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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제1차 북만원정 1. 조선인민혁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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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19 19: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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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9 장 제1차 북만원정 1. 조선인민혁명군

  

   


  

제 9 장 제1차 북만원정

1. 조선인민혁명군  

 

 백성이 있는 곳에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는 곳에 군대가 있다는것은 하나의 초보적인 정치상식이다. 모나꼬와 같은 특수한 몇몇 나라들을 제외한 세계의 대소국가들은 거의 모두가 자체방위를 위한 민족군대를 가지고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약소국가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총 몇방에 자주권을 송두리채 빼앗기고 수백년동안 노예살이를 해온것은 군대가 없었거나 약한데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구한국의 군대도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고 괴멸되였다. 내란을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그악스럽던 군대가 외적앞에서는 대포도 변변히 쏘아보지 못하고 삿대질을 얼마간 하다가 주저앉아버리였다. 우리 나라가 망한데는 국정이 부패한데도 있었지만 군력이 쇠약한탓도 있었다.

 

 

망한 나라를 찾아보려고 조선의 선각자들은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국권을 강탈당한 민족이 그 국권의 수복을 위해 군대를 조직하는것은 필수적인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이 독립군을 조직하여 여러해동안 무력항쟁을 해왔다면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유격대를 창건하여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에게 철추를 내리였다. 소규모의 비밀유격대로 항일장정의 첫걸음을 떼였던 우리의 무장대오가 이제는 간도 모든 현들에서 련대규모로 발전하였다.

 

 

동기《토벌》의 포화가 멎은 뒤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른 지방의 유격대지휘관들과 함께 그 방도를 심중하게 상론하였다. 각 현에 조직되여있는 유격대의 련대들을 하나의 군으로 통합하는 문제는 조성된 정세의 요구로 보나 반일인민유격대자체발전의 합법칙성으로 보나 한시도 미루어서는 안될 초미의 과제로 나섰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것은 장성강화된 유격부대들에 대한 통일적지휘를 더 잘할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전투력을 높이며 일제의 대규모적인 공세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게 하는 혁명적인 조치였다.

 

 

혁명군문제가 처음으로 우리의 론의에 오른것은 명월구회의때였다. 그때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의 전망문제를 론하면서 유격대를 일단 대대규모로 조직해가지고 일정한 기간 질량적으로 발전시키다가 때가 되면 대부대혁명군으로 개편하자고 결의하였다. 물론 이 문제가 회의에서 기본안건으로 상정된것은 아니다. 그러나 혁명군대의 장래와 관련된 이 문제를 두고 대표들은 회의장안팎에서 진지한 론의를 거듭하였다. 대부대혁명군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는 오빈과 박훈이였다.

 

 

식민지나 반식민지나라들에서의 항쟁무력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조직되는것이 상례이다. 소규모의 력량으로 무장대오를 조직한 다음 그것을 밑천으로 살금살금 력량을 확대해가다가 조건이 성숙되면 부대들을 통합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군을 내온다. 메히꼬에서 망명을 끝내고 꾸바로 돌아온 초기의 까스뜨로부대는 82명이였다. 그들중 살아남은 12명이 7자루의 총을 가지고 씨에라 마에스뜨라산에 들어가서 대오를 늘이고 힘을 키우다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바띠스따친미독재정권을 벼락같이 무너뜨리였다.

 

 

1933년 하반기부터 간도에서는 유격대력량을 통합하고 그 지휘체계를 단일화할데 대한 문제가 중요한 론점으로 상정되였다. 그것은 적의 동기《토벌》을 격파하기 위한 마촌작전과 수천수만㎢의 판도에서 전개된 영웅적방위전이 가르쳐준 교훈이기도 하였다.

