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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 18 장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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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8-17 18:1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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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6권 제 18 장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1937년은 항일혁명의 전성기였다. 우리 주력부대의 백두산지구 진출이 일으킨 파도를 타고 력사적인 전환의 시대에 들어선 조선민족해방투쟁과 조선공산주의운동은 전례없는 폭과 심도를 가지고 앙양일로의 길을 걷고있었다.


만사가 우리의 의도와 의지대로 다 잘되여가던 그때 조선혁명은 사나운 도전에 부딪치였다. 우리가 백두산지구를 떠나 무송, 몽강현일대에서 활동하는 사이 적들이 세칭 《혜산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여 우리의 혁명력량에 대한 대대적인 폭압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던것이다. 적들은 우리가 백두산지구에 나온후 한해 남짓한 기간 꾸려놓은 지하조직들을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우리의 령도와 로선에 충실한 혁명가들을 무데기로 잡아다가 처형하였다.


수차에 걸치는 검거선풍을 통하여 적들은 수백수천명의 애국자들을 잡아가두었다. 옥중에서 고문치사를 당한 사람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사건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국내당공작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내달리던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사업은 심각한 손실을 당하였다.


나는 몽강현 대갑랍자밀영에서 김평과 김재수를 통하여 《혜산사건》에 대한 상보를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의 통분하던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수많은 억울한 희생을 낸 《민생단》소동이후 처음으로 체험해보는 커다란 상실감이였다.


나는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혜산사건》은 매개 사람들이 지니고있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신념과 의지의 강도를 검증하는 일대 시련이였다고 할수 있다. 말하자면 이 사건은 진짜혁명가와 가짜혁명가를 가르는 하나의 엄혹한 검열과정이였다.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절개를 지켜 원쑤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고 반대로 신념과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혁명가로서의 존엄을 버리고 배신과 굴종의 길에 떨어졌다.


사건초기 고문에 못이겨 적들에게 대내의 비밀을 고스란히 섬겨바친 배신자들가운데는 길혜선과 백무선의 철도공사장들에 파견되여 활동하던 지하공작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철도공사장의 로동계급속에 혁명조직들을 박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을 몇개 맞고는 인차 적들에게 투항해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고 혁명의 리익을 고수해야겠다는 철석같은 각오와 불굴의 투쟁정신이 부족하였다. 그 몇사람이 비밀을 불지 않았더라면 장백일대 혁명조직들은 건재하였을것이다. 우리는 벌써 1차검거에서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지도핵심들과 조직성원들을 잃는 참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신념과 의지는 혁명가가 갖추어야 할 기초적자질이다. 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혁명가라고 말할수 없다.


참된 인간의 표징을 론할 때 우리는 그가 무슨 사상과 신념을 어떻게 지니고있는가에 대하여 응당하게 중시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신념이 강한 인간일수록 삶의 목표가 뚜렷하고 그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에 성실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가들을 육성하는데서 모든 사람들이 공산주의적인 신념을 소유하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였다. 우리가 신념을 혁명가의 중요한 표징으로 보고 그 배양에 막대한 노력과 정력을 기울이는것은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의 기발밑에 진행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과정이 인류가 수행하는 모든 혁명가운데서 가장 간고하고 장기적인 변혁운동으로 되기때문이다. 강철같은 신념과 의지가 없이는 자연과 사회의 온갖 구속과 도전으로부터 인간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어려운 변혁운동을 끝까지 승리에로 이끌어나갈수 없다.


신념을 신념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강력한 동반자, 보호자가 바로 의지이다.


신념과 의지는 고정불변한것이 아니다. 환경과 조건에 따라 더욱 굳건해질수도 있으며 약화될수도 있고 변질될수도 있는것이 신념과 의지이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에 변질이 생길 때 그 혁명은 헤아릴수 없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런 리유로 하여 우리는 신념교양을 공산주의적인간육성의 필수적인 공정으로 보고있는것이다.


