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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5. 천교령의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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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23 20:5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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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5. 천교령의 눈보라

  

   


  

5. 천교령의 눈보라 

 

우리가 원정대앞에 나섰던 군사정치적과제를 수행하고 귀로에 오른것은 1935년 1월 하순이였다.


왕청 뒤틀라즈를 떠날 때 170명이나 되였던 대오에는 50~60명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다. 원정초기 연길중대가 동만으로 떠나간 후 우리는 훈춘중대도 녕안땅에서 철수시켰다. 적의 위공작전으로부터 혁명의 책원지들을 보위해야 할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였던것이다. 석달동안 꼬리를 물고 진행된 전투들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였다. 부상자들까지 죄다 안전지대로 후송시키고나니 대오는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우리에게는 대오를 보충할수 있는 길이 따로 없었다. 원정대가 머무르는 마을들에서 참군을 요청하는 청년들도 많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전부 주보중부대에 넘겨주었다.


주보중은 우리의 귀로를 두고 진심으로 걱정하였다.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적들이 지금 김일성부대의 종적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여 돌아친다고 하오. 아마 톡톡히 값을 받아내려고 하는것 같소. 이 겨울에 그들이 당신한테서 얼마나 혹독한 타격을 받았나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신변이 우려되는구만.》


내 얼굴을 바라보는 주보중의 눈길에서는 어딘가 불안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로야령눈보라가 우리를 감싸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튼 무사히 돌아가게 되겠지.》


나는 우리의 신변을 념려해주는 그의 우정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장 사지판에 들어서야 할 사람이 저렇게 태평이라니까. 김사령은 여전한 락천가로구만.》


주보중은 귀로에 오른 우리의 편의를 위해 가장 안전하고 믿음성있는 로정을 잡아주었으며 우리와 함께 갈 100여명의 반일부대력량까지 붙여주었다. 그 로정이란 우리가 북만으로 올 때 잡았던 뒤틀라즈-로야령-팔도하자의 정상통로와는 완전히 다른 천교령-로야령-팔인구의 우회로였다. 이 로정은 적들의 배치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발들을 타게 되여있었다. 주보중의 말에 의하면 적들이 예측할수 없는 통로라는것이였다.


이 통로에 대해서는 주보중보다도 평남양이 더 잘 알고있었다. 그는 내 팔굽을 툭툭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교령쪽으로 빠지면 어느모로든지 무탈할것 같수다. 그 고장 목재소들엔 식량이 많지요. 〈토벌대〉놈들도 천교령쪽에는 잘 오지 않구요. 이건 내가 장담할수 있수다.》


천교령이라는 말은 그대로 직역하면 하늘아래 다리라는 뜻으로 된다. 산이 다리같이 생긴 아슬한 고지대였다.


우리는 북만동무들의 권유대로 천교령-로야령-팔인구의 우회로를 타고 간도에 돌아가기로 하였다. 로야령을 넘는 2~3개의 다른 통로들은 이미 적들에 의해 봉쇄되여있었다.


우리는 북만전우들의 뜨거운 전송을 받으며 주보중의 산막을 떠났다.


언땅에 베개도 없이 누워있는 수많은 리성림들의 령전에 봉분도 해주지 못하고 묘비도 세우지 못한채 간도로 돌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였다.


잘 있으라, 전우들! 나라가 독립되면 우리 다시 그대들을 찾아오리라. 지금은 타향만리 언땅에 그대들을 두고간다만 해방의 날이 오면 고향의 뒤동산에 업고가리라. 그대들의 령전에 묘비를 세우고 상석을 깔고 둘레에는 꽃을 심고 년년이 그대들을 조상하리라. 전우들, 그날까지 안녕히.


나는 북만의 황야에 쓰러진 전우들을 위해 전 대오가 모자를 벗고 3분동안 묵도할것을 명령하였다.


녕안의 이름모를 봉우리와 골짜기들에 단벌홑옷차림으로 누워있는 전우들에게 안식이라도 주려는듯이 북만의 하늘에서는 그날도 발목을 휘감는 폭설이 물커지게 쏟아져내리였다. 그 폭설은 우리의 발자국을 메꾸어주었다. 은밀히 행방을 감추면서 행군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날씨였다.


