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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4. 소부대활동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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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16 19:4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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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4. 소부대활동의 나날

  

   



4. 소부대활동의 나날 

 


  

 한때 일본의 어용출판물들은 항일련군부대들에서 지휘관들이 희생되면 그 부대가 다 녹아난것처럼 떠들었습니다. 관동군사령부를 비롯한 일만군경 역시 항일련군의 많은 력량이 항전을 계속하고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유격대가 다 망했다고 했습니다.


항일무장부대들이 다 녹아나고 우리의 항전이 종말을 고한것이 사실이라면 노조에가 사령부를 길림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지역인 연길로 옮긴것은 무엇때문이며 양정우를 치는데 돌렸던 병력까지 다 끌어다가 백두산동북부에 들이민것은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또 빨찌산《토벌》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무력과 함께 철도경호대와 협화회의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몽땅 내몬것은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우리는 소부대활동시기에도 계속 총소리를 냈습니다. 무의미한 충돌은 피하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적들을 되게 답새겼습니다.


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큰 규모의 싸움은 물론 피했습니다. 그 대신 대중정치공작과 정찰활동에 많은 힘을 넣었습니다. 국내에 많은 소부대와 소조,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전민항쟁준비도 하였습니다.


소부대와 소조의 인원은 경우에 따라 각이했으나 소부대는 보통 10명 안팎으로부터 수십명으로, 소조는 수명정도로 편성하였습니다. 무장은 사명과 임무에 맞게 간편하게 하였습니다. 소부대와 소조를 편성한 다음에는 해당한 임무와 활동구역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임무분담에 따라 정치사업을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를 두는가 하면 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도 두었으며 정찰을 기본으로 하는 소부대, 소조도 두었습니다. 그러되 그 분공이 고정불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황에 따라 정찰소조가 정치사업을 하기도 하고 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소조가 정찰과 정치사업을 동시에 맡아보는 식으로 다른 임무를 겸해서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대편성이 끝난 다음에는 소부대나 소조들이 의거할 림시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사업에 힘을 넣었습니다. 소할바령회의이후 건설된 대표적인 림시비밀근거지들로는 연길현 도목구부근기지, 화룡현 맹산촌부근기지, 안도현 황구령기지, 왕청현 쟈피거우기지 등이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은덕, 선봉, 무산, 라진으로부터 종심깊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림시비밀근거지들을 건설하였습니다. 림시비밀근거지들에는 소부대가 있을 밀영과 통신련락장소, 비밀회합장소, 후방물자보관장소 등을 두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할바령회의후 몸소 경위중대의 일부 대원들을 친솔하시고 안도현 황화전자부근 사득판전투를 승리적으로 결속하여 소부대활동의 시범을 창조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 전투를 두고 아래와 같은 회고를 하시였다.


황화전자부근에서 있은 싸움은 소할바령회의후 우리가 소부대활동에로 넘어가면서 벌린 첫 전투입니다. 소할바령회의가 끝난 다음 1개 분대가량 되는 경위대원들을 데리고 한총구에 갔다 돌아오다가 황화전자라는 곳에서 불의에 적과 조우전을 벌렸는데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마당거우나 남패자와 마찬가지로 황화전자라는 지명에도 유래가 있었습니다. 그 지방사람들을 보고 황화전자가 무슨 뜻인가고 물으면 서로 엇갈린 대답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들국화가 많이 피는 사득판이라는 뜻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원추리가 많이 피는 사득판이라는 뜻이라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처녀총각의 사랑에서 유래된 지명이라고도 했는데 어느것이 정확한지는 알수 없었습니다.


황화전자라는 고장을 여러번 지나다녀보았는데 들국화도 그닥 많지 않고 원추리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득판은 있었습니다. 전투는 바로 그 사득판에서 붙었습니다.


우리 일행가운데는 황순희도 섞여있었습니다. 최현에게 소할바령회의에서 토의결정된 방침을 전달할 임무를 주려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가 몸은 체소했지만 날파람도 있고 책임성도 높았습니다. 황순희는 최현부대의 위치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황화전자 뒤산에서 잠간 휴식을 하였습니다.