 

 

작전을 총화하는 자리에서 중대호상간의 협동문제, 부대의 통합문제를 가지고 열변을 토한것은 소왕청관내에서 90일동안 우리와 함께 시종일관 방위전에 참가한 2중대장이나 3중대장이 아니라 작전지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은 한흥권중대장이였다. 한흥권은 마촌작전과 관련하여 자기네 중대가 받은 임무는 로야령을 넘어 동만으로 쳐들어오는 적을 견제하는것이였는데 그동안 적과 접전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주력부대를 위해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고 토론하였다. 말하자면 적이 유격근거지를 《토벌》할 때 자기가 적의 뒤통수를 쳐야 하겠는데 그러지 못했고 또 그럴수 없었다는것이였다.

 

 

우리는 그때 그 토론을 들으면서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한흥권의 토론은 자기비판적인것이였으나 그에게는 사실 비판을 받을만 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기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한 훌륭한 지휘관이였다.

 

 

그러면 그가 왜 자기를 의리도 없고 혁명성도 없고 통찰력도 없는 지휘관이라고 타매하였겠는가. 그가 총화모임에서 강조하려고 한것은 요컨대 무엇이였겠는가 하는것이다. 한흥권이 자기를 근시안이라고 자탄할 때 나는 나대로 그를 지도하는 상급의 자각을 가지고 마촌작전이 남긴 심각한 교훈을 도출해냈다. 그것이 바로 수시로 변화되는 전투정황에 맞게 중대호상간의 협동을 원만히 조직하자면 그를 총괄할만 한 지휘, 참모기구가 있어야 한다는것, 그렇게 하자면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교훈이였다.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결국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정연한 군체계를 갖춰야 하겠다는것이였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기 위한 방위전의 전 과정에서는 각 지방에 산재하고있던 유격부대들이 익측과의 협동적련계나 원조도 없이 고군독전하였다.

 

 

화룡현의 경우를 보면 적들이 어랑촌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것이 1933년 11월초라고 한다. 이 첫《토벌》은 강력한 타격을 받고 일단 좌절되였다가 11월말부터 단 3일동안 진행된 2차 《토벌》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싸움의 전부라고 한다. 수자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어랑촌에 대한 《토벌》은 소왕청에 대한 공격보다 보름정도나 앞선것으로 된다. 만일 이런 때 교전상태에 놓여있지 않은 다른 현의 유격부대들이 상호협동의 원칙밑에서 적들의 배후를 타격한다면 어랑촌유격대는 한결 헐한 싸움을 했을것이였다.

 

 

연길현이나 훈춘현의 사정도 이와 대동소이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주는가?

 

 

유격구마다 《토벌》을 당하는 시기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각 현과 구에 있는 유격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움직이는 단일한 지휘체계가 있고 참모기구만 있으면 모든 유격대들이 서로 손발을 맞추어가며 상호협력의 강력한 무기로 싸움을 보다 용이하게 할수 있었을것이라는것을 때늦게나마 시사해준다.

 

 

그런데 유격대에 대한 지도가 현과 구를 단위로 하여 실현되고있던 당시의 조건에서는 이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협조관계가 이루어질수 없었다. 이것은 동기《토벌》당시의 유격대지휘체계가 현실적요구에 수응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유격대의 지휘는 각급 당군사부가 하게 되여있었다. 한개 현에 무력이 한두개 중대밖에 없던 유격운동의 초창기에는 전투도 작은 규모로만 하였으므로 현과 구를 단위로 하여 군대를 지휘하는 체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유격대의 대오가 확대되고 적들의 《토벌》력량도 백단위로부터 천단위나 만단위로 껑충 뛰여올라간 형편에서는 작은 전투만 골라가며 할수도 없었다. 전투란 교전일방의 의사에 의해서만 진행되는것이 아니다. 적들이 력량을 끊임없이 증강해가며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조건에서 우리도 맞불질을 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적들이 사방에서 무슨 사단, 무슨 려단, 무슨 련대 하며 무력을 긁어모아가지고 대부대로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힘을 합치지 못하고 이웃을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뿔뿔이 엎디여 제가끔씩 뚱땅거리기만 하였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계속 싸워야 하는가? 큰 도시나 성시를 치러 갈 때에는 이 현, 저 현에서 인원들을 추려가지고 집중된 력량으로 적을 쳤는데 방어전에서는 왜 현별, 유격구별로만 싸워야 하는가?

