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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8. 북만에서 온 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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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20 21:3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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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8. 북만에서 온 투사들

  

   



8. 북만에서 온 투사들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후 하룬가 이틀인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안길이 나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은 곳에 최용건이 와있는데 나를 몹시 만나보고싶어하더라고 하면서 내가 도착한것을 모르니 그렇지 알았으면 한달음에 달려올것이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나 역시 최용건을 무척 만나보고싶었습니다. 그는 김책, 강건, 허형식, 박길송이네들과 함께 이전부터 만나고싶었던 전우들중 한사람이였습니다.


우리가 간도지방에서 활동할 때 조직한 제2차 북만원정의 주요한 목적의 하나가 바로 김책과 최용건을 비롯한 북만일대의 조선인전우들을 만나 그들의 투쟁을 도와주자는데 있었습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해서 그때 그 목적은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최용건도 우리한테 련락원을 네번이나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그 련락원중 한사람은 돈화까지 왔다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동남만과 북만의 여러 지역에 널려서 활동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합작하고 협동하고 련대하려는것은 우리모두의 공통된 념원이고 지향이였습니다.


최용건은 북만의 항일련군건설에서 주동적역할을 한 공로자의 한사람이였습니다. 항일련군 4군과 7군은 그가 주역이 되여 건설한 부대였습니다. 최용건은 원동으로 들어오기 전에 군참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나에게 최용건에 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해준 사람은 황포군관학교졸업생인 박훈이였습니다.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훈련을 다그치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우리의 제일 큰 애로가 군사교관의 부족이였습니다. 유격대를 조직했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부대를 훈련시킬만 한 군사전문가가 한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차광수와 박훈은 마주앉기만 하면 어디서 군사전문가를 데려올수 없을가 하는 론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 자연히 최용건도 화제에 오르게 되였습니다.


박훈은 나에게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공합작이 깨지면서 황포군관학교에 있던 조선청년들이 다 흩어졌는데 그중에서 주목할만 한 인물은 최추해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에 있을 때 훈련교관을 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명만이라도 있으면 우리가 많은 도움을 받을수 있겠는데 지금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알아보니 최추해란 최용건의 다른 이름이였습니다. 최용건은 최추해외에 김지강과 최석천이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습니다.


나는 최용건이 하바롭스크에 와있다는 말에 그렇다면 기다릴것 없이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내가 안길이를 앞세우고 숙소에 도착하자 최용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어깨가 쩍 버그러진 무관형의 사나이였습니다.


《만주에서 만나지 못한 김사령을 아라사에 와서야 만나는구만!》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인사삼아 하는 말이였습니다.


최용건은 그런 말을 하고나서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그는 김사령이 인차 하바롭스크에 도착할것이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와있는줄은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찾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숙소에서 맞게 되여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는것이였습니다.


《내 평생 김사령과 함께 싸우는것이 소원이였는데 이렇게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소. 이젠 헤여지지 맙시다.》


최용건은 혁명의 길에 나선 후 곡절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으로부터 혁명을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최용건이 중학교를 다닐 때 그 학교에서는 미국인교장을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났습니다. 최용건은 이 동맹휴학의 주모자였습니다. 미국인교장은 겁을 먹고 뺑소니를 쳤지만 일본관헌들의 간섭으로 최용건을 비롯하여 투쟁을 조직지도한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습니다.


최용건은 그후 3.1인민봉기에도 참가하고 반일출판물발간사업에도 관여하였는데 그때문에 형무소맛도 보았습니다.


그후 그는 서울에 가서 얼마간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상해림정의 공작원과 친교를 맺게 되여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였고 결국은 그가 잡아끄는대로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조국땅을 떠나게 되였습니다.


이래저래 상해까지 가기는 했지만 최용건은 림시정부의 실태를 보고 실망했다고 합니다. 그후 공산주의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투쟁속에서 일정한 군사적경험도 얻게 되였으나 조국을 떠날 때 품었던 국권수복의 뜻과는 달리 중국혁명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였습니다. 그 당시 관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청년들은 중국혁명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딴 나라 혁명을 하면서도 보람은 느꼈지만 어쩐지 변두리로 자꾸 밀려나는것 같은 서글픈 심정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때로는 중국혁명이자 조선혁명이고 조선혁명이자 중국혁명이라는 등식까지 세우고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했지만 고국의 현실을 등지고 멀리로 달아나버리는것만 같아 늘 죄스러운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손중산이 련쏘, 련공, 부조공농을 제창하며 국공합작에 의거하여 북경정부를 전복하고 국민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하였을 때 최용건은 그 투쟁에 적극 참가하였습니다. 북벌의 성공으로 국민혁명세력이 중국 동북지방까지 장악하게 되면 조선독립에 유리한 환경이 마련될것이라고 판단했다는것이였습니다.


