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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2. 부자와 가난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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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20 13: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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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2. 부자와 가난뱅이

  

   


  

2. 부자와 가난뱅이 

 

 유격근거지가 우리의 집이고 보금자리인것은 틀림없었으나 나는 사실상 거기에만 있은것은 아니였다.

 

 

군대가 울타리속에만 갇혀있는것은 전술상으로 자멸을 가져오는 길이였다.

 

 

인민들이 주는 밥을 축내면서 소왕청골안을 빈둥빈둥 돌아다니는것은 우리의 배짱에도 맞지 않았다. 멀쩡한 자기편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죽이는 좌경분자들과 민족배타주의자들의 처사도 혐오감을 자아내였다.

 

 

나는 짬만 있으면 군대를 데리고 적구로 나갔다. 반유격구를 꾸려놓은 다음에는 더 자주 나가 돌아다니였다.

 

 

군대가 적구로 나가는데 대해서는 인민들도 좋아하였다. 적구활동을 해야 쌀도 생기고 천도 생긴다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들이 아무리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선전하여도 우리가 하루밤 자고가면 다 허사가 되였다. 인민들은 적들이 내돌리는 소문보다도 우리의 도덕과 례절에 체현된 공산주의자의 실상을 더 중시하였다.

 

 

적구생활에 재미를 본 다음부터는 대원들이 모두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하였다.

 

 

내가 데리고다니던 부대는 5중대였다. 너무 많이 데리고다니면 먹는 문제도 곤난하고 흔적도 많이 생길수 있으므로 50~60명만 데리고다니였다. 병력이 많이 요구될 때에는 1중대까지 불러오군 하였다. 내가 적구에 나와서 계속 돌아다니는 바람에 2중대를 책임진 최춘국과 3중대의 장룡산이 왕청을 지키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요영구방위를 담당한것은 4중대였다.

 

 

5중대는 왕청치고도 싸움을 제일 잘하는 정예부대였다. 3보 간격으로 걸으라고 하면 3보 간격으로 걷고 숨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면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큰 전투는 별로 하지 않고 제낄만 한것만 골라 답새겨버리고서는 하루밤사이에 20리, 50리씩 벼락같이 자취를 감추군 하였다.

 

 

우리의 적구교란전은 적들로 하여금 유격근거지《토벌》에 전력을 다할수 없게 하였다.

 

 

해방후 당선전사업을 맡아보던 일부 사람들은 항일전쟁당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창조한 적후투쟁경험 같은것은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나라의 전통이나 경험만 선전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부식시킨 사대주의병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해방직후 우리 사람들은 쓰딸린그라드격전이나 꾸르스크땅크전에 대한 말은 많이 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항일전쟁사에 소왕청방위전과 같은 가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조차 못하고있었다. 한때는 리수복영웅을 가리켜 《조선의 마뜨로쏘브》라고도 하였다. 조국해방전쟁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인민들은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화구를 막은 영웅이 쏘련의 마뜨로쏘브라고만 생각하였지 자기 나라의 항일선렬들중에 그보다 먼저 화구를 막은 김진이란 투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있었다.

 

 

우리가 해방직후 혁명전통교양만 잘하여도 후퇴시기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날수 있었을것이다. 5~6명씩, 15~20명씩 소부대를 조직해가지고 도끼나 하나씩 차고 쌀이나 한두말씩 걷어메고 이산저산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총이나 몇방씩 갈기고 삐라나 몇장씩 붙이고 산에 들어가면 한두달쯤은 얼마든지 견딜수 있었는데 우리가 사전에 이런 교양을 많이 못하다보니 입지 않을 피해도 더 입었다.

 

 

내가 적구활동을 제일 많이 하며 돌아다닌 곳은 두만강연안의 농촌부락들이였다. 어느 해인가 기차를 타고 두만강류역을 지나가면서 건너다보니 옛모습과 조금도 다름없는 산과 골짜기들을 알아볼수 있었다.

 

 

등하불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적의 코밑에 바싹 붙어있는것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심지어 도문뒤산에까지 나와있었다. 거기에 와서는 모두 사복을 입고 지냈다. 세 봉우리에 보초를 각각 한명씩 세우고는 수림속에 들어앉아 잠도 자고 책도 보면서 여유작작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적들은 자기네 코앞에 유격대가 와있는것을 몰랐다.