나는 대원들을 휴식시키면서 저 사득판을 어떻게 돌파하겠는가 하는걸 궁리하였습니다. 사득판가운데 큰 물도랑이 있고 그우에 외나무다리가 놓여있었습니다. 그 밑으로는 몇길이 될지 모르는 썩은 물이 흐르고있었습니다. 그 외나무다리를 건느고 산 한두개만 넘으면 우리가 림시비밀근거지로 내정한 연길현 도목구까지 직행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리건너편에 적이 매복해있을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쪽다리목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는데 아니나다를가 건너편에서 무슨 불빛이 번쩍했습니다. 혹 반디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분명 적들의 전지불이였습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야 도목구로 가겠는데 적들이 어둠속에 도사리고있으니 야단이였습니다. 이거야말로 외나무다리에서 원쑤와 맞다든 격이였습니다.


무장투쟁을 하는 나날에 적의 포위에도 들어보고 사지판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그때처럼 정황이 급박하고 방도가 떠오르지 않기는 처음이였던것 같습니다.


만일 다리를 건느지 못하면 수십리를 에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난감한 일이였습니다. 죽으나사나 가던 길로 곧추 가야 하였습니다. 내가 정황을 살피며 방도를 찾느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원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가슴을 조이고있었습니다.


한참만에야 나는 적들이 눈치채기 전에 감쪽같이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결단을 내리고 대원들에게 출발구령을 주었습니다. 모두가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후위에 선 내가 맨나중에 다리를 건너 풀숲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우리 기관총수에게 적의 기관총수를 답새기라고 명령한 다음 대오를 큰길쪽으로 빼돌리였습니다. 그때 전문섭이와 황순희가 나를 결사적으로 보호해주었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였습니다. 한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깊은 수렁에 빠져 헤여나올수 없는데다가 적의 총알이 비발치듯 하였으나 우리는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그 위험한 함정을 헤쳐나왔습니다. 참으로 그것은 천행이였습니다.


만일 그때 우리가 조성된 정황에 놀라 당황하거나 제때에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더라면 적의 함정에서 헤여나지 못하고 큰 손실을 당했을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큰길쪽으로 한창 빠지고있을 때 이번에는 앞에서 적들이 나타났다는 척후의 련락이 왔습니다. 다리목에서 울리는 기관총소리를 듣고 대기했던 주력이 밀려오는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렬에 다리쪽으로 되돌아서서 급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였습니다. 대원들을 시켜 다리목의 적과 꽁무니를 따르는 적들에게 총을 쏘고 옆으로 슬쩍 빠져 산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다음 휴식구령을 내리였습니다.


대원들은 산중턱에 앉아 숨을 돌리였습니다. 그럴 때 다리목에 있던 적들과 대도로쪽에서 밀려온 적들사이에 치렬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후날 안도지방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적들은 저희들끼리 총격전을 벌리다가 무리주검을 냈다고 합니다. 누가 먼저 총질을 시작했느냐 하는 책임추궁이 따르고 외나무다리목을 건너온것이 귀신인가 빨찌산인가 하는 비명도 터지고 적들내부가 온통 수라장이였다는것입니다.


그후 우리는 연길현 발재툰과 안도현 오도양차부근에서도 숱한 적들을 요정냈습니다.


연길현 발재툰일대에서는 황화전자에서와 달리 3개의 습격조에 의한 습격전법과 망원전술을 배합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적들은 저희들끼리 총격전을 해서 많은 무리주검을 냈습니다.


이런 싸움을 매일같이 했습니다. 어떤 날은 몇개 소부대가 력량을 한데 합쳐가지고 큰 대상을 쳐갈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소부대전을 기본으로 하면서 때때로 큰 싸움을 배합했기때문에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대부대전으로부터 소부대전으로 전술을 바꾼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황순희한테서 소할바령회의방침을 전달받은 후 최현이네도 소부대활동을 잘했습니다. 최현이네 부대들은 왕청현에서 먼저 대부대로 광성툰과 소성자의 적을 친 다음 소부대로 분산하여 사방으로 오가면서 적들을 요정냈습니다.


연길, 화룡, 안도현에서는 오백룡이네 소부대들이, 훈춘과 동녕현일대에서는 김일, 손장상의 소부대들이, 동녕현과 녕안현, 목릉현, 오상현일대에서는 한인화와 함께 박성철, 윤태홍이네 소부대들이 싸움을 벌리였습니다.


온 동북땅과 조선의 북부국경지대는 소부대와 소조들의 활동으로 죽가마처럼 끓어번졌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하바롭스크회의후 자신께서 친히 지휘하신 소부대활동정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상하시였다.