그러나 대세는 그가 바라는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손중산이 서거하자 장개석은 국공합작을 파괴하였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데서 국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대학살의 시기에 관내에서 장개석의 손에 희생된 조선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최용건도 죽을 고비를 여러번 겪었습니다. 그는 피비린내나는 대학살의 선풍을 피해서 관내를 탈출하였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이 바로 북만이였다고 합니다. 최용건은 그때 자기가 간도로 가지 않고 북만으로 직행한것은 항로미실과 같은 실책이였다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때 간도로 갔더라면 김사령도 더 일찌기 만나고 조선혁명을 위해서도 보탬이 될수 있었겠는데 참 아쉽게 됐소. 일생일대의 회한입니다.》


나는 그에게 나도 최용건과 같은 군사전문가와 일찍부터 손을 잡지 못한것이 여간 아쉽지 않다, 김책이나 최용건과 같은 사람들이 동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조선혁명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했을것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당신과 같은 골간들이 북만에 가서 항일의 불을 지폈기에 그 고장에서 사는 조선사람들도 혁명화하고 항일련군운동도 발전시키지 않았는가, 군중을 혁명화해놓으면 그것이 다 조선혁명을 위한 준비로 되고 밑천으로 된다, 그리고 중국혁명에도 리로운 일로 된다,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서로 분리시켜 고찰하지 말자, 중국땅에서 혁명하는 이상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공동투쟁, 중국항일력량과의 공동전선을 중시하지 않을수 없다, 당신들이 북만에서 지금까지 해놓은 일은 중국의 해방을 위한 일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을 위한 일로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최용건은 지난날의 생활에서 자기를 제일 괴롭힌것이 고독감이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고독했는가고 하는 내 질문에 그는 적이 너무 강대하고 혁명의 전도가 너무 료원한것 같이 생각되는데다가 중국사람들속에서 살다나니 자연히 고독스러워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독감이 심하게 치밀 때면 백두산에서 싸우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생각했다는것이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보니 그가 나한테 련락원을 네번이나 파견한 심정이 리해되였습니다.


최용건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전달받았을 때의 충격이 대단히 컸다고 합니다. 그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받아 읽은 다음부터 조선혁명에 더 잘 이바지하려면 백두산에 나가서 우리와 함께 싸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우리 부대와의 련계라도 강화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하기에 나도 북만의 조선인전우들을 만나기 위해 1935년에 2차 북만원정을 조직하던 사연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나와 최용건은 동만과 북만에서 무장대오를 꾸리느라고 바삐 뛰여다니던 1930년대초의 일들에 대해서도 화제에 올리였습니다.


최용건은 북만의 농민들속에 훈련소를 내오고 무장대오를 조직했지만 력량을 늘이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이 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김사령이 전민항쟁을 주장한다는 말을 오래전에 들었는데 전민을 어떤 방법으로 항쟁에 동원시킬 생각인지 그 구상을 말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조선민족의 대다수가 극한상태에서 민족의 재생을 갈망하고있는것이 조국의 현실이다, 그들을 무장시키면 수십만대군이 생기게 된다, 어떤 식으로 무장시키려고 하는가, 일하면서 무장활동을 하는 반군사조직들을 도처에 내오자는것이다, 공장지구에서는 로동자부대들이 나올것이고 농촌에서는 농민부대가 나올것이며 도시에서는 학생부대가 나올것이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 북부조선일대에서는 벌써 생산유격대와 로동자돌격대들이 조직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앞으로 그런 조직들을 전국각지에 다 내오자는것이다, 누가 조직하는가, 항일무장투쟁에서 단련된 골간들이 각 지방에 파견될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최용건에게 이것은 결코 료원한 일이 아니다, 세계대세는 지금 일본제국주의가 망하는 방향에로 번져지고있다, 일본이 지금은 중국과만 전쟁을 하고있지만 조만간에 더 큰 전쟁을 도발할수 있다, 중일전선의 형편도 막막한데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곧 일본이 망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될것이다, 몇해안으로 최후결전의 시각은 반드시 온다, 그런 시각이 오면 우리는 조선혁명의 주력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작전에 배합하여 온 나라의 항쟁조직들을 다 불러일으키는 전민항쟁의 방법으로 최후결전을 해야 한다, 이것이 조국해방작전에 대한 나의 구상이며 자력독립로선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최용건은 그 말을 듣고나서 자기의 민중관에 문제가 있는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조국의 인민들을 구원의 대상으로만 보았지 해방작전의 담당자로는 보지 않았다, 혁명이란 선각자들이나 하는것이지 아무나 다하는것이 아니다, 로동자, 농민이 혁명의 동력인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어떻게 다야 혁명을 하겠는가, 선각자들이 피를 흘려서 인민들에게 해방된 조국을 선사해야 한다는것이 민중을 보는 나의 관점이였다, 그래서 대중혁명화를 위한 정치사업보다 군사일면에 치중했다고 실토하였습니다.