그러나 그 푸짐한 하늘의 선물도 적의 매눈같은 감시경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감싸주지는 못하였다. 해발 700m정도 되는 릉선에서 원정대가 북만동무들이 싸준 점심밥을 먹고 간단한 휴식을 하고있을 때 적《토벌대》무리들이 멀리에서 나타났다.


평남양이 명예를 걸고 절대안전을 담보한 이 천고의 수림지대에서 총구를 우리에게로 겨누고 은밀히 추적해오는 적의 무리를 보는것은 실로 천만뜻밖의 일이였다.


원정대원들은 눈이 휘둥그래서 이게 웬일인가, 우리가 혹시 길을 잘못든게 아닌가, 돌아가는 길에서나 휴식을 좀 할가 했는데 저놈들이 저렇게 따라오니 휴식은커녕 또 시끄럽게 되였다고 하면서 짜증을 내였다.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서는 부대가 성과적으로 귀로를 돌파할수 없는 법이다.


나는 첫출발에서부터 대원들이 나약해지거나 긴장을 늦추지 않게 좀 훈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동무들, 우리는 이 몇해동안 줄창 적의 포위속에서 살아왔다. 앞에도 적이고 뒤에도 적이고 옆에도 적이고 지어는 하늘에도 적이였다. 빨찌산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적이 있었다.


행군중에 적의 추격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있다고 말해보라. 우리 항일전쟁사에 총성도 없고 백병전도 없는 무탈한 행군이 과연 몇번이나 있었던가. 그러니 전우들, 우리는 이 행군에서도 결국 싸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싸움, 이것은 우리가 포위를 뚫고 간도에로 갈수 있는 유일한 출로이다.》


원정대원들은 내 말을 듣고 모두 정신을 번쩍 차리였다.


우리는 추격해오는 상대가 어떤 놈들인가를 알아보려고 정찰조를 파견하였다.


그 정찰조가 적을 답새기고 척후병 두명을 포로해왔다. 포로들의 진술에서는 우리와의 거듭되는 접전에서 여러번 참패를 당한 정안군 부대장 요시자끼의 이름이 자주 튀여나왔다.


원정대의 공격에 만신창이 된 요시자끼는 패전의 수치를 씻어보려고 거듭 유생력량을 새롭게 증강하였다. 그 부대가 바로 우리를 추격하고있는 《토벌대》였다.


9.18사변직후 관동군 참모 고마쯔소좌의 지도하에 관동군을 협력하는 특별독립군의 명목으로 조직되였던 정안유격대는 정안군의 전신으로 일만일체의 혼합부대로 편성되였다.


만주국군의 건군과 함께 1932년 11월에 위만군에 편입된 정안군은 사령 후지이 쥬로소장을 비롯한 지휘관의 3분의 2가 모두 일본인들이였다.


정안군에는 후보생대라는것이 있었는데 그 성원의 대부분이 17~18살의 일본본토출신의 중학교졸업생들이였다.


정안군의 병기와 피복류는 관동군이 공급하였다.


팔소매에 붉은천을 동인것으로 하여 일명 《홍수대》라고도 하였는데 언제나 싸움터에 있을것을 강요한 《상재전장》의 정신으로 교육하면서 《야마도다마시》와 함께 악질적인 《세이안다마시》(정안혼)도 고취하였다.


이 부대에 있는 중국인들의 대부분은 자산계급의 자식들로서 모두가 일본말을 아주 잘하였다.


일제의 충견들로 조직된 정안군의 배심은 공산주의자들의 유격전에 유격전으로 대처한다는것이였다. 이것은 정안군의 기본적인 활동목표가 바로 우리 유격대를 소멸하는데 있음을 증명해준다.


조직초기 정안유격대의 력량은 3,000명정도였다.


그것은 일본군의 한개 련대력량을 조금 초과하는 수자였다.


요시자끼는 바로 이 정안군 보병 제1단 단장이였다.


요시자끼의 부대는 정안군부대들중에서도 가장 검질기고 악착스러운 부대였다. 이 부대의 《토벌》에 일단 걸려들기만 하면 어떤 강자든지 피투성이가 될것을 각오해야 했다.


