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2. 혁명가 김책 >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본문 바로가기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2. 혁명가 김책

페이지 정보

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14 17:11 댓글0건

본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3 장 2. 혁명가 김책

  

   



2. 혁명가 김책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여러달이 지난 어느날 일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였다.


《금수산의사당에는 수령님께서 애용하시던 금고가 있었습니다.


수령님께서 그 금고안에 무엇을 보관하시였는가 하는것은 부관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다음 그 금고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열쇠를 찾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며칠전에 그 열쇠를 찾아 금고를 열어보니 그안에 수령님께서 … 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었습니다.…


원래 수령님께서는 사진들을 다 당력사연구소에 보관하시였습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김책동지와 함께 찍으신 사진만은 직접 금고에 따로 보관하여두시였습니다.


이것은 수령님께서 전우인 김책동지를 얼마나 못 잊어하시였는가 하는것을 잘 말하여줍니다.…》


수령의 추억속에서의 영생, 그것은 인간이 한생을 통해 지닐수 있는 영광가운데서도 가장 큰 영광이며 혁명가가 한생을 바쳐 도달할수 있는 행복가운데서도 가장 큰 행복이다. 김책동지는 그 영광과 행복의 상상봉에 있는 충신중의 충신이다.


그는 어떻게 되여 수령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인간으로 되였는가.




내가 김책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하바롭스크에서 국제당이 소집한 회의를 할 때입니다. 거기서 최용건도 만나보았습니다. 내가 그래서 하바롭스크를 잊지 못합니다. 그때 김책은 북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3로군대표로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여러달 하바롭스크에 머물다보니 나와 김책은 서로 래왕을 자주 하였습니다. 내가 들어있는 숙소에서 안길이와 서철이도 숙식을 하였는데 거기에 김책이 와서는 한두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군 했습니다.


그때 김책을 만나보고 받은 인상이 얼마나 강했던지 지금도 첫 상봉을 하던 때의 광경이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나이 40이 채 되기도 전에 앞머리가 벗어지기 시작한 그의 침착한 모습을 보니 첫눈에 마음이 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초면인 김책이 자꾸만 구면처럼 생각되는것이였습니다. 소문을 많이 듣고 또 마음속으로 그리던 사람이여서 그랬던것 같습니다.


통성을 한 다음 첫 대면인데 구면같다고 했더니 김책은 자기도 김일성이 초면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나와 김책이 그렇게 리해하고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상대를 그만큼 마음속으로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김책이나 최용건을 얼마나 만나고싶었으면 부대를 데리고 북만에까지 갔다왔겠습니까. 김책이 나를 얼마나 만나고싶었으면 벌써 1930년에 길림부터 찾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최용건이 나와의 공동투쟁을 얼마나 열망했으면 간도에 련락원을 네번이나 보냈겠습니까.


투쟁무대가 북만이건 동만이건 우리는 그때 모두가 다 조선혁명을 생각하였고 자기가 조선사람이며 조선의 혁명가라는것, 단체의 소속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몸 바쳐야 할 조선의 아들들이라는것을 항상 잊지 않고있었습니다.


이런 공통성이 동만과 북만의 조선혁명가들로 하여금 오래전부터 서로 그리워하고 동경하게 하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책이나 최용건이 왜 더구나 동만을 자꾸 넘겨다보았는가. 조선사람들이 그리웠기때문입니다.


동만의 2군이 조선인부대라면 그들이 소속되여있던 3군이나 7군은 다 중국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부대들이였습니다. 언어와 풍습이 판이한 중국사람들속에서 지내다나니 늘 조선사람들이 수십만이나 와글와글하는 동만을 부러워했고 조선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룬 우리 부대들을 그리워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김사령을 만나는 길이 왜 이다지도 멀었는지.》


초면인사가 끝난 다음 김책이 혼자소리처럼 하는 말이였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내 가슴을 파내리였습니다.


김책은 통성이 끝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간도의 조선사람들이 얼마나 그립고 조선인부대들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 과묵한 사람이 눈물까지 보였겠습니까.


그날은 나도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김책의 선친은 나라가 망하자 인차 가족을 데리고 간도로 들어갔습니다. 간도가 땅도 많고 살기도 좋다는 말을 들었던것 같습니다. 땅으로 말하면 학성도 옥토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땅에서는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할수 없었습니다.