신념과 의지의 련마는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질수 있으며 부단한 교양과 자체수양과정을 거쳐야 견고하고 확실한것으로 될수 있다. 이런 공정을 경과하지 않은 신념이나 의지는 사상루각과 같다. 혜산경찰서의 취조실에서 혁명가의 신념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가 바로 그런것이였다. 그들은 혁명적인 조직생활과 실천과정을 거쳐 심신을 충분히 단련하지 못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사상의식은 폭풍속에서 련마되지 못한것이였다. 그들은 모두 항일혁명의 전성기에 입대하여 승리하는 싸움만을 체험한 사람들이였다. 혁명이 상승단계에 있을 때에는 그 흐름을 타고 이처럼 대렬내에 사상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우연분자들이 끼여들게 된다.


《혜산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은 우리는 인차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비상회의를 열고 위기에 직면한 혁명조직들을 보호하고 당건설과 조국광복회조직건설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하였다.


1차검거를 통하여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둔 적들은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 검은 마수를 뻗치고있었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명줄을 다 끊어놓기라도 할것처럼 그 무슨 실적을 뽐내면서 기세를 올리고있었지만 우리가 애써 건설해놓은 지하조직들이 다 망가진것은 아니였다. 장백과 갑산일대에는 적들의 폭압망에서 벗어나 타고장에 피신했거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장백현당과 장백현 조국광복회조직의 지도부는 권영벽, 리제순, 서응진, 박인진 등의 체포로 해체상태에 이르렀지만 박달, 김철억, 리룡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부는 그대로 살아움직이고있었다.




우리는 1차적으로 장증렬과 마동희를 국내에 파견하여 피신중에 있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성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통하여 조직들의 피해정형을 료해장악하며 파괴된 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우리의 총적인 지향과 의도는 적들의 탄압으로부터 오는 손실을 최대한으로 막고 화를 복으로 바꾸자는것이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 성원들의 행방을 찾아 갑산군일대의 산간부락들을 차례로 훑어나가던 마동희와 장증렬은 남흥동에서 산농지도구 서기로 일하는 김태선이라는자의 밀고로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김태선은 마동희의 동향친구였다. 그 두사람은 갑산땅에 와서도 청소년시절을 남다른 우정속에서 보냈다. 김태선이 장백현에 건너가서 무슨 강습소에 다니다가 학비난으로 학업을 계속할수 없게 되였을 때 그에게 돈을 대준 사람이 다름아닌 마동희였다. 김태선이 강습소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될 형편에 처하게 되자 마동희는 서당돈을 5원이나 돌려 그가 공부를 계속 할수 있게 해주었다. 그후에도 그는 삯김을 매주고 번 돈과 땔나무를 팔아서 번 돈, 대서인노릇을 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모아 친구의 뒤받침을 직심스레 해주었다.


강습소를 졸업하고 산농지도구 서기의 자리에 취직하였을 때 김태선은 장길부어머니를 찾아가 어머니, 내가 지식청년이 되여 밥술이나 얻어먹을수 있게 된것은 다 동희가 나를 진심으로 도와준 덕입니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내 한평생 동희의 우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동희가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도부와의 련계를 지을 과업을 받고 갑산땅에 나갔을 때 남흥동의 김태선네 집을 피신처로 정한것은 이런 우정을 굳게 믿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런데 그동안 적들의 충실한 노복으로 변해버린 김태선은 마동희와 장증렬이 자기 집에 나타나 숙식을 보장해달라고 하자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마련해주고는 김일성의 부하 두사람이 자기 집에 와있다고 신고하였다. 그 김태선이라는자가 아주 고약한 놈이였다.


마동희와 장증렬은 적들에게 체포된 때로부터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걸었다.


마동희가 어떻게 고문을 이겨냈고 어떤 방법으로 비밀을 지켜냈는가 하는것은 항일투사들의 회상기들과 문예작품들을 통하여 많이 소개되였다고 생각한다. 마동희가 어떤 사람인가고 물으면 인민학교 아이들까지도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혀를 끊은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사람이 자기 혀를 스스로 끊는다는것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각오는 살아서 역적으로 되는것보다 죽어서 충신이 되기를 바라는 참인간들만이 할수 있는것이다. 사람이 일단 죽음을 각오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할수 있다.