화제가 오가는 사이에 처음에는 무뚝뚝하게 보이던 최용건이 이따금씩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최용건은 자기는 하바롭스크에 오면서도 쏘련과의 군사적협조에 대해서만 관심했지 조선국내에서의 전민무장이나 조국해방작전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는 김사령을 만났으니 앞길이 환히 트인다고 말했습니다.


《김사령, 솔직한 심정인데 나는 백두산에 가서 싸우고싶었소. 백두산에 가야 나도 조선사람구실을 할수 있을것 같소. 평대원을 해도 좋고 아무것을 해도 좋으니 백두산에 가서 김사령의 부하로 싸우다가 백두산에 묻히고싶은것이 내 소원입니다!》


최용건은 눈물을 머금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남만, 동만, 북만에 흩어져 싸우던 조선의 혁명가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으니 이제는 흩어지지 말고 손을 더 굳게 잡고 조선을 위해 싸웁시다.》


이것은 최용건의 숙소를 떠날 때 내가 한 말이였습니다.


나는 최용건과의 상봉에서 지울수 없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한 말속에는 여러해를 두고 품어온 숙원이 담겨져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는 경우에도 제 나라 혁명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려는 강렬한 념원이였으며 하나의 중심을 내세우고 그 두리에 집결하여 주체적으로 혁명을 해나가려는 확고한 지향이였습니다.


그것은 최용건 한사람만의 념원이나 지향이 아니였습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남만에 있건 동만에 있건 북만에 있건 모두가 다 그런 념원과 지향을 품고있었습니다.


최용건이 백두산에 가서 싸우겠다고 그처럼 절절하게 말한것은 우리에 대한 신임과 기대의 표시였으며 혁명을 해도 조선혁명을 하고 죽어도 조선을 위해 죽겠다는 애국심의 표현이였습니다.


최용건이 품었던 소원가운데서 많은 몫은 그후 국제련합군의 조직으로 하여 스스로 해결되였습니다. 하바롭스크에서 나와 첫 상봉을 한 때로부터 그는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백두산에 가서 함께 싸우고싶다던 그의 소원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원동에서 내가 만난 북만의 전우들가운데는 강건도 있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이 조직되기 전에 나는 북야영에 갔다가 강건을 만나본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보고 얼마나 반가와했던지 거기에 있던 2로군과 3로군의 군정간부들이 다들 놀라와하였습니다.


북만의 군정간부들가운데서 나와 강건의 연고관계를 아는 사람은 주보중을 비롯해서 5군출신의 몇몇 지휘관들뿐이였습니다.


나와 강건은 구면이였습니다. 나는 만주에 있을 때 몇번 강건을 만나보았습니다. 한번은 1차 북만원정때였고 다른 한번은 2차 북만원정때였습니다.


강건은 1938년부터 5군 제3사 9련대 정치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입대후 얼마 안되여 련대급정치일군이 된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할바령회의에서 소부대활동방침을 채택한 후 5군에서도 부대개편을 하였습니다. 강건은 그때 제2로군 총지휘부직속 경위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습니다. 그 경위대의 대장은 박락권이였습니다.


나는 북만으로 가고오는 통신원들을 만날 때마다 늘 강건의 소식을 묻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가 잘 싸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강건은 5군에서 발전이 빠르고 전도가 촉망되는 군사적재능을 소유한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있었습니다.