 

 

우리가 두만강연안의 도문과 량수천자일대에 나와서 적구활동을 한것은 1933년과 1934년 두해 여름이였다. 오의성과의 담판을 치르고 왕청에 돌아와 량수천자부근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할 때 나는 지휘부가 있을만 한 곳을 물색하기 위하여 도문지방에 대원들도 파견하고 그 고장 토착민들과 담화도 해보았다. 그들은 대체로 송동산, 북고려령, 초모정자 세 지점을 리상적인 후보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지점들은 지휘부의 안전을 보장하는데서는 좋은 점을 가지고있었지만 우리의 진출목적을 실현하는데서는 적합하지 않은 고장들이였다.

 

 

나는 어째서인지 전에 온성으로 드나들 때 평양의 모란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돌아보던 도문뒤산으로 마음이 끌리였다. 지도를 꺼내놓고보니 우리의 진출목적에도 딱 들어맞는 곳이였다.

 

 

골짜기가 여러 갈래이고 숲이 우거져서 여름 한철 초막이나 치고 지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였다. 이 산주변에는 1930년 이후부터 우리의 조직이 들어가 박힌 개간지도 많았지만 아직 보습을 대보지 못한 처녀지도 많았다. 우리는 그 처녀지들을 다 혁명촌으로 만들 작정이였다.

 

 

나는 원래 라자구전투가 끝난 다음 인차 도문뒤산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반일부대의 피복과 식량을 해결하느라고 예정되였던 출발날자를 지키지 못하고 소왕청에서 얼마동안 지체하였다. 초복이 다된 때였지만 청산부대 장병들은 헐어빠진 솜동복을 입고있었고 식량이 거덜나서 참새알만 한 감자알을 파먹고있었다.

 

 

그바람에 부대주둔지주변의 감자밭들이 결딴났다. 밭주인들은 청산부대를 원망하였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니 자연히 상하관계도 나빠지고 부대는 토비화의 길을 걸을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투항하려는 기미까지 보이였다. 코산부대나 사충항부대의 실태도 이와 비슷하였다. 코산부대가 아직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청산부대와 함께 가야허를 치고 해결한 식량과 천들을 반일부대들에 나누어준 다음 조묘태의 적까지 치고나서 도문뒤산으로 향하였다. 라자구에서 창자가 쏟아져나오는 치명상을 당한 후 유격구병원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고있던 한흥권중대장이 무슨 오그랑수로 병원을 탈출하였는지 아무도 모르게 슬금슬금 중대를 따라오다가 도문뒤산에 도착하자마자 내앞에 불쑥 나타났다.

 

 

한달전에 총상으로 밸까지 나왔던 사람이였는데 수술자리를 보니 어느새 다 아물어있었다. 다만 봉합사를 뽑은 자리에 피기가 좀 남아있을뿐이였다. 실로 꿰맸던 자리가 터질것 같아서 병원으로 되돌아가라고 하자 이 억대우같은 중대장은 울상이 되여 자기를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나는 중대장대리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왕동무에게 지시하여 도문뒤산에서라도 휴식을 잘 시켜 수술자리가 말썽을 부리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도문은 본래 회막동이라고 부르던 고장이다. 회막동이란 지명은 조선사람들이 옛날 막을 짓고 석회구이를 한 동네라는데로부터 유래된것이였다. 이 주변은 모두 석회석산이였다고 한다.

 

 

9.18사변후 만주를 강점한 일제는 길회선철도를 조양천에서 회막동까지 연장하고 그 역이름을 도문이라고 하였다. 역근처의 마을들에 집들을 지어 시가를 만들고 령사관분관, 경찰서, 세관을 설치한 다음 수비대까지 끌어들이여 석회와 함께 살아온 시골을 군경들의 성화에 시달리는 번잡한 소비도시로 만들어버리였다. 이 신시가의 이름은 도문으로 되고 서쪽산밑의 낡은 마을은 구시가로 되였는데 그 시가의 이름은 조선사람들이 부르던 그대로의 회막동이였다. 도문과 남양사이에는 미구에 국경철도가 놓이였다. 그때부터 도문은 만주대륙에서 일본의 리권을 지키는 동쪽관문이 되였다.

 

 

대안의 남양도 조선과 만주를 련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이 지구에 쏘련침략을 위한 첩보모략기구들이 둥지를 틀었다. 이처럼 도문은 군사정치적으로 중시되는 곳이였다.

 

 

도문이 우리의 활동거점으로 되고 국내반유격구와의 련계를 지어주는 중요한 통로로 리용된것은 어느모로 보나 유익한 일이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회막동에 조직을 박았다. 이 조직은 오중성이네 영향하에 있었다. 나는 1930년 9월에 온성으로 넘어갈 때에도 회막동동무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이듬해 5월에 종성으로 건너갈 때에도 그들의 전송을 받았다. 최금숙이 병중에 있는 내 입맛을 돋구려고 사과, 배를 구하러 왔을 때 그를 도와준것도 바로 이 회막동조직이였다.