마동희의 용기와 희생성은 신념이 강한데서 나온것이였다.


그 용기와 희생성은 어떤 고문이나 위협으로써도 거세할수 없는 무쇠같은 의지의 발현이였다. 마동희는 자기가 비밀을 지키면 조직은 건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믿었다.


마동희를 신념이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준것은 혁명실천이였다. 그는 백암지방에서 살 때 반일회도 조직해보았고 교편을 잡고 화전민의 자식들에게 애국주의교양도 해보았다. 인민혁명군에 입대한 후에는 구대원들과 함께 간고한 무송원정도 해보고 경위중대의 학습강사로서 대원들의 정치, 문화적자질을 높이기 위한 계몽사업도 해보았다. 그 과정에 사람이 망국노가 되면 상가집 개만도 못한 신세가 되며 민족이 살아나갈 길은 투쟁에 있다는것, 혁명을 해야 살길이 열리고 혁명을 하지 않으면 자자손손 마소보다도 못한 노예살이를 하게 된다는것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이였고 그것을 확고한 신념으로 만들었다.


마동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신념의 소유자로 될수 있는 기질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불공정한것, 몰렴치한것, 비량심적인것과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았다. 상대가 너절한 인간이라는것을 간파하게 되면 담임교원과도 단호히 결별하였다.


소학교시절의 마동희의 담임교원 조가는 교육자의 량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시정배와 같은 인간이였다. 그는 학업성적을 실력에 따라 평가한것이 아니라 친, 불친을 가려가며 불공평하게 평가하였다. 뢰물을 많이 먹이는 집 아이들과 부자집 자식들, 권세가의 출신들에게는 실력에 관계없이 모두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담임교원은 자기가 편애하는 학생들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우수생들의 점수를 깎아내리는것과 같은 비행도 서슴지 않았다. 마동희가 졸업반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가는 그 버릇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뢰물을 듬뿍 찔러준 어느 권세가의 자식을 1등생으로 내세우기 위해 전 과목최우수생인 마동희의 력사시험성적을 일부러 《갑》이 아니라 《을》로 매겨버리였다. 교원의 처사에 불만을 느낀 마동희는 담임교원한테 서슴없이 찾아가 자기의 시험지를 보여줄것을 요구하였다. 조가는 시험지를 보여줄 대신 버르장머리없는 놈이라고 하면서 그의 뺨을 후려갈기였다. 조가의 행위는 마동희의 분노를 격발시키였다. 그는 스스로 퇴학을 선언한 다음 담임교원앞에서 성적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동희의 아버지 마호룡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린 나이에 학교를 단념하고 생활전선에 뛰여드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낮에 장마당에서 사온 소학생모자를 아들에게 내보이며 네가 맨머리바람으로 다니는것이 민망스러워 방금전에 모자까지 사왔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니 그게 무슨 망발이냐, 훈장이 부자집자식편을 든다든가 권문세가의 눈치를 보는거야 다반사인데 그런다고 선생한테 시비를 걸면 어쩔셈이란 말이냐, 어서 담임선생을 찾아가서 사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동희는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가 담임선생을 찾아가는것까지 한사코 막아나섰다.


그후 마동희와 담임교원은 각기 적대되는 길을 걷게 되였다. 마동희가 시대의 반항아가 되여 애국전선에 떨쳐나섰다면 조가는 교단을 버리고 매국반역의 길에 나섰다. 그는 순사가 되였다가 나중에는 형사로 승진되여 애국자색출에 혈안이 되여 돌아갔다. 그가 눈을 곤두세우고 감시한 첫 대상이 바로 마동희였다. 조가는 마동희의 일거일동을 지꿎게 주시하였다. 똑똑한 건덕지가 없으면 사건을 날조해서라도 마동희를 형장으로 끌고갈 잡도리였다.