 

 

이것은 마촌작전을 전후한 시기 나를 사로잡고있던 생각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유격운동은 그 내용과 규모에 알맞는 새로운 그릇을 요구하고있었다. 우리앞에는 현과 구들에 널려있는 무장부대들을 한 체계에 묶어세울수 있는 전환적인 대책이 필요하였다. 이 요구를 가장 빠르게 충족시킬수 있는 길은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대부대혁명군으로 개편하는것이였다.

 

 

요영구에 주둔하고있던 4중대장의 편지도 같은것을 시사해주고있었다. 4중대장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마촌작전총화에 참가하지 못하고 자기 중대의 총화내용을 편지로 써서 마촌에 보내주었다. 그 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은 중대장의 전령병으로 일하던 오진우였다. 마촌작전을 총화하면서 나는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는 문제에 대하여 심중히 생각하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주진, 량성룡 등과 자주 협의하였다.

 

 

어느날 나는 량성룡이네 집에 가서 기타를 탔다. 내가 기타를 탄것은 마음이 흥겹거나 편안해서가 아니였다. 솔직히 말하여 그 당시의 나의 심경은 대단히 울적하였다. 마촌작전은 비록 승리로 결속되였으나 유격구는 가슴을 파내리는 고통에 울고있었다. 우리와 생사를 같이하던 수많은 얼굴들이 진토속에 묻혀 일어나지 못하였다. 마지막 한대의 서까래마저 다 타버린 재무지우에서 집들을 다시 일떠세우고 생활을 새롭게 조직해나간다는것은 조련치 않은 일이였다.

 

 

군사문제를 의논하고싶어 량성룡을 찾아갔는데 그도 침울한 기색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어제날의 대대장은 《민생단》감투를 쓰고 구금되였던것을 몹시 분하게 여기고있었다. 우리가 보증을 서서 겨우 감옥신세는 면했지만 그는 복직되지 못하였다. 그는 소왕청과 라자구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량식공작을 하고있었는데 《토벌》에 안해와 어머니를 잃고나서는 더 과묵한 사람이 되였다.

 

 

내가 대부대혁명군조직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그는 대뜸 반색을 하면서 범상치 않은 열의를 보이였다.

 

 

《문제는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부대들을 통합하는가 하는데 있다고 생각하오.》

 

 

량성룡은 찬성, 불찬성이라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형식과 방법 문제를 상정시키는 방법으로 군조직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였다. 그가 제일 걱정한것은 반《민생단》투쟁에 열을 올리고있는 배타적기분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가 그런 걱정을 하는것은 무리가 아니였다. 바로 거기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충이 있었고 그러한 난점들을 용의주도하고 원만하게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던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자기 식의 원리와 자막대기로 재고 내려먹이던 《국제로선》이 득세하고 이른바 계급적리익과 국제적련대성의 이름밑에 민족적전통과 지향을 한마디로 민족주의적편향으로 통렬히 공격하던 그 시기 남의 나라 땅에서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우리의 독자적인 무력건설구상을 실천에 옮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진도 찬성하였다. 성격이 괄괄하고 대범한 주진은 내가 말을 꺼내기 바쁘게 격렬한 손짓을 해가면서 부대들을 통합해가지고 큼직큼직하게 싸움을 해보자고 말하였다. 나는 큼직큼직하게 싸우자는 그 표현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간도의 조선사람들이 한결같이 아끼고 사랑한 호걸남아 주진한테서만 들을수 있는 통쾌한 표현이였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부대들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혁명군을 내오게 되면 《조선연장주의》감투를 쓸수도 있는데 그런 감투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속히 일을 내밀자고 하였다.

