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 15 장 지하전선의 확대 1. 불굴의 투사 박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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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7-21 18:3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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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 15 장 지하전선의 확대 1. 불굴의 투사 박달
제 15 장 지하전선의 확대
1. 불굴의 투사 박달
박달은 단 한번도 군복을 입은적이 없었고 나와 한부대에서 싸운적이 없었다. 내가 백두산지구에서 박달을 만난것은 몇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가 우리를 찾아온것이 여러번이였는데 둬번은 내가 자리를 뜨고 없어 만나지 못하였다.
한두차례의 상봉으로 생면부지의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한다는것은 헐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하루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과 같이 나와 박달사이의 호상리해는 첫번째 상봉만으로도 상당히 두터운것으로 되였다고 할수 있다.
리제순과 마찬가지로 박달도 세파에 때묻지 않은 깨끗한 사람이였다. 그는 어떤 파벌에 속하였던적도 없었고 주의자행세를 하며 거드름을 부린적도 없었다. 박달은 내가 길림시절에 많이 만나본 김찬이나 안광천과 같은 류행식운동자가 아니였다.
그는 산골사람다운 농민적인 순박성을 가지고있었으나 말과 몸가짐이 세련되고 식자도 풍부하였다. 첫 상봉으로도 무게가 있는 사나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수 있었다. 자기 식으로 종래의 여러 운동에 대하여 비판도 하고 민족의 출로를 두고 걱정도 하였다. 그는 종래의 낡은 운동방식을 타파할만 한 지도자를 찾지 못해 흥남에도 가고 단천에도 가고 간도땅에도 갔었다고 한다.
박달이 자기를 이끌어줄만 한 령솔자를 찾아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있을 때 우리는 우리대로 준비된 국내혁명가들을 찾아내기 위해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관철하는데서 우리가 중요하게 내세운 전략적과업은 한편으로는 국내에 무장투쟁과 정치투쟁을 총괄적으로 이끌어나갈수 있는 믿음직한 책원지, 비밀거점을 꾸리는것이였으며 다른편으로는 강력한 정치적력량과 군사적력량을 마련함으로써 자력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것이였다.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력량을 꾸리는 사업은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굳게 묶어세우는것과 함께 국내에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림으로써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전반적항일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나갈수 있는 핵심력량을 마련하는것이였다. 이것은 사실에 있어서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아 벌리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활동의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적인 중심고리라고 말할수 있었다.
우리가 국내혁명운동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처음부터 령상태에서 시작하는것은 아니였다. 국내에는 우리가 발을 붙이고 혁명을 심화시켜나갈수 있는 일정한 조직적기초도 있었고 일제의 군도와 곤봉맛을 본 준비된 정치적력량도 있었다. 로조와 농조를 비롯하여 전국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계층별 대중조직들, 그 조직들을 항일에로 인도해가는 검열된 투사들, 거듭되는 실패와 우여곡절속에서 단련되고 세련되고 강해진 인민, 좌절과 실패를 체험할 때마다 가슴을 치며 피눈물로 기록해놓은 투쟁의 교훈… 그 모든것은 국내혁명운동을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여 가일층 심화발전시킬수 있는 튼튼한 밑천이였다.
국내혁명운동이 거둔 업적과 경험을 존중시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하여 기성운동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발전시키는것, 이것이 국내혁명운동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한 자세였고 방침이였다.
우리는 1920년대말과 1930년대초부터 《ㅌ.ㄷ》와 조선혁명군에서 육성된 우수한 공작원들을 북부국경지대와 국내깊이에까지 파견하여 정치군사적지반을 닦기 위한 일정한 준비사업을 선행시키였다.
국내혁명운동을 더 높은 단계에로 추켜올리자면 조선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세력으로 등장한 인민혁명군의 조선경내에로의 본격적인 정치군사적진출과 국내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방조가 필요하였다.
