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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3. 로야령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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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21 16: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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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3. 로야령을 넘어

  

   


  

3. 로야령을 넘어 

 

적구활동을 마치고 유격근거지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왕청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북만에서 활동하고있던 주보중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여 방조를 요청해왔던것이다.

 

 

나는 그 요청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이였다. 주보중은 반일병사위원회시절부터 나와 깊은 련계를 가지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싸워온 친근한 전우였다. 라자구전투를 계기로 나와 주보중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나이도 나보다는 10살이나 우였다. 나는 주보중의 요청에 응하는것을 신성한 국제주의적의무로 여기고 북만원정준비를 다그치였다.

 

 

1934년 10월 하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내리는 날 왕청, 훈춘, 연길에서 선발된 3개 중대의 력량으로 꾸려진 170여명의 북만원정대는 뒤틀라즈를 출발하여 로야령을 넘기 시작했다.

 

 

자연이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이다. 산줄기들을 기준으로 하여 국경이 그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성과 현이 갈라지기도 한다. 그 산줄기라는 장벽이 때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수준상 층하를 규정하는 하나의 요인으로도 된다. 로야령은 동만을 북만, 남만과 갈라놓는 령이며 북간도와 동간도, 동간도와 서간도를 갈라놓는 천험의 울타리이다. 이 울타리의 남쪽과 북쪽은 지세도 대조적이다. 산악이 병풍처럼 첩첩한 남쪽에 비해 북쪽에는 조선의 호남지방에서나 볼수 있는 일망무제의 대평원들이 많다. 로야령이남 동만지방 사람들의 대부분이 함경북도출신들이라면 이북지역 사람들중에는 경상남북도출신들이 많았다.

 

 

의식수준의 견지에서 볼 때 북만사람들은 동만사람들보다 좀 뒤떨어져있은 편이였다. 그러다보니 혁명열도도 동만에 비해서는 높지 못했다. 언제인가 주보중은 북만인민들에 대한 정치적계몽이 동만인민들을 계발시키는것보다 훨씬 힘들다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북만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서 큰 고충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면 그것은 동북혁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서도 유익한 일로 될것이였다.

 

 

우리는 동만과 국내는 말할것도 없고 남만과 북만까지도 장차 대부대활동무대로 삼으려고 계획하고있었다. 린접과의 협조, 협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것은 우리가 초기부터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온 립장이였다. 우리가 리홍광, 리동광과의 상봉을 남만진출목적의 주요항목으로 삼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애쓴 리유도 거기에 있었다. 북만을 돕는다는것은 곧 이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있던 김책, 최용건, 허형식, 리학만, 리계동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돕는것으로도 되는것이다.

 

 

원정대는 첫출발부터 흥분의 도가니속에 빠져버리였다. 새 고장이란 언제나 무지개같이 화려한 동경심을 자아내는 법이다. 게다가 원정대원들은 대체로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 제일 강한 18~20살안팎의 청년들이였다. 나도 역시 그들과 다름없는 희열을 안고 대오를 이끌었다.

 

 

그러나 원정대가 뒤틀라즈를 떠난 그 순간부터 나는 내 발을 비끄러매려고 집요하게 매달리는 어떤 불안을 무시로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대오가 유격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불안은 점점 더 커지기만 하였다.

 

 

나는 동만의 유격근거지들이 위공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에 북만으로 가고있었다. 장기특별치안공작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하기공세앞에서 쓴맛을 본 일제가 지구전의 방법으로 기어이 위공기도를 실현해보려고 만들어낸 《토벌》대강이였다. 이 대강의 요점은 1934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의 1년반사이를 3개의 시기로 나누고 처음에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인민혁명군의 마지막지탱점을 소탕한다는것이였다. 점령지역을 걸음걸음 확대해나가는 《보보점령》의 전술에 《토벌》에 소요되는 절대시간을 늘이는 지구전의 전술까지 겹쳐 위공은 그야말로 혁명을 질식시키는 목조르기로 될수 있었다.