그가 입대후 2~3년 안팎에 인차 쟁쟁한 인물로 될수 있은것은 싸움을 잘한데도 있었지만 인민을 지극히 사랑한데도 있습니다.


인민들이 강건을 고지식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몹시 따랐다고 합니다. 그가 대오를 이끌고 주민부락들에 들어서면 인민들은 강정위가 왔다고 하면서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을 다투어 자식들을 부대에 받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만큼 강건이네 부대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강건이 부대의 기강을 단단히 세워놓았기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조직성과 규률성도 강했다고 합니다.


강건은 싸움도 본때있게 하였습니다. 그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재능과 수완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군사적재능은 소부대활동시기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강건은 매복습격과 렬차전복전투를 특별히 잘했습니다. 한번은 일본장교들만 실은 렬차를 요정냈습니다. 그는 소부대활동시기 여러차례의 렬차전복전투와 철교, 도로, 군수창고에 대한 파괴전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강건을 다시 만난 그날 우리는 아무르강반에서 장시간 회포를 풀었습니다.


국제련합군이 조직된 때부터 그는 우리와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나랑 강건이랑 살던 집을 그때는 도리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도리집에서 국제련합군의 주요지휘관들이 살았습니다.


도리집이란 당시 씨비리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원통식으로 된 주택입니다. 복도를 중심으로 방들이 빙 둘러가며 배렬된 집이였습니다.


나는 그후에도 여러번 강건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고와 실천에서 틈이 없는 그는 말도 재미나게 하였습니다. 그를 메마르고 딱딱한 군사지휘관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인간 강건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였습니다. 강건은 랭철하고 고지식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인정미가 풍부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자기 주장이나 견해에 치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였습니다. 그저 평소에 생각하고있던것을 아무 분칠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숨김없이 터놓군 하였습니다.


강건은 고향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라는 곳이였습니다. 그가 상주를 떠난것은 10살때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에 대한 표상이 아주 구체적이였고 그리움도 대단히 절절하였습니다.


그때 강건이한테서 상주가 술과 명주로 이름난 고장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강건의 말에 의하면 상주에서는 감도 많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상주의 술과 감과 명주에 대해서, 락동강과 속리산에 대해서 말할 때면 강건의 눈에서는 매번 물기가 번들거리였습니다. 겉보기에 메마르고 랭철해보이는 사람이 고향에 대한 화제를 꺼내기만 하면 시인들처럼 감정을 걷잡지 못하였고 평상시보다 말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고향에 남의 집 민며느리로 두고온 누이에 대해서도 아프게 회상하였습니다.


강건이처럼 자기가 나서자란 고향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혁명을 해도 열렬하게 합니다. 향토애가 강한 사람은 조국애도 강하며 조국애가 강한 사람은 혁명열도 높습니다.


나와 강건과의 교우는 국제련합군시절에 열렬한 동지적사랑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내가 강건의 인간상에서 특별히 탄복한것은 그의 남다른 군사적안목과 높은 책임성이였습니다. 그는 해박한 군사지식을 소유하고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어떤 군사작전에 대한 론의가 벌어지면 열을 내여 자기 견해를 발표하군 했는데 그 주장이 독특하고 심도도 깊었습니다.


강건은 중국말도 잘했고 로어도 잘했습니다. 그가 로어공부를 시작한것은 북야영에 들어온 다음부터였습니다. 공부를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쏘련군관들과 간단한 회화도 하고 로문으로 된 쏘련군사규범책도 제힘으로 읽었습니다.


그의 명석한 두뇌에 대해서는 쏘련사람들도 중국사람들도 다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한문략자도 자기 식으로 만들어 썼습니다.


강건의 발전을 두고 제일 기뻐한 사람은 김책이였습니다. 김책과 강건은 사제간이였습니다. 김책이 녕안에서 활동할 때 사립학교에서 얼마동안 교편을 잡은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강건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신태는 사립학교시절에도 수재로 소문났지요. 그 시절에 벌써 〈삼국연의〉를 뜬금으로 외우더라니까요.》


김책이 늘 자랑삼아 하는 말이였습니다. 신태란 강건의 본명입니다.


김책과 강건은 사제간이지만 품성을 보면 쌍둥이 같은 사람들이였습니다. 김책은 생전에 대바르고 고지식한것으로 유명했는데 강건도 그만 못지 않게 대바르고 고지식했습니다. 원칙성이나 전개력을 보아도 두사람은 한형타에 찍어낸것처럼 어슷비슷했습니다.