사실상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해온 국내혁명운동은 새로운 지도와 로선을 기다리고있었다. 운동의 상층부는 파쟁으로 혼란되여있었으나 하층의 선각자들과 인민들은 혁신적인 로선과 지도를 받아들여 결사전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있었다. 당재건에 열을 올리던 투사들도 지하와 감방에서 자신들이 엮어온 실패작들을 돌이켜보며 출로를 찾으려고 암중모색하였다.
우리앞에는 이러한 요구에 민감하게 호응할수 있는 실천대책이 필요하였다. 그 대책중에서도 선차적인것이 바로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하는것이였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실현한다는것은 달리 말하여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를 실현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과제를 실행하자면 무엇보다도 국내에서 리제순과 같은 형의 견실한 혁명가들을 찾아내고 그들과의 공동노력을 통하여 조국광복회망을 빨리 늘이고 온 민족을 반일성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 적임자로 물색된것이 박달이였다.
우리에게 박달을 소개한 사람은 리제순이였다.
《박달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것을 위해서는 칼날우에라도 올라서는 사내대장부입니다. 리론도 굉장합니다. 한번은 사상가랍시고 으시대던 단천내기 사자머리하고 무슨 론쟁이 붙었는데 그 사람의 코를 아예 납작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함남북을 개척하자면 박달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리제순이 한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다 믿기가 어려웠다. 사실 요란한 소문을 듣고 만나본 명사들에게서 우리는 기대와 달리 얼마나 큰 실망만을 받아안았던가.
주의주장에는 관계없이 지난날 내가 만나본 이러저러한 명사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로서의 분명한 탁견이 없었고 사고와 실천에서 참신성이 부족하였다.
박달로 말하면 내가 길림시절에 만나본 안창호, 김좌진, 리청천, 오동진, 손정도, 심룡준, 현묵관, 현하죽, 고원암, 김찬, 안광천, 신일용, 서중석과 같은 일류명사는 아니였다. 박달에 대해서는 기껏해서 지방순사나 고등계형사들이 살피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소박한 시골초부와 같은 사람이 결국은 우리 혁명에 큰 자국을 남긴 거물로 솟아올랐고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막역한 벗으로, 동지로 되였다. 리제순의 말에 의하면 박달의 본명은 박문상이라고 하였다. 박달나무같이 단단한 사람이라고 하여 이웃들이 《박달》, 《박달》 하고 불렀는데 그것이 그만 박문상의 별명이 되고 나중에는 이름으로까지 고착되였다고 한다.
박달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태생이였다. 아버지가 명천에서 정어리공장을 운영하였다고 하니 가세는 그닥 빈한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학력만은 보통학교졸업정도라고 하였다. 그는 11살에 신랑이 되고 16살에 아버지가 경영하는 정어리공장에 취직하여 월급쟁이 회계원이 되였다. 아마도 그의 부친은 아들을 일찌기 자수성가시키려고 했던것 같다.
박달은 조혼한것이 부끄러워서 동무들에게 신랑이 되였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점심식사하러 집에 들어왔다가도 안해가 혼자 있으면 밥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는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성미가 호방하고 인정도 있는 사람이였는데 주색을 즐겨 첩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저래 박달을 낳은 어머니는 아버지한테서 따돌림을 당한것 같고 아들은 어머니를 몹시 동정했던것 같다.
《내가 제일 미워한것은 첩을 얻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언제인가 박달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일생동안 첩을 둔 아버지의 슬하에서 어머니가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축첩제도의 쓴맛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해방후 우리가 법으로 축첩제도를 페지해버린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축첩제도로 하여 어머니가 당한 불행은 일생동안 박달을 괴롭힌 근원으로 되였다. 그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별로 받아보지 못하고 고독하게 살아온 어머니의 인생에서 교훈을 찾고 주색과는 담을 쌓으면서 자기보다 나이가 5살이나 우인 안해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순정을 바쳐왔다.
박달이 다음으로 경멸한것은 깍쟁이들이였다. 그는 직급과 직업과 성별에 관계없이 깍쟁이란 깍쟁이는 죄다 미워하였다.