 

 

물론 이 시기 우리가 단행한 북만원정이 일제침략군의 위공기도에 큰 파렬구를 뚫어놓는 작용을 한것은 틀림없었다.

 

 

적의 위공작전에 못지 않게 유격구의 운명을 위협하는것은 간도전역에서 극좌적으로 벌어지고있던 반《민생단》투쟁이였다. 이 투쟁은 동만당이 설정했던 본래의 과제와는 달리 지도부를 차지하고있던 일부 야심가들과 탐위분자들, 민족배타주의자들,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목적에 리용됨으로써 혁명대렬을 내부로부터 분렬와해시키고 유격근거지의 존립을 위협하는 엄중한 결과를 빚어내였다.

 

 

인정사정없는 숙반의 무시무시한 쇠몽둥이는 자기 위업에 끝없이 충실한 진실한 혁명가들과 애국적군중들을 네편내편 가리지 않고 날마다 무데기로 처형하였다. 유격근거지에 거주하고있던 군민의 절대다수가 《민생단》혐의를 받고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을 돌리지 않을수 없는것은 반《민생단》투쟁의 예봉이 조선사람, 그것도 당과 군대, 대중단체의 책임적지위에서 사업하던 핵심간부들과 정수분자들에게로 돌려지고있는 점이였다. 숙반의 총구는 항상 군중이 신임하고 따르는 선봉적인 일군들과 투사들, 열성분자들을 겨냥하였다. 왕청현당 서기 리용국이 《민생단》감투를 쓰고 처형된것도 그 실례의 하나였다. 《민생단》감옥에 갇혔다가 우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나온 왕청대대의 대대장 량성룡도 여전히 감시속에 있었다. 간도지방의 일부 야심가들과 책략가들은 이처럼 숙반의 이름을 걸어 진실한 혁명가들을 모해하였다. 《민생단》혐의를 받고 처형직전에 놓여있던 현당군사책 김명균과 1구당서기 리웅걸은 유격구를 탈출하였다.

 

 

10월말만 되면 만주대륙에서는 폭설이 쏟아져내리고 강풍이 몰아친다. 북관사람들은 그 강풍을 오래전부터 씨비리바람이라고 불러왔다.

 

 

우리가 뒤틀라즈를 떠난 그날도 로야령에서는 사나운 설한풍이 행군길을 막아나섰다. 로야령은 활에 화살을 메운 형국이였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직역하면 늙은 할아버지 령이라는 뜻으로 된다. 아주 높고 험한 령이라는것이다. 우리는 그때 이 령을 하루종일 톺아올랐다. 리성림은 무슨 령이 이렇게도 험한가고 자주 두덜거리였다.

 

 

이 령을 넘을 때 고보배가 자기의 특기를 가지고 전우들을 잘 고무해주었다. 동장영이 룡정감옥에 갇혀있을 때 고보배가 우리의 과업을 받고 우정 따기를 하는 방법으로 구류장에 끌려들어가 그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였다는것은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는 큰 장마당의 돈도 잠간동안이면 다 털어낼수 있는 번개같은 손재주를 가지고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재간만 가지고서도 백만장자 못지 않게 잘 살아갈수 있는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혁명의 도가니속에 뛰여든것은 자못 신기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참으로 찬양을 받을만 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재주는 고보배가 소유하고있는 특기의 일부일뿐이였다. 그보다도 더 큰 묘기는 입재주와 어리광대재주였다. 입에 손만 대면 못내는 소리가 없었고 얼굴을 몇번 씰룩거리면 눈과 입이 한쪽으로 비뚤어지면서 치켜들렸는데 2군 군장 왕덕태와 같이 무뚝뚝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도 고보배가 이런 재주를 부릴 때에는 입이 째지게 폭소를 터치군 하였다. 그가 한쪽다리를 까부라붙이고 외발로 뛰여다닐 때는 웃지 않을래야 웃지 않을수 없었다.

