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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6. 밀림속의 병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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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6-17 20:5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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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 제 8 장 6. 밀림속의 병기창

  

   


  

6. 밀림속의 병기창  

 

 나는 마촌에 있을 때 병기창에 자주 다니였다. 병기창이란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말한다. 《창》은 《공장》의 중국식이름이다. 우리는 그 당시 병기창을 소박하게 철공소라고도 불렀다. 이런 철공소들은 간도의 어느 현에나 다 있었다.

 

 

마촌병기창 또는 소왕청병기창이라고도 부른 이 철공소의 초기수준은 조직에서 파견된 한두명의 로력이 화독에 숯불을 피워놓고 풀무를 당기면서 창이나 칼과 같은 소소한 무기를 벼려내는 정도였다.

 

 

마촌작전직전에 철공소에 가보았더니 직원이 자그만치 7~8명이나 되였다. 그때의 철공소는 구정부 량식과장으로 소환되여간 박두경의 후임으로 김상욱이라는 사람이 주관하고있었다. 철공소일군들속에서 지금까지도 이름이 기억되는것은 오학봉, 최상문, 양도길, 강해산, 박영복, 리응만 등이다. 이 사람들중에 철공기술을 가지고 병기창에 들어온 기술자는 강해산밖에 없었다. 그 나머지는 거의나 쇠붙이를 다루어본 경험도 없고 더우기는 무기수리 같은것을 해본 전적이 한번도 없는 초학도거나 문외한들이였다. 그런데 이런 풋내기들이 나중에는 선반도 볼반도 쎄빠도 후라이스반도 없는 촌야장간에서 현대적군수공장에서나 생산할수 있다고 생각하던 작탄도 만들고 권총, 보총과 탄알은 말할것도 없고 여기에 필요한 화약까지도 척척 만들어냈다. 이것은 항일전쟁만이 창조할수 있는 기적이였고 이 전쟁의 승리가 민족자주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달성될수 있다고 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자력갱생의 혁명정신만이 낳을수 있었던 기적이였다.

 

 

한때 간도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쏘련사람들의 도움으로 유격근거지에 수류탄공장을 하나 지으려고 계획하였다. 전세계공산주의자들이 쏘련을 인류해방의 등대로 경건하게 우러러볼 때였다. 혁명을 먼저 수행한 나라의 덕을 보려는 사상은 사람들속에서 남에 대한 의존심을 조장시키였다. 남들에 대한 의존심, 남들의 뒤받침으로 혁명을 해보려는 지향이 민족주의자들속에서 자본주의렬강들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을 낳게 하였다면 공산주의자들속에서는 쏘련에 대한 의존심을 낳는 근원으로 되였다. 우리는 그때 혁명승리의 테프를 선참으로 끊은 쏘련공산주의자들이 후진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주는것은 응당한 국제주의적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쏘련측에서는 그 청원에 아무런 회답도 보내주지 않았다. 청원을 해결해주겠다는 약속도 없었고 해결해주지 못하겠다거나 해결할수 없다는 통지도 없었다. 우리가 자력갱생을 해야겠다고 강하게 결심한것이 그때였다. 쏘련사람들의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자력갱생만이 살길이라는것, 혁명을 추동하는데서 결정적인것은 자기 힘을 최대한으로 발동하는것이며 남들의 원조는 부차적인것이라는 립장을 확고히 가지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병기창사업을 특별히 중시하고 거기에 화력을 집중하였다.

 

 

박두경이 창장으로 일할 때 우리는 모루, 망치, 집게, 메, 풍구, 줄칼, 착공기 등의 철공도구들을 주어 병기창을 꾸리게 하였다.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병기창일군들은 파손된 무기들을 수리재생하거나 새로운 무기들을 생산하여 유격대와 반군사조직들에 공급해주었다.

 

 

 

병기창이 생산한 무기가운데서 이채를 띠는것은 파손된 퉁포나 38식보총 총신을 잘라서 외방으로 쏘게 만든 단발권총이였다. 이런 권총은 군대에 주지 않고 자위대원들이나 소년선봉대원들에게 보내주었다. 어랑촌유격대에서 만들어낸 외알배기권총은 정치공작원들에게 주로 공급되였는데 사용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병기창사람들은 38식보총 탄피들에서 뢰관을 뽑은 다음 새 뢰관을 만들어 끼우고 화약을 장약하는 방법으로 탄약도 재생하였다.

 

 

그런데 병기생산에 필요한 자재나 원료가운데서 가장 절박하게 요구되면서도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운것이 화약이였다.