 

 

도문은 온성과 우리를 련결시켜주는 중계소와도 같은 고장으로서 유격대의 후방물자공급기지라고도 할수 있었다.

 

 

우리는 도문뒤산에 체류하는 기간 활동의 총적목표를 적들이 시정방침으로 내세운 《비민분리》의 책동을 파탄시키는데 두었다. 《비민분리》란 그네들이 소위 《공비》라고 부르는 혁명군과 인민을 갈라놓는다는 뜻이다. 일제는 이것을 하나의 정책으로 선포하고 사상공작이니, 집단부락정책이니, 십가련좌법이니, 오가작통법이니, 귀순공작이니 하는것들을 연방 고안해내여 군대와 인민을 련결시켜주는 혈맥을 끊어버리려고 발악하였다.

 

 

《비민분리》의 폭정밑에서 조직들은 무데기로 파괴되고 민심마저 소란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귀순신청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하였다. 이런 현상이 제일 혹심하게 나타난것이 바로 두만강류역의 왕청남단이였다.

 

 

우리는 적의 분리주의를 군민단합주의로 타파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군중들속에 들어가 조직공작에 착수하였다. 오중흡이 살던 남양촌조직도 그때 복구해주었다. 대립자에는 최씨들을 핵심으로 하는 조직들을 새로 내왔다. 주변마을들에서 조직공작을 끝낸 다음에는 점차 량수천자방향으로 군중사업무대를 옮겨 림업로동자들과 농민들속에 침투하였다. 언제인가는 한개 소조를 데리고 솔골을 거쳐 훈춘현 밀강의 웅기동이라는 곳까지 가서 두만강건너편에 있는 경원(새별), 훈융쪽의 조직도 수습하였다. 이런 과정에 《비민분리》에 울고있던 인민들을 군민화합으로 웃게 하였다.

 

 

도문뒤산으로 들락날락하던 시기에 나는 국내 여러 지역에 꾸려진 기층당조직들과 혁명조직들에 대한 조직지도체계를 정연하게 세우며 당조직건설사업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기 위하여 륙읍일대에 자주 나왔다.

 

 

1930년 10월 온성군 두루봉에서 당조직이 결성된 후 두만강연안일대에는 당지도핵심들인 오중화, 김일환, 채수항, 오빈 등과 정치공작원들이였던 리봉수, 안길, 장금진 등에 의하여 수많은 기층당조직들이 꾸려졌다. 회령, 연사, 웅기(선봉), 무산, 경원(새별), 라진, 부령, 청진 신암동 등지에 수많은 기층당조직들이 생겨났다.

 

 

1933년 8월에는 경원(새별) 박석골에서 지하당사업과 관련한 강습을 진행하였다. 박석골 숯구이막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밑에서 2일간 진행한 강습에는 북부조선일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정치공작원들과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이 참가하였는데 지하당조직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강의하고 공청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조동욱이, 부녀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박현숙이, 아동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박길송이 각각 맡아서 강의하였다.

 

 

우리의 지도밑에 온성에서 국내당조직 및 혁명조직대표들의 회의가 진행된것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1934년 2월 지금의 온성군 풍인로동자구에 있는 진명서숙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국내의 넓은 지역에 당조직을 확대하며 당조직지도체계를 세울데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하고 지구당위원회와 같은 지역적지도기관을 내오도록 하였다.

 

 

이 회의결의에 따라 전장원을 책임자로 하는 온성지구당위원회가 조직되였다. 이 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 국내당조직건설사업을 확대하는데서 전환적인 사명을 수행한 중요한 회의였다.

 

 

당시 《조선일보》가 《진명서당의 당대회에서 과격한 슬로간 수항목을 결의하여 인쇄배부》했다고 쓴것은 이 회의의 일단을 보여준것이였다.

 

 

도문뒤산에서의 적구활동은 흥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남기였다.

 

 

그 많은 일화들중에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어떤 심보나쁜 지주의 뽕을 빼던 일이다. 그 지주가 살던 마을이름이 무엇이였던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조선사람동네였던것만은 틀림없다.

 

 

어느 날 나는 대원들을 도문뒤산에서 쉬게 하고 사복차림으로 그 지주가 사는 동네에 내려갔다. 그때의 사복차림이란 양장이 아니라 조선바지저고리차림이다. 우리는 배낭속에 늘 사복을 넣어가지고 다니였다. 사복을 입지 않고서는 적구공작을 할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일본옷을 지고다니였다.