《나는 린색한 사람들만 보면 하루종일 밥맛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을에서 박달을 만나던 1957년은 그런 한담을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좋아진 때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생활에서 가장 질색해하는것이 개인주의, 리기주의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달자신은 인덕이 높은 사람이였다. 통속적인 표현을 빈다면 인정이 남아돌아가는 사람이였다. 감자를 수확하는 계절이 올 때마다 그는 자기 집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였다. 금년 감자맛이 꿀맛인데 한번 먹어보고 갈 생각이 없소 하고 잔뜩 구미가 동하게 해놓고는 슬쩍 팔을 잡아당기군 하였다. 감자를 심지 못한 집에는 감자떡을 쳐서 갖다주게 하였다.
박달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만일 부자였다면 굉장한 자선가가 되였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돈은 없지만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였다.
박달은 소학교를 마친 다음 독학으로 구학도 공부하고 중학강의록도 보았다. 박달이 얼마나 근면한 독학가였는가 하는것은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 불구의 몸으로 《동의보감》을 전부 독파했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능히 증명할수 있을것이다.
《혜산사건》때 박달의 집을 수색한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비롯하여 《사회주의대의》, 《사회진화론》, 《식민지문제의 기본지식》, 《무산계급의 부인운동》, 《실업반대투쟁선언》, 《사회주의사전》, 《제7차 국제당대회에서의 왕명의 연설》, 《중국공산당창건 15주년기념》, 《조선문제에 관한 테제》, 《당원기본상식》과 같은 사회주의서적들이 무데기로 발견되였던것이다.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걸칠것이 하나도 없는 집이였는데 책만은 부자였다.
박달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자기는 별로 배운것도 없고 아는것도 많지 못하니 문맹자로 여기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겸양의 뜻이였고 실은 맑스주의혁명리론일반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지식을 뽐내지 않았고 지식으로 그 누구를 압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무슨 《령도권》을 잡아보려는것과 같은 야심은 품지도 않았다. 그는 물욕도 없고 직위욕도 없는 검박한 인간이였다. 바로 여기에 참된 인간, 참된 애국자, 참된 혁명가로서의 박달의 참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달은 언제나 자기를 배우는 사람의 립장에 세웠고 그래서 누구인가가 자기네를 손잡아 옳은 길로 이끌어주기를 고대하였다.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할 때에도 그는 그 단체의 포괄범위를 《갑산》이라는 지방적인것으로 한정하였고 공작위원회라는 명판을 통하여 그 잠정적인 성격도 명백히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장차 조선공산당이 창건되면 그에 복종하는것을 전제로 하였고 그때에 가서 조직의 이름을 다시 적당한것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박달이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한것은 반일투쟁을 이끌어줄만 한 지도자를 찾지 못한 조건에서 그들자신의 힘으로 지방적인 테두리에서나마 먼저 조직을 뭇고 운동을 벌려보자는 립장에서 출발한것이였다.
박달이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던 과정은 순탄한것이 아니였다. 그 당시 갑산지방의 일부 사회운동자들은 군경들의 폭압에 겁을 집어먹고 투항주의적립장에 빠져있었는데 그들은 이 원인을 당중앙기관이 없는데서 찾으려고 하면서 자기들의 립장을 정당화하였다.
《갑산군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반제투쟁을 부추겨주거나 부채질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여 새로운 로선을 내놓고 그 로선에 따라 갑산에서의 운동을 령도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것이 바로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하는것이며 중앙집권제원칙을 존중하는것으로 된다.》
박달은 이런 립장을 혁명에서의 도피라고 비판하면서 갑산군에서 일어나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우리가 조직화하여야 하며 그것을 전 조선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앞으로 공산당이 조직되더라도 당중앙이 우리 지방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대한 령도를 보다 쉽게 할수 있게 될것이라고 하였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이처럼 좋은 시기가 도래하기를 앉아 기다리기만 하거나 경찰의 주목을 피하여 타지방에 도피해서 제 한몸이나 부지하려는자들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속에서 조직되였다.