요시자끼는 자기 관하의 부대들이 소멸되면 다른 부대들을 인차 갈아대군 하였다. 그의 수중에는 인민혁명군원정부대를 련속 타격할수 있는 예비력량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희생자를 대신하여 대오를 보충할만 한 그런 예비가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4~5차례씩 추격해오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우리가 행군하면 적들도 행군하고 우리가 숙영하면 적들도 숙영하였다. 정말 상대가 혀를 빼물 정도로 지독스럽게 따라다니는 찰거마리같은 놈들이였다.


주보중이 말한것처럼 정안군놈들은 우리 대오가 김일성부대라는것과 우리의 력량이 얼마나 되며 우리가 어떤 전술을 쓴다는것도 알고있었고 천교령일대와 그 부근에는 우리를 지원해줄만 한 공산군무력이 없다는것까지도 다 파악하고있었다. 그 당시 일본군대가 첩보사업을 아주 잘하였다. 그런즉 우리는 완전히 로출된 싸움을 하는셈이였다.


그때 적들은 《우리가 100명 죽고 공산군 한명만 잡아도 큰 소득이다. 우리는 100명을 보충할수 있지만 유격대는 한명도 보충하지 못한다.》고 떠벌이면서 부단히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였다. 군인의 예비가 많은 놈들인지라 배짱도 이만저만 뜬뜬하지 않았다. 정안군의 속심은 자기네 군대 1,000명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간도에서 온 원정대를 전멸시키자는것이였다. 원정대를 전멸하면 김일성의 운명도 끝장이고 김일성만 없으면 조선공산군도 반만항일도 일락서산이라는 배짱이였다.


정안군이 이처럼 집요하고 악랄한데다가 그해따라 눈보라가 얼마나 세차게 일었던지 적아를 식별하지 못할 지경이였다. 어느 한편이 먼저 말을 해야 적아가 구별되고 싸움이 붙었다.


우리를 따라오던 반일부대병사들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리의 곁에서 떠나가버리였다. 희생정신이 박약한 반일부대장병들에게 있어서 꼬리를 바싹 물고 끈덕지게 따라오는 정안군의 추격과 인정사정모르는 사나운 추위는 감히 맞설수도 없고 감당할수도 없는 도전으로 되였다. 그들이 우리를 보호한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히려 마지막까지 그들을 보호해준셈이였다.


평남양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길량식도 인차 거덜이났다.


우리는 며칠동안 생눈으로 끼니를 이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보아야 인적기라고는 느낄수 없는 황량하고 무정한 대지에서 눈은 우리가 돈을 주지 않고서도 구할수 있는 유일한 량식이였다. 결사대를 무어가지고 적의 숙영지도 몇번 기습해보았지만 그들이 로획해가지고 오는 식량으로는 대오를 먹여살릴수가 없었다.


적들도 전장으로 출동할 때에는 먹을것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어떤 곤난이 있든지 천교령목재소가 있는데까지만 가보자. 거기에 가면 식량이 많다고 평남양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런 희망을 가지고 서로 고무해주고 부축해주면서 꾸준히 행군을 다그치였다.


나는 먹을것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그것을 대원들앞으로 돌려놓았다. 어떤 날에는 한되박의 강냉이를 가지고 전 대오가 나누어먹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앞에 차례지는 강냉이알들을 어린 대원들의 입에 넣어주군 하였다. 그리고 나자신은 눈으로 요기를 하였다. 그 눈이 무슨 기운을 냈겠는가. 그래도 악을 쓰며 눈보라를 헤치고 비탈길을 톺아올랐다.


한흥권은 그때 눈에도 영양성분이 있다는 주장을 하여 일동의 호기심을 끌었다.


나는 그 주장이 대원들의 맹렬한 반박에 부딪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주장을 엉터리라고 일축해버리는 전우들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의 전우들은 오히려 한수 더 떠서 물에도 영양소가 많을지 모른다는 가설까지 내놓음으로써 한흥권의 발명을 무색하게 하였다.


나도 그 가설에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것을 허튼소리라고 하거나 무식한 소리라고 하면 구름장같이 허황한 가설을 내세우고 그 변론에 열중하는 방법으로 시장기를 잊어버리기 위해 애쓰는 대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수 있었다.