강건이 해방후 총참모장을 할 때 그의 수하에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혁명년조가 오랜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나 다 강건을 어렵게 대하였습니다. 그가 혁명적원칙성이 강한 사람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입니다.


강건은 원칙앞에서는 상대가 누구이건 추호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그 상대가 가까운 혈육이라고 해도 원칙을 저버리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동무가 일군들에게 당과 수령에 대한 강건의 충실성과 혁명적원칙성을 따라배우라고 강조하는데 그것은 옳은 요구입니다. 강건은 후대들이 따라배울만 한 재능있는 일군이며 매력있는 군사지휘관입니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전사했으니 그렇지 살아있었더라면 무력건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였을것입니다.


강건은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혁명에 깡그리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한평생 휴식이라는것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다음에는 중국혁명을 돕느라고 조국에도 나오지 못하고 길동분구 사령관으로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강건은 동북해방작전을 할 때 조선사람들로 많은 부대를 꾸렸습니다.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사람의 수가 무려 25만이나 되였다고 합니다. 무리하게 일하는 과정에 그는 위탈까지 만났습니다. 조국에 돌아와 보안간부훈련소 2소 소장으로 사업할 때에도 강건은 위궤양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식사를 제시간에 한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위궤양이 심하기때문에 나는 연회때 강건이 술은 물론, 사이다도 못마시게 하였습니다.


인민무력건설분야에서 강건이 쌓은 업적이 큽니다.


서울해방전투와 대전해방전투의 승리를 비롯하여 전쟁1계단때 우리 인민군대가 거둔 전과속에는 강건의 공로도 크게 깃들어있습니다.


인민군대가 락동강계선에 진출한 후 강건은 나에게 전선형편을 보고하다가 며칠후에는 고향 상주에 가서 누이와도 상봉할수 있을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건의 그 말은 유언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1950년 9월 그는 고향이 멀지 않은 곳에서 애석하게 전사하였습니다.


강건은 재능있는 일군이였습니다. 그는 정치에도 군사에도 다 능하였습니다. 강건이 전사했을 때 그의 나이가 32살이였습니다. 우리가 젊은 총참모장을 가지고있는데 대해서는 쏘련사람들도 부러워하였습니다. 강건이 그처럼 젊은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난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강건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고 그의 공로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제1중앙군관학교를 강건군관학교로 명명하였습니다. 공화국창건 20돐때에는 사리원시에 강건의 동상을 세워주었습니다.


강건을 잃은것이 정말 아깝습니다. 나는 지금도 자주 강건을 생각하군 합니다.


동만출신 항일투사들이 원동의 훈련기지로 들어갈 때 한결같이 바란것은 북만에서 투쟁하던 조선사람들과 만나는것이였습니다. 북만사람들도 원동에 들어갈 때 같은 심정이였다고 합니다.


내가 북야영에 처음 갔을 때 북만에서 들어온 조선인대원들은 모두 병실밖에 뛰쳐나와 나를 환영해주었습니다. 절대다수가 나와는 초면이였습니다. 북야영을 떠나려고 할 때 그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던 일이 어제 같습니다.


북만출신의 조선인투사들은 동만사람들을 고국에서 온 사람들처럼 대해주었습니다. 북만이나 동만이나 다같이 만주땅이라는 점에서는 다를바없지만 그래도 북만보다야 동만이 조선과는 훨씬 더 가깝지 않습니까. 조선사람들이 개척한 동만땅이고 조선사람들이 개척한 동만혁명이니 다들 그 고장을 고국의 한 부분처럼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습니다.


동만출신 항일투사들은 나와 함께 조국에도 여러번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니 북만사람들이 우리를 고국동포들처럼 대하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습니다.


내가 북야영에 처음으로 갔을 때 제일 유표하게 보인 사람은 코수염을 기른 김룡화였습니다. 그 코수염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다음은 우스개대장인 최용진이였습니다. 그도 역시 코수염을 길렀습니다. 그가 한발 앞에 나서서 동료들을 한사람한사람 소개해주었는데 격식을 차리지 않고 어찌나 덜렁거리는지 초면이라는 느낌을 조금도 가질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소개할 때 강상호는 기억력이 비상하다, 김룡화와 김대홍은 명사수이다, 장상룡, 김지명, 전봉서는 엉치가 가볍고 달구지바퀴처럼 부지런하다, 김증동은 눈썰미가 빠르다, 류응삼은 실농군이다라는 식으로 개개의 특징을 단마디로 요약해서 설명하군 하였습니다. 후날 지내보니 그때의 그 소개가 다 정확하였습니다.