박달은 있을수 있는 적의 탄압으로부터 갑산공작위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부조직들의 명칭을 정우회, 전진회, 반일회 하는 식으로 각이하게 달았다. 대중계몽을 위해서는 진흥회나 자위단과 같은 어용단체들도 서슴없이 리용하였다. 이 단체들의 간판을 가지고 야학회나 운동회, 조기회 같은것을 할 때 속내를 모르는 경찰들은 이제는 갑산촌뜨기들도 충실한 황국신민이 돼가는가보다고 흐뭇하게 생각하였다.
박달은 한달에 한번씩 소집하기로 되여있는 공작위원회 하부조직책임자들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축구경기를 조직하였다. 군중이 모인 다음 시합을 붙여놓고는 뒤에 돌아앉아 슬금슬금 회의도 하고 분공조직도 하고 할 일을 다하였다. 제사, 결혼식, 생일놀이, 환갑잔치도 조직원들과 조직책임자들의 비밀모임을 하는 계기로 리용하였다. 합법적인 가능성을 리용하니 조직을 위장하는데도 좋았고 조직활동도 활발히 벌릴수 있었다.
공작위원회성원들은 이러한 합법적활동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리용하기 위하여 일제경찰, 주구들과의 관계를 매우 능란하게 가졌다. 공작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대부분의 조직성원들은 일제의 어용단체들과 말단행정기관들에 들어가 《열성분자》로 활동하였다.
이것은 일제군경이나 주구들에 대하여 로골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대결자세를 취하던 신간회, 로총, 청맹, 적색로조, 적색농조의 투쟁에 비하면 매우 대담하고 혁신적인 조치였다.
국내투사들가운데서 박달이 맨처음으로 응용한 이 외유내강한 위장전술이 크게 은을 내였다.
경찰기관이나 자위단이나 그밖의 관공서와 농촌진흥회, 소방조, 학교조합, 산림보호조합 등의 단체에서 촌장이니, 구장이니, 무슨 장이니 하는 감투를 쓰고 심부름을 고분고분 들어주는척 하는것은 적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데도 좋았고 적의 내부를 속속들이 파악하는데도 좋았으며 적의 주위에 집결되여있는 세력을 와해시켜 우리편으로 끌어당기는데도 좋았고 인민들이 들볶이지 않도록 하는데도 좋았다. 박달은 갑산공작위원회 책임자 겸 그 위원회의 정치부와 쟁의부를 담당한 만만치 않은 혁명가였지만 적들이 관할하는 공공단체들에도 들어가 있었다. 그는 보천면 신흥리 1구의 농촌진흥회 부회장, 1구 일신서당계의 계장, 자위단 부단장, 운흥면 대오시천리 소방조 소방수 등 주요한 자리들을 뻐젓이 차지하고있었다.
《혜산사건》당시 1차로 감옥에 잡혀갔던 사람들중 63명이 자위단원으로 되여있었다고 하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그들이 얼마나 령활하게 일제의 어용기관과 단체들을 리용했는가를 잘 알수 있다. 그 63명가운데는 진흥회 서무부장, 자위단 5가조장, 산림보호조합 평의원, 산농지도구 지도위원, 화전측량총대표, 중견청년강습회 수강생, 서당학무위원, 간이학교 평의원 등 별의별 직함이 다 있었다.
갑산공작위원회는 이와 같은 합법적인 방법과 비합법적인 방법을 능숙하게 배합하면서 농촌지역의 특성에 맞는 구호, 례를 들면 소작료인하, 화전자유개간, 부역반대, 고리대반대, 아마강제재배반대, 소맥강제재배반대 등의 구호를 들고 투쟁을 힘있게 벌리였다.
얼핏 보면 경제투쟁일변도로 나간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지만 그 구호들에는 아마강제재배반대나 소맥강제재배반대와 같은 심각한 정치투쟁의 구호들도 포함되여있었다. 갑산지구 농민들이 아마강제재배조치에 반기를 든것은 그 작물이 군수품원료로 리용된다는 사정과 관련되여있었다. 그들은 아마씨를 가마에 쪄서 심거나 드물게 심어 아지를 많이 치게 함으로써 못쓰게 만드는 방법으로 강제재배조치를 파탄시키였다.