 

 

그날 나와 동행한 사람은 전령병 리성림과 그밖의 대원 2명이였다.

 

 

늦은 오후여서 해질녘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나는 우리가 손을 한번도 대보지 못한 그 마을 민심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알아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두고 산에만 배겨있자니 한편으로는 갑갑증도 났다. 이 마을 인심이 좋으면 신세도 지고 조직도 박을 작정이였다. 마을에는 일본군경들도 없었다.

 

 

나는 이 부락에서 덩지가 제일 크고 번듯하게 생긴 기와집대문앞에 가서 주인을 찾았다. 해가 두발이나 되는 청천백일이였으나 주인들은 웬일인지 안으로 문을 걸어놓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문고리를 잡고 대문을 왈가당왈가당 흔들어대서야 신발을 끌며 게으름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나이의 사나이가 대문을 열고 언짢은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바로 우리가 뽕을 뺐다는 지주였다.

 

 

《주인님, 우리는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해가 저물어가고 갈 곳도 없어 하루밤 자고가려고 주인을 찾았는데 신세를 좀 질수 없겠습니까?》

 

 

나는 례절을 차려 깍듯이 찾아온 사유를 말했다.

 

 

주인은 정신빠진 놈들이라고 하면서 다짜고짜 욕지거리부터 앞세웠다. 도덕도 없는 심통이 사나운 지주였다.

 

 

《아니, 여기서 한 5리 가면 려관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려염가에 찾아오는거야. 여기가 뭐 동네집방아간인줄 알아?》

 

 

눈알을 굴리며 욕지거리부터 퍼붓는 본새가 이만저만 고약하지 않았다. 상대가 두마디안팎에 우리를 미친놈들이라고 하면서 지나가는 거렁뱅이처럼 박대하기때문에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동하였다. 그렇지만 꾹 참고 태연하게 또 말을 꺼냈다.

 

 

《주인님, 이거 다리도 아프고 발도 부르트고 해서 더 걷지 못하겠는데 어떻게든지 하루밤만 자고가게 해주십시오.》

 

 

지주는 입에 거품을 물고 벌컥 짜증을 냈다.

 

 

《아니, 려관이 멀지 않다는데 왜 거마리처럼 자꾸 달라붙는거야? 초하루날 장에도 보이지 않던것들이…》

 

 

그러자 내뒤에 섰던 전령병이 나를 대신하여 간청하였다.

 

 

《주인님, 려관집에 들구싶어도 돈이 없습니다. 마음을 곱게 쓰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는데 한턱 내는셈치고…》

 

 

전령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주는 《그럼 우리보구 돈을 내란 말이야, 쥐똥같은 소리!》 하면서 침을 탁 뱉았다. 그리고는 왈카닥 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혁명을 10년 가까이 해오는 동안 나는 그런 대접을 처음 받아보았다. 우리가 지하활동을 하느라고 많이 다니던 중부만주지방에도 부자들이 많았지만 이 지주와 같이 야박하게 구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령병 리성림은 분을 참지 못하고 풀럭풀럭하였다. 자기네 대장이 사람같지 않은 촌지주한테서 그런 괄시를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였다. 그는 분한 나머지 저따위 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은 살 자격조차 없으니 쏘아제끼자고 하였다. 쏘아제끼지 못하면 그놈의 귀구멍에 대고 공포라도 한방 놓아 기절해 자빠지게 하자고 하였다.

 

 

나도 역시 전령병처럼 분노를 다잡을수 없었다. 이방에서는 동족들끼리 더 친밀해지는 법이다. 고국에서 살 때 개와 고양이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이국에서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정을 나누는것이 인간의 본도이다. 하지만 우리를 정신빠진 놈들이라고 모욕한 그 지주한테는 도대체 인정이라는것이 깨알만치도 없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인정마저 더러워질수야 없지 않는가. 같은 불행을 당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정하는것이 인생리치라고 우리 조상들은 동병상련이라는 성구까지 만들어내였다.

 

 

조선민족만큼 정에 잘 웃고 잘 우는 그런 민족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옛사람들도 귀신은 경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에 막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님을 환대하는것은 조선사람의 장점이다. 쫓지 않고 재워주는것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풍속이고 인심이다. 비록 남의 묘를 봐주고 살아가는 산당지기의 가문이였으나 우리 집에서는 손님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쌀이 없으면 죽솥에 맹물을 한바가지 더 부어서라도 끼니를 마련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머니와 삼촌어머니한테는 거죽에 뜬 멀건 물이 차례지군 하였다.