고향이 좋은줄이야 누가 모릅니까. 밥술이라도 얻어먹으려니까 줄레줄레 북행길에 오른것입니다.


김책이네 부모들은 간도에만 가면 살길이 트일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셋이나 둔 부모들이니 로력걱정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큰 기대를 걸었던 세 아들은 집안일은 뒤전으로 밀어놓고 혁명, 혁명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 집안에 혁명바람을 끌어들인것은 김책의 형 김홍선이였습니다. 이 사람이 3.1인민봉기때 거리에 나가 독립만세도 부르고 독립군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고 공산주의운동에도 뛰여들었습니다. 그가 교편을 잡고있던 룡정 동흥중학교에 로씨야에서 건너온 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 아마 그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김홍선은 녕안현일대에서 공산당구위로 일하다가 모해에 걸려 억울하게 희생되였다고 합니다.


김책의 동생도 쟁쟁한 혁명가였습니다. 김책은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자기 동생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는데 그후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야학에 다니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혁명운동에 뛰여들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관계한 조직이 동만청총이였습니다. 그후 그는 공산당에도 입당하였습니다. 김책이 소속된 세포는 화요파의 영향밑에 있던 조직이였습니다.


19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이 파쟁놀음때문에 해산된 당이라는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가 한때 이 당산하의 어느 한 세포에서 생활했다는것을 다 밝히였습니다.


그 당시 만주땅에는 두개의 만주총국이라는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화요파가 장악하고있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였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항하여 엠엘파가 만들어낸 만주총국이였습니다.


김책은 령도권쟁탈로 일관된 파쟁의 내막을 알고는 권력다툼을 일삼는 공산당상층인물들에게 환멸을 느끼였습니다. 그 나날에 감옥에도 잡혀들어가게 되였습니다. 그가 파쟁속에서 조락해가는 공산주의운동실태를 두고 고민하고있을 때 이번에는 국제당이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는 놀라운 소식이 감방안에까지 날아왔습니다. 파쟁으로 피투성이가 된 당이였지만 그 당마저 해산되였다고 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김책은 감옥안에서도 감옥밖에 나와서도 이 한가지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기성세대에 의거해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겠고 그렇다고 기성세대를 부정하자니 그것을 대신할만 한 세력이 없는것 같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출로는 막연한데 감옥문을 나섰다고는 하나 수중에 돈 한푼 없으니 이 몸을 어디다 어떻게 건사하겠는가. 이렇게 막막한 생각을 하다가 은인에게 인사라도 한마디 하고 가는것이 도리라고 찾아간 곳이 허헌선생네 집이였습니다.




김책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서준 사람이 바로 허헌선생이였습니다. 김책은 원래 변호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를 붙일만 한 돈도 없었고 또 변호를 받고싶은 생각도 없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허헌선생이 자청해서 무료로 그의 변호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 많은 혁명가들과 독립운동자들의 변호를 맡아가지고 형량을 덜게 하거나 무죄가 되게 하였습니다.


김책은 허헌선생네 집에서 며칠동안 보양을 하였습니다. 그가 서울을 떠날 때 허헌선생은 두루마기도 한벌 입혀주고 손에 로자도 쥐여주었습니다. 그때 돈으로 3원인가 4원인가 주었다는데 그 돈으로 김책은 차표도 끊고 도중식사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김책과 허헌선생은 이렇게 인연을 맺었습니다. 허헌선생이 김책의 변호를 서준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표현이였습니다. 조선의 애국자들이 조선사람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도 벌을 받는것이 가슴아프고 억울해서 무료변호를 서준것입니다. 동정심, 련대감, 애국선배로서의 의리… 이런것들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고보면 허헌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해방후 김책이 내각에서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일할 때 허헌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초대의장으로 사업하였습니다. 지난날 피고석에 앉아있던 사람과 그의 변호를 담당했던 사람이 국가의 고위간부가 되여 일하게 되였으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기이한 인연입니까.


