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 14 장 장백사람들 3. 리 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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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7-18 15:4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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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제 14 장 장백사람들 3. 리 제 순
3. 리 제 순
우리는 백두산지구에 나오자마자 밀영건설을 빠른 속도로 추진시키는 한편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주민지대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조국광복회망건설의 첫 대상지로는 백두산을 직접 끼고있는 장백지구와 국내의 갑산지구가 선정되였다.
조직건설의 어려운 과업을 용의주도하게 수행해나가자면 생명을 걸고 우리 일을 도와줄수 있는 믿음직한 인물들을 찾아내야 하였다.
나는 서간도에 진출한 직후 소부대를 파견하면서 리동학중대장에게 재삼 강조하였다. 동무네의 기본임무는 인재발굴이다, 장백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믿음직한 조력자를 찾아내라, 적을 치는것은 부차적임무이다, 인재탐색에 주력하면서 싸워이길만 한 적만 치고 그렇지 않으면 피하라고 일러주었다.
리동학은 이 과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그는 리제순을 데리고 밀영에 돌아왔다. 리동학이란 사람이 몹시 덤비는것 같지만 내속은 아주 찬찬한 묘한 사람이였다. 말을 어떻게나 빨리 해대는지 처음 듣는 사람들은 정신이 얼떨떨해질 지경이였다. 그는 늘 빠른 말씨로 대원들을 볶아댔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에게 《보따지》라는 별명을 붙이였다. 《보따지》라는 별명은 《복닥질》이라는 말에서 나온것 같다.
리동학은 중대를 데리고 장백땅을 한바퀴 빙 돌다가 20도구등판에서 청소년들의 아침체조를 지도하는 젊은 촌장을 만났다. 그 촌장이 바로 리제순이였고 아침체조를 하던 동네가 신흥촌이였다. 리제순은 촌장인 동시에 야학선생이였다. 신흥촌사람들은 늙은이건 젊은이건 부녀자이건 할것없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자기네 촌장을 가리켜 우리 선생, 우리 선생하면서 존경하였다.
리동학은 리제순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늠해볼 작정으로 그에게 중대가 2~3일정도 소비할수 있는 식량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촌장은 중대성원들이 다 지고도 남을만큼 엄청난 량의 식량을 잠간사이에 모아놓고 밀영까지 져다드리겠다고 자청해나섰다. 일솜씨도 좋았지만 통이 또한 이만저만 크지 않아서 《보따지》는 초면의 이 촌장에게 대뜸 반해버리고말았다. 그는 후에 경솔하다는 비판은 좀 받더라도 리제순을 사령부에 직접 소개하고싶었다. 그래서 촌장이 짐을 져다주겠다고 할 때 그 청을 얼른 받아들이였다.
촌장이 마을사람들을 휘동해가지고 자진해서 쌀짐을 지고갔다는 사실이 적들에게 알려지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것 같아 《보따지》네 대원들은 리제순에게 포승을 지워 마치 큰 죄인이라도 호송해가는것 같은 흉내를 내였다.
신흥촌을 떠난 식량운반대가 밀영에 도착한것은 사흘후였다. 밀영에서 20~30리밖에 안되는 곳에 다달았을 때 리동학이 마을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려고 하자 리제순은 자기를 밀영까지 따라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리동학은 리제순의 마음을 중떠보려고 일부러 난처하다는듯 한 표정을 지어보이였다.
《그건 곤난하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비밀기지에 데리고 들어가겠는가?》
그러자 리제순은 리동학의 팔을 잡고 아주 기발한 제의를 하였다.
《그렇다면 나를 놓고 한번 시험을 쳐보는것이 어떤가? 가령 목숨까지도 걸고 풀어내야 하는 일감을 맡길수 있지 않는가.》
리동학은 촌장의 제의를 받아들여 3일동안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통버선 5컬레와 행전 5짝을 만들어오라고 하였다. 당신이 버선과 행전을 만들어가지고 제시간에 돌아오면 밀영으로 데리고 들어가는것이요,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빈손으로 돌아오면 불합격이라고 하였다.