 

 

고보배가 마대를 메고 장타령을 부르면서 다닐 때에는 병신중의 병신처럼 보였으므로 적들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넘길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장기와 변장술을 가지고 도시와 마을들에 자주 내려가 적정을 탐지해오군 하였다. 이런 일이 거듭되는 사이에 그에게는 고보배라는 별명이 붙게 되였다. 보배처럼 귀중한 인물이라는 뜻이였던것 같다. 고보배의 전우들가운데는 그를 본명으로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도 그를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다보니 고보배의 본명이 잘 알려지지 않게 되였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는 함경북도라는 설도 있고 함경남도나 강원도라는 설도 있다. 고보배자신은 자기의 출신도가 어디인지 잘 몰랐다.

 

 

고향이 어디인가고 물으면 그저 조선의 어느 해변가라고만 대답하였다. 젖먹을 때 만주땅에 와서 자랐고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다보니 알 도리가 없었다는것이였다. 어려서부터 로동속에서 잔뼈가 굵어온 그는 못하는 일이 없었다. 야장을 하라면 야장을 하고 집을 지으라면 집을 짓고 리발을 하라면 리발도 하였다.

 

 

고보배는 한동안 동만과 북만사이의 련계를 보장하는 통신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한다는데 대해서는 서뿔리 입밖에 내지 않았다. 간혹 어떤 동무들이 《보배동무는 요새 무슨 일을 하오? 유격대원이요?》 하고 물으면 고보배는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순시원이요?》 하고 물어도 역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런 대답을 하는 경우에도 롱담인지 진담인지 알수 없게 묘한 웃음을 항상 덧붙이군 하였다. 이것은 자기 직무를 안개속에 묻어두기 위한 고보배식의 독특한 수법이였다.

 

 

고보배가 나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존경한것처럼 나도 고보배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사랑하였다.

 

 

우리가 로야령산정에 올라섰을 때 일본군의 쌍엽전투기 2대가 저공으로 날아와 령마루를 누비다가 달아나버리였다. 아마 우리를 따라오던 《토벌대》놈들이 본부에 원정대의 행방을 알려준 모양이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기 드문 폭설이 내리였다.

 

 

로야령북쪽 등성이들과 골짜기들은 모두 눈속에 묻혀 어느것이 어느 골짜기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게다가 오후부터는 세찬 바람까지 일기 시작하여 북만주지방으로 많이 다녀보지 못한 우리들은 말할것도 없고 이곳 지형을 자기 집 울안처럼 휑하니 꿰들고있던 고보배조차도 향방을 가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지경이 되였다. 우리는 팔도하자로부터 80리 떨어진 지점에서 길을 잃고 행군을 멈추었다. 대원들은 사정없이 쏟아져내리는 눈과 혹한속에서 내 얼굴만 지켜보고있었다.

 

 

그처럼 명랑하던 고보배마저도 사색이 되여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내앞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서있었다.

 

 

《해마다 이 령에서는 길을 잃은 나그네들이 눈구뎅이속에 파묻혀죽군 합니다. 지난해에도 7명인가 8명인가 되는 반일부대병사들이 이 산중에서 객사하였습니다. 마을이 있는데까지 되돌아갔다가 거기서 하루밤 자고 눈바람이 잦은 다음 행군을 계속하는것이 어떻습니까.》

 

 

그는 백설로 뒤덮인 로야령의 북쪽골짜기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심스레 제의하였다.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의 후퇴란 백해무익한것이기때문이였다.

 

 

《아니요. 그럴수가 없소. 보배동무가 며칠전까지 발이 닳게 지나다니던 곳인데 무얼 겁낼게 있소. 로야령이 할바령이나 목단령으로 되지 않는 이상 길이 있어도 여기에 있지 어디로 가겠소. 나에게 라침판도 있는데 곧장 북으로만 가면 될것이니 너무 겁을 내지 마오. 자, 용기를 내시오. 북만동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소.》

 

 

나의 이 말에 고보배는 힘을 얻었다. 그는 입으로 자동차엔진소리를 내며 앞장에서 눈을 헤쳐나갔다. 그 엔진소리를 듣고 원정대원들은 일제히 로야령이 떠나가게 웃어댔다.