조가가 마동희를 본격적으로 미행하기 시작한것은 그가 장백땅에 들락날락하면서 인민혁명군의 물을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어느날 마동희는 장백에 건너가서 유격대대표인 김주현을 만나 입대승인을 받아가지고 돌아오다가 압록강다리목에 도사리고있는 조형사와 맞다들었다. 조형사는 눈살이 꼿꼿해서 마동희를 노려보고있었다. 마동희는 다리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대번에 직감했으나 태연자약하게 집에 돌아가 출발준비를 하였다.


그날 마동희의 어머니는 백두산으로 떠나가는 아들에게 하직밥을지어주었다. 그러나 마동희는 그 밥마저 먹지 못하고 총총히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가가 그를 잡아가려고 순사들과 함께 뜨락에 나타났던것이다. 마동희는 뒤문으로 집을 탈출하여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


스승이 제자를 잡으려고 돌아치는것과 같은 말세기적현상은 일제통치자들이 강요하는 반인륜적인 풍조가 빚어낸 비극이였다. 해방후 장길부녀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옛말처럼 들려주군 하였다.


마동희는 구시산전투후 전투장근처에서 우리 부대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가는 조형사를 만났다. 그자는 마동희를 보자마자 무작정 총질부터 하였다. 마동희는 조국도 민족도 제자도 안중에 없는 이 후안무치한 친일반동을 즉석에서 처단해버리였다.


이 일화를 통하여 마동희의 인간상을 알수 있고 마동희가 지니고있던 신념이 어떤 토양우에 서있었는가를 알수 있다.


내가 마동희를 데리고 다닌것은 1년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마동희는 만사람의 사랑을 받은 충실한 유격대원이였지만 그가 유격대에서 생활할 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만 한 사건이나 일화를 남긴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한가지 일화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송원정을 끝내고 동강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진행하기 위해 식량을 구해들이던 때의 일이다. 그때 마동희네 7련대 3중대도 매일같이 식량공작에 동원되였다. 어느날 밤 중대장은 식량공작을 떠나면서 발에 동상을 당한 마동희와 그밖의 신입대원동상자들에게 밀영에 남아 다음날 아침식사준비를 위해 통강냉이를 망에 갈라는 과업을 주었다.


마동희는 중대장의 명령대로 망에다 통강냉이를 갈기 시작했다. 종일 힘에 부친 설상행군을 한데다가 식곤증까지 겹쳐 그는 참을수 없는 피로를 느끼였다. 그러나 마동희는 찬눈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졸음을 이겨냈다. 그런데 다른 대원들은 자기들은 먹지 않아도 좋으니 피곤해서 누워있겠다고 하였다. 그들은 마동희가 혼자서 망질을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말로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마동희가 통강냉이를 다 갈아놓자 수고한 값을 어떻게 갚으면 좋겠느냐고 하면서 자기네들끼리 걱정하였다. 우리 신입대원들가운데는 그들처럼 동서남북을 전혀 모르는 얼떨떨한 사람들이 간혹 끼여있었다. 마동희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두 신대원을 호되게 꾸짖었다.


내가 밀영에 도착하자 마동희는 이 사연부터 말하였다. 동지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혁명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한탄하였다. 그가 몹시 락심해하기에 나는 지금은 조직적세련이 부족해서 그렇지만 교양을 잘하면 그들도 훌륭한 대원이 될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신대원들은 물론 그후 일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진짜배기 강병이 되였다.


마동희는 입대후 짧은 기간에 훌륭한 전투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보천보시가에 대한 정찰도 아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임무수행에서 발휘한 헌신성과 적극성을 높이 평가하여 나는 보천보전투승리를 경축하는 군민련환대회장에서 인민대표단이 우리에게 축기를 증정할 때 마동희를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대표로 내보내여 그 축기를 받는 영예를 지니게 하였다.


그후 생활이 증명해준것처럼 마동희는 확실히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병사들을 당당히 대표할수 있는 뛰여난 혁명전사였다. 그는 한마디로 말하여 공산주의자의 표본이라고 평가할수 있는 인물이였다.