리제순은 그까짓거야 못해내겠는가, 그런 문제라면 얼마든지 합격할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신흥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해와 장모를 시켜 하루밤사이에 안해가 시집올 때 가지고온 한채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 5컬레의 버선과 5짝의 행전을 만들어가지고 접선장소에 다시 나타났다.
리동학은 그제서야 리제순을 부둥켜안고 통성을 하였다. 그는 자기의 별명이 《보따지》라는것과 고향이 어디라는것까지 친절하게 대주고나서 《결국은 내가 당신네 이불을 거덜나게 했구려.》 하였다. 리제순은 시험에 합격한셈이였다.
내가 백두산지구를 한바퀴 선회하고 돌아오자 리동학은 신흥촌이라는 동네에서 좋은 청년 한명을 물색하였는데 사령관동지께 소개해드리고싶어 밀영까지 데려왔다고 하면서 리제순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리제순은 밀영에 들어와 지내는 며칠동안 대내출판물들을 읽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는것이였다. 사람이 어찌나 이악하고 직심스러운지 그사이 유격대원들을 따라다니며 무기분해결합법과 방위판정법까지 다 배워두었다고 하였다.
《사람이 똑똑하고 대가 바른데다가 혁명을 하자는 열의도 높고 정열가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푸접이 또 어찌나 좋은지 며칠사이에 우리 동무들을 다 친해놓았습니다. 군중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리동학의 견해가 과장된것이 아니라면 신흥촌 촌장에 대한 총적평가는 좋은것이라고 볼수 있었다.
리제순은 녀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사람이였다. 인상적인것은 언제나 새물새물 웃는것 같은 눈이였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부드럽고 유약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강쇠처럼 굳건한 속대와 바위와 같이 드놀지 않는 신념과 랭철한 사고력을 가진 강의하고 리성적인 인간이였다.
빈농가의 아들로 태여난 리제순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였다. 가난때문에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하고 어머니를 도와 남의 집 밭들을 돌아다니며 삯김을 맸고 10살적부터는 이웃마을 지주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11살 되던 해의 어느날 저녁 그가 지주집 머슴방에서 짚신을 삼고있을 때 문득 어머니가 찾아왔다. 몹시 보고싶었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노전머리에 앉을 때도 눈을 들지 않았다. 너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짚신만 삼았다. 가련한 어머니는 아들의 다정한 말 한마디도 들어보지 못한채 머슴방을 나섰다. 그제야 리제순은 일손을 놓고 뒤쫓아가서 울먹거리며 말하였다.
《어머니, 다시는 오지 말아요. 어머니가 오면 지주집에서 숙봐요. 뭘 얻어가지러 왔나 해서 업신여긴단 말이예요!》
자식의 심정을 비로소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은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네가 보고싶어도 내 다시는 지주집에 나타나지 않으마 하고 약속하였다.
리제순은 정규교육을 받아보지 못하였으나 독학으로 중등정도의 지식까지 소유한 성실한 노력가였다. 14살까지 머슴을 산 뒤에 몇해동안 야학방에 다니였고 형한테서 국문을 배우고 장가를 간 다음에는 옥편을 끼고다니면서 자습하였다. 학교물을 먹어보지 못한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리제순은 신흥촌에 오자 화전민의 자식들을 위해 야학을 열고 정열적인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리제순은 고향에 있을 때 소년회와 청년동맹에 망라되여 몇해동안 조직생활을 하였다. 형이 감옥으로 끌려간 다음부터 일제경찰들은 그에게도 감시를 붙이였다. 끊임없는 박해와 탄압속에서 신변의 위험을 느낀 리제순은 1932년초에 처가가 있는 갑산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무렵이 바로 박달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이 일대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한창 벌리고있을 때였다. 리제순은 그들과 함께 오풍동일대에서 비밀독서회를 뭇고 새 사조를 연구하는데 달라붙었다.