 

 

우리는 다음날까지 행군해서야 겨우 자그마한 중국인부락을 발견하였다. 원정대가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이웃부락에 와있던 일본군《토벌대》가 불의에 달려들었다. 이렇게 되여 우리는 북만에서 첫 싸움을 하게 되였다.

 

 

북만지방의 일본군《토벌대》나 위만군은 인민혁명군과 접전해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 당시까지 그들의 상대란 대체로 일본군의 그림자만 보아도 천리밖으로 꽁무니를 빼는 토비나 산림대같이 조잡하고 무맥한 무장집단들뿐이였다.

 

 

약한 상대를 일반적인 추격전으로 쉽게 소멸하는데 습관되여온 일본군《토벌대》는 그날도 우리를 토비나 산림대로 알았던지 기세등등해서 마구 접어들었다.

 

 

우리는 재빨리 산에 올라가 《토벌대》와 응전하면서 한개 소대를 우회시켜 적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하였다. 하도 드세게 답새기니 적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했다. 그 싸움에서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였다.

 

 

이 전투에 대한 소문이 적들의 입을 통하여 북만지방에 널리 퍼졌다. 동만에서 《로꼬리》부대들이 들어왔는데 싸움을 아주 본때있게 한다, 도대체 누가 지휘하는 부대인가, 혹시 동녕현성을 들이쳤다는 김일성부대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와짝 끓었다. 그때부터 벌써 신문들에는 우리 부대에 대한 기사가 실리였다. 그때 적들은 유격대를 《공비》라고도 부르고 공산당이나 반만군이라는 어정쩡한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원정대는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가는 바람에 밥도 먹을수 없는 고립무원한 처지에 떨어졌다.

 

 

주보중부대를 찾을 때까지 부락에 오래 체류하자면 적정을 알아야 되겠는데 정보망도 없고 아는 사람들도 없으니 다음단계의 활동으로 넘어갈수 없었다. 녕안유격대의 행방에 대해서는 고보배조차도 잘 알지 못하였다.

 

 

우리는 마을에서 자지 못하고 이름모를 산골안에 들어가서 하루밤을 지냈다. 다음날 고보배와 오대성이 정찰임무를 받고 나가 주보중이 거처하고있는 산막을 찾아냈다. 나는 그 산막에서 20~30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병치료를 하고있는 주보중을 만났다. 라자구전투에서 박격포탄에 맞은 그 상처자리가 화농이 심하여 여러달이 지나간 그때까지도 채 아물지 않았었다.

 

 

주보중은 지팽이를 짚고 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산막에서 퍼그나 떨어진 곳에까지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보시다싶이 나는 아직 이런 신세요.》

 

 

그는 지팽이를 들었다 내리고나서 쓸쓸하게 웃었다. 그런 다음 내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소. 많이 도와주시오.》

 

 

짤막한 인사였으나 그 음성과 눈빛에는 절절한 기대가 비껴있었다.

 

 

나와 주보중과의 상봉은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변이였다. 이 상봉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인공산주의자들이 령솔하는 유격부대들과의 전면적인 공동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우리가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무장대들과의 합작을 중시한것처럼 만주지방의 중국공산주의자들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무장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9.18사변후 장개석의 무저항주의에 반기를 들고 반일부대, 구국군, 홍창회, 대도회 등의 명칭을 가진 각양각색의 항일의용군부대들이 도처에서 태여나 일본의 침략에 도전해나섰을 때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은 다같이 그들과의 통일전선에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저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얼마나 큰 결실을 가져왔는가 하는것은 여기서 구태여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것이다.