이전에는 소부대, 소조들이 주로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였지만 이 시기부터는 국내종심깊이에로 뚫고들어가 조선남단의 군사요충지들과 멀리 일본본토에까지 활동지역을 확대해나갔습니다.


소부대, 소조들의 활동내용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국내와 동북일대에서 파괴된 당조직들과 지하혁명조직들을 복구하고 새로 꾸리며 남아있는 무장부대들을 수습하고 재편성하는 사업, 전민항쟁조직들에 대한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지도를 확립하는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국내각지의 비밀근거지들을 보강하며 정세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림시비밀근거지들을 꾸리는 사업, 국내와 동북일대에서 애국적청장년들을 유격대에 받아들여 조선인민혁명군대오를 확대하며 군사적골간을 육성하는 사업들을 진행하였습니다.


동시에 적극적인 습격전과 매복전, 파괴전으로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전쟁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투쟁, 적의 군사시설과 기지, 요충지들에 대한 군사정찰활동과 적통치체계와 적군내부를 혼란시키기 위한 투쟁 등을 폭넓게 벌려나갔습니다.


그 시기의 소부대활동에는 동북항일련군 부대들도 참가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부대별로 소부대활동지역을 분담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과 제1로군관하의 부대 그리고 일부 2로군부대들은 조선국내와 동남만지역을 맡았고 제2로군의 기본부대들은 흥개호이북으로부터 동강에 이르는 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제3로군부대들은 경성, 철려, 해륜을 비롯한 여러 현들에서 소부대작전을 벌리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백두산과 원동의 림시기지를 왔다갔다하면서 국내와 동남만에 대한 소부대활동을 지도하는 한편 군정학습도 동시에 밀고나갔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부대활동에 나갔다가 기지에 돌아오면 정치학습과 현대전훈련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하였습니다.


남야영에서는 비교적 많은 인원이 망라된 소부대를 데리고 내가 제일먼저 백두산동북부와 국내에로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뒤를 이어 최현이네 소부대와 안길이네 소부대도 정황을 보아가며 국내와 만주에 나가기로 하고 활동구역과 임무를 정해주었습니다.


내가 소부대를 데리고 기지를 떠난것은 1941년 4월이였습니다. 우리 소부대가 해야 할 기본임무는 동남만일대에 남아 투쟁하고있는 소부대들과 소조들과의 련계를 맺고 그들에 대한 통일적인 지휘를 보장하는것이였습니다.


이와 함께 파괴된 혁명조직들을 복구정비하고 새 조직들을 건설하며 지하조직망을 통하여 선발된 청년들로 무장대오를 늘이는 한편 그들을 조국해방을 위한 최종작전과 새 조국 건설에 필요한 간부들로 육성하기 위한 사업도 중요한 활동목적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위증민의 행처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당시 국내와 만주정세는 험악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초봄부터 새로운 《토벌》작전에 달라붙었습니다. 《노조에토벌사령부》는 해산되고 그 권능이 관동군사령부에 이관되였습니다. 관동군의 기본부대와 각 지구별 위만군 군관구사령부들과 관동헌병대사령부 관하의 모든 《토벌대》들이 인민혁명군에 대한 《토벌》에 더욱 미쳐날뛰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소부대를 이끌고 적구로 나가는데 대하여 걱정하면서 일부 지휘관들은 정세를 좀 보아가며 행동했으면 하였습니다. 김책도 처음에 나의 신변을 념려하여 그런 걱정을 하였습니다.


나는 소부대공작을 떠나면서 중대장으로 류경수를 선발하고 정치지도원으로는 김일을 임명하였습니다. 전령병으로는 전문섭이 임명되였습니다. 그를 전령병으로 임명할 때 김책은 그에게 내곁에서 한발자국도 떨어져서는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우리 소부대의 무전수로는 안영이 선발되였습니다.


그는 동만에서도 활동하고 북만에서도 활동한 사람입니다. 여러해동안 교단에 서서 청소년들에게 애국주의교양을 많이 하였습니다. 동만에서 활동할 때는 순회극단을 만들어가지고 다니면서 군중계몽사업도 하였습니다.


안영은 식견이 높고 생활체험이 풍부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북만에서 대중공작을 할 때 남의 집 부엌데기노릇도 하고 약담배밭에 가서 품도 팔았습니다.