김책은 부수상으로 임명된 날 허헌선생앞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옛날에는 선생님이 나를 변호해주셨는데 이제부터는 비판을 해주셔야겠습니다. 내가 부수상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잘못하는것이 있다면 사정없이 종아리를 쳐주십시오.》


허헌선생은 호인이지만 대가 바른 사람이였습니다. 김책이 일을 잘못한다면 정말로 종아리를 칠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허헌선생에게는 그런 기회가 한번도 차례지지 않았습니다. 김책이 부수상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비판감이 될만 한 일을 한번도 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그 대신 박헌영은 부수상을 하면서 늘 허헌선생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허헌선생이 무슨 낌새를 챘던지 나보고 노상 박헌영을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서거했다는 말을 듣고 목놓아울던 허헌선생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상님한테는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오른팔이였는데 너무도 일찌기 갔다고 하면서 못내 애석해하였습니다.


김책은 허헌선생네 집에 있을 때 창피한 생각이 들어 끼마다 차려주는 더운 음식도 살에 가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해서 해놓은 일은 별로 없이 파쟁군들한테 롱락만 당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는데 자기를 대단한 혁명가처럼 돌봐주니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 같더라는것입니다.


백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인민의 기대에 보답하자! 이것이 김책이 허헌선생네 집을 떠나 간도로 들어갈 때 다진 맹세였다고 합니다.


김책은 간도땅에 들어서자 그동안 아버지와 안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막힌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에는 철도 채 들지 않은 두 아들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사사일을 생각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일제의 특무들이 자기를 잡아가려고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기때문이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얼마나 교활했는가. 혁명가들을 붙잡아다가 한바탕씩 두들겨패고나서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것처럼 앞문으로 석방하고는 다시 뒤문으로 잡아들이군 했습니다. 그들의 잔꾀가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김책은 두 아들을 처남네 집에 맡기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헌 삿갓을 쓴 농부의 차림으로 처남네 소를 앞세우고 동구밖으로 나갔습니다. 고개마루에 올라서자 그 소가 외양간에 떼두고 온 새끼소를 찾느라고 계속 울었습니다. 외양간의 새끼소도 어미소를 부르느라고 구슬프게 울었습니다.


위장도 중요했지만 김책은 어미소를 더 끌고갈수가 없었습니다. 엄지와 새끼가 서로 울음으로 화답하는 소리를 들으니 처남집에 맡기고온 자식들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고 송아지도 아이들도 다 불쌍한 생각이 들더라는것입니다. 그래서 어미소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16년동안이나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김책과 같은 혁명가가 아니고서는 체험할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김책에게 아이들이 그후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가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처남이 살아있으면 입에 풀칠은 할것이다, 그러나 처남네가 잘못되였으면 거지가 되였을것이다, 거지가 되여 남의 집 대문밖에서 동냥질을 하더라도 죽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어느때든지 해방의 날도 보고 이 못난 애비도 볼게 아닌가고 하였습니다.


김책이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들은것은 녕안에 갔을 때였습니다. 아들들과 헤여져서 곧추 찾아간 곳이 녕안현인데 거기에 있는 동만청총시절의 동료들과 만주총국시절의 친지들이 길림방면에 기성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새 세력이 등장했다는것, 그 지도자가 김성주라는것, 나이는 많지 않지만 인망이 있고 친화력이 강하다는것, 군벌감옥에 갇혀 고생하다가 석방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는것이였습니다.


동만청총에 길림선이 닿아있었으니까 그들이 우리의 활동내막을 알수 있었습니다. 녕안현일대에 길림에 가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김책은 동료들한테서 그런 말을 듣기 바쁘게 나를 찾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미 길림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 대신 려관에서 그는 우연히 우리 동무들을 만났습니다. 아마 그들이 김책을 미행하고있었던것 같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김책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가 길림에 오게 된 사유까지 듣고나서 김성주는 길림에 없다, 길림이 초행인것 같은데 여기서 어물어물하지 말고 몸을 피하라, 지금 《적색5월》의 여파로 군벌들이 혁명가들을 잡아내느라고 혈안이 되여있다, 김성주는 후날에도 만날수 있으니 경찰들의 손이 뻗치기 전에 길림성안을 빠져나가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로자까지 주어서 바래주었다는것이였습니다.


김책은 그길로 북만쪽에 갔다가 국민당군대에 붙잡혀 또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9.18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김책은 그후 감옥문을 나서기 바쁘게 또다시 군벌경찰한테 붙잡혀 미결수로 있게 되였습니다. 략식재판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간판은 공산주의자이지만 아직 운동다운 운동은 별로 해보지도 못하고 군벌들의 손가락 하나 다친적 없는 사람에게 사형이라는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형벌이였습니다. 당시의 만주땅이라는 곳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습니다.