 

 

처음에 유격구의 병기창들에서는 광산로동자들과 지하공작원들이 보내주는 화약으로 작탄도 만들고 탄알도 재생하였다. 그러나 이 구입방법은 상시적인 위험을 동반하였고 광산들에 모처럼 꾸려놓은 혁명조직들을 로출시킬 우려가 많았다. 실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화약때문에 생명을 잃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룡수평늪사건이다.

 

 

룡수평은 팔도구광산근처에 있는 동네이다. 최현의 전우이며 부인이였던 김철호가 바로 이 마을에서 자라나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동구앞에는 수심이 깊고 갈대가 무성한 늪이 있었다. 룡수평사람들은 이 물을 리용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 고장 농민들의 생명수였던 룡수평늪이 하루아침사이에 피바다로 된 참변이 일어났다. 일본헌병대야수들이 유격근거지에 화약을 반입한 팔도구광산의 로동자 20여명을 색출하여 이 못가에서 무참히 학살하였던것이다.

 

 

이 사건은 유격근거지의 지도자들과 병기부문 일군들로 하여금 광산조직들에 전적으로 의탁하여 화약을 해결하던 종전의 방법을 검토하고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유격구의 병기창들에서 작탄과 총탄을 만들 때 쓰던 그 한g한g의 화약은 그대로 다 투사들이 뿌린 피였고 살점이였으며 그 모든것의 결정체였다.

 

 

우리는 화약도 자체로 만들려고 결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결심을 사상루각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사람이 각오만 하면 못해낼것이 없다, 조상들이 만든 화약을 그 후손들이 왜 못만들겠는가 하는 배심을 가지고 화약제조의 력사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진지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 화약의 기본원료인 염초를 민간에서도 생산할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염초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들수 있고 또 우리가 늘 보는것이였다. 해빛이 쨍쨍 내려쪼이는 어느날 나는 병기창성원들을 데리고 재와 퇴비가 쌓여있는 리치백로인의 집마당으로 갔다. 두엄더미주변에 하얗게 쌓여있는 흰소금 같은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염초라는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병기창동무들은 손에 대통을 쥐고도 내 대통, 내 대통 하는 할아버지격이 되였다고 하면서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댔다.

 

 

변소자리나 외양간, 마구간에서 나간 두엄더미밑바닥흙에서도 염초를 얻어낼수 있었다.

 

 

고려시기에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국방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가 만들어낸 화포는 곧 함선에 설치되였다. 고려의 수군은 그 화포로 진포해전에서 왜구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였다. 그가 화약을 제조할 때에 사용한 염초도 역시 집주변에서 얻은 재나 먼지를 정제한것이였다고 한다.

 

 

한때 어떤 사람들은 고려시기의 화약이 최무선의 발명이 아니고 그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배운 제조법을 도입하여 만든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그런 화약을 발명해낼만 한 리론기술적토대가 우리 나라에 없었다는것이다. 나는 이것을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 않았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삼국시기에 신라에서는 벌써 화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무슨 발명을 했다고 하면 《그 나라 사람들은 확실히 두뇌가 비상해!》 하고 감탄하면서도 조선사람이 무슨 발명을 했다고 하면 《그게 정말은 정말이야?》 하고 고개부터 기웃거리는 사대주의적이며 허무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려놓았다.

 

 

병기창사람들은 간단한 방법으로 염초를 얻어내였다. 염초를 뽑아낼 때의 용기들로는 밑굽이 뚫린 토기시루나 양철시루, 오지항아리 같은것을 사용하였다. 이런 용기들에 마구간, 변소, 두엄더미바닥에서 긁어온 흙을 다져넣고 물을 부었다. 그때 구멍으로 떨어져내리는 물을 그릇에 받아두었다가 가마에 넣고 달이면 하얀 결정체가 되는데 이것이 염초였다.

 

 

그때 생기는 웃층의 결정체를 가로발이라고 하였고 밑층의 결정체를 선발이라고 하였다. 선발은 곧게 나가는 성질이 있으므로 보총, 권총탄알들에 장약하였고 가로발은 옆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작탄제작에 많이 사용하였다.

 

 

화약을 만들 때에 소용되는 원자재는 군중이 동원되여 다 해결하였다. 필수원료인 류황은 경비전화선애자에서 많이 긁어다가 해결하였다. 화약에는 알콜과 같은 가연성물질이 있는데 우리는 그 대신 빼주를 썼다.

