군사위원이였던 스띠꼬브와 거래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25집단군 사령관 치스쨔꼬브나 집단군지휘성원인 레베제브와도 친분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대일작전의 개시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조선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여있었습니다.


원동쏘련군총사령부의 소재지는 하바롭스크였습니다. 나는 하바롭스크에 드나들면서 와씰렙스끼와도 낯을 익히고 말리놉스끼와도 친교를 맺었습니다.


1945년 여름에 이르러 원동쏘련군총사령부는 련합작전을 위한 회의를 자주 소집하였습니다.


와씰렙스끼는 쏘련군총사령부의 작전적구상에 대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관동군주력을 포위하고 그것을 몇개로 고립분단하여 일거에 소멸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국해방과 관련해서는 종래의 작전적방침을 시종일관하게 견지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간백산일대에 집결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예정된 통로로 진출하여 각 도들을 해방하며 원동의 훈련기지에 집결되여있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평양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항공편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이미 꾸려놓은 비밀근거지들을 차지하고 전격적인 군사작전을 벌리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 활동하는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와 정치공작원들은 항쟁조직을 대대적으로 늘여 인민들을 전민항쟁에 불러일으킴으로써 온 민족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진격에 합세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 작전계획이 그 당시 우리 나라가 처한 군사정치정세하에서 조국의 해방을 단시일내에 이룩할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의 모든 도들에 락하산을 타고내린 빨찌산부대들이 왁왁 쓸어나와 전민항쟁부대들과 함께 사방에서 적들을 답새길판인데 무엇이 어려울것이 있었겠습니까.


해안선에 구축된 적의 요새지구로는 쏘련군이 폭격과 함포사격을 들이대면서 쓸어들고 국경쪽으로는 보병부대들이 기갑부대들을 앞세우고 해일처럼 밀려들판이였습니다. 쏘련사람들과 그렇게 약속이 다되여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최후결전을 앞두고 국내에 소부대들과 소조들을 많이 들여보냈습니다.


우리는 모든 빨찌산부대들과 인민무장대들, 항쟁조직들앞에 적들을 완전격멸한 후 식민지통치기관들을 청산하고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당과 인민정권기관들을 내올데 대한 임무도 설정하였습니다.


원동쏘련군 지휘성원들가운데서 내가 제일 많이 상종한 사람은 메레쯔꼬브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이마가 약간 벗어질사한 40대말기의 장령이였습니다.


메레쯔꼬브의 경력을 보면 쓰딸린이 그를 연해주방면의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한것이 우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원동의 한 부대에서 지휘성원으로 있은 메레쯔꼬브는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으로 있다가 쏘련-핀란드전쟁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제7집단군도 지휘하였습니다. 그는 쏘련군총참모장도 하였고 원동으로 오기 전에는 모스크바서북부의 까렐리야전선사령관으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메레쯔꼬브는 구면친구라도 만난것처럼 내 손을 꽉 잡아흔들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여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리를 권하고나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쟁에서는 조선동지들이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대일작전에서 조선동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에 큰 기대를 가지고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국제련합군에서의 조선지대의 활동에 대하여 간단히 료해한 다음 나에게 조선국내의 군사정치정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줄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 나라에서의 일본의 군사력량배치와 통치방법, 국내인민들의 반일투쟁과 혁명조직들의 분포정형, 비밀근거지들과 련결되여있는 무장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있었습니다.


대일작전을 앞둔 어느날 나는 련합군지휘관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향하였습니다. 쏘련군 총참모부가 소집한 회의에 가보니 메레쯔꼬브와 스띠꼬브를 비롯해서 대일작전과 관련되여있는 각 전선사령부의 책임일군들도 벌써 다 와있었습니다. 와씰렙스끼총사령관도 거기에서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우리의 항공륙전대전법에 기초한 조국해방작전계획에 대해서는 모두가 지지하였습니다. 그때 동북항일련군 부대들앞에는 만주지방의 주요도시들에 먼저 날아들어가 진격하는 쏘련지상부대들의 통로를 열어줄데 대한 임무가 부과되였습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쥬꼬브도 만나보았습니다. 그가 독일주둔 쏘련점령군 총사령관과 독일관리감독리사회 쏘련대표로 있을 때입니다. 쥬꼬브가 무슨 일로 거기에 왔댔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나로서는 매우 인상깊은 상봉이였습니다. 이름난 백전로장인 쥬꼬브는 대단히 서글서글하고 소탈한 사람이였습니다.