비밀독서회성원들은 수난속에서 신음하고있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의로운 투쟁에 한몸을 서슴없이 바칠 각오로 충만되여있었으나 투쟁방략을 찾지 못해 안타깝게 모대기였다. 그들은 옳바른 투쟁진로와 명망높은 지도자를 찾으려고 방방곡곡에 줄을 놓았다. 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농조, 로조출신의 선각자들과 주의자들을 더러 만나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명백한 투쟁로선이나 전술이 없었다.
리제순의 시선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쏠리였다. 1934년경부터는 인민혁명군이 장백지방으로 나온다는 풍문이 국내에까지 전파되였다. 리제순은 훈춘쪽으로 가려던 본래의 계획을 버리고 장백현 20도구 천가덕으로 넘어왔다. 후날 그 천가덕을 개척한 이주민들은 자기네 마을에 신흥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였다.
신흥촌에서 보천보까지는 직선거리로 얼마 멀지 않았다. 그 마을에서는 베개봉, 소백산, 곤장덕과 함께 백두산도 볼수 있었다. 백두산을 바라볼수 있는 고장에서 산다는것, 이 한가지 사실은 이방의 서름서름한 풍토앞에서 망향의 슬픔을 금치 못하던 리제순에게 신비스러운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관헌들의 압제와 생활고는 그림자처럼 이주민들을 따라다니였다. 소작료와 부역, 가렴잡세로 불쌍한 화전농들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쳐다볼 경황도 없었다. 지주들은 명절때마다 소작농들에게 뢰물을 강요하였으며 땔나무도 전적으로 소작농들이 맡아 해오게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강건너 조선땅에 있는 가림리, 천수리의 경찰놈들까지 장백지방의 조선이주민들에게 화목을 해내라고 호통질하였다. 순사나부랭이들은 민가를 시찰할 때마다 농민들의 닭둥우리에 손을 넣어 닭알을 꺼내먹군 하였다. 화전농들의 식탁에는 보리밥이나 강태죽만 올랐다.
60여호를 헤아리는 신흥촌의 농가들에 소가 있는 집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 농민들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고역을 치르었겠는가. 농민들은 모두가 인력으로 보습을 끌었다. 어떤 젊은 부부가 봄갈이를 할 때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그들은 소도 없이 하루종일 후치질을 하였다. 처음에는 안해가 보탑을 잡고 남편이 소를 대신하여 보습을 끌었다. 그다음에는 안해가 보습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보습은 땅에 박힌채 움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답답한 나머지 그만 고향에서 소로 밭을 갈던 타성대로 《이랴!》하고 고함을 질렀다. 남편이 자기를 부림소로 여긴다고 생각한 안해는 분을 참지 못하여 밭머리에 엎드려 오열을 터뜨리였다.
그러자 남편은 보탑을 놓고 내가 그만 실언을 했으니 용서하구려 하면서 곁에 주저앉아 이놈의 두더지같은 농군신세 언제면 끝장이 날가 하고 한탄하였다.
이러한 생활처지는 신흥촌농민들을 민족적으로나 계급적으로 쉽게 각성시킬수 있는 바탕으로 되였다.
신흥촌주민들의 대부분은 함남북일대에서 이주해온 령세농민들과 농조와 청년동맹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대중단체들에서 반일운동에 관계하다가 새로운 활동무대를 찾아 리향출국의 길을 택한 망명가들이였다. 후날 조국광복회 신흥촌지회와 그곳 당특별지부에서 사업한 김병철도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망명해온 사람이였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동지들에게 늘 농조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을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것과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수 없다는것을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물론 그 주장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는가고 하면서 그 주장을 시답지 않게 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라도 유격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자기의 친지들이 활동하고있는 장백현 신흥촌으로 단호히 이주하였다.
그는 국내인사들가운데서 해외의 무장투쟁과 국내정치투쟁의 불가분리성과 일원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공리공담의 울타리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그것을 실현하였을뿐아니라 혁명군과의 련계를 성사시킨 다음에는 우리의 로선을 관철해나가는 길에서 생명까지 바친 선각자, 투사들중의 한사람이였다.