 

 

우리는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실험을 거듭하여 끝내 리상적인 배합비률을 얻어냈다.

 

 

그때 화약제조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잊을수 없다. 손원금이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원래 나는 손원금이와는 별로 인연도 없고 서로 만나서 통성을 한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원금의 경력이며 활동내용을 십년지기 못지 않게 잘 알고있었다.

 

 

 

우리에게 손원금의 투쟁사적을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박영
순이였다. 작탄강습에 출연하려고 마촌에 온 그는 나와 한방에 누워 딩굴면서 며칠동안 신변잡사에 대한 말을 많이 하였다. 그 말가운데는 손원금의 이름도 이따금씩 껴묻어나왔다. 열마디에 한마디정도씩 드문드문 튀여나오는 이름이였지만 거기에는 박영순의 각별한 애정과 존경심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나도 손원금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호기심을 가지고 듣군 하였다. 박영순은 그의 친근한 전우이자 입당보증인이였다.

 

 

 

사람은 업적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고 재능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으며 사건으로써도 유명해질수 있다. 1932년 당시의 손원금은 경찰서탈출사건으로 간도지방의 혁명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였다. 약장사로 가장한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통신련락임무를 수행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고문에 만신창이 된 몸을 끌고 구정물이 허리를 치는 하수도구멍으로 빠져나와 옹근 하루낮을 강물속에서 보냈다. 경비가 철통같은 적의 소굴을 무사히 탈출하였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였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하루해를 꼬바기 물속에서 보냈다는것도 경탄을 금치 못할 일이였다.

 

 

그후 그는 유격대에도 입대하고 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손원금은 이때부터 성실한 노력으로써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곡촌의 신성덕 수리바위골장대는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병기창이 자리잡고있던 곳이다. 이 병기창일군들이 처음으로 만든 작탄을 소리폭탄이라고 하였다. 소리폭탄은 그후 고추폭탄으로 발전하였다가 연길폭탄이라는 위력한 작탄으로 완성되였다.

 

 

 

연길폭탄을 제작하는데 많은 자재가 들었다. 이 자재를 병기창성원들자체의 힘으로 해결하자면 무수한 로고를 바쳐야 했다. 손원금은 언제나 이 로고의 앞장에서 걸린 고리들을 풀어나갔다.

 

 

《한번은 소리폭탄을 만들다가 큰 난관에 봉착한 일이 있습니다. 장약함을 만들 종이와 천이 거덜났거든요. 모두가 방도를 찾느라고 머리를 썩였지요. 그런데 원금동무는 어느새 마을로 뛰여내려가 자기 집 문창호지와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뜯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재밤중에 헐떡거리며 병기창으로 돌아온 그를 보니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겠지요.…》

 

 

이것은 박영순이 마촌에서 나에게 한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품성을 지닌 혁명가입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받아안은 감흥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하였다.

 

 

박영순은 말을 이었다.

 

 

《원금동무는 무슨 일에서나 앞장에 서군 했습니다. 철사가 모자라서 작탄제작이 중단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앞장에 선것은 손원금이였습니다. 그가 수십리 밖에 있는 남양평에 가서 300m나 되는 전화선을 끊어왔지요. 류황도 무쇠쪼각도 양철판도 그 사람이 구해왔습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치는 어느날 밤 양철판과 무쇠를 한짐지고 병기창으로 돌아온 손원금의 뒤로는 주소도 이름도 알수 없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한분이 무쇠가마를 이고 따라들어왔다.

 

 

늙은이의 돌발적인 출현은 일군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원금이, 웬일인가? 씨베리야바람에 살점이 막 떨어져나갈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이 밤중에 로인님을 모시구왔나. 사람두 참…》

 

 

박영순이 할머니의 머리에서 무쇠가마를 들어내리며 하는 말이였다.

 

 

손원금은 등짐을 벗어내치고 의미있게 도리를 흔들었다.

 

 

《내가 모시구온게 아니라 할머니가 자청해서 따라왔습니다.》

 

 

박영순은 할머니한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어떻게 되여 저 동무를 따라오셨습니까?》

 

 

《저 젊은이하구 난 구면이라우. 전에 내풍동에서 살 때부터 낯을 익혔수다. 우리 며느리가 중병이 들어 골골하면서도 약 한첩 쓰지 못하구있을 때 깽깽이를 들구 약장사를 하던 저 젊은이가 글쎄 돈 한푼 안 받구 약두 지어다주구 쌀두 사다주지 않았겠수. 그래서 우리 며느리가 살아났수다. 신세를 갚지 못해 알알했는데 오늘 마침 저 젊은이가 우리 마을에 왔더구만. 집집마다 다니면서 무쇠가 있으면 내라구 하길래 옳지 됐다, 이제는 신세를 갚을 길이 틔였다 하구 무릎을 치지 않았겠수. 이건 우리 집 가마중에서 제일 큰게라우. 에구, 신세갚음이 되기나 되겠는지.…》

 

 

할머니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화독앞에 놓인 가마를 굽어보았다.