쏘련사람들은 있는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접대하였습니다. 그것은 외교적관례를 벗어난 특별한 환대였습니다.


우리는 모스크바에 체류하는 동안 레닌묘도 참관하고 력사박물관에도 가보았습니다. 모스크바방위와 관련되여있는 이름있는 전적지들도 구경하였으며 영화 《챠빠예브》도 다시 보았습니다.


대일작전과 관련한 회의가 끝난 다음에도 쏘련사람들은 어째서인지 우리를 원동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배포유하게 계속 시내구경만 시키였습니다. 며칠후 그들은 우리를 쥬다노브에게로 안내하였습니다. 그 당시 쥬다노브는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겸 비서의 직책을 맡고있었습니다.


쥬다노브에게 가보니 스띠꼬브가 이미 와있었습니다.


쥬다노브는 쓰딸린의 위임에 따라 동방에서 온 사절들을 만난다고 하면서 우리가 진행해온 항일무장투쟁을 격찬하였습니다. 그는 쓰딸린과 스띠꼬브를 통해 조선의 빨찌산 김일성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는데 듣던바보다는 훨씬 더 젊어보이는것이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쓰딸린도 우리의 활동에 류다른 관심을 가지고있다는것이였습니다.


나와 쥬다노브와의 담화는 당면한 군사정치정세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되였습니다. 나는 그날 쥬다노브와 담화하면서 그가 해방된 조선을 민주주의독립국가로 발전시키자면 어떤 방법으로 사업하겠는가 하는데 대한 나의 견해를 몹시 듣고싶어한다는것을 간파하였습니다.


담화도중에 쥬다노브는 불쑥 나에게 조선사람들이 나라가 해방된 후 몇해동안이면 독립국가건설을 실현할수 있을것 같은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늦어도 2~3년간이면 해낼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그 대답을 듣자 두손을 마주 비비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뜻밖이라는듯 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때 쥬다노브가 어째서 해방후 우리의 자주독립국가건설문제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고있으며 2~3년이라는 나의 대답을 듣고 반신반의의 모순된 표정을 짓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짐작하였습니다.


그 까닭이란 다른것이 아닙니다. 얄따회담에서 전후 조선문제처리에 대한 론의가 벌어질 때 루즈벨트가 신탁통치안이라는것을 들고나왔기때문입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세아의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후원밑에 《민주적제도속에서 교육되여야 한다.》는것이 그의 시종일관한 주장이였습니다.


루즈벨트는 1943년 봄에 워싱톤에서 미국무장관, 영국외상 등과 회담할 때부터 조선과 인도지나는 강대국들의 신탁통치하에 놓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에게는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너무 우습게 본것 같습니다.


나는 우리 인민이 장기간의 항일무장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으로 크게 각성되고 단련되였다는것과 그 과정에 자체의 힘으로 국가건설을 해나갈수 있는 견실한 지도핵심과 광범한 애국력량이 준비되였고 풍부한 투쟁경험과 무궁무진한 창조력, 능숙한 조직력과 강력한 동원력을 가지게 되였다는것을 력설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내 설명을 주의깊게 듣고나서 해방후 조선인민의 건국투쟁에 어떤 형태의 지원을 주었으면 좋겠는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쏘련이 독일과 4년동안이나 전쟁을 했고 앞으로 또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르어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떠세우려고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는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는 력대적으로 사대주의가 망국의 근원으로 존재해왔다, 새 조국을 건설할 때는 사대주의로 인한 피페가 절대로 없게 하자는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기대하는것은 우리 나라에 대한 쏘련의 정치적지지이다, 쏘련이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조선문제가 조선인민의 리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쥬다노브는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는 얼마전에 동구라파의 어떤 나라 사람이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 나라는 본래부터 경제적으로 락후한데다가 전쟁피해가 막심해서 난관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쏘련이 큰집이 된셈치고 도와주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립장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이것이 바로 동방과 서방의 차이, 해뜨는 나라와 해지는 나라의 차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쥬다노브의 마지막말은 물론 롱이였습니다.


거기에 무슨 해뜨는 나라와 해지는 나라의 차이가 있었겠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동구라파지도자들이 자기 인민의 힘보다 쏘련을 더 믿은데 있는것입니다. 그 나라들은 거의다 쏘련군대에 의해서 해방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나라들은 쏘련에 의존하여 쏘련식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였습니다. 쏘련사람들이 《아》하면 그들도 《아》 했고 지어는 모스크바에 비가 오면 그들도 우산을 들고다닌다고 할 정도로 사대주의가 심했습니다. 동구라파사회주의가 망한 원인의 하나가 바로 이 사대주의에 있습니다.