김책은 사형장까지 끌려나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어떤 장교가 와서 쏘지 말라고 호통치더라는것입니다. 반일사상이 강한 진보적인 장교였던것 같았습니다.


김책은 그때 사형장을 떠나면서 세상이 영 무심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곡절을 겪는 과정에 그가 어떤 교훈을 얻게 되였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젊어서부터 혁명을 하느라고 했지만 태반은 감옥이나 로상에서 보내면서 큰일은 치지 못하고 쫓겨다니기만 하다가 무장을 잡은 다음부터야 비로소 주동에 서서 적들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적들은 맨주먹으로 싸우는 혁명가들을 허재비로 압니다.》


김책은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장을 하지 못하면 무장한 강도들앞에서 허수아비처럼 무력한 존재가 되고 자기자신마저 지켜낼수 없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의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김책의 그 말을 듣고 그가 옳은 교훈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김책의 반생이 도달한 교훈이기도 했지만 혁명투쟁의 일반적합법칙성이라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하며 민족적독립이나 사회적해방을 위한 모든 투쟁의 결말은 대체로 무장투쟁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우리가 항일혁명에서 승리할수 있었던 기본요인도 자체의 독자적인 혁명무력을 가지고있은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무대에 김구네 세력, 리승만이네 세력, 려운형이네 세력을 비롯하여 각이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본것은 우리의 조선인민혁명군이였습니다. 왜 우리를 제일 무서운 적수로 보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청원이나 파업이나 붓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최고형태인 무장투쟁의 방법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완강하게 싸웠기때문입니다.


항일혁명의 승리는 혁명은 총대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진리의 정당성을 확증해주었으며 해방후 우리로 하여금 새 조국건설과 사회주의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의 전 행정에서 혁명적군건설로선을 확고히 틀어쥐고 강유력한 혁명무력을 건설하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게 하였습니다.


국력도 총대에서 나오고 민족적자부심도 총대에서 나옵니다. 군대가 강해야 민족이 부흥하고 나라도 륭성번영합니다. 총대를 떠난 자주성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총대에 녹이 쓸면 인민이 노예가 됩니다.


오늘 김정일동무가 혁명무력의 수위에 서서 인민군대를 무적필승의 강군으로 키우고 군건설에서 경이적인 성과를 이룩하고있는것은 백두산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는데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력사적업적으로 됩니다.


김책은 종파의 해독성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별로 한 일도 없이 감옥으로 끌려간것은 종파의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그때 자기는 감옥밥을 먹고나서야 공산주의운동을 재래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것과 종파를 없애지 않고서는 민족해방이나 계급해방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것을 통감하였다고 하면서 자기가 나를 만나려고 한것은 길림에 나타난 새 세력이 조선공산당산하도 아니며 종파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참신한 새 세대들의 집단이라는 말을 듣고 그런 세력이라면 서슴없이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기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행로에서 인생이라고 할만 한것이 있다면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시작한 다음부터라고 하였습니다. 그전의 생활은 방황과 모색과정이였다는것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였습니다. 주하에서 유격대를 조직한 때로부터 그는 북만당과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의 주요직책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하였습니다. 북만의 조중혁명가들과 인민들은 한결같이 김책을 로숙하고 세련된 혁명가로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일찍부터 김사령을 주시해왔습니다. 우리 북만의 조선혁명가들이 사령을 얼마나 만나고싶어했는지 압니까. 우리는 늘 김사령부대가 있는 백두산쪽을 쳐다보며 싸웠습니다. 그때 길림에서 김사령을 만났더라면 내 그동안 마음고생도 그렇게는 안하는건데.…》


김책은 계속하여 우리가 조국진군을 단행하여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제일 간절한 소원은 나의 손을 잡아보고싶은 생각이였으며 북만의 조선혁명가들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리고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엄한 사람으로만 알려져있던 김책은 뜻밖에도 다감한 사람으로 내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내가 북만에 파견한 사람들한테서 동만소식도 듣고 서간도소식도 많이 들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에서 제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것은 관병일치, 상하일치, 군민일치의 기풍이며 사상과 넋에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것은 남의 나라 땅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조국해방을 주되는 투쟁강령으로 내들고 조선사람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정정당당하게 주장해온 자주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우리의 투쟁행로를 속속들이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내가 한 대원의 총가목을 수리해준 사실까지 다 알고있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자기는 혁명투쟁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우리를 거울로 삼고있었다는것이였습니다. 김책은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였습니다.