 

 

동장영과 같은 사람도 우리의 구상을 지지하였다. 그는 동만에 조직되여있는 반일인민유격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여 조직한 무장력이며 그 구성에서도 조선사람들이 압도적다수를 이루고있으며 중국땅에서 조직된것이기는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조선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혁명적무장력으로 되여야 할것이라고 하였다.

 

 

동장영의 이 평가는 조선혁명을 운운하는것 그자체가 민족주의로 범죄시되던 당시의 실정에서 아주 공정하고 진보적인것이였다.

 

 

동장영도 정당하게 지적한것과 같이 동만은 물론, 남만의 리홍광, 리동광, 북만의 허형식, 김책, 리학만, 최용건 등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지방의 당건설에서 선구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것처럼 군건설에서도 개척자, 주창자, 령솔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군을 이루고있는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절대다수도 조선공산주의자들이였다.

 

 

동장영은 군을 내오되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련대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서로 지지하고 보충하는 형식과 방법을 적절하게 선택할것을 권고하면서 바로 이렇게 하는것이 조중 쌍방간에 다같은 리익을 주게 될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당파견원 반성위도 국제당로선에 부합되는 정당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왕청대대를 함께 이끌던 량성룡으로부터 후에 인민혁명군독립1사 사장을 했던 주진, 동만특위의 동장영, 국제당파견원 반성위에 이르기까지 리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할데 대한 방침을 인식하는데서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통합개편된 무장력의 명칭선택과 그 성격규정에서도 그들은 우리와 대체적으로 견해를 같이하였다.

 

 

우리는 1934년 3월에 정식으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할데 대한 방침을 제기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투쟁목적에도 맞고 그것을 담당수행하는 정치적력량의 성격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

 

 

초기에 동만의 일부 지역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공농유격대라고 명명한것은 그 성격규정에서 계급성일면을 지나치게 강조한것으로서 사회적해방에 앞서 민족적해방과 독립을 선차적인 과제로 내세웠던 우리 혁명의 성격은 물론, 중국공산주의자들이 주관한 동북혁명의 성격에도 맞지 않았다.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기 위한 준비사업으로 동만지방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각 현에 있는 유격대 대대들을 련대로 발전시키였다. 그리하여 간도지방 유격대의 총 무력은 5개 련대에 달하였다.

 

 

각 련대에는 유격대에 대한 당적지도를 사명으로 하는 정치부를 두고 작전, 정찰, 통신임무를 담당한 참모부서와 피복, 량식, 군의사업을 보는 후방처를 설치하였다.

 

 

왕청련대는 동만지방 련대무력의 시초로 되였으며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제1단계준비사업이 낳은 산아들중 첫번째 산아로 되였다.

 

 

항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데서 우리가 제2단계의 목표로 설정한것은 사단체계를 내오는것이였다.

 

 

우리가 사단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한것은 마촌작전과정에서였다. 5,000명의 대군을 2개 중대력량으로 대항한다는것은 세계전쟁사에서도 류례가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소부대에 의한 적후교란전으로 유격구앞에 가로놓인 난관을 타개하면서도 줄곧 우리에게 군단은 몰라도 사단급의 무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몇천명쯤 되는 무력을 가지고 대포를 꽝꽝 쏘아대면서 대부대활동도 하게 되면 얼마나 성수가 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각 현들에 련대들이 이미 조직되고 또 그 력량도 빠른 속도로 불어가는 조건에서 사단을 조직하는것은 한시도 지체시킬수 없는 최대의 과제였다.