쥬다노브는 나와의 상봉결과를 쓰딸린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후에도 쥬다노브와 여러차례 만나 깊은 친교를 맺었습니다.


메레쯔꼬브도 쓰딸린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한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려순에서 있은 일을 잊을수 없습니다.


해방직후 내가 려순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메레쯔꼬브를 만났습니다.


그는 나를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곧 모스크바에 가서 쓰딸린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 부탁할것이 없는가고 물었습니다.


나는 쏘련군사령부가 발행한 군표를 없애고 우리 화페를 발행할데 대한 문제, 산업국유화문제, 조선인민혁명군을 현대적인 정규무력으로 개편하는데서 쏘련이 필요한 방조를 주는 문제를 비롯한 몇가지 안을 제기하였습니다.


메레쯔꼬브는 그후에도 우리의 사업을 각방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연해변강군관구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평양에도 이따금씩 오군 했는데 그때마다 쏘련군사령부에 가지 않고 먼저 우리 집부터 찾았습니다.


한번은 메레쯔꼬브가 말리놉스끼와 함께 평양에 온적이 있습니다. 조선주둔 쏘련군사령관은 그들을 외국인전용호텔로 안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령관의 호의를 물리치고 우리는 김일성동지네 집에 찾아온 사람이니 거기에 가서 부인한테 만두나 해달라겠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 들린 일이 있습니다.


말리놉스끼와 메레쯔꼬브는 내가 집에 있건없건 그런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두사람은 아주 대범하고 텁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예고도 받지 못하고 손님들을 맞아들인 김정숙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말리놉스끼는 자기네가 평양으로 떠나올 때 나에게 미리 련락을 했는데 그런 련락을 받고서도 비행장에 못 나오고 또 이렇게 집에도 없는것을 보면 여간 바쁘지 않은 모양이니 바쁜 사람을 기다릴것 없이 우리끼리 먼저 먹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조선국수도 가져오고 《조선흘레브》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쥬다노브와의 회견을 마친 나는 스띠꼬브와 함께 원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동에서 맺어졌던 스띠꼬브와의 친교는 그후에도 계속되였습니다. 스띠꼬브는 조선문제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으로 소집되였던 쏘미공동위원회의 쏘련측대표단 단장으로 조선의 통일과 자주적발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정열적으로 벌리였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그동안의 활동정형을 통보하였습니다.


1945년 8월 9일 쏘련은 동맹국들과의 협약에 따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군대와 교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날 나는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에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데 대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최후공격작전에 앞서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로 하여금 웅기군 토리와 훈춘현 남별리, 동흥진을 비롯한 적의 국경요새구역의 여러 군사요충지들을 불의에 습격하여 적들의 방어체계에 혼란을 조성하고 요새구역안에 배치된 적 유생력량과 화력기재들에 타격을 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와의 련합작전을 하면서 제1원동전선군사령부가 제일 신경을 쓴것은 가장 효과적인 타격을 줄수 있는 장소의 선택이였습니다. 요새화된 국경지대에서 어느 고리를 답새겨야 일본군의 방어체계전반을 뒤흔들어놓을수 있겠는가 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이 고충을 우리가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1945년까지 만주와 쏘련, 몽골국경지대에 수많은 영구화점들을 건설하였습니다. 조선에 건설된 4개의 요새지대는 모두 쏘련을 공격하기 위한 발진기지들이였습니다.


일제가 10여년에 걸쳐 건설한 조쏘, 조만, 쏘만국경일대의 요새구역들에는 관동군과 조선주둔군관하 부대들을 비롯한 륙해공군의 방대한 무력이 집결되여있었습니다. 적들은 이 요새구역들을 가리켜 《난공불락의 방어선》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적들이 구축한 요새들은 모두가 비밀지하요새였습니다. 일제는 요새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을 비밀담보의 명목으로 학살해버리였습니다. 이런 요새들은 대일작전수행에서 최대의 걸림돌로 되고있었습니다. 쏘련지휘관들은 그 요새선뒤에 있는 관동군을 크게 보았지만 나는 요새선의 돌파를 난문제로 보았습니다. 내가 요새구역의 몇군데를 찔러보아야겠다고 생각한것은 그때문이였습니다.