리주관, 리주익을 비롯한 조선의 애국자들은 1930년대초에 장백지방에서 재만한인적색농조를 결성하고 그에 의거하여 대중투쟁을 벌리였다. 미신, 도박, 조혼, 매혼타파와 문맹퇴치와 같은 계몽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농조의 활동은 점차 소작쟁의나 강제부역을 반대하는 경제투쟁의 단계를 거쳐 군용도로건설을 반대하고 군사시설구축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것과 같은 반일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우리가 장백땅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기 전까지 신흥촌과 주변의 대중운동은 그 적색농조가 주관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리제순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생활경력도 비교적 단순하였다. 그것은 그가 행세식운동자들과 파쟁분자들의 그릇된 사고와 투쟁방법에 오염당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우리는 오히려 그 단순성을 값있게 여기였다. 다른 때가 끼지 않은 순결한 머리에 이식되는 사상이나 주의주장은 흐리터분해지지 않는 법이다.
반일애국운동을 하는 과정에 리제순이 터득했다고 하는 인생철학가운데는 흥미있는것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하는 일가운데서 제일 힘든것은 선구자,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것이라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남이 한가지를 할 때 두가지, 세가지를 하거나 남이 한걸음을 걸을 때 두걸음, 세걸음을 걷는것이 제일 뻐근한 일이라는것이였다.
그 말에는 사실 심오한 진리가 있었다. 그것은 남들의 앞장에서 사회개조의 어려운 길을 개척해가는 혁명가의 고충을 반영하고있는 진리였다.
《농사도 짓고 촌장노릇도 하고 혁명도 하느라면 고생이 막심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리제순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고생이 오히려 저에게는 락으로 되고있습니다. 이 험한 세월에 혁명을 하는 고생마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는 군중공작을 제일 큰 재미라고 하였으며 동지를 얻을 때의 기쁨을 제일 큰 기쁨이라고 하였다. 군중을 쟁취하는데서 제일 어려운 대상이 무엇인가고 하였더니 로인들이라고 대답하였다. 리제순은 큼직한 운동장과 공회당(회관)만 있으면 한 동네를 계몽시키는것쯤은 문제없고 옹근 한개 면이라도 다 혁명화할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리제순의 군중관점과 군중공작에 대한 견해에 완전한 공감을 표시하였다.
군중계몽과 관련된 리제순의 경험가운데서 한가지 흥미있는것은 《가정야학방》의 운영이였다. 《가정야학방》이란 한가정을 단위로 하여 운영하는 야학을 말한다. 리제순의 집에서도 그런 야학을 열었는데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이 가정이 다 참가하였다. 매일 밤마다 빠짐없이 온 식구가 모여앉군 하였는데 리제순이 팔을 걷고나서서 자기의 안해와 동생들을 교육하였다. 《가정야학방》의 덕으로 이 집안은 문맹자가 없는 집안으로 되였다.
나는 군중공작과 관련된 리제순의 사업을 료해하다가 문득 그에게 밀영에 짐을 지고온 다른 십가장들의 동향이 어떤가고 물었다.
리제순은 그 사람들의 동향은 다 좋은데 리동학중대장이 데려온 천지주의 양아들이 문제라고 하였다. 그 양아들이 혁명군을 《비적》이라고 오해하고있으며 유격대가 자기를 죽이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밀영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냥 불안해한다는것이였다.
나는 리제순에게 넌지시 물었다.