우리가 만주로 떠나면서 안영을 무전수로 선택한것은 그가 북만부대에 있을 때 쏘련에서 무전강습을 6개월동안 받고 나온 경력을 가지고있었기때문입니다.


안영의 코수염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를 코수염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 소부대의 인원이 30명정도 되였을것입니다. 소부대전원이 일본군복으로 변장했는데 그럴듯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4월 상순 어느날 심야에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국경을 넘은 다음에는 옛 근거지자리들을 밟으면서 백두산동북부쪽으로 행군해갔습니다.


우리가 백두산동북부에 가서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습니다.


우리가 동만에서 유격구를 해산하고 서간도쪽으로 진출하자 적들은 동만과 백두산동북부 일대에서 전면적인 파괴작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후과를 수습하기 위해 무산지구전투후 백두산동북부에 다시 진출하여 이 일대에 대한 혁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시켰습니다.


우리가 잠시 쏘련에 들어가있는 짬을 타서 적들은 또다시 이곳에 정규무력을 들이밀어 대대적인 파괴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나서는 《동만은 치안이 확보되였다.》고 떠들었습니다.


백두산동북부에서 혁명을 다시 앙양시키자면 소부대와 소조들의 과감무쌍한 활동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를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실체만 보여주면 얼마든지 군중을 다시 불러일으켜세울수 있었습니다.


안도, 왕청, 연길, 훈춘, 돈화일대를 휘저어놓은 다음에는 백두산에 나가 서간도일대와 국내에 혁명조직을 더 많이 꾸리는 한편 전민항쟁력량을 강화하며 애국적인 청년들을 수백명 선발해다가 백두산근거지와 원동의 기지에서 군정간부로 키우려고 하였습니다.


국경을 넘은 소부대가 며칠간 강행군을 하여 도착한 곳이 큰곰의골밀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골안이였습니다.


언제인가 연변에서 사는 조선사람들이 왕청, 동녕, 훈춘 세 현계에 있는 유격대숙영지자리를 찾아냈다고 하면서 답사과정에 찍었다는 록화테프를 가져온적이 있는데 그걸 보니 그 지대가 바로 우리 소부대성원들이 림시비밀근거지로 정한 고장비슷했습니다.


이 골안에까지 오고보니 벌써 지고온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나는 김일이네를 금창에 보냈습니다. 왕청현 금창부근에 가서 금광을 치고 식량도 해결하고 군중공작도 하라고 했습니다.


큰곰의골기지근방에서 전문섭이 곰을 잡았는데 대단히 컸습니다. 여럿이 목도를 해서 겨우 기지까지 날라왔습니다. 그때 그 곰한테서 기름을 한초롱이나 뽑았습니다.


며칠후 김일이네가 식량을 해결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침통한 얼굴빛으로 공작도중에 장흥룡이 전사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장흥룡이 전사한것은 지갑룡이때문이였습니다. 금광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밥을 해먹고 가자고 우겨대는 바람에 한시간쯤 지체했는데 그사이에 뒤따르던 적들이 소부대가 있는 장소에 달려들었다는것입니다.


김일은 지갑룡이 밥을 해먹고 가자고 할 때 그 제의를 물리치지 못한것을 후회하면서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흥룡의 희생은 우리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였습니다. 소사건으로 처벌을 받았던 그가 과오를 씻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하던 일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쓰렸습니다.


장흥룡의 희생과 때를 같이하여 중국인대원 1명이 적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우리 부대의 행적이 로출되게 되였습니다. 적들은 김일성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기를 쓰고 우리를 추적해왔습니다.


나는 우리의 행적이 로출된것이 차라리 잘되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적들이 김일성부대가 나타났다고 떠들어대게 되면 그 사실이 인민들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결국은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해서 투쟁한다는걸 선전하는것으로 될것이란 말입니다. 소부대의 행로가 어려워진것은 사실이나 적들자신이 우리를 선전해주게 되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는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그후 령을 넘어 태평구쪽으로 행군하였습니다. 5월 상순에는 왕청현 쟈피거우에 도착하였습니다.


나는 쟈피거우에서 김일과 헤여졌습니다. 그가 소부대 하나를 데리고 쟈피거우를 림시비밀근거지로 하여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그 소부대의 활동구역으로 된 라자구와 도가선일대에는 유격구시절에 우리가 손때를 묻혀 키워놓은 조직성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김일에게 여기 어디에 최춘국의 가족들이 살고있을지 모르니 련계를 지어보라고 하였습니다.