어쨌든 리제순의 말만 들어보아도 우리가 하루속히 손을 잡아야 할 인물인것만은 틀림없었다.
우리는 박달을 만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고 리제순을 국내련락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리제순은 련락임무를 신속히 수행하였다. 박달이 자기에게 인민혁명군대표를 직접 보내줄것을 요구한다는 리제순의 보고가 통신원을 통하여 나에게까지 전달되였다. 무슨 리유인지는 알수 없으나 그는 우리와의 회견을 열렬히 환영하면서도 곧바로 밀영을 찾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가 매우 심사숙고할줄 아는 혁명가라는것을 확신할수 있었다. 즉흥적인 행동을 삼가하는 박달의 조심성과 용의주도성은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호기심을 더해주었다.
우리에게는 남비처럼 쉽게 끓다가 인차 식어버리거나 바람부는대로 왔다갔다하는 경박한 사상가가 아니라 진지하고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혁명가가 필요하였다.
우리는 박달이 요구한대로 당사업경험이 풍부한 권영벽을 갑산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때 내가 권영벽을 통하여 박달에게 보낸 편지는 아래와 같다.
조국을 사랑하며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국내의 애국자동무들 앞
국내에서 간악한 일제원쑤들과 싸우는 동무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것을 충심으로부터 원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동무들에게 파견하오니 서로 만나서 사심없는 토론들을 교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경례
김 일 성
권영벽이 갑산으로 나갈 때 리제순도 동행하였다. 그들이 박달을 만난것은 1936년 12월이라고 기억된다. 박달은 그때 처음으로 권영벽을 통하여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다. 권영벽은 그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이 전개해온 주요활동내용에 대해서도 소개해주었다.
권영벽의 출현은 우리와의 련계를 열렬히 희망하는 박달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사변으로 되였던것 같다. 권영벽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박달이 워낙 웬간해서는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아서 《무툴쇠》라는 별명까지 받은 사람이라는데 나의 편지를 받고서는 너무 기뻐 눈굽에 이슬방울까지 맺히더라는것이다.
《그 동무는 즉시 장군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제기하였습니다. 사령관동지가 허락만 해주시면 아무때든지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니 나도 박달을 만나고싶은 욕망이 더 간절해졌다. 나는 우리 밀영에서 박달을 만나기로 작정하고 회견과 관련하여 필요한 대책을 세울것을 권영벽에게 지시하였다.
박달은 자기대로 우리에게 오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준비란 다른것이 아니라 압록강을 무사히 도강하는것이였다. 당시의 살벌한 정세로 인하여 비합법적인 도강은 거의나 불가능한것으로 되여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도강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혜산경찰서관하 큰웅뎅이마을에 있는 주재소 김순사를 찾아갔다.
《여보, 김순사, 당신은 장백소식을 좀 들었소?》
박달은 주재소에 들어서자마자 큰일이라도 난것처럼 떠들었다. 김순사와 다른 여러 순사들이 눈이 휘둥그래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식말인가?》
《장백땅에 〈비적〉들이 많이 다니는 바람에 백성들이 다른데로 이사해가느라고 곡식을 마구 처분하는통에 그 값이 매우 눅다고 하는데 콩을 한 두어차 실어다 돈벌이를 해야겠소. 눅거리콩신세를 지고싶거든 도강증이나 한장 떼주시구려.》
순사들은 그 말에 귀가 항아리만 해서 도강증을 떼줄테니 자기네들의 메주콩도 실어다달라고 저마끔 부탁하였다. 도강증은 예상외로 헐하게 뗄수 있었다. 이렇게 되여 박달은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리제순의 집에 가닿게 되였다.
리제순이 박달을 데리고 사령부에 들어선것은 새벽이 다 되였을 때였다.
리제순의 말대로 박달은 정말 넓은 어깨에 비해 얼굴이 작아서 어딘가 생김새가 조화롭지 못한감을 주는 사람이였다. 외모로 보아서는 풍운아다운데가 그닥 없고 촌나무군 같다고 한 리제순의 말이 옳은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지켜보는 예리한 눈빛만은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퍽 만나보고싶었습니다.》
이것이 박달의 첫인사였다. 겉치레가 없는 간단한 인사였으나 진정이 느껴졌다.