 

 

《할머니, 지성은 고맙습니다만 우리는 마사진 가마만 받지 새 가마는 받지 않습니다. 이 가마는 도로 가져다 쓰십시오.》

 

 

박영순이 송구스럽게 하는 말이였다.

 

 

할머니는 그 말에 왈칵 짜증을 내였다.

 

 

《그런 말은 하지두 마우. 일본놈들이 내 아들을 둘이나 불에 태워 죽이였는데 이까짓 무쇠덩지가 무얼 그렇게 아깝겠수!》

 

 

병기창일군들은 그이상 할머니를 설복하지 않았다.

 

 

나는 박영순의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화룡땅에 달려가 손원금을 만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를 매혹시킨 손원금의 인간상에서 핵을 이루는것이 바로 강쇠같은 자력갱생의 정신이였다.

 

 

나는 흥분된 심정으로 박영순에게 말했다.

 

 

《박동무의 이번 걸음에 손동무도 같이 올걸 그랬습니다. 그 동무의 경험이 아주 교훈적입니다. 이 훌륭한 경험을 고스란히 들려준다면 모두들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박동무가 손동무를 대변하여 다 말해주는것이 좋겠습니다.》

 

 

마촌작탄강습을 계기로 손원금은 전 동만이 다 아는 인물로 되였다.

 

 

박영순이 강습을 끝내고 마촌을 떠날 때 나는 이런 부탁을 하였다.

 

 

《화룡에 돌아가면 손원금동무에게 그의 경험이 강습참가자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주시오. 그리고 언제인가는 우리들이 서로 만나 정을 나누게 될것이라는것도 전해주시오.》

 

 

그러나 나와 손원금과의 상봉은 한번도 실현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작업도중 폭발사고로 두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불행까지 당했다.

 

 

화약을 제조하는 과정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을수도 있었다. 제일 위험한것은 작탄이나 총탄에 화약을 재우는 일이였다. 박두경, 박영순, 강위룡은 다같이 화약을 제조하다가 중상을 당한 사람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곤경을 겪으면서도 작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손원금이도 실명의 쓰라린 아픔속에서 락심하거나 비관에 잠기지 않고 《동무들, 슬퍼말라. 비록 두눈은 잃었지만 나에게는 심장이 남아있지 않는가. 두팔이 있고 두다리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면서 오히려 동무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는 손더듬으로 쇠줄을 자르고 작탄을 조립하면서 인터나쇼날의 노래를 불렀다.

 

 

한많은 세월의 바람받이에 아버지를 묻고 형을 묻고 누이를 묻고… 이제는 또 자신의 광명마저 잃은 손원금! 그는 아직 반생에 이르지도 못한 젊은 나이였다.

 

 

손원금은 유격구가 해산되자 전우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고 부대를 떠나 금곡촌으로 내려갔다. 그의 귀에는 날마다 유격대를 헐뜯고 공산당을 헐뜯는 적의 념불소리가 들려왔다.

 

 

《유격대는 산에서 전멸되였다.》

 

 

《근거지사람들도 다 굶어죽었다.》

 

 

《처창즈에 가보라. 백골뿐이다.》

 

 

《공산당의 정치는 망하는 정치다. 공산당을 따라다녔대야 먹을알이 쥐뿔도 없다.》

 

 

손원금의 혈관속에서는 분노의 피가 끓어번지였다. 그는 집집을 찾아다니며 열변을 토하였다.

 

 

《아니다. 유격대는 살아있다. 살아서 더 넓은 지역으로 나갔다. 지금 남북만도처에서 적들을 치고있다. 몇십명으로 출발했던 유격대오가 지금은 대포와 기관총을 가진 수백수천명의 대오로 자라났다. 동포들, 형제들! 적들의 선전에 속지 말고 인민혁명군을 더 잘 원호하자. 항일전쟁은 반드시 우리의 승리로 끝날것이다!》

 

 

손원금의 발자욱은 금곡촌의 범위를 벗어나 수백리 밖에 있는 연길과 룡정에도 찍혀갔다. 이전날처럼 바이올린을 둘러메고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더듬더듬 걸어가는 이 《소경걸인》을 군경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상에서 보천보전투소식을 들은 그는 연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목메인 소리로 웨쳤다.