마동희는 누구보다도 사령부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가 비밀을 불지 않았기때문에 우리는 무사할수 있었다.


마동희가 희생된 다음날 마호룡은 관을 짜가지고 혜산에 와서 아들의 시신을 싣고 경찰서앞으로 지나가다가 최경부와 맞다들었다.


최경부는 마호룡을 보자 이렇게 말을 걸었다.


《령감, 죽은 아들을 싣고가니 감상이 어떤가?》


민족에게 백정질을 하는 최경부를 평소부터 밉살스럽게 보아오던 마호룡은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분연히 대답했다.


《내 아들 동희는 조선을 독립하기 위해서 싸우다가 죽었다. 딸과 며느리도 그렇게 죽었다. 왜놈들의 물건을 훔치다가 죽은것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자랑으로 여긴다.》


마동희의 아버지는 이 말 한마디때문에 그후 체포되여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하는 마지막순간까지 혁명투사의 아버지, 애국자로서의 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교형리들과 맞서 싸웠다.


마동희와는 대조적으로 장증렬은 곤장맛을 몇개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마동희는 혀를 끊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지켰는데 장증렬은 어찌하여 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저주스러운 배신의 길을 택하였는가.


학력이라든가 리론수준이라든가 사업능력으로 볼 때 그는 마동희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사람이였다. 유격대년한을 따지면 오히려 마동희의 선배라고 할수 있었다. 똑똑하고 붙임성이 좋은 장증렬은 입대하자마자 일반대원들로부터 《간부감》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우리 사령부도 역시 그를 《간부감》이라고 점찍어두었다. 그는 입대후 보통사람들이 대체로 거쳐야 하는 계단식공정을 밟지 않고 일약 사단청년과장자리에까지 도약해오른 인물이였다. 사단청년과장이면 그가 권영벽이나 김평에 못지 않은 신임을 받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장증렬을 어느 정도로 신임했는가 하는것은 장백현당이 조직되였을 때 그를 현당위원으로 선거한 사실만 놓고보아도 충분할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장증렬에게 줄수 있는 모든것을 다 주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밥도 굶어보고 손발도 얼궈보고 밤도 밝혀보았다. 장증렬은 우리가 당하는 곤난을 두고 비관에 잠기거나 신심을 잃어본적이 별로 없었다. 그저 우리와 함께 만난을 묵묵히 참아냈다. 그러나 그는 철창안에 끌려가자마자 쉽게 흰기를 들고 말았다. 인간이 겪을수 있는 온갖 곤난을 다 참아내면서도 형장에서의 고문만은 견디여내지 못하고 휴지장을 집어버리듯이 혁명가로서의 체면과 지조를 얼른 집어던지였다.


장증렬의 변절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나는 철창밖의 인생관이 다르고 철창안의 인생관이 다를수 있다는 진실을 통감하였다. 철창밖에서의 장증렬의 세계관이 공산주의적인것이였다면 철창안에서의 그의 세계관은 유다의것과 같은것이였다. 그는 자기 개인의 육체와 혁명의 리익을 바꾸어먹은 장사군으로 전락한셈이였다.


장증렬은 많은 비밀을 적들에게 섬겨바치였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관하에서 자기와 련계를 맺고있던 혁명조직의 지도핵심성원들을 다 불었으며 사령부의 위치와 밀영들의 위치까지도 아는것은 다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렬처럼 변절하였다. 그는 우리 재봉대가 자리잡고있는 간파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전원이 희생되게 하였다. 간파하자에서 전사한 녀대원들가운데는 마동희의 안해 김용금도 있었다.


어찌하여 장증렬은 이처럼 너절하고 추악한 인간으로 변질되였는가. 평상시 그가 지니고있던 공산주의적신념은 허울뿐이였단 말인가.