《리동학중대장은 경제모연을 하려고 데려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순동무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천지주의 양아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합니까?》
리제순은 마치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것을 미리 예견하고있었던 사람처럼 자기의 속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유격대가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명색은 지주의 양아들이지만 실상은 머슴이나 다름없는 불쌍한 청년인데 별로 죄를 지은것도 없습니다.》
통일전선의 각도에서 문제를 너그럽게 고찰하는 그의 관용과 독특한 사고방식앞에서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천지주의 양아들에 대한 리제순의 관점은 사실 우리의 관점과 일치하였다. 리동학은 그 양아들을 여러가지로 교양하여 우리에 대한 그의 인식을 바로잡아주었다. 드디여 그는 자발적으로 입대를 청원하게까지 되였다. 우리는 천지주의 양아들을 본인의 소망대로 혁명군에 받아들이였다. 우리가 20도구전투를 할 때 그 청년은 길잡이를 하였다. 리제순이 큰 믿음을 표시하여준 그는 그만 그후 전투에서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어쨌든 리제순은 만사람이 반할만 한 특색있는 성격의 사나이였다. 그는 장백을 혁명화할수 있는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필요한 지식과 방법만 배워주면 리제순은 장차 훌륭한 지하조직활동가로 될수 있는 사람이였다. 나는 장백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그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자는 참군을 열망하였다.
리제순은 우리가 싸움을 하러 간 사이 참군준비를 좀 했다고 하면서 이왕이면 입대시험을 치게 해달라고 성화를 먹이였다.
나는 입대시험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보따지〉동무가 동무를 시험쳐보고 데려왔으니 그것으로 입대자격증은 이미 받은셈입니다. 동무가 정 요구하면 아무때라도 유격대에 받아주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무가 다른 일을 하는것이 우리 혁명에 더 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리제순은 얼떨떨해하였다.
《다른 일이라니 어떤 일입니까?》
《일개의 사격선수로 출전하기보다 큼직한 조직을 무어가지고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이기라고 지원해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조직을 뭇는다는겁니까?》
그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동무가 살고있는 신흥촌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의 도처에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리는 일입니다.》
나는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우는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중요한가에 대하여 력점을 찍어 설명해주었다.
총명한 리제순은 그렇다면 지하조직활동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능력이 없기때문에 그 어려운 사업을 감당해낼수 있겠는지 자신이 안간다고 말하였다.
《그건 크게 념려할게 없습니다. 배우면 됩니다. 타고난 혁명가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아무나 혁명할 생각을 가지고 실천투쟁속에서 하나하나 착실히 배워가며 경험을 쌓으면 혁명가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 사업에 필요한 지식은 우리가 주겠습니다.》
우리는 리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진행하였다.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것이였다. 이 강의는 내가 담당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강의는 리동백이 해주었다. 단 한명의 수강생을 위해서 여러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그처럼 알심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례는 항일혁명투쟁의 전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강습을 마치고 밀영을 떠나게 되였을 때 리제순은 진정에 넘쳐 말하였다.
《저는 쌀 한말을 지고왔다가 몇섬이나 되는 혁명적량식을 지고갑니다. 이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저에게 사업분공을 주십시오. 지역을 하나 떼서 맡겨주면 그 지역안에 있는 조선사람들이 사는 모든 마을마다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내오겠습니다.》
우리는 장백현 상강구지역을 그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출발에 앞서 리제순은 자기에게 신임장을 한장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도장이 찍힌 신임장만 내대면 군중들을 조국광복회조직에 많이 묶어세울수 있고 또 일도 상당히 쉽게 해나갈수 있을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요구대로 신임장을 써주고 나의 이름밑에 도장까지 찍어주었다.
리제순은 그 자그마한 증명서를 받아들자 반년안으로 상강구지역을 우리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하였다. 그 장담이 허풍이 아니였다는것은 그후의 그의 투쟁실적이 증명해주었다.
그날 리제순은 나에게 이런 청을 하였다.
《장군님, 제 청이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다른게 아니고 밀영을 떠나기 전에 유격대의 군복을 입어보면 유한이 없겠습니다.》
《그런 청이야 못 들어주겠습니까. 군복을 입어보도록 합시다.》
나는 그 청을 반갑게 받아들이였다. 참군열의가 얼마나 간절하면 그런 청까지 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제순은 지하광복전선에 모든것을 다 바칠 결의를 다지면서도 참군열망만은 그대로 고이 간직하고있었던것이다. 일본이 만주를 타고앉은 다음 중국본토와 나아가서는 아세아전역을 송두리채 삼켜버릴 야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대전을 향해 미친듯이 내달리고있을 때 군복을 입고 항일대전에 참가하고싶어하는것은 사실상 애국주의의 최고표현이라고 평가할수 있었다.