밥이나 빵대신 자기들이 삼키는 눈속에 영양소가 있을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고 그 가설에 대한 론쟁속에서 온갖 고통을 다 극복해나가는 원정대원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눈물겨운것이였다.


2만 5천리장정때 중국동지들이 가죽띠를 우려먹었다고 한다. 우리도 쌀이 없을 때는 가죽띠를 우린 물이 식량을 대신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남비에 넣고 끓일 시간적여유가 없었다. 행군이 이렇게 간고하다나니 어떤 날은 길림시절에 읽은 장편소설 《철의 흐름》에 반영된 생활들을 되그려보며 힘을 가다듬기도 했다.


나는 밤마다 다른 대원들과 꼭같이 보초를 섰다. 위기를 겪고있는 대오에서 대장이라고 틀을 차리기에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나도 절망적이였다.


부대를 움직이는 지휘관의 수완과 통솔력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때에 원정대원들은 또 한차례의 타격을 받게 되였다. 내가 천교령부근에서 촉한에 덜컥 걸려 자리에 드러누워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되였던것이다.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는 몸이였으니 병마인들 어찌 그런 육신에 쉽사리 달려들지 않을수 있겠는가.


온몸을 화독처럼 달구는 무시무시한 고열과 오한은 마침내 나를 눈구뎅이속에 사정없이 쓰러뜨리였다.


처음에 몸이 오슬오슬 떨릴 때 우등불이라도 쪼이였더라면 병이 덧나지 않았을터인데 전우들이 근심할것 같아 그냥 내쳐두었더니 손발마저 까드라들고 나중에는 빈사상태에까지 빠지였다. 전우들이 달려들어서 손발도 주물러주고 팔다리도 주물러주어서야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였다.


꿀이나 한사발 마시고 뜨뜻한 구들에서 땀을 쭉 뽑으면 촉한이 낫는다고 하였는데 해발 1,000여m나 되는 무인지경에서 그런 호사는 바랄수도 없었다.


한흥권은 대원들과 함께 사람이 끌고갈수 있는 발구를 만들고 거기에 개가죽을 깔았다.


전우들은 그 발구에 나를 앉히고 이불과 노루가죽으로 내 몸을 감싼 다음 번갈아 끌었다. 제발 이 이상 적들이 더 따라오지 말았으면 하고 하느님에게 기도라도 드리는 심정으로 내 신변을 걱정하였으나 《토벌군》은 막무가내였다. 한편으로는 추격해오는 적을 견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력으로 앓는 나의 발구를 끌면서 험한 산령을 한치한치 돌파해가는 이 긴장된 활동은 고도의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하는 고역이였다.


요시자끼는 우리를 추격하는 《토벌군》의 무리속에 《토벌의 왕》이라고 불리우던 구도의 중대를 새롭게 들이밀었다. 구도는 만주에서 세운 전공으로 하여 죽어서 일본의 《군신》까지 된자였다. 《군신》의 유골은 야스구니진쟈에 안치된다고 한다. 구도는 천교령계선에 나타나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김일성은 지금 중병에 걸려 지휘능력을 잃어버리였다. 그러니 특별히 전투를 벌릴 필요도 없게 되였다. 싸움은 하지 말고 공산군의 기력이 다 빠질 때까지 계속 추격만 하라. 추격하면서 그저 한놈씩만 쏴제끼라. 한놈씩 쏴죽여도 한달안팎이면 공산군을 모조리 요정낼수 있다.


구도는 이런 배심을 가지고 여러명의 원정대원들을 전투서렬에서 떼내였다. 적의 사격은 명중률이 대단히 높았다.


내가 빈사상태에서 깨여났을 때 나의 주변에 있은 대원은 도합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눈정기를 모으고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았대야 나를 에워싸고있는것은 16명뿐이였다. 다들 어데로 가고 이 동무들만 남았을가. 그 아까운 전우들이 모두 천교령의 눈속에 묻혔단 말인가. 이렇게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왕대흥은 어데 갔소?》


목안이 말라서 말을 할수가 없게 된 나는 이불밑에 놓여있던 싸창자루로 설자(눈우에 쓰는 글)를 써보이였다. 그리고는 한흥권중대장의 얼굴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한흥권은 대답대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수염이 검숭검숭한 턱밑에서 목젖이 풀떡거리는것이 보이였다.