그도 물론 신념에 대한 말은 많이 하였다. 하지만 그가 소유한 신념은 공고한 기초를 가지지 못한 서푼짜리것이였다. 그는 형장의 어마어마한 광경과 경관들의 독기어린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대일본제국의 위용에 겁을 집어먹은것 같고 항일혁명으로 그 제국을 타승한다는것은 실현불가능의 부질없는 공상이라는 회의주의에 침식된것 같다.


공고한 기초우에 선 신념이란 어떤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숭상하는 리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며 그 리념을 위해서라면 굶어죽을 각오, 얼어죽을 각오, 맞아죽을 각오까지 되여있는 그런 신념이다. 달리 말하면 자기 위업의 정당성과 자기 계급, 자기 인민의 힘에 대한 확신이며 자체의 주체적인 힘으로 만난을 극복하면서 혁명을 끝까지 완수해나가려는 각오를 의미한다. 그런데 장증렬에게는 맞아죽을 각오가 없었다. 자기가 맞아죽더라도 혁명의 리익을 고수해야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하겠는데 그는 반대로 혁명이야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기만 무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증렬은 혁명을 팔아먹은 값으로 육체적생명은 건질수 있었으나 그 대신 그보다 더 값비싼 정치적생명은 잃어버리였다. 사람들이 마동희를 기억하면서도 장증렬을 기억하지 못하는 리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동희와 장증렬이 걸어온 서로 대조되는 두 인간의 행로를 돌이켜볼 때마다 나는 김혁과 장소봉을 의례히 회고해보군 한다. 그들도 같은 시각에 같은 지점에서 같은 궤도를 타고 혁명을 시작하였지만 그 종착점은 서로 남극과 북극과 같은 차이를 가지고있었다. 이 격차의 출발점 역시 두 인간이 지니고있던 신념과 의지의 질적차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김혁이 조직생활과 혁명적실천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장소봉은 리론에 밝고 두뇌가 명석한 대신 실천이 굼뜨고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혁은 어떤 고생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소봉은 육체를 혹사하는 그런 성격의 일에 몸을 깊이 잠그지 않았다. 한사람은 물불을 모르는 열정의 사나이였고 다른 한사람은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진창속에서 돌을 골라디디면서 신등에 흙을 묻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런 랭철하고 타산이 밝은 사나이였다.


우리가 카륜이나 고유수 같은 고장으로 왔다갔다할 때만 해도 나의 친구들은 김혁을 재사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혁명을 위해 큰 몫을 담당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시나 쓰고 작곡이나 하는 선비가 혁명을 하면 얼마나 잘하랴 하는 선입견이 작용했던것 같다.


기타를 메고 거리를 몇번만 오락가락하여도 풍각쟁이대접을 받던 세월이였으니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김혁을 그런 눈으로 보는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였다.


그렇지만 장소봉에 대해서는 모두가 상당히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그가 후에 변절은 하였지만 명물이였다. 그는 가명으로 글을 많이 써서 발표하였다. 잡지 《볼쉐비크》에 글을 제일 많이 낸 사람도 바로 장소봉이였다. 그 사람은 차광수와 동렬에 놓을수 있는 한다하는 리론가이고 선동가였다. 그가 리론수준이 얼마나 높았던지 화요파의 거두인 김찬도 그와 론쟁을 하면 늘 수세에 몰려 허둥지둥하였다. 우리는 카륜회의때에도 장소봉네 집에 가있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가 몇해후 류치장에서 전향문을 쓰고 일제의 충견이 되여 우리를 반대하는 《귀순》공작에 나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이처럼 육체적생명외에 인간이 가지고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수 있는 정치적생명의 나이는 신념의 유무와 대소에 의해 결정된다. 신념이 강하고 의지가 강할수록 그 인간은 정치적생명을 유지하는데서 장수자가 된다. 신념을 일찌기 줴버린 사람들의 정치적생명은 비명에 요절하고만다.