무전수 안영도 보조성원 2명을 데리고 쟈피거우기지에 남게 했습니다. 쟈피거우기지는 중간련락소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나는 20명쯤 되는 대원들을 데리고 백두산동북부 두만강연안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기 위하여 쟈피거우를 떠났습니다. 우리는 돈화현, 안도현, 무송현, 화룡현, 연길현 등 동만의 여러 현들을 선회하면서 활동할 작정이였습니다.


우리 소부대는 돈화현을 거쳐 안도현 한총구에 기지를 꾸리고 련락지점을 설치하였습니다. 한총구는 내가 위증민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입니다.


한총구에 이르니 절기가 바뀌여 숲이 무성해지고 한낮이면 더웠습니다.


한총구에서 정치공작소조들을 장백과 돈화, 처창즈, 국내와 백두산등지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때 장백일대에 파견된 사람은 한창봉과 한태룡이였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장백지방의 지하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며 우리 대원들의 가족과 친척들을 찾아 조직의 줄을 달아 국내에 이주시키는것이였습니다. 우리 부대에 장백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일가친척을 다 조직에 망라시키고 국내에 박아넣으면 전민항쟁조직을 꾸리는데 크게 한몫 할수 있었습니다. 좋은 청년들을 선발하여 원동기지로 보내라는 임무도 주었습니다.


나는 한창봉과 한태룡에게 장백 도천리에 가면 누가 있고 또 어디 가면 누가 있다는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하조직을 꾸린 다음에는 국내에 나가 로동계급속에 틀고앉으라고 하였습니다.


전문섭과 김홍수는 처창즈치기에 가서 우리가 그전에 묻어놓았던 무기와 지도를 파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돈화쪽에 공작나갔던 동무들이 대황구부근 밀림속에서 산짐승잡이로 생계를 유지해가고있던 박가성을 가진 로인을 데리고왔습니다. 그는 원래 화전현에서 반일회에 관계하던 지하조직원이였습니다.


나는 로인과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산마다 일본놈《토벌대》가 쫙 깔려있고 주구들이 득실거린다는것이였습니다. 소부대들이 거점으로 삼군 하던 숯구이막이나 아편재배막, 도가집, 동굴 같은데도 다 밀정들이 틀고앉아있는데 조심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박로인의 말이 인민들을 집단부락에 말짱 가두어넣고 왕래마저 통제하는데다가 서로 감시까지 붙여놔서 지하공작이 정말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격대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건 힘껏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로인은 돈화현 소재지와 집단부락들에 드나들면서 조직관계자들의 명단을 가져오기도 하고 우리를 위해 식량과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보내온 자료에 근거하여 이 일대의 조직들을 재빨리 복구하였습니다.


그후 로인은 적들에게 체포되여 희생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소부대활동시기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받았습니다. 적후에서 하는 이 어려운 싸움에서 인민들의 지지야말로 우리에게 크나큰 고무로 되였습니다. 우리의 투쟁에 대한 인민들의 이러한 지지는 사실상 그들이 벌써부터 전민항쟁에 떨쳐나서고있다는 뚜렷한 증거로 되였습니다.


우리는 지하조직망을 확대하는 한편 1로군의 남아있는 부대들과 위증민의 행방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조를 3개 만들어서 돈화현과 화전현 그리고 안도지방과 화룡현북부, 무송현일대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류경수가 활동을 잘했습니다. 그가 고생도 많이 하였습니다.


화전현 쟈피거우로 가자면 푸르허강을 건너가야 하였는데 물이 불어난 때여서 건너갈 재간이 없었습니다. 강줄기를 올리훑고 내리훑다나니 식량도 다 떨어지고 돌아와야 할 날자가 되였습니다. 류경수는 며칠간 굶은데다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여 너무 속을 태우다나니 병이 나서 몹시 앓았습니다.


쟈피거우에는 누구든 꼭 갔다와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류경수를 보내려던 곳에 내가 직접 소부대를 데리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천막 한쪽에서 정신없이 앓고있던 류경수가 이 사실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내앞에 나서더니 장군님, 장군님은 가시면 안됩니다, 제가 다시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내가 못 간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떼를 쓸 때에는 설복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고통스러운대로 그의 제의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활에는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검열하게 되는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다. 생사를 판가리하는 우리의 유격투쟁은 매 분초가 그런 검증의 순간이였습니다. 자기를 바치는가 마는가 하는 순간이 하루에도 수십번 있었습니다.