김책은 우리를 거울로 삼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혁명가의 표본이였습니다.


그는 범같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있었으나 사실상 그 누구보다도 대원들을 사랑하는 정치일군이였습니다. 그가 총가목에 대한 일화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와 비슷한 상하관계상의 일화들은 그에게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혁명군대의 전투력은 무엇인가, 동지애이다, 혁명동지를 아끼고 사랑하라, 사랑하되 자기의 심장처럼 사랑하라, 혁명동지보다 더 귀중한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하는것이 김책이 대원들에게 강조한 사상이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지대의 한 대원이 문건을 가지고 그를 찾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김책은 그 대원을 병실에서 재우고 문건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자 바느실을 준비해가지고 그 대원이 자고있는 병실에 찾아가 그의 해진 옷과 내의를 기워주었습니다. 낮에 문건을 넘겨받을 때 김책은 벌써 그 통신원의 옷이 해진것을 보고 기워줄 궁리를 했던것입니다. 자기 부대의 대원도 아니고 딴 부대의 대원이였는데 친형이나 친아버지처럼 그 사람을 돌봐주었단 말입니다.


김책은 싸움을 한번씩 하고나서는 대원들을 만나 그들의 전투성과를 축하해주군 했습니다. 대원들을 한데 모아놓고 축하해준것이 아니라 한사람한사람 찾아다니면서 동무가 성문을 돌파할 때 잘한것은 무엇이고 위만군 병실들을 들이칠 때 잘한것은 무엇인가, 함화공작에서는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부족했는가 하는 식으로 전투성과를 구체적으로 평가해주군 했습니다. 북만부대들에서 싸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대원들이 그런 총화를 받고난 다음이면 싸움을 더 잘했다고 합니다.


김책은 비판을 받은 사람이나 책벌을 받은 사람들과의 사업도 아주 로숙하게 했습니다. 만일 어떤 대원이 지휘관한테서 충고를 받으면 꼭 그 대원을 만나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가를 알아보고 잘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리해할 때까지 꾸준하게 설복하였습니다.


김대홍이 소대장으로 공작할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기관총부사수를 되게 욕질한적이 있습니다. 싸움에서 단련되지 못한 그 대원은 적탄이 우박처럼 날아오자 총을 공중에 대고 쏘았습니다. 김대홍은 그 광경을 보다 못해 《비겁한 놈, 목숨이 그렇게 아까우면 총을 놓고 부모들곁으로 썩 사라져!》라고 하였습니다.


싸움이 끝난 다음 김책은 김대홍을 불러 동무, 대원들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그 사람이야 신대원이 아닌가, 싸움을 처음해보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욕설인가, 동무는 그 대원에게 욕부터 할것이 아니라 솔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의 충고를 받은 김대홍은 그후부터 절대로 대원들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김책을 부하들을 어루만지기만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경우에 따라 설복할것은 설복하고 추궁할것은 추궁하고 처벌할것은 처벌하는 원칙성이 강한 지휘관이였습니다. 과오가 엄중하면 무섭게 다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김책이 서거한 후 장상룡이 그를 회고하면서 한 이야기인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1942년 겨울, 그러니까 김책이 하바롭스크회의에 참가했다가 다시 만주에 돌아가 소부대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그들의 소부대는 식량부족으로 고생을 몹시 하였습니다.


어느날 장상룡은 사냥을 하려고 진종일 밖에 나가 돌아다니였습니다. 곰 한마리와 메돼지 한마리를 잡았는데 숙영지로 돌아가려고 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잡은 짐승들을 감추어놓고 바삐 걸었지만 맥이 빠진데다가 길도 험해서 숙영지로 돌아갈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사냥군들의 숙소에 들어가 하루밤 자고 다음날 아침 숙영지로 돌아왔습니다. 그 숙소는 김책이 특무들이 리용할수 있는 거처라고 하면서 사용금지령을 내린 집이였습니다.