우리 주력부대의 참모장으로 활동하다가 적들에게 투항한 림수산은 리종락이나 장소봉보다 더 한심한 반역행위를 하였다. 그는 《토벌대》대장이 되여 지난날 한전호에서 싸우던 전우들을 해치기 위해 미친듯이 돌아다니였다. 적들은 그를 주구로 써먹다가 쓸모가 없게 되자 내던지였다. 그후부터 림수산은 달구지를 끌고다니며 술장사를 하였다. 사단 참모장으로부터 술장사에로의 전락, 그것은 신념을 잃어버린 그에게 차례진 서글픈 운명의 귀결이였다.


그는 해방직후 달구지에 술통을 싣고 안도에서 삼지연을 거쳐 혜산으로 오다가 길가에서 류경수가 인솔하는 소조를 만났다. 그날 류경수네 일행은 백두산주변에서 출몰하는 일본군 패잔병들을 소탕할데 대한 나의 명령을 받고 현장으로 가던중이였다.


림수산은 지난날 자기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을 보자 어색해하면서 당신들도 이제는 산에서 내려왔구만, 김일성장군은 아직도 산에 있는가, 왜 장군과 같이 오지 않고 당신들만 내려왔는가고 하였다. 그때 류경수, 리두익을 비롯하여 패잔병숙청사업에 동원된 항일투사들은 모두 일본군복을 입고있었다. 그래서 림수산은 그들이 모두 자기처럼 일본사람들에게 귀순한줄로만 알았다. 얼마나 정세에 암둔했던지 일본이 망한것도 모르더라는것이였다. 사람이 신념을 잃고 지조를 지키지 않으면 이 지경이 되고 만다.


손에 무장을 들고 우리와 함께 험난한 항일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물론 신념도 강하고 의지도 강한 백절불굴의 투사들이였다. 그들은 최악의 역경에 처한 순간에도 혁명가의 지조를 버리지 않았고 조국해방에 대한 신념을 더럽히지 않았다. 우리의 전우들과 전사들은 낯설은 이역에서 황야의 티끌로 사라지면서도 《미래를 사랑하라!》고 부탁하였으며 《공산주의는 청춘!》이라고 부르짖었다. 신념을 가진 강자들만이 최후를 이렇게 장식할수 있다. 이런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의 항일유격대원들이 만주의 그 모진 추위와 주림을 견디여내지 못했을것이다.




혁명가의 신념과 의지를 두고 론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전렬에 류경수와 같은 사람들을 세우군 한다. 자기 수령이나 지도자의 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그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한생을 곧바르게 걸어가는데서 류경수는 만사람이 따라배울만 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나와 류경수와의 첫 상봉은 1933년 9월 동녕현성전투직후에 이루어졌다. 싸움을 끝내고 소왕청으로 돌아와 대원들을 휴식시키고있을 때 최현이 인솔한 연길유격대의 대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대원들중에 최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어린 대원이 한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류경수였다.


류경수는 통신원의 불찰로 연길유격대가 동녕현성전투에 참가하지 못한데 대하여 몹시 원통하게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지각생》의 신세가 된 분풀이를 최현에게 막 해댔다.


《중대장동지, 소왕청까지 와서 밥만 얻어먹다가 어떻게 거저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데라도 좋으니 김대장을 모시고 한번 답새기고 갑시다.》


그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나는 류경수가 보통배짱군이 아니라는것을 인차 간파할수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이였다. 그가 혁명대오에 들어선것은 16살때였다.


《김대장, 저 삼손이가 나이는 어려도 싸움군입니다. 애가 록록치 않수다.》


삼손이란 류경수의 본명이였다.


이것이 류경수에 대한 최현의 총적평가였다. 나는 그 한마디의 평가를 듣고 최현이 류경수를 몹시 애지중지해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18살밖에 안되는 이 어린 대원의 짤막한 인생속에는 망국으로 해와 달마저 빛을 잃었던 내 나라의 구슬픈 얼굴이 비껴있었다. 류경수의 경력가운데서 특기할만 한 점은 어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한 사실과 10대에 춘황폭동에 참가하였다가 군벌당국에 체포되여 룡정감옥에서 곤장맛을 본 사실이였다. 간도지방에 혁명가들이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물고문이나 고추가루고문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장증렬이나 리종락과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류경수는 그 시련을 용감하게 이겨냈다. 무심결에 류경수의 손을 잡아보았는데 손바닥에 썩살이 어찌나 험하게 배겼던지 쇠판대기 같았다.