《정치지도원동무는 전사했습니다.》


십리평에서 발진티브스에 걸린 나를 간호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한 김택근소대장이 울먹거리면서 대답했다. 얼굴을 보니 그도 수염이 더부룩하였다.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들이 뚤렁뚤렁 떨어져내리고있었다.


부대가 적의 포위속에 들자 중대정치지도원 왕대흥은 김택근을 비롯한 몇명의 전우들로 결사대를 무어가지고 포위를 돌파하기 위한 백병전을 벌리였다. 왕대흥은 총창과 총탁으로 다섯놈의 정안군을 쓸어눕히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눈구뎅이에 묻혀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왕대흥,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해온 군사정치일군중의 한사람이였으며 만사람의 존경을 받아온 날파람있는 싸움군이였다. 왕대흥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과 중어를 조선말 못지 않게 자유로이 하는 솜씨로 하여 그는 노상 중국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군 하였는데 사실은 순수한 조선사람이였다. 북만의 군대와 인민을 돕는데서 왕대흥은 뚜렷한 자기 몫을 남기였다. 중어에 능숙한 그는 어데 가서나 중국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주보중이 그를 탐낸것은 다 까닭이 있는 일이였다.


주보중이 달라고 할 때 왕대흥을 떨궈두고 오는건데… 나는 온몸과 마음이 천만쪼각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지는것 같은 통절한 심정을 안고 이미 내곁을 떠나간 전우들을 조상하였다.


《정황이 너무 급해서 정치지도원동무의 시신은 안장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분과 회오로 떨리는 김택근소대장의 음성이 다시금 내 고막을 두드렸다.


《이 북만땅에 눈이야 많지 않은가. 왜 눈으로라도 안장하지 못했소?》


내 입에서는 하마트면 이런 푸념소리가 튀여나올번 하였다.


그런데 리성이 그 목소리를 용케도 눌러버리였다.


김택근인들 왜 그걸 모르겠는가.


그 인정이 후한 사람이 오죽이나 급했으면 안장도 못하고 돌아섰겠는가.


나는 아까처럼 권총자루로 다시금 눈우에 글을 썼다.


《왕대흥이 죽은 골짜기를 똑똑히 기억해두었소?》


《네, 그걸 왜 잊어버리겠습니까.》


김택근의 대답이였다.


《그러면 됐소. 해토가 되면 와서 묻어주자구.》


대원들은 내가 눈우에 글을 쓸 때마다 글자들이 덧놓이지 않게 하느라고 발구를 조금씩 앞으로 움직여주었다.


그러나 그후 우리는 왕대흥의 곁으로 다시는 가지 못하였다.


천교령에는 왕대흥뿐아니라 우리가 미처 땅속에 안장하지 못한 전우들의 시신이 여러구 있었다.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다. 영원히 갚을수 없는 빚을 진듯 한 심정이다. 그 송구스러운 심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하겠는가.


해방후 조기천은 장편서사시 《백두산》이 탈고되자 원고보따리를 안고 나부터 찾아왔다. 나는 첫 독자가 되여 그가 랑송하는 서사시를 감상하였는데 진주같은 명문도 명문이지만 그 내용에 완전히 심취되였다. 그 서사시에는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 참으로 많았다.



이 나라의 초부들이여,


부디 삼가 나무를 버이라-


우리 선렬의 령을


그 나무 고이 지키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옆에 놓인 돌 차지 말라-


우리 선렬의 해골이


그 돌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이 구절은 국내공작임무를 받고 압록강을 건느던 철호가 적의 흉탄에 쓰러진 영남이를 안장했을 때의 심리를 반영한 주정토로이다.


그 대목을 랑송할 때에는 조기천이도 울고 나도 눈물을 흘리였다.


나는 그 대목을 들으면서 북만땅에 묘도 만들어주지 못한채 두고온 수많은 왕대흥이들과 천교령들을 생각하였다. 만주의 산야와 강하에는 실로 우리의 선렬들과 전우들의 유해가 수없이 묻혀있었다.