장상룡이 사용하지 않기로 된 집에서 하루밤 자고왔다는것을 알게 된 김책은 전창철을 불러 장상룡은 우리 대오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되게 문제를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전창철은 지금까지 혁명을 위해 충실히 싸워온 동무인데 한번만 용서해주자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책은 용서할수 없다, 우선 밖에 내다가 3시간동안 세워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전창철은 그의 명령대로 장상룡을 밖에 데리고나갔습니다. 2시간도 되기 전에 장상룡은 벌써 몸이 꽁꽁 얼어들었습니다.


전창철은 보다 못해 김책에게 그만 하면 장동무가 자기 과오를 충분히 반성하였겠는데 이제는 불러들이자고 제기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책은 과오를 범한자의 처벌을 덜어주려고 하는것도 똑같은 규률위반이라고 하면서 전령병에게 전창철도 밖에 내다가 벌을 세우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는 3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장상룡을 천막안으로 불러들이였습니다. 그리고는 시장할터이니 우선 식사부터 하라고 하였습니다.


장상룡은 밥상에 마주 앉았으나 밥술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잘못을 뼈아프게 뉘우쳤기때문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서야 김책은 장상룡을 가까이에 불러앉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무는 자기의 과오가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할수 있는데 그러면 안된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엄중시하는가, 동무 한사람의 잘못으로 해서 우리 소부대의 위치를 로출시킬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우리모두의 생명은 물론, 혁명임무까지 몽땅 말아먹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 막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것이다, 그러나 동무는 자기 상급이 그런 지시를 했다는걸 알면서도 그걸 무시하고 하루밤 모험을 하였다, 거기에 특무들이 있었다면 어쩔번 했는가고 하였습니다.


장상룡은 그때 그 한마디한마디를 뼈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김책은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였지만 그 대신 그의 말 한마디한마디에는 법조항과 같이 드틸수 없는 무게가 담겨있었습니다.


적들이 한때 북만에서 항일유격대원들의 사기를 꺾어보려고 김책이 체포되였다, 박길송이 투항했다, 어느 지대가 귀순했다, 허형식이 어떻게 됐다 하고 엉터리없는 류언비어를 돌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날조라는것을 알고있는 유격대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격분하였습니다. 그런 류언비어에 신물이 난 2지대의 지대장은 좋다, 너희들을 혼내주마 하고 적들을 골탕먹일 계책을 꾸미였습니다. 그는 부대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특무를 한놈 유인해다가 그에게 빨찌산이 투항하려고 하니 당신이 산에서 내려가 헌병대와 교섭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헌병대는 특무를 통하여 접선장소와 접선시간을 알려주고 지대장에게 후한 표창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순자대렬을 인수하기 위하여 약속된 접선시간에 특무를 앞세우고 지정된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수림속에 정렬한 2지대의 대오를 보자 벌쭉벌쭉 웃으면서 그들에게 손까지 흔들어보였습니다.


이때 2지대의 대원들은 일제히 총을 내들면서 《꼼짝말라!》고 고함쳤습니다. 지대장은 적들에게 이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는 투항하러 온것이 아니라 네놈들을 잡아가러 왔다, 손을 들라고 호통쳤습니다.


그러자 적의 우두머리는 공산군은 거짓을 모르는 군대라던데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는가, 군대란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지대장이 그 말을 듣고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눈만 째지면 류언비어를 퍼뜨리고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신의는 무슨 신의란 말이냐, 네놈들이 하도 대포를 불기때문에 우리도 대포를 불어본거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지대는 적들을 몽땅 생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대장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들이 대단했습니다. 성공한 작전이라고 추어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박득범이 식량을 해결하려고 《투항》을 광고했다가 되게 비판을 받은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였습니다.


추천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인기게시물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9일(수)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17일(목)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8월 30일(일)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3일(목)
왜 조선만은 오늘날 세계유일의 주체적강성대국이 되었나
죽음을 타승한 사랑의 힘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13일(일)
최근게시물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9월 26일(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 24 4. 민족의 얼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9월 26일(토)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25일(금)
[Reminiscences]Chapter 23. In Alliance with the Internationa…
인민은 사회주의를 사랑한다
[정론] 위대한 우리의 10월명절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뜨거워만지는 사랑의 손길
기적적승리를 안아오는 무비의 힘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원칙을 담대히 실행해야합니다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9월 25일(금)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9월 24일(목)
Copyright ⓒ 2000-2020 KANCC(Korean American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webmaster@kan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