강상호는 머리가 명석했고 김룡화와 김대홍은 한다 하는 명사수들이였으며 장상룡이나 김지명이나 전봉서, 박우섭, 김양춘과 같은 사람들은 다 무슨 일거리를 맡기면 묵여두지 않고 가분가분 해치우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력가들이였습니다. 장상룡은 원동의 훈련기지에 있을 때 나와 김책사이에서 심부름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류응삼은 농사물계에 밝은 사람이였습니다. 북만에 있을 때도 유격구농사를 주관했지만 북야영에서도 부업지의 일이라면 이것저것 다 참견하였습니다. 한때 그는 인민무력부에서 부업부장으로 사업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최민철이와 리종산이도 만나보았습니다. 리종산은 북만사람들가운데서 제일 나이가 어린 대원이였습니다. 그가 비상소집을 알리는 총소리를 듣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던 일을 최용진이 상기시키는 바람에 우리는 모두 배를 그러쥐고 웃었습니다.


북만에서 온 녀대원들은 대체로 성격이 개방적이였습니다. 북만에는 무연한 평원이 많습니다. 사람이 넓은 고장에서 살면 성미도 호방해지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도 잘 탔습니다.


북만의 녀대원들가운데서 무전을 제일 잘 친 동무는 박경숙과 박경옥이고 기마술이 제일 높은 동무는 왕옥환이였습니다. 리숙정도 말을 잘 탄다고 하였습니다. 허창숙, 전순희, 장히숙은 한다하는 재봉대출신들이였습니다. 리계향은 사격명수였습니다.


최용진은 동료들을 소개할 때마다 한마디씩 툭툭 희떠운소리를 했는데 그때마다 얼굴에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군 해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최용진이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서간도시절에도 더러 들은바가 있지만 정작 만나고보니 그는 소문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였습니다.


최용진이 유명한 싸움군이고 배짱군이라는것은 주력부대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있었습니다. 그가 싸움군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것은 발동선을 타고 시찰하는 일본군《토벌대》고위장교와 그 수원들을 몰살시키는 싸움에서 용맹을 발휘한 때부터입니다.


최용진은 혁명적원칙성이 강한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북만에서 련대장인가 중대장을 할 때 부대의 식량을 해결하려고 자위단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최용진의 아버지는 원래 무장을 들고 독립군에서 싸우던 반일독립운동자였습니다. 독립군운동이 흐지부지된 후 그가 총을 놓고 은퇴하여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자 적들은 조선사람들을 분렬리간시키는데 써먹으려고 그를 자위단에 강제적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최용진이 지금 부대가 식량고생을 하고있는데 쌀을 좀 달라고 하자 그의 아버지는 너에게 줄 쌀이 어디 있는가고 하면서 딱 잡아떼였습니다.


사실 최용진이네 집에는 땅마지기도 좀 있었고 쌀도 넉넉했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조반석죽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는 집이였습니다. 최용진의 아버지가 쌀을 주지 못하겠다고 한것은 다른 자위단원들앞에서 유격대와 내통하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려고 그랬는지 그것은 잘 알수 없습니다.


성미가 급한 최용진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분개하였습니다. 그는 독립군을 했다는 아버지가 처신을 그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아버지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항일유격대원들은 강도 일제를 쳐부시고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변변히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풍찬로숙하면서 싸우고있다, 조국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는 유격대를 도와주지 않는것은 나라도 모르고 민족도 모르는 역적이다, 쌀을 주지 않으면 가만놔두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의 말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튼 최용진의 아버지는 그에게 쌀을 열다섯달구지나 주었습니다. 그후에도 그는 많은 식량과 무기를 구입하여 유격대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자위단의 간판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총을 들고 독립군을 따라다니던 왕년의 그 애국심과 절개를 버리지 않고 원군운동을 꾸준하게 벌려나갔습니다.


그후 일본놈들은 그를 학살하였습니다.


국제련합군시절에 최용진은 우리 지대에서 중대장을 하였습니다. 최용진중대라면 쏘련사람들도 탄복하였습니다. 그가 지휘하는 1중대가 모든 면에서 앞자리를 차지했기때문입니다. 그는 요구성이 높고 승벽이 강하고 일욕심이 많은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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