나는 전에 내각수상으로 사업할 때 교육성의 한 책임일군으로부터 이런 여담을 들은적이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어떤 교수의 집에 하루는 그의 전우가 찾아왔다. 두 전우는 반갑게 만나서 서로 쌓였던 회포를 풀었다. 교수한테는 유치원에 다니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손님은 그 아이하고도 인차 친숙해졌다.


손님의 무릎에 앉아 옷깃도 만지고 단추도 만지고 략장도 만지던 교수의 아들은 그 손님의 손을 만지다가 깜짝 놀라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피도 흐르지 않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거운 의수였던것이다. 어린것은 그 의수를 잡고 손님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 손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요?》


《전쟁판에서 미국놈들과 싸우다가 그렇게 됐다.》


《인민군대두 부상을 당하나요?》


《당하구말구. 때로는 죽기도 하지.》


교수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몹시 분해하였다. 인민군대가 상할수도 있고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손님의 말은 인민군대는 죽지도 않고 상하지도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어온 어린것의 생각을 뒤집어놓았다.


그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그림책들과 아동영화들은 적이 죽는것은 많이 그리고 인민군대가 죽는것은 적게 그리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인민군대나 항일유격대는 죽지도 않고 부상당하지도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우리의 교육자들과 문필가들은 미일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전쟁의 승리가 얼마나 막대한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진것인지 후대들에게 사실주의적으로 똑똑히 가르쳐주지 못하고있다. 우리는 형언할수 없는 고뇌와 시체로 사닥다리를 쌓으며 항일대전의 승리라는 까마득한 령봉에 올라섰다고 말할수 있다.


호소로써도 청원으로써도 테로로써도 통하지 않는 제국주의강적을 격파하는 싸움에서 어찌 희생이 없을수 있겠는가. 죽음은 적아를 가리지 않으며 정의와 부정의를 구별하지 않는다. 단지 그 죽음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뿐이다. 한명의 죽음으로 열명을 살리고 열명의 죽음으로 백명을 살리며 백명의 죽음으로 천명을 살리는것이 바로 혁명군대의 죽음이다.


왕대흥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얼마 안되여 나는 또다시 실신상태에 빠지였다. 온몸을 통채로 불사르는것 같은 고열이 오고 이어 환각인지 꿈인지 분간할수 없는 몽롱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담가를 들고 왕대흥과 함께 오가산령을 넘고있었다.


담가우에는 차광수와 주보중이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것은 차광수나 왕대흥이 조금도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는것이였으며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그것을 조금도 어색하게 여기지 않는것이였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여름날 갈길은 멀고 령은 높은데 우리는 갈증과 무더위로 헐떡거리고있었다.


고개를 오를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나는 참다 못해 길가의 자그마한 물웅뎅이로 뛰여가 무작정 고인물을 들이키려고 하였다. 그 순간 어디서인지 《아서라!》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우에 소복단장을 한 어머니가 영주동생과 함께 고개마루턱에서 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있었다.


《아서라, 그 물은 독물이니 마시지 말아라.》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웅뎅이를 들여다본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포도송이같은 올챙이알들이 물속에 와글와글하였던것이다. 이 물을 어째서 독물이라고 하실가? 내 눈에는 그것이 꿀물이나 정화수처럼 보이였다. 나는 웅뎅이앞에 엎드려 물마실 차비를 하였다. 그때 어머니의 두번째 경고가 또 날아왔다.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나는 그 경고에 놀라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마루턱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동생도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그것은 분명 꿈이였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그 꿈을 흔들어놓았다.


《성주형, 제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주시오. 성주형이 일어나지 못하면 우리 나라가 빛을 보지 못해요.》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누구인가 발구우에 상체를 숙이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길림시절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글도 써주고 시중도 들어준 왈남이라는 공청원이였다.


석양의 강렬한 락조에 피빛으로 타번지는 수림속의 설경이 천천히 발구뒤로 미끄러져가고있었다. 저녁어스름에 물든 차디찬 하늘이 머리우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


왈남이는 《성주형》, 《성주형》 하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발구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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