 

 

설사 한끼나 두끼를 굶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집안 녀성들은 절대로 시집타발, 신세타발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린시절부터 내 눈에 새겨진 조선민족의 참모습이고 참표상이였다.

 

 

괴춤에 동전 한푼 없는 장돌뱅이도 마음만 먹으면 조선팔도를 무전려행으로 죄다 편력할수 있는것이 저 아득한 삼국시대에서부터 전해내려온 우리 나라의 관례였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조선의 려염집에서 손님대접을 받아본 외국인들은 우리 나라를 가리켜 동방례의지국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런데 저 야비한 지주놈의 몸에서는 조선사람의 피가 흐르지 않고있단 말인가. 어쩌면 인간에 대해 저렇게도 랭랭할수 있는가.

 

 

그 지주는 우선 도덕적으로 볼 때 무뢰한이였다.

 

 

국력이 쇠약한 민족이 나라를 통채로 빼앗기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다. 나라없는 백성은 심지어 말과 글과 성까지도 떼울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잃었다고 어찌 인정까지 버릴수 있겠는가. 모두가 저 지주처럼 동족도 몰라보는 돼지가 된다면 조선사람은 조선을 다시 찾을수 없는것이다.

 

 

다행히도 조선민족중에는 저 지주와 같은 인간들이 소수이다.

 

 

나는 여기서 부자들에 대한 견해를 다시한번 재정립하지 않을수 없었다.

 

 

1933년 여름에 십리평에 주둔하고있던 구국군의 한 부대가 석현이라는 고장을 치고 경제모연공작을 위해 어떤 중국부자의 안해를 인질로 붙들어온적이 있었다. 전족을 한 녀자였는데 속옷만 입은채로 붙잡혀와서 며칠동안 십리평에 머물러있었다. 구국군들은 그 녀자의 남편에게 통고장을 보내여 아무아무 날까지 돈 얼마를 가지고오면 너희 안해를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자는 그 돈이면 더 멋있는 녀자를 얻어 장가를 다시 들겠다고 하면서 십리평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구국군에 돈을 내고 그 녀자를 데려간것은 남편이 아니라 친정아버지였다.

 

 

심보가 사나운 부자들이란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잠자리를 잡아보려고 동네를 또 한바퀴 돌았다. 이번에는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집에 가서 사정해보자고 하였다. 심보나쁜 지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래웃방 문을 다 열어놓고 저녁식사를 하고있는 초가집이 보이였다.

 

 

나는 그 집 토방돌앞에 서서 지주에게 하던것과 꼭같은 사정을 하였다.

 

 

《지나가던 사람인데 날이 저물어 그러니 하루밤 자고갈수 없겠습니까?》

 

 

주인은 자리에서 움쭉 일어나 문설주를 짚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여튼 들어와 앉으십시오. 뭐 변변치는 않지만 죽이라도 같이 나눕시다. 다른것은 없으니 허물하지 마시오.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거 너무 루추해서 안됐습니다.》

 

 

《루추하다니요.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가리게 됐습니까.》

 

 

우리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초라했지만 주인들의 언행과 마음씨에서는 비단같은 인정이 풍기였다.

 

 

주인은 안해를 보고 죽이 한그릇 더 없는가고 물었다. 주인녀자는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광경을 보니 역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은 부자의 편이 아니라 평민의 편에 있었다. 둘이나 들어왔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하니 우리로서는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주인들몫을 우리가 먹으면 댁에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자기나 하겠습니다.》

 

 

나는 밥상앞에 마주앉아도 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갈것 같지 않아서 자꾸 사양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펄쩍 뛰면서 나를 나무랐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손님으로 오셨으면 손님대접을 받아야지요. …이거 뭐 맛이 없어서 그러시는것 같은데 우리한테는 이것밖에 정말 없습니다. 여보, 거 파나 두어뿌리 뽑아오구려, 장접시두 하나 더 놓구…》

 

 

주인녀자는 남편의 분부대로 파와 장을 가져다가 식탁우에 놓았다.

 

 

친혈육 못지 않게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눈물이 날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밥상앞에 마주앉았으나 동네밖에서 경계근무를 서고있는 동무들생각이 나서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내 조금 있다가 먹겠으니 먼저 식사를 하십시오. 우리 동무들이 아직 동구밖에 떨어져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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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7월 2일(토)
민족어발전을 조국의 통일을 위한 중요한 문제로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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