 

 

1934년 이후부터 항일의용군의 활동은 점차 쇠퇴기에 들어섰다. 일본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적지 않은 항일의용군 지휘관들은 부대들을 데리고 중국관내로 들어갔고 부분적으로는 투항하거나 비적화되였다. 일부 세력은 사충항처럼 민족주의적인 사상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으로 지도리념을 바꾸는 방향전환의 대로에 들어섰다. 적들은 이러한 반일부대들을 가리켜 《정치비》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만주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직지도하는 반일인민유격대들과 중국공산주의자들의 영향하에 있는 이러저러한 반일부대들을 련합하여 하나의 정연한 체계를 갖춘 군을 내오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주보중은 녕안반일유격대의 탄생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하면서 그 경위를 중언부언 설명해주었다. 녕안반일유격대의 밑천으로 된것은 그가 라자구를 떠날 때 데리고온 20명가량의 반일병사들이였다.

 

 

길동국이 해산되고 수녕중심현위가 조직되자 군사부를 책임진 주보중은 그 20명을 모체로 하여 곧 무장대오를 늘이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대오는 얼마 안있어 50여명으로 장성하였다.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유격대가 주보중의 부대에 편입되였던것이다. 부대는 뒤이어 여러차례의 교섭끝에 이도하자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평남양부대와의 통합을 실현하였다.

 

 

주보중은 평남양을 통합부대 대장으로 선출하고 자기는 군사책임을 맡았다.

 

 

평남양의 본명은 리형박이다. 리형박이 본명대신 평남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다고 한다.

 

 

평남양이란 남쪽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침략군무력은 녕안현 남쪽지대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리형박은 이 일대에 둥지를 틀고있는 일본침략군과의 결전을 자기의 사명으로 내세웠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리형박의 무장대오에는 평남양부대라는 명칭이 붙게 되였고 그 대오의 지휘관인 리형박이도 점차 평남양으로 불리워지게 된것이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평남양이 용기가 있고 애국충정에 끓는 호걸남아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는 반일감정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였지만 부하들의 무규률때문에 애를 먹고있었다. 이것은 이 부대의 통솔자이고 실권자인 주보중에게도 골치거리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나를 만나자 주보중은 자기를 대신하여 평남양과의 사업을 해주었으면 하였다.

 

 

《평남양이 비록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지만 김사령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품고있소. 자기를 구원해준 생명의 은인이 조선공산주의자였으니까.》

 

 

내가 그 믿음은 고맙지만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하자 주보중은 웃으면서 《나는 우사령과 오사령을 설복한 김사령의 특출한 감화력을 믿을뿐이요.》라고 하였다.

 

 

주보중은 반일부대와의 관계때문에도 골치를 앓고있었다.

 

 

녕안현일대에는 크고 작은 반일부대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반일부대들중 적지 않은 부대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적대시하였다. 이것은 녕안반일유격대의 활동에서 시급히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커다란 암초였다.

 

 

동경성 서쪽 북호두를 중심으로 출몰하는 대평, 사계호, 점중화, 인의협 등은 다 한때 평남양과 손을 잡았다가 갈라진 반일부대들이였다. 이 부대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적의를 품고있는데다가 정안군이 귀순까지 권고하며 쐐기를 박고있어 그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였다.

 

 

동경성 서북쪽에서 비적행위를 일삼는 쌍산, 중양 등의 반일부대들도 역시 정안군의 위협을 받고있었으며 녕안동쪽의 당도구일대의 군소반일부대들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강애민부대도 일본군 13려단의 《토벌》에 혼쌀난 다음부터는 동요하고있었다.

 

 

강애민의 관할하에 있는 부대들이 그 13려단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 동만으로 쫓겨나온적이 있다. 그때 그 부대들은 식량을 략탈하며 돌아가다가 귀순신청까지 하였는데 우리 동무들이 그것을 겨우 저지시키였다.

 

 

주보중의 말에 의하면 마창부근에 있는 채세영부대도 이전보다는 활동이 미미하다는것이였다.

 

 

그는 녕안에서도 왕청의 관부대사건과 같은 점중화사건이 있었는데 그 맹랑한 변고때문에 자기 부대는 합법적활동을 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점중화사건이란 주보중이 평남양과의 통합을 실현하기 전에 생긴 불상사였다. 평남양의 부대가 내분으로 복잡한 진통을 겪고있을 때 반란자들은 평남양을 위시한 반대파들에게 술을 먹인 다음 무장해제를 단행하고 도주하였다.