류경수는 어려운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언제나 자기를 육탄처럼 내던지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일 어려운 모퉁이에 늘 그를 보내군 했습니다.


헐한 일은 전우들에게 맡기고 힘든 일은 자기가 맡아하며 영광의 자리에는 동무들을 내세우고 책임추궁이 가해지면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서 찾고 어떤 처벌이나 책망이든지 달게 받아들이는 여기에 바로 류경수의 인간적매력이 있고 그가 만사람의 사랑을 받을수 있었던 중요한 리유가 있었습니다.


류경수가 화전현 쟈피거우로 떠날 때 나는 우리가 가지고있던 식량을 다 털어주라고 하였습니다. 류경수는 전문섭에게 우리의 몫으로 남겨둔 식량은 있는가고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전문섭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것을 본 그는 전령병이란게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가고 되게 다불리면서 배낭의 쌀을 도로 쏟아놓았다고 합니다. 류경수는 여러날만에야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나를 만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해여진 신발을 벗겨보니 발이 썩어서 피고름이 줄줄 흐르고있었습니다. 입에 미음을 떠넣으니 간신히 눈을 뜨고 사업보고부터 하였습니다.


그들은 쟈피거우일대에서 유격대와 련계가 있는 한 농민을 만나긴 했으나 그가 속을 주지 않는 바람에 곽지산네를 만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위증민이 사망한것 같다는 소문만을 듣고 왔습니다.


류경수는 할수 있는껏 다하고서도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몹시 괴로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다른 1개조를 책임지고 왕바버즈에 나갔던 지갑룡은 변절하였습니다.


1941년의 시련은 다시한번 누가 진짜배기혁명가이고 누가 가짜였는가를 가른 시금석이였습니다.


이런 시련과 검열은 조국이 해방되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였습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항일투사들은 다 시련속에서 백번천번 검열된 귀중한 사람들입니다.


지갑룡이 변절한 후에 우리의 행처를 알게 된 적들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이리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나는 대오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를 교묘하게 빠져 대사하, 소사하를 거쳐 안도쪽으로 나갔습니다.


안도와 무송의 넓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우리는 이전에 박아놓았던 조직을 확대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때 조직원들을 통하여 위증민이 병사했으며 그의 사진을 실은 광고가 명월구시가에까지 나붙었다는 풍문이 돈다는 사실도 알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30여명의 유격대원들이 남북하마탕일대에서와 명월구와 연길부근에 나타나 활동한다는 정보도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이 고장들에 좀더 머물러 활동하기로 작정하고 1개의 소조를 사하장, 남호두, 다홍왜, 북하마탕일대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자신은 나머지성원들을 데리고 백두산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나는 그때 간백산밀영에 가서 소부대와 정치공작소조, 혁명조직책임자들을 불러 조성된 정세의 요구에 맞게 주체적립장을 튼튼히 견지하며 우리의 힘으로 조선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을 진공적으로 벌릴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와 서간도일대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원동의 기지에 데려다가 훈련시키기 위한 준비와 그밖의 많은 력량을 백두산밀영과 간백산일대에서 튼튼히 키워 전민항쟁에 대처하기 위한 사업을 조직해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우리는 온성군에 나가서도 이러한 방향에서 국내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였습니다.


백두산일대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로정도 간단치 않았습니다. 소부대들이 울린 총소리에 놀란 적들이 우리의 행적을 찾아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었기때문입니다.


그때는 어데 가나 《토벌대》가 누렇게 깔려있었습니다. 적들은 신작로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고 골짜기에도 있고 없는데가 없었습니다.


연길현 로두구는 적들의 군사요충지의 하나로서 관동군의 헌병대와 특수부대들, 위만군과 경찰이 틀고앉아있는 곳이여서 통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사방대수림으로 통하는 산발에 붙을수도 없었으며 우리 소부대의 집결지점으로 갈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본군복을 입고 야간행군으로 로두구를 통과할 결심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로두구철길을 건느기 전에 그만 날이 밝았습니다. 낮에는 행군을 중지하고 안전한 곳에 가서 숨어있어야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다보니 대통로옆에 집이 몇채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정거장이 있었습니다. 그 농가들에 들어가 어두울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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