그 두세마디의 투박한 말에 나는 어째서인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박달은 길주에서 류치장신세를 질 때부터 우리와의 상봉을 꿈꾸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적의 감시도 피할겸 조직도 확대할겸 길주에 나타난 그는 제지공장공사장에서 토목로동을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류치장으로 끌려갔다. 어느날 박달은 휴지뭉테기속에서 우리 부대가 장백지구에 진출하여 적들을 답새기고있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의 상념은 줄곧 우리에게 와있었다는것이다. 류치장에서 풀려나온 박달은 갑산에 들어서자 우리와 련계를 지을수 있는 줄을 잡아쥐자고 행상짐을 짊어지고 압록강변 마을들을 거의다 훑으며 돌아다녔다고 하였다.
《정말이지 오늘 이렇게 장군님을 만나보게 된건 천행이올시다!》
박달은 반가움에 겨워 내 손을 다시 부여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박달동무를 만난 내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무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후 우리를 찾아온 첫 국내대표입니다.》
《내가 무슨 대표이겠습니까. 이 갑산촌놈이… 길주나 성진이나 함흥과 같은 대처에 가면 무슨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나같은걸 외눈으로 보기나 하는줄 아십니까.》
그는 마치 몸가짐마저도 《갑산촌놈》의 분수에 맞게 가지려고 애쓰는것 같아보이였다. 하지만 나는 박달의 그 겸허한 언행과 몸가짐에서 오히려 거인성을 느끼였다.
《대처에서만 큰 사람이 나온다는 법이야 없지 않습니까. 리제순동무를 통해서 갑산공작위원회가 그동안 많은 반일애국활동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에 그렇게 속이 살아있는분들이 있다는게 우리에게 큰 고무를 줍니다.》
내가 몸을 녹이라고 하면서 더운물을 권하였으나 박달은 한모금 마시는둥마는둥 하고 국내형편을 보고하겠다고 서둘렀다. 온몸이 열정으로 빚어진 탄복할만 한 사나이였다.
박달과의 본격적인 담화는 그 다음날 아침부터 시작되였다. 우리는 그때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박달이 당시의 국내형편과 갑산지방의 운동상황을 소개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가 국내형편에 대하여 설명한 요점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것들이였다.
국내형편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말할수 있다. 당재건을 위한 운동도 맥이 빠진것 같고 농조운동도 한물 지나가버리였다. 운동자들은 탄압에 견디지 못해 이산저산 돌아다니며 피신생활을 하고있다. 다시 일어날 힘이 있는가? 없다. 설사 용기를 가다듬고 다시 일어난다 해도 로선이 없다. 그저 맹목적인 싸움이야 할수 없지 않는가.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는데만 골몰하고있다. 용기를 버리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분파적습성을 버리지 못하고있다. 상해패요, 아라사패요 하는 패당들이 계속 잔존하고있을뿐아니라 함남패, 함북패라는것도 있고 지어는 같은 함남패안에서도 함흥패, 홍원패, 단천패라는것이 생겨 서로 으르렁거리며 갑론을박의 공허한 입씨름으로 정력만 소비하고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있다.
《국내혁명운동에서 제일 큰 애로는 옳은 령도가 없는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인을 납득시킬만 한 로선이 없고 그런 로선을 만들어낼만 한 인물이 없는것입니다. 그러다나니 전에 단천에서 농민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국제당에 사람을 보내여 조언과 지도를 요청하였는데 거기서도 이렇다할 소득이 없었다나봅니다. 그런즉 우리가 누구를 쳐다보겠습니까.》
박달의 말을 요약하면 국내혁명운동에서 해결을 기다리는 가장 절박한 현안문제가 로선문제, 령도문제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우리의 담화에서 중요하게 론의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명과 성격에 대한것이였다.