 

 

평남양도 싸창없는 신세가 되였다. 평남양은 알몸만 남은 부대를 재건하기 위하여 심복부하들과 함께 귀순을 모색하고있던 남호두근방의 점중화부대를 무장해제시키였다. 그리고 그 총으로 자기 부하들을 무장시키였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북만의 반일부대들은 평남양의 이름과 결부되여있는 녕안유격대를 적으로 선포하였다.

 

 

결국 주보중의 요구는 자기네 부대를 합법화하자면 반일부대와의 관계를 풀어야 하는데 내가 그 중계자의 역을 맡아달라는것이였다.

 

 

주보중이 제일 크게 걱정한것은 녕안지방의 혁명운동실태였다. 그는 이 일대에서 혁명을 승화시키지 못하는것이 자기자신의 무능이나 불찰에 있는것처럼 몹시 안타까와하였다.

 

 

《동만사람들의 시점으로 보면 녕안은 혁명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무풍지대나 다름없소. 대중의 기세가 왜 이다지도 저조한지 모르겠소. 혁명에 궐기하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인민들이 곁을 주지 않는단 말이요. 이 고장 농민들의 동향이 어떤지 아시오? 지주가 못 살게 굴어도 자기들은 얼마든지 살 도리가 있다는거요. 산중에 가면 흔한것이 땅이요, 그 땅을 일구면 생계도 유지할수 있는데 무엇때문에 피를 흘리며 고생스레 혁명을 하겠는가 하는거요. 국민의 관점으로 보면 땅이 넓은것이 흐뭇한 일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이 계급의식을 무디게 하는 장애로 되고있으니 우리로서는 북만주에 토지가 많은것을 자랑해야 할지 한탄해야 할지 알수 없는 형편이요.》

 

 

주보중이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였다.

 

 

《허허, 땅이 많은것이야 4억이나 되는 중화민족을 위해서 다행한 일이지.》

 

 

주보중도 이마의 주름살을 펴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지, 광대한 령토와 비옥한 토지야 만민복지의 원천이니까. 그러고보면 내가 공연한 걱정을 한것 같소.

 

 

김동무, 이상 렬거한것들이 내 고충이니 잘 도와주시오. 녕안땅에서 혁명을 앙양시킬 방도만 찾아도 발편잠을 자겠는데 나로서는 아직 속수무책이요.》

 

 

주보중이 우리를 북만땅에서 만났을 때 한 이야기는 대체로 이런것이였다.

 

 

나는 주보중의 고충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었다. 그는 능력도 있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북만혁명이 안고있는 난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육체적조건은 너무도 나빴다. 주보중은 화농이 심한 창상자리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수하에는 준비된 핵심력량이 많지 못하였다.

 

 

우리는 팔도하자의 산막에서 며칠동안 주보중과 함께 북만혁명의 발전방도를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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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기남동지의 장의식을 본 후기
엘에이동포들 5.18민주항쟁 기념식과 오월문화제 진행
우주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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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시마핵참사가 고발하는 반인류적인 범죄와 흉계(1)
[조선신보] 전국의 습지와 보호구들에서 이동성물새들에 대한 정기조사
[동영상] 조선관광총국에서 전하는 조선의 오늘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 5월 22일 (수)
[사진으로 보는 로동신문] 5월 23일 (목)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건설과 성대한 준공행사의 성과적보장에 기여한 군인건설자들과 …
5월 학살 진짜 주범 미국을 몰아내자!
서해벌방 평원군 운봉농장에서도 새집들이 경사
국제적 고립을 모면해보려는 궁색한 연극
[동영상] 조선로동당 중앙간부학교 준공식 성대히 진행
민족유산보호는 전인민적인 애국사업
[KCTV 조선중앙텔레비죤 보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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