나는 리동학중대장을 시켜 창고에서 새 군복 한벌을 가져다가 리제순에게 입히게 하였다.
리제순의 군복맵시가 참으로 좋았다. 호수를 어림짐작하고 가져온 군복이였는데 몸에 딱 들어맞았다.
《제순동무는 마치 군복을 입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 사람같습니다. 옷맵시가 대단합니다. 군복까지 입어보았으니 이왕이면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한것으로 합시다. 오늘부터 동무는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입니다. 제순동무, 입대를 축하합니다!》
나는 리제순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힘있게 잡아주었다. 그의 입대를 제일 열광적으로 축하해준것은 리동학이였다. 리동학은 군복을 입고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촌장을 업고 내 둘레를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렇게 되여 리제순은 밀영에 쌀짐을 지고왔다가 유격대에 입대한셈이 되였다.
우리는 리제순을 집으로 내려보내면서 그를 위장해주기 위한 소규모의 전투를 조직하였다. 그 임무는 리동학의 소부대가 담당수행하였다.
적들을 감쪽같이 속여서 골탕먹인 리제순의 귀환담이 아주 재미있다. 그는 우리가 일러준대로 산에서 내려가자마자 자기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20도구경찰분서에 찾아가 다짜고짜로 행악질부터 하였다. 나는 촌장질을 더는 못하겠다, 당신들은 촌장을 부려먹을줄이나 알지 보호해줄줄은 모른다, 내가 붙잡혀간줄 알았겠는데 당신네들은 아무런 구원대책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무서워서 다시 조선땅에 넘어가 살아야 할가부다, 죽음밖에 차례질것 없는 당신네 하수인노릇은 다른 사람들이나 실컷 하라고 하라, 이렇게 마구 들이댔다.
그러자 경찰들은 바빠나서 제발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 우리가 당신 걱정을 하지 않은게 아니다, 당신의 행처를 몰라서 미처 손을 쓰지 못했을뿐이다, 좀 진정하고 그동안 어디에 붙잡혀 가있었는지 또 어떻게 놓여나왔는지 그것이나 어서 알려달라고 하였다.
리제순은 유격대가 내내 자기의 눈을 싸맨채 끌고다녔기때문에 그동안 가있은 장소는 알수 없고 새벽에 도망친 장소만 알고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휴식참에 자기를 감시하던 보초병이 깜빡 조는새에 삼십륙계를 놓았다고 그럴듯하게 엮어댔다.
경찰들은 유격대가 몇명이나 되던가, 도망친 그 장소가 어디인가를 따져묻고 자기들을 그곳까지 안내해달라고 하였다.
일은 우리가 사전에 짠 각본대로 되였다. 경찰《토벌대》는 리제순이 대준 골안에 들어갔다가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였다. 적들은 리제순을 믿지 않을수 없었다.
리제순은 적들의 신임을 능숙하게 리용해가며 그해 가을 김병철, 리주관, 리삼덕과 함께 조국광복회 신흥촌지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회는 백두산 서남쪽 턱밑에서 생겨난 최초의 조국광복회조직이였다.
이때부터 리제순은 촌장의 자리를 리삼덕에게 넘겨주고 권영벽과 함께 장백현 상강구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망을 확대하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리는 장백현을 편의상 크게 세개의 지구 즉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로 구분하고 활동하였으며 상강구는 다시 상방면, 중방면, 하방면으로 나누고 활동하였다. 리제순은 신흥촌에서 지회를 내온데 뒤이어 주경동, 약수동, 대사동, 평강덕에도 조국광복회 지회들을 조직하였다.
지회산하에는 또한 많은 분회들을 두었으며 반일청년동맹과 부녀회, 아동단과 같은 외곽단체들을 꾸려 각계각층을 폭넓게 결속시키였다.