내가 개전에 앞서 국부적인 싸움을 해야겠다고 하자 제1원동전선군의 고위지휘관들은 다들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나는 대일작전의 돌파구를 열자면 군사요충지를 몇군데 답새겨서 적들이 은밀히 증강해온 방어체계와 은페해놓은 유생력량과 화력기재들을 단번에 로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우리의 한 부대가 개전전야에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속에서 두만강일대에 구축한 요새의 한모퉁이를 담당한 토리에 대한 습격전투를 단행하였습니다. 토리는 경흥요새구역과 웅기-라진요새구역을 끼고있는 묘한 위치에 자리잡고있었습니다. 토리가 점령되면 적들이 그 일대의 넓은 지역을 내놓아야 하고 경흥요새도 위험에 빠질수 있었습니다.


우리 전투원들은 토리의 경찰관주재소를 불사르고 마을을 해방하였습니다.


토리는 조국광복을 위한 최후결전에서 우리 혁명군부대에 의해 첫번째로 해방된 마을이였습니다.


적들은 증원부대를 급파했지만 그 증원대는 겁을 집어먹고 웅상령에서 경찰관주재소가 불타는것을 구경만 하다가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부대의 토리습격에 대하여 일본의 한 출판물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8월 8일 오후 11시 50분 조선인의 일단 약 80명이 쏘련군과 함께 쾌속정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 토리에 래습하였다. 여기는 쏘련령토가 지척에 바라보이는 곳이다. 우선 토리경찰관주재소가 습격당하였다. …


… 9일 오전 3시경 … 트럭을 토리에 보냈으나 때는 이미 늦어 … 트럭은 웅상령에서 되돌아왔다.》(《조선종전의 기록》 29페지)


쏘련군과 련합전선을 형성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별동대, 선견대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해 마련된 돌파구는 대일전쟁을 전격적으로 마무리하려는 우리의 작전적의도를 관철하는데서 결정적고리의 하나로 되였습니다.


간백산밀영을 최후공격작전의 출발진지로 차지하고있던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은 대오를 늘이면서 작전계획에 예견된대로 진격하였으며 두만강연안에 집결한 부대들은 일시에 적의 국경요새들을 돌파하고 경원, 경흥일대를 해방하였으며 웅기방향으로 계속 전과를 확대하면서 국내의 넓은 지역을 해방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안상륙부대의 선견대로 활동하던 일부 부대들은 지상부대와의 긴밀한 협동작전으로 웅기에 상륙하였으며 전투성과를 확대하면서 청진일대에로 진격하였습니다.


다른 부대들은 금창, 동녕, 목릉, 목단강을 해방하고 적들을 격멸하기 위한 추격전을 벌리면서 관동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두만강대안에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미 국내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은 인민무장대들과 무장봉기조직들, 광범한 인민들을 무장폭동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전국각지에서 일제침략군과 헌병, 경찰기관들을 습격소탕하면서 적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투쟁을 과감히 벌리였으며 진격해오는 인민혁명군부대들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경흥요새를 격파하는 전투에서는 도천리출신인 한창봉이 잘 싸웠습니다. 한창봉은 그때 국제련합군의 선견대에서 맨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만강을 도하한 선견대원들은 지방혁명조직성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의 포대들과 영구화점들을 단숨에 까부시고 원정일대를 해방하였습니다.


두만강일대의 요새돌파작전에서는 훈융 마유산전투도 유명했습니다. 마유산과 월명산일대는 적들이 난공불락이라고 떠들던 곳이였습니다.


적들은 훈융교를 폭파하고 영구화점들이 구축되여있는 고지에 들이배겨 결사전을 준비하였습니다.


박광선은 일본군으로 변장한 조선인민혁명군 정찰조원들과 함께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 마유산뒤면에 불쑥 나타나 적정을 샅샅이 알아냈습니다. 마유산을 지키고있는 적의 력량은 2개 대대나 되였다고 합니다. 정찰조는 부대에 무전으로 적정을 알리고 두만강을 강행도하한 부대의 앞장에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마유산일대의 인민무장대는 전투전에 적의 화약고와 포탄, 탄약야적장을 폭파함으로써 전반적전투승리에 기여하였습니다.


토리습격전투에 참가하였던 오백룡이네 선견대는 만향고개전투에서도 위훈을 세웠습니다.


만향고개는 적들이 웅기-라진요새를 륙로에서 견제할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였습니다.


만향고개에서 부대의 전진이 좌절되자 오백룡은 자기네 선견대가 고지의 적화점과 포진지를 까부시겠다고 자청해나섰습니다. 그는 대원들을 데리고 고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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