나는 류경수가 어렸을 때 이삭공부를 했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금할수 없었다. 이삭공부란 남들이 공부할 때 그곁에서 눈과 귀로 글자를 익히고 리치를 새기면서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섭취하는 학습방법을 말한다. 그는 나무짐을 지고 장에 갔다올 때마다 사립학교 창문밑에 쭈그리고앉아 나무가치를 들고 교원이 칠판에 쓰는 글을 열심히 따라썼다. 그 과정에 조선말 자모와 구구표를 완전히 익히였다.


류경수의 이삭공부를 미구에 온 학교가 다 알고 동정하게 되였다. 류경수의 향학열에 감동된 곽찬영(곽지산)교원은 그를 학교에 입학시키였다. 그리고 학비는 자기가 부담하였다. 이삭글을 배우는 나무군총각애도 쉽지 않은 소년이였지만 낯도 모르는 생면부지의 아이에게 입학을 허락하고 그에게 학비까지 대준 훈장 역시 쉽지 않은 교육자였다.


하지만 류경수는 가정사정으로 인해서 학교를 졸업할수 없었다.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지주집에 머슴군으로 끌려갔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곽찬영도 큰 충격을 받고 교사직에서 물러나 로동자, 농민들속에서 혁명적인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후에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류경수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계속 곽찬영의 지도를 받았다. 자기 제자에 대한 곽선생의 사랑과 관심은 실로 각별한것이였다. 그런데 이 선생이 그만 억울하게도 《민생단》올가미에 걸려들어 심판대우에 서게 되였다. 좌경배타주의자들은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를 중대장자리에서 철직시키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감시병들의 감시속에 놓여있었다.


곽찬영이 군중심판장에 끌려나온 날 류경수는 목숨을 걸고 그를 보증해나섰다. 그가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보증해나선것은 사실 만인의 찬양을 받을만 한 큰 용단이였다. 그 당시는 류경수자신도 《민생단》혐의자의 명부에 등록되여있었다. 《민생단》혐의자가 《민생단》의 딱지가 붙은 《피고》를 두둔하거나 동정한다는것은 총구앞에 달려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청원하는것과 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류경수는 가슴을 내대고 스승의 무죄를 증명하였다. 그 《죄》로 하여 그는 《민생단》감옥으로 끌려갔다.


류경수의 용감한 행위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지킬수 있는 최고의 의리였다. 그는 한평생 스승의 은정을 잊지 않고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그처럼 의리에 충실할수 있었던것은 신념이 강했기때문이였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도덕과 의리도 잘 지키는 법이다. 혁명가는 정의를 옹호하고 불의를 증오하며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는것, 혁명하는 사람들이 동지들과 인민들에 대한 의리를 잘 지키자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어야 한다는것이 바로 그가 지니고있던 생활의 신조였다.


그는 좌경배타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이 《민생단》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중 절대다수는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며 혁명에 충실한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아무렇게나 처형하는것은 범죄이라고 단호히 까밝히였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은 비록 반《민생단》투쟁이 극좌적으로 벌어져 혁명대오내에서 혼란이 빚어지고있지만 언제인가는 꼭 수습될 날이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있는 견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인민들을 견결히 옹호하였다.


생사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심판장에서 자기의 은사를 구원해낸 류경수의 용감한 소행에 대한 풍문은 동만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을 격동시키였다. 나도 다홍왜에서 그 소식을 듣고 소왕청에서 있었던 그와의 상봉을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돌이켜보았다.


나는 마촌에서 연길유격대의 전우들을 바래줄 때 최현에게 이런 롱을 하였다.


《저 삼손이는 어느모로 보든지 욕심나는 싸움군입니다. 우리의 상봉기념으로 저 애를 우리한테 넘겨주지 않겠습니까?》


최현은 그 말에 롱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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