불과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리제순은 상강구 전지역을 조밀한 지하조직망으로 뒤덮어놓았다.
백두산밀영을 둘러싸고있는 거의 모든 마을들에는 조국광복회조직들이 그물코처럼 촘촘히 들어배기였다. 조국광복회조직은 현내의 선진적인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 종교인들속에도 침투되였으며 지어는 만주국의 관공서들과 경찰기관들, 정안군부대들에도 뿌리를 내리였다.
조국광복회는 그 산하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망라한 대중단체들을 두었다. 조국광복회의 외곽단체들에는 수만명의 군중이 집결되였다. 조국광복회의 매개 지회는 생산유격대를 가지고있었는데 그것은 유사시 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거사를 치를수 있는 강력한 밑천으로 되였다.
장백지구에서의 조국광복회조직들의 확산이 어찌나 빠르게 진척되였던지 우리가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내오고 리제순에게 총책임을 지우던 1937년초에 이르러서는 장백현의 전지역이 완전한 우리 세상으로 되였다.
장백의 거의 모든 마을들은 《우리 마을》이 되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사람》이 되였다. 장백의 거의 모든 촌락의 구장, 촌장의 직책들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적들의 하수인노릇을 하는척 하였으나 안속으로는 우리 일을 하였다.
면장 리주익도 그런 사람이였다. 우리가 백두산진출을 앞두고 장백지방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을 때 그는 김주현에게 흡수된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였다.
리주익은 우럭골에 약방을 차려놓고 의원일을 하는 한편 면장질을 겸하였는데 그 직함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우리 사업을 아주 실속있게 뒤받침해주었다.
리면장이 국내에서 수리조합을 반대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가 감옥에 잡혀가던 그무렵부터 리제순은 줄곧 그를 주시해왔다고 하였다. 리주익은 리제순의 지도를 아주 허심하게 받아들이였으며 그가 하는 지시라든가 부탁을 매우 성실하게 리행하였다.
그 당시 정치공작원들이 국내로 나가든가, 압록강연안의 중국쪽 마을들에 발을 붙이고 안전하게 활동하자면 도강증이나 거민증 같은 증명서들이 필요하였다. 거민증이 없이는 파견지에 나간다 하더라도 배겨있을수가 없었고 도강증이 없으면 세관경찰들이 버티고 서있는 압록강을 자유로이 넘나들수 없었다.
거민증과 도강증은 면장의 보증밑에 경찰기관에서 발급하였다. 그런 증명서들은 경찰서에서 면장이 제시하는 민적부에 등록된 사람들에 한해서만 내주었다.
리제순과 리주익은 우리 정치공작원들의 안전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백두산쪽으로 올라가는 마지막산골인 24도구에 많은 《유령민적》을 만들어낼 꾀를 생각해냈다. 그곳 막치기는 멀고 험악하여 경찰들도 가기를 저어하는 곳이였다.
리주익은 민적부에 장백일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우리 정치공작원들을 가명으로 등록한 다음 그 민적부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가 수선을 떨었다.
《산골가난뱅이들이란 하나같이 무식하다보니 통 셈판을 모르거든. 일년 열두달 내내 산골에 들어박혀서 아무데도 나다니지 않으니 도무지 세상물계도 알지 못하고 거민증이 있어야 살아갈수 있다는것조차 느끼지 못한단 말이요. 그러니 어찌겠소. 그 곰같이 우둔한것들한테 이쪽에서 갖다줘야지 별수가 있소. 다리가 늘어져도 할수 없지. 정말 면장질하기도 헐친 않구만.》
경찰서에서도 백성들이 무식해서 야단났다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면장, 촌장들에게 수다한 《유령민적》에 따르는 거민증을 내주었다. 리제순에게는 리주익이 마련해다준 예비거민증이 언제나 푼푼히 장만되여있었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아무때나 그것을 받아가지고 타고장에도 수월히 발을 붙일수 있었고 국경도 쉽게 넘나들수 있었다.
장백지구에서 조국광복회조직망이 급속히 늘어나고 그 사업범위가 넓어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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