 

 

우리의 목표는 조선인민혁명군산하에 2개 사단과 1개 독립련대를 선차적으로 꾸리고 그 성과를 확대시켜 장차 수개 사단의 무력을 건설하자는것이였다. 우리는 이런 목표를 세우고 연길과 화룡에 있는 련대들로 하나의 사단을 꾸리고 훈춘과 왕청에 있는 련대를 기본으로 다른 하나의 사단을 또 편성하기로 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가 새로운 당지도기관으로 출현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는 군대안의 당조직에 대한 지도와 함께 지방의 당조직들에 대한 지도도 동시에 감당하는 무거운 사명을 지니고있었다. 무력의 담보가 없이는 지방당조직들이 자기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에 놓여있었기때문이였다. 종전까지는 지방당조직들이 군대안의 당조직까지 지도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사업은 1934년 3월부터 5월사이의 극히 짧은 기간에 진행되였다.

 

 

이 소식에 접한 유격구역인민들은 앞을 다투어 군대를 지원하고 도처에서 성대한 경축모임들을 준비하였다.

 

 

왕청의 녀성들은 축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주었고 공청에서는 아동유희대축하공연을 마련하였으며 여러가지 체육경기도 벌리였다.

 

 

연길의 삼도만유격구역에서는 적통치구역 대표들까지 참가한 1,000여명의 군중대회와 시위가 있었다.

 

 

인민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편성에서 조국광복의 앞날을 더욱 뚜렷이 확신하게 되였으며 군대와 일심동체가 되여 항일혁명전쟁에 한결같이 떨쳐나설 굳은 결의들을 다지였다.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함으로써 보다 넓은 판도에 자유롭게 진출하여 적극적인 대부대활동을 전개할수 있는 광활한 길을 열어놓았다. 만일 우리가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지 않았거나 련대나 사단과 같은 대부대의 군사력을 제때에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암운에 덮인 조국을 밝히며 높이 타오른 보천보의 홰불도 마련하지 못하였을것이며 무송, 간삼봉, 홍두산, 리명수, 대홍단, 홍기하 등 국내와 만주도처에서 적의 정예부대들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은 련전련승의 기쁨도 맛보지 못하였을것이다. 동기《토벌》에 이어 유격구를 위협하던 악명높은 위공작전도 파탄시키지 못하였을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함으로써 우리는 무력항쟁으로 기어이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려는 조선민족의 의지를 내외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경우에 따라서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활동하였다.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동북이라는 명칭은 어느 한 나라를 의미하는 국호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역적개념으로 통용되는것이였다.

 

 

우리가 조직한 인민혁명군이 《만주인민혁명군》이나 《중국인민혁명군》이 아니라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으로도 활동한것은 반만항일을 투쟁목적으로 내세우고있었던 중국동지들에게 있어서도 적합한것이였다. 결국 동북인민혁명군은 조선인민혁명군으로서의 사명과 함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반만항일위업에 이바지하는 혁명무력으로서의 사명도 동시에 감당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간도와 동변도일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반도전역에서 가장 강대한 무장력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원칙적인 립장과 용의주도한 정치적아량은 그후 일제를 반대하는 조중인민의 공동투쟁,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일 우리가 당시의 주객관적정세를 고려함이 없이 우리 혁명의 주체로선에 명실상부한 형식이나 명칭만을 고집하였더라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항일무장투쟁을 중국인민의 광범한 지지성원속에서 효과적으로 전개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우리는 후날 동북항일련군을 조직한 다음에도 조중항일련합군의 성격에 맞게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할 때에는 동북항일련군이라고 하였고 조선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거나 조선에 나와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정황에 맞게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동함으로써 이르는 곳마다에서 조중 량국 인민의 사랑과 보호속에 살며 싸울수 있었다.

 

 

우리가 운동의 그 어떤 형식적인 측면보다도 본질적인 내용을 더욱 중시한것은 지금의 시점으로 평가해보아도 참으로 떳떳하고 자랑스러운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원칙적인 견해와 폭넓은 태도로 하여 우리는 언제나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도 투쟁의 민족적성격과 독자성을 원만히 고수할수 있었으며 바로 이것으로 하여 중국동지들이나 국제당으로부터 높은 존경과 지지를 받을수 있었다.

 

 

당시의 출판물들은 간도에 조직된 인민혁명군을 동북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으로가 아니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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