 

 

《조선동포 여러분, 6월 4일 김일성장군이 부대를 거느리고 보천보를 습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오매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진출하였다. 혁명군의 위력앞에 혼비백산한 적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있다. 일제의 멸망은 확정적이다.》

 

 

그의 불같은 연설에 연길시가는 죽가마처럼 끓어번지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손원금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화형을 당하였다.

 

 

《여러분, 나에게는 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산천이 환히 보입니다. 승리의 날까지 굳세게 싸워주십시오! 조선혁명 만세!》

 

 

이것은 그가 사형직전에 남긴 마지막말이였다.

 

 

당년 25살의 자력갱생의 선구자 손원금은 이렇게 한생을 마치였다.

 

 

박영순은 손원금을 추억할 때마다 《원금이는 장가도 못 가보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라고 하군 하였다.

 

 

만일 손원금이 지금까지도 살아있다면 후대들앞에서 자력갱생을 두고 좋은 말을 많이 할것이다. 그의 경력자체가 자력갱생의 산 교과서로 되고있을것이다.

 

 

화약의 개발은 병기생산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화약이 해결되자 작탄제작이 부쩍 늘어나게 되였다. 작탄은 양철통을 리용해서 도화선을 물리는 방법으로 만들어냈다. 껍데기로는 통졸임통을 많이 리용하였다. 적통치구역이나 반유격구의 지하조직들에서 모아보낸 통졸임통속에 화약이 장약된 기름통 같은것을 넣고 통졸임통껍데기와 기름통사이의 빈공간에 마사진 보습이라든가 파편으로 쓸수 있는 쇠붙이들을 깨뜨려넣고 심지를 물리면 곧 작탄이 되였다.

 

 

순수한 손로동으로 만들어내는 작탄이였던것만치 물론 조작도 불편하고 볼품도 없었다. 손동작이 굼뜨면 조작과정에 사고를 일으킬수도 있었다. 한 대원은 량수천자에서 적들을 칠 때 심지에 불을 다느라고 꾸물꾸물하다가 팔이 떨어진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작탄은 수류탄과는 대비도 할수 없으리만큼 굉장한 살상력을 가지고있었다. 일본군인들이 빨찌산의 작탄이라면 벌벌 떨었다.

 

 

화약이 생기게 되면서 유격근거지들에서는 나무포도 만들수 있게 되였다. 오의성의 부대는 지금의 반땅크총과 비슷한 쇠로 만든 대포를 꽝꽝 쏘아대며 싸움을 했지만 우리는 그런 호강을 하지 못하고 나무포라는것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왕청사람들이 쇠스래나무를 가지고 처음으로 나무포를 만들어낸것은 동녕현성전투 직후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대두천을 칠 때 이 포를 쏘아보았는데 소리가 뢰성벽력처럼 요란하였다. 손으로 두드려만든 나무포가 위력을 내면 얼마나 큰 위력을 내겠는가. 그런데 그 포로 한방 쏘자 적들은 놀라서 다 달아나버리였다.

 

 

화룡지방사람들도 어랑촌의 머구엔즈에 있는 병기창에서 나무포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그 포를 천리봉에 올려놓고 쏘면 30리 밖에 있는 이도구의 일본군경들까지도 혼비백산해서 아우성을 치군 하였다.

 

 

혁명군이 나무포를 쏘면 적들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였다. 아무런 기술설비도 없는 유격근거지들에서 포를 만들어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상식밖의 일이였기때문이였다.

 

 

무기제작과 수리에서 병기창일군들이 발휘한 혁명적적극성과 견인불발성, 창의창발성은 실로 세인을 경탄시킬만 한것이였다. 그 당시 유격대의 병기창들에는 현대적인 기계나 공구가 거의 없었다. 왕청사람들이 착공기 1대를 가지고있었고 박영순이 주관하고있던 화룡병기창 일군들이 대립자의 단야업자를 통하여 구해들였다는 손볼반 한대를 가지고있었을뿐이였다. 연길현의 두도구, 능지영병기창들에 그런 기계수단들이 있었던지 없었던지 하는것은 기억에 삭막하다. 착공기와 손볼반을 제외한 최상의 수단은 줄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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