박달은 나에게 좀 외람된 질문을 한가지 하겠는데 나무라지 말라고 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국내혁명가들속에서는 김일성장군은 조선사람이지만 중국혁명을 하는 사람이고 김일성부대는 조선사람들로 꾸려진 부대이지만 동북항일련군에 소속되여있는 부대라는 말이 돌아가는데 이걸 어떻게 리해해야 합니까? 장군님의 직접적인 해명을 받고싶습니다.》
리제순에게서 듣던바대로 박달은 역시 매우 솔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였다.
나는 박달을 위해 비교적 긴 설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출판보도계가 내가 인솔하는 부대를 가리켜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6사라고도 칭하고있는것만큼 국내혁명가들이 그런 의문을 가지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인솔하는 부대를 완전한 중국군대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것으로서 사실과도 맞지 않는다. 동북항일련군이라는것은 명칭 그대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는 각종 항일유격부대의 련합군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공산당계렬의 중국인유격부대, 구국군계렬의 중국인반일부대들과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직지휘하는 조선인항일유격대 등이 망라되여있다. 그것은 반일항전에서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하여 결속된 일종의 국제적인 련합군이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 자기 조국의 해방이라는 같은 목적, 동북이라는 동일한 투쟁무대 또는 력사적으로 형성되여온 조중 두 나라 인민들간의 친선의 감정과 공통한 처지, 이러한것들이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의 무장대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무력련합을 실현하게 하였다. 련군체계는 어디까지나 자원성의 산물인만큼 항일련군은 각 민족군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존중하고있다. 우리 조선인민혁명군은 련군의 간판을 띠고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도 조국해방을 근본사명으로 하는 민족군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조선혁명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있다. 우리 군대가 창건초기부터 자기 조국의 해방과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우고있는 조선의 민족군대라는것은 만주에 살고있는 모든 동포들이 다 알고있다.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항일련군이라고 부르고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고장에 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말한다.
한때 어떤 사람들은 1국1당제원칙을 코에 걸고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데 대해 시비하면서 우리 민족군의 독자성과 자주적권리를 침해하고 유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후 국제당은 조선사람이 조선혁명을 하는것이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항일련군에서 갈라져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하라는 조언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남아있기로 하였다. 따로 세간을 나면 우리에 대한 중국인민의 지지가 약화될수 있었고 우리의 활동도 불편해질수 있었다. 련군을 민족별로 가르는데 대해서는 중국사람들도 바라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유지하고있는 련군체계는 공동의 적을 반대하여 싸우는 조중 두 나라 전우들간의 혈연적뉴대의 산물로서 국제적인 반제공동행동의 모범이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다. 우리의 자주적권리가 침해당하지 않고 또 중국사람들이 싫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이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가능하다면 몽골민족군대나 쏘련군대와도 항일련군을 형성해가지고 싸우고싶다.
박달은 나의 설명을 다 듣고나서 방안이 환해지게 미소를 지었다.
《아참, 그런걸 우리는 괜히 락망했댔습니다. 김장군빨찌산이 중국군소속의 군대라면 기대를 걸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용기가 백배해집니다!》
《그렇다면 나도 기쁩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해서는 신심을 가져도 됩니다. 일본군은 강군이긴 하지만 결코 무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백두산을 거점으로 조선국내에로 광복전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조국해방은 시간문제입니다. 우리는 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광복할수 있는 힘을 축적해가고있습니다. 그속에 바로 박달동무가 지도하는 갑산공작위원회도 있다는걸 명심해야 합니다.》
나와 박달의 담화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화제로 된것은 우리의 통일전선정책과 조국광복회에 대한 문제였다.
박달은 반일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과 그것을 확대강화하기 위한 제반조치, 《조국광복회10대강령》이 담고있는 총적인 지향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는 조국광복회가 내세우고있는 목적의 높이와 보편성, 포괄하고있는 력량의 방대성에 있어서 지난 시기의 신간회나 근우회와 같은 좌우합작의 소산이였던 민족단체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있는 거대형의 단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우리의 조치와 방침들을 어느것이나 다 지지한것은 아니였다. 그는 조국광복회